제목

권두언

현대 기독교의 교회들은 깊은 영적 잠에 빠져 있습니다. 전통과 유전과 거짓 구원의 기만 속에서 편안한 오수를 즐기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 교회의 교인들 역시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영적인 상태, 곤고하고, 헐벗고, 가련하고, 눈먼 상태를 깨닫지 못한 채, 평안하다 평안하다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의 교회들을 깨우는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그 귀중한 진리의 메시지는 마지막 시대의 교인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옛날 유대 백성들이 그들의 편견 때문에 메시아가 전하는 진리를 거절했듯이, 현대 기독교인들도 그들의 전통과 편견 때문에 진리를 거절합니다. 유대 백성들이 그렇게도 확신있게 주장하던 인간의 유전은 그들을 구원해주지 못했습니다. 현대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주창한 교리와 영적 교만과 거짓 구원의 확신은 영혼을 구원해주지 못합니다.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깨닫고 고침을 받기 위해 겸손히 마음을 열 때, 인간의 전통과 유전과 아집을 버리고 성경의 순수한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열 때, 그 진리는 심령 속에 와서 놀라운 치료와 변화를 줄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위한 확실한 진리가 있습니다.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영생을 보장해주는 놀라운 하늘의 권고가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 교회와 교인들에게 보내는 하늘의 진리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진리를 거절하지 않을 때, 그 진리는 여러분의 병든 곳을 치료하고 새 삶을 돋게 하는 명약이 될 것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성화되고 진리로 구원을 받는 경험이 독자 여러분들께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Love Letter_나와 함께 이 잔을

                                                                                                        강 영은

어느 날 한 어머니가 두 아들과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의 소원을 말했습니다.
“저의 두 아들을 주의 우편에 주의 좌편에 앉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나의 마시는 잔을 함께 마시며 나의 침례를 함께 받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주님과 함께 마셔야 하는 그 잔이 시련과 고통의 잔이라는 것을…
주님과 함께 받아야 하는 그 침례가 고난과 죽음의 침례라는 것을…


가끔씩 주님이 우리 마음에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우리는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릅니다.
주님을 따를 때 마셔야 하는 잔이 얼마나 쓴 잔이라는 것을…
직접 그 잔을 마실 때까지는…


주님과 마시는 잔은 그냥 잔이 아닙니다.
여러 맛이 뒤섞인 쓰디쓴 잔입니다.

살아나려는 자존심을 초연히 삼켜야 하는 인내의 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차분히 삭여야 하는 오래 참음의 잔,
핍박과 억울함을 조용히 참는 견딤의 잔입니다.

쓰라린 고통을 이겨내는 인고의 잔,
날카로운 비난을 받아내는 감내의 잔,
가슴에 사무치는 슬픔을 재우는 침묵의 잔입니다.


자주 주님이 우리 삶 속에 찾아와 물으십니다.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
우리는 주저 없이 약속합니다.
“네, 받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릅니다.
주님과 함께 받아야 하는 침례가 얼마나 아픈 것이라는 것을…
직접 그 침례를 받을 때까지는…


주님과 함께 받는 침례는 그냥 침례가 아닙니다.
여러 가지 고난이 섞인 아프디아픈 침례입니다.


물벼락처럼 쏟아지는 모욕을 참고 가는 침례,
흙가루 끼얹어지듯 뿌려지는 비방을 업고 가는 침례,
모래처럼 퍼부어지는 폭언을 안고 가는 침례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고 장사 되어 물속에 잠기는 침례,
주님과 함께 살아 물에서 일어나는 부활의 침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하는 새 삶의 침례입니다.

때때로 주저 없이 대답하는 우리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합니다.
영광의 면류관을 쓰기 전에 먼저 고난의 면류관을 써야 하는 것을…
주님의 좌우편에는 못 박혀야 할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주님의 보좌 앞에는 넘어야 할 고난의 언덕이 있다는 것을….

식탁에 앉아 마시다 반쯤 남은 빈 잔을 바라봅니다.
그리곤 조용히 마음속에 생각해 봅니다.
주님과 함께 마시기 때문에 그리 쓴 잔은 아니라고…
주님과 함께 받기 때문에 그리 아픈 침례는 아니라고…
아니, 주님과 함께하기에 달콤한 잔, 행복한 침례라고…

제1부_메시아를 거절한 사건

이 세상에 수많은 교회가 있어도 진리되신 예수님이 안착하실 교회가 없습니다. 약속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임했건만 그분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유대교회처럼, 현대 기독교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전하시는 진리의 기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유대인들은 결국 메시야를 거절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참된 증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곧바른 진리의 기별을 거절하고 있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거절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그 당시의 유대교회가 메시야를 거절했던 이유와 현대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이유는 동일합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메시야를 거절한 유대교회와 그 이유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기사가 우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해 보게 하고 신앙 생활에 큰 각성이 되는 기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편집실 –

제 1부: 메시야를 거절한 사건

유대 백성들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메시야에 대한 많은 예언과 메시야에 대한 소망의 기록들이 있었다. 온 민족의 희망과 꿈에 정점을 이루어줄 사건이 메시야의 강림이었으므로, 그들은 열렬하게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약속된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난 그렇게 많은 이적과 기적들을 목격하면서도, 수없이 병자를 치료하고 고치는 행위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과 동정과 자비를 보면서도, 그리고 특히 영혼과 마음의 병을 치유시키는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그들은 왜 메시야를 거절했을까? 그들을 그렇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 고향 교회에서 일어난 일

어느 날 예수께서 나사렛을 방문하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예수께서는 유소년 시절을 나사렛에서 보내셨고 회당에서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셨었다. 공생애를 위해 고향을 떠나 계셨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같은 고향 출신인 예수의 행적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예수가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에 대한 흥미로운 소문이 그등레게 빠짐없이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나사렛에 오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사렛 사람들의 흥미와 기대는 최고조에 달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하시리라는 기대감과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 뭐라고 선포하실까 하는 호기심 속에서 그들은 예수를 기다렸다. 드디어 예수께서 나타나시고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앉으시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분에게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예수님을 유아 시절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의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고,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있었다. 그 날의 봉사 순번에 따라 한 장로가 선지자의 글을 읽으며, 장차 메시야께서 오셔서 모든 압제자들을 정복하고 유대 나라에 영광스러운 통치를 시작하실 것이니 소망 중에 기다리라고 권면하였다. 그들은 모두 메시야가 위대한 통치자와 군대를 통솔하는 자로서 영광 중에 나타나 유대 나라를 구원하리라고 믿고 있었고, 그리하여 메시야의 영광스러운 강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 회당에 랍비가 참석하면 설교를 하도록 요청했는데 그 날 읽을 구절은 선지자의 글에서 뽑아 주어졌다. 예수께서도 예배 순서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으셨고 낭독하실 선지자의 글도 주어졌다. “예수께서…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눅 4:16,17). 예수님께 주어진 이사야 선지자의 글은 메시야에 관한 기록으로 이해되고 있는 구절이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케 하려 하심이라.”

2) 성경이 가리키는 메시야와 그들이 기다린 메시야

예수님 당시에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나 메시야가 오셔서 행할 사업에 대해 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수께서 복음 사업을 시작하실 때에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외치셨는데, 그 기별에서 “때가 찼다”는 의미는, 다니엘 선지자의 2300일 예언된 예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정해진 기간 중 이레 중간인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신 메시야 왕이 일어나실 때가 찼다는 의미였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야의 강림의 때와 태어나실 장소와 그분의 사업의 성격과 심지어 그분께서 돌아가신 후 묻히실 묘실까지 자세히 예언되어 있었다. 그러나 영적으로 눈 멀고 현세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깊은 영적 흑암 속에서 졸고 있었으므로,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에 대해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이제 메시야가 오시는 때와 시간이 꼭 찼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야의 예언 중에서 관심을 기울인 부분이 있었는데, 그 부분은 메시야의 영광스러운 통치와 유대 나라의 영광의 회복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잘못 인도하고 가르쳐서 현세의 부와 권세를 얻게 하는 메시야, 권력과 힘을 주는 메시야, 유대나라를 세상에서 가장 강한 국가로 만들어줄 메시야를 기다리게 했다. 그들은 마음 속에 은혜의 왕국을 건설할 메시야, 죄에서 그들을 구원해주실 메시야,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실 메시야를 기다리는 대신, 영광과 권세로 강림하실 재림 때의 영광스러운 모습의 메시야와 그분의 사업을 고대하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들은 메시야의 모습과 성격과 사업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곡해하여 자신들의 욕망에 맞는 메시야상과 이미지로 변경시키고 말았다. 과연 누가 그들의 왜곡된 메시야관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예수께서는 메시야이신 당신 자신에 대한 예언을 설명하는 산 설명자로서 사람들 앞에 서셨다. 그분은 성경이 기리키는 메시야의 모습을 바르게 설명해주셔야 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방금 읽은 말씀을 설명하면서, 메시야를 압박받는 자의 구원자로, 사로잡힌 자의 해방자로, 고통당하는 자의 치료자로,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키며 세상에 진리의 빛을 드러내는 자로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인상적인 태도와 놀라운 뜻에 감명을 받아 마음이 예전에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감동으로 가득 찼다. 거룩한 감화의 물결이 좌중을 휩쓸고 성령으로 감동을 받은 그들은 열렬한 아멘과 찬송으로 화답했다. 그들은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기”(눅 4:20~22)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3) 자존심을 건드린 진리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큰 감동을 가지고 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는 선언을 덧붙이시자 그들은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그들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깜짝놀라 자신들의 상태와 처지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의 주장을 생각하게 되었다. 방금 예수께서는 택하심을 받은 유대인들이며 아브라함의 자녀인 자신들을 속박 당하고 있는 포로로 표현하지 않았는가? 이방인들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악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며, 진리의 빛이 필요한 흑암 가운데 있는 자들이라고 예수가 제시하지 않았는가? 그들의 자부심은 손상을 입었고 자존심은 크게 상처를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 말해주는 진리를 듣기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 문제가 없고 그들 주위에 있는 이방인들이야 말로 구원을 받아야 할 자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사업은 유대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살려주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고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지금 그들 앞에 서있는 메시야는 그들이 원한 메시야, 그들의 욕망에 맞게 수정된 메시야와는 너무나 달랐다.

회당이 술렁거리고 사람들에게 분노와 공포심이 일어났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이 그들의 지도자들에게서 들었던 그것과는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예수께서 그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여 내시겠다는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대신 그들이 진리의 빛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죄된 이방인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로 묘사하시지 않는가! 이 예수는 누구인가? 라고 그들은 물어보았다. 메시야의 영광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주장한 이 자는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아버지 요셉과 함께 일하던 자,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수고하던 일개 노동자가 아닌가? 더구나 이 사람은 그렇게 큰 이적을 행할 능력과 힘이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유대인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데 사용하기는커녕 그들의 처지와 상태가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인 이방인과 같다고 말씀하시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은밀한 생각을 알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셨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사람 나아만 뿐이니라”(눅 4:23~27).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의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었다.

4) 일어난 폭동

엘리야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죄에 빠지고 하나님을 떠나 성령의 경고를 거절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여러 가정들을 그냥 지나치고 이방 땅의 선택받지 않은 백성 중의 한 여인의 가정에 당신의 종을 보내셨는데, 이 여인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큰 빛에 마음 문을 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여인은 하늘의 은총을 입었다.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문둥병자들이 있었지만 이방인인 나아만에게 기적이 나타난 것도 이런 이유였다. 이방의 귀족 나아만은 자신이 너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꼈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바라며 간구하는 심정으로 물 속에 들어가라는 명령을 따른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얻었을 뿐 아니라 참된 하나님을 알게 되는 축복을 받았다.

회당에서 청중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독선을 뿌리째 흔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죄 가운데 빠진 사람들이며 그들이 구원과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상실되었다는 그 쓰라린 진리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방인들을 정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비를 가장 깊이 필요로 하는 잃어버린 바된 자들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런 그들의 참된 상태를 적나라하게 펼쳐놓고 진단하는 진리의 말씀이 그들 앞에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진리를 겸손히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처지를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하는 대신 분노하였다. 그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예수를 대적하여 고함을 질렀다. 자신들의 참 상태를 드러낸 예수, 가난과 비천함 가운데서 일어난 예수가 보통 인간 이상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예수의 말씀으로그들의 극렬한 민족적 자존심이 건드려졌다. 이제 예수님의 말은 떠드는 청중의 소리 속에 묻히고 말았다. 집회는 깨어지고 그들은 예수를 회당으로부터 끌어내었다. 그리고는 그를 밀고 성 밖 벼랑 끝으로 급히 끌고 가서 거꾸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고함과 저주의 소리가 공중을 메웠다. 어떤 자가 그분에게 돌을 던지자 예수께서 갑자기 그들 가운데서 사라지셨다. 회당에서 그분 곁에 있었던 하늘의 천사들이 사단으로부터 충동을 받은 그 미친 군중으로부터 예수님을 보호하여 안전한 장소로 인도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봉사가 끝날 무렵, 그분은 다시 한번 유년시절의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다. 그러나 모든 이적과 증거와 성령의 감동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선택받은 특권과 축복을 강조하고 그들의 상태를 칭찬하시기보다, 그들이 이방인보다도 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제시하신 그 쓰디쓴 기억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만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라는 헛될 질문만 허공에 던질 뿐이었다. 메시야의 영광스러운 통치 하에 이스라엘이 모든 열국보다 높임을 받아 으뜸이 되리라는 자랑과 자만 속에 빠진 그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상태를 지적해주는 견책을 견딜 수 없었다. 마음에 한번 품은 불신은 나사렛 사람들과 유대 지도자들과 산헤드린과 국가를 지배하였다.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첫 거절은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들의 최초의 거역이 정당하였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첫 거절은 갈바리의 십자가와 예루살렘 도성의 멸망과 온 유대 민족의 흩어짐을 불러들이고 말았다.

제2부_진리가 인기가 없는 이유

진리는 예수님 시대에 인기가 없었던 것처럼 현시대에도 인기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찾지도 않고, 들으면 불편하기도 한 진리에 사람들이 가까이 오거나 받아들이기를 머뭇거린다. 그것은 진리가 요구하는 조건이, 진리가 이루어 낼 역사가, 그리고 진리를 받아들인 후에 초래될 결과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이다. 진리가 제시해주는 길은 사람의 본성과 대치된다. 그러나 받아들이기만 하면 진리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을 보장해 주는 지름길이 된다. 진리가 그렇게 인기가 없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1) 아부하지 않고 드러내기 때문에

진리는 아부하지 않는다. 진리는 달래주지 않는다. 진리는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노출시킨다. 유대 백성이 메시야되신 예수님의 진리를 거절한 이유도 그랬다. 그분의 진리는 그들에게 아부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상태가 양호하다고 달래주거나 그들의 형편이 괜찮다고 위로해 주지도 않았다. 그 대신 진리는 영적 교만에 가득 차 있는 유대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위선을 드러내었다. 선민사상의 우월감과 거짓 경건의 기만을 탄핵했으며 그것들을 버릴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진리가 드러내는 자신들의 진정한 상태를 인정할 수도 없었고, 인정하기도 싫어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건드리고 그들의 처참한 영적 형편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진리에 그렇게 대항하며 분노했던 것이다. 나사렛에서 메사야에 대한 첫거절이 일어난 이래로 이런 현상은 세상 어디에서나 나타난다. 진리가 가진 환한 빛이 영혼의 구석 구석을 살피고 버려야 할 것들을 드러내기 때문에, 진리는 항상 인기가 없으며 자신들의 형편이 드러날까 두려워 사람들은 진리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만일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학식과 경건을 칭찬하셨다면 그들은 예수를 기쁨으로 환영했을 것이다. 그 당시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욕망은 성전 봉사에서까지도 드러나고 있었다. 그들은 회당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를 좋아하였고, 시장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했으며 사람들의 입술에서 그들의 칭호가 불려지는 것에 만족을 느꼈다. 잔치에 초대를 받았을 때에 손님들은 신분에 따라 좌석에 앉았는데, 가장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 제일 주목을 받고 특권을 누렸다. 이런 명예를 얻으려고 늘 계획을 세우며 경건함을 과시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그들의 목표의 전부인 그들의 삶을 예수께서는 견책하셨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5). 예수님의 분명한 진리는, 마음은 탐욕과 질투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거짓된 겸손을 나타내며 지위와 권세를 얻으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이기적 야망을 드러내었다. 순결의 화신인 그리스도의 생애는 부정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생애와 대비되었으며, 흠 없고 완전한 그분의 생애는 죄악적인 동기로 점철된 그들의 생애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진리가 내리는 진단과 선고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유대인들은 그렇게 크신 하늘의 치료자가 그들과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치유를 받지 못했다.

** 오늘의 적용

이 시대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애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진리에 가까이 오기를 꺼리는가! 자신의 상태 그대로를 말해주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복하기를 얼마나 머뭇거리는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완전한 생애가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를 풀기에 주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양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진리가 내리는 진단을 자신에게 적용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예수께서 유대 백성들의 영적 곤고함과 불신과 헐벗음을 말씀시자 자신의 상태가 그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한 그들이 화를 낸 것처럼, 오늘 날에도 진리가 다가와 우리 자신들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때에 사람들은 그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기보다 화를 낸다. 영적인 교만이 진리와 싸운다. 진리가 진언하는 그 사항은 다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치료하는 진리가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헛되게 흘러 떠내려 가게 된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가? 이방인 과부와 나아만보다도 못하고,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메시야의 선고를 듣고 분노했던 유대인들의 마음이 오늘 날의 우리의 마음은 아닌가? 진리가 내리는 선고가 내 자신에게 해당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만큼 우리의 마음은 겸손할까? 그리하여 진리의 날카로운 칼로 육신의 가죽을 베고 부드러운 새 살 같은 새 마음으로 진리 앞에서 배우기 위해 무릎을 꿇을까? 아부하지 않는 진리가 우리에게는 어떤 것이 되고 있는가? 우리에게 진리는 인기가 있는가?

2) 고정관념과 유전을 깨뜨리기 때문에

유대 백성들이 메시야를 거절한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의 진리가 그들이 가진 유전, 곧 잘못된 메시야관, 인간이 세운 교리와 관습과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의 잘못된 교육을 받은 유대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누리게 될 미래의 영광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잘못된 메시야관을, 그들이 만든 고정관념ㅇ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증오의 대상인 로마를 지배하고 세계 대 제국의 부귀영화를 누릴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셔서 그들의 초라한 가옥과 빈약한 양식과 보잘껏없는 의복을 윤택한 저택과 편안한 세월과 정복자들의 것같은 호사스럽고 값진 의복으로 바꿔주시기를 바랬다. 모든 사람은 이스라엘이 미구에 주의 택하신 백성으로 열방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고 예루살렘은 전 세계 왕국의 머리로 높임을 받게 되리라는 의기양양한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나타난 메시야의 모습과 교훈은 그들의 고정관념을 산산히 깨뜨리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완고한 유전을 고수하는 사람들이었다. 외형적 의식에 엄격하였고 씻고 금식하고 긴 기도를 드리는데 부지런하였으며 구제하는 일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유전과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의 헛되이 경배한다고 선언하셨다. 유대 백성들은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대로 전해 내려온 유전과 성경에 대한 인간적인 해석이 그것을 가려 참 진리를 보지 못했다. 표상과 상징 속에 위대한 구속의 진리가 숨겨져 있는 제사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메시야가 이 땅에 왔을 때에 그분이 바로 이 표상들이 가리키는 실체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가 메시야가 되신다는 증거가 그렇게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진리가 그들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기는 유전을 버리는 단호한 변화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소중히 간직했던 처세법과 유전과 이기적이고 불경건한 습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불변의 진리, 영원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는 큰 희생이 필요했다.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회개해야 할 것을 알고 그렇게 하기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3). 그들은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확신하였지만 그 사실을 고백하는 일은 그들의 야망에 맞지 않았다.

** 오늘의 적용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진리는 유전을 깨뜨린다.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알아온 기존의 가르침과 오류가 섞인 교리와 인간의 관습을 버리고, 성경이 말하는 정확한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감추인 보화의 비유 중에 나오는 사람이 땅 속에 감춰져 있는 보화를 얻기 위해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산 것처럼,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아마 모든 것을 버리고 청산하는 개혁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어쩌면 진리는 고정관념과 인간의 유전을 깨뜨리기 때문에, 전통과 혈연관계와 자신의 속한 사회를 떠나라고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리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진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고 팔고라도 소유할만한 가치는 있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냥 피상적으로 믿는 것을 좋아하지, 자신의 믿는 바가 성경이 말하는 진짜 진리인지 알아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 진리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관념, 교회의 고정관념, 또한 자신의 안일한 사회생활의 범주를 개뜨리는 것이 될 때에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기존의 것을 고수하려는 성향이 짙다. 곧 진리를 원하되, 자신이 원하는 범주 내에서만, 그렇게 큰 변화와 개혁이 요구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진리를 부인하는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진리의 보화를 열심히 찾고 있다. 이기심과 야망으로 가득 찬 세속적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하늘의 보화를 찾는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세상의 재물과 명예와 권세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보다 처세술과 유전과 사람의 제안을 더욱 존중하고 있다. 우리은 어떤가? 진리가 하나님의 뜻과 맞지않는 우리의 관념과 개념을 부술 때에, 진리가 성경에 배치되는 오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해 줄 때에 그 참된 권고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가? 자신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그동안 내려오던 교회의 전통과 유전을 꺾어 버리고 진리가 제시하는 것을 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현대 기독교인들이 성경이 말하는 곧바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실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를 거절한 사실과 똑같다. 현대 기독교는 인간이 바꾼 교리와 인간이 만든 유전을 성경의 권위보다 더 위에 놓았던 유대인들과 똑같은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는 아직도 메시야를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3) 쪼개고 잘라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진리, 성령의 검으로 표상된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기도처럼, 우리는 진리로 거룩하게 성화 되는데, 그것은 진리의 칼이 인간의 죄된 속성을 다 쪼개고 잘라내기 때문이다. 마치 조각가가 조각을 새기듯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은 죄인의 마음을 파고들어 하나님의 성품과 맞지 않는 모든 것들을 잘라낸다. 비록 그 과정이 아프지만 그런 진리의 역사로 우리는 영생에 이르게 된다. 진리를 마음 속에 받아들이면 마치 누룩이 작용하듯 마음 속에 변화가 일어난다. 진리는 거룩하지 않은 욕망과 세속적인 욕심, 그리고 악한 성질을 복종시킨다. 거친 행동과 난폭한 기질이 부드럽고 온순하게 변하며, 교만과 경쟁심이 사라지게 된다. 진리는 인간의 죄된 본성에서 치밀어 오르는 모든 악한 정욕들을 베어낸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우상들과 정면으로 대치하여 그 우상들을 다 깨뜨린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마음 속에 거하시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세속적인 것들을 몰아낸다. 진리는 인간의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과 후천적으로 배양된 품성과 생활습관과 자주 충돌하지만,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역사에 순복하게 될 때, 그 진리는 삶과 생활의 전반적인 모든 것에 영향을 끼쳐 아름다운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매일 진리의 말씀을 연구할 때에, 그 진리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부정한 것들을 잘라내주고 죄를 승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진리로 자신을 개끗하게 하고 진리로 자신을 살피는 사람들은 그렇게 성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진리를 싫어하고 가까이 오지 않는 이유는, 진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가차없이 잘라내기 때문이다. 자아의 그루터기를 베어버리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진리의 역사가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거절한다.

** 오늘의 적용

우리는 진리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살후 2:10). 진리의 사랑을 받는다는 의미는, 심령에 있는 모든 죄악적인 것들을 쪼개고 잘라내는 진리의 역사를 허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리에 순복하여 말씀이 가리키는 대로 자신을 꼴지우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라고 표현했다. 진리는 영혼을 개끗하게 하는데, 더러운 모든 것들을 잘라내고 새로운 동기와 의욕을 갖게 하며, 영혼을 완전한 새 피조물로 탄생하게 한다. 당신은 그런 진리의 역사를 허용하고 있는가? 당신은 진리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인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3~57)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가? 우리는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 그치지 말아야 한다. 진리의 말씀을 매일 섭취하고 그것이 내 속에 들어와 살과 피를 이루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 진리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생활과 성품에 함께 짜여져야 한다.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과 동화되므로, 진리가 우리 생명의 한 부분이 되고 생애와 행동의 동기가 되게 하는 것이다. 영적인 생명을 가지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경험이 매일의 경험이 되게 하자!

제3부_충성된 증인이 내린 진단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의사와 약이 필요하다. 그런데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다. 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없이는 치료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영적인 질병도 마찬가지다. 정확한 진단이 있어야 영적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 진리는 우리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주고 진단해준다. 예수께서 진리를 통해 그들의 영적 상태를 진단해 보여주시자, 그 진리에 대항하고 메시야를 거절했던 유대 백성들처럼, 이 시대에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진리가 그들의 상태를 진단해 줄 때, 그 진단을 받기를 거부하고 진리를 거절한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심각한 영적 질병에 대해 날카롭고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아울러 그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도 처방해주고 있다. 우리도 유대 백성들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진리와 진리가 내리는 진단을 거절할 것인가?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할 것인가?

마지막 진리의 증인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진단과 처방이 있다. 만일 우리가 그 진단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그 진단이 내리는 질병 상태에 대해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그 처방약을 복용한다면, 심각한 영적 질병을 고침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진단과 처방을 함께 연구해 보자.

1) 마지막 교회 – 라오디게아 교회

성경의 마지막 책이며 예언서인 요한 계시록에는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내려진 진단이 기록되어 있다. 요한 계시록은 시대마다 펼쳐질 일곱 교회에 대한 계시로 시작된다. 사도 요한은 그의 첫 계시에서 일곱 금촛대 즉, 일곱 교회 사이를 거니시면서 진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은 사도 요한의 시대부터 계속해서 이어질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와 성도들의 경험에 대한 예언이다. 이 예언은,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계속 이어지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공격하는 사단의 도전과, 그 도전에 대응하시면서 진리를 보호하고 진리를 통해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해 계시해 주고 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나는 모습으로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며 역사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 계시록 1장에서 “충성된 증인”으로 불려지고 있으며(계 1:5), 여기 나오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한다(계 1:20). 일곱 교회는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한다. 일곱 교회의 예언은 시대별로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서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적 변천을 나타내고 있으며,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의 내용은 각 시대마다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이 교회의 특징들은 각 시대마다 세상에 존재하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상태와 그들의 신앙을 완전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일곱 교회 중 가장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이 교회는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예수 재림까지 지구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 존재할 마지막 교회로서, 이 교회에는 현대 기독교회들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라오디게아의 뜻은 “백성을 심판하심”이라는 뜻으로, 이 교회는 그 이름이 의미하듯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심판을 받을 것에 대해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사실은, 각 교회마다 칭찬이 있지만 이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칭찬의 말씀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다만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와 처방만이 내려져 있다.

2) 마지막 교회 라오디게아에게 내려진 진단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심각한 질병에 대한 진단이 내려져 있다.
그런데 더 심각한 사실은, 자신들의 심각한 질병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메시야를 거절한 유대 백성들처럼, 예수님의 진리를 통해 내려진 진단에 분노한 유대인들처럼,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신들의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 만족하고 자랑하기까지 하는 아이러니한 형편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예수께서 진단을 내리신다. 어떤 진단인가?

진단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4~17).

질병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큰 걸림돌은 환자 자신이 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므로 치료 받아야 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교회가 이와 똑같은 상태에 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신들이 병에 걸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질병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 교회에 내려진 진단이 무엇인가?

진단 1.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상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인 현대 기독교회의 신앙을 보시면서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경고하고 계신다(16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두고 가장 뜨거워야 할 이 마지막 교회는 가장 미지근한 상태 가운데에 놓여 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기별은 현대 진리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더욱 적용될 수 있다. 진리를 안다고 자랑하지만, 이름 뿐만의 실속 없고 열심이 없는 뜨뜻미지근한 공언자들에게 이 진단이 내려졌다. 진리를 사랑한다고 공언은 하지만 그리스도인 열심과 헌신이 부족한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진리와 신앙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불신자가 되는 모험을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기꺼이 자아에 대해 죽고 진리와 믿음의 원칙을 철저히 따르려고 하지도 않는다. 부분적으로 헌신하지만 삶의 전부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이상인 완전한 성품을 이루기 위해 전적인 굴복과 전적인 포기를 하지 않는다. 영적인 성장이 멈춘 채 어중간한 상태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무관심한 것도 아니고 이기적으로 완고한 것도 아니지만,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역사와 사업에 전적으로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속적이고 개인적인 이익이 요구할 때는 언제나 그들의 자리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 마음 속에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내적인 역사가 결핍되어 있다. 참된 증인께서는 이 뜨뜻미지근함과 무관심을 싫어하신다. 뜨뜻미지근한 물처럼, 그들은 그분에게 메스꺼움을 준다.


진단 2. 곤고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는 심각한 진단이 내려져 있다. 그 진단은 그들이 곧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정작 라오디게아 교인 본인들은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과 필요를 느껴야 치료와 도움을 요청할텐데, 그들은 완전한 자기 만족과 자기 기만 속에서 종교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위험한 비극이 있을까? 너무나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데 자신은 너무나 부요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상태가 말이다. 이 교회는 마지막 시대인 현재 교회이다. 제일 무서운 영적 질병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자기 자신들은 부족한 것이 없다고 느끼는 상태, 곧 가장 잘못되어 있으면서, 가장 올바르다고 느끼고 있는 상태이다. 이 교회는 자기의 영적인 참 모습과 상태를 모르는 교회로서, 자기의 상태를 모르기 때문에 고침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교회는 자신들이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는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생각에 도취되어 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있으며, 신앙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교회이다.

제4부_참된 증인이 내린 세 가지 처방약

마지막 교회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치명적인 상태를 치료하기 위해 참된 증인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처방이 내려졌다.

1) 하늘의 처방약

처방: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처방 1. 불로 연단한 금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한 상태를 치료하기 위해 예수께서 내리신 처방은 “불로 연단한 금”이었다. 이것이 무엇이며, 그 의미는 또 무엇일까?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벧전 1:7).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기 23:10).

자신의 가난한 것을 모르고 오히려 자신이 부요하다고 자랑하고 있는 마지막 시대의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그들을 부요하게 해 줄 금이 필요하다. 이것은 불로 연단하여 단단하게 된 금으로, 변하지 않는 순수한 믿음과 사랑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사라고 하시는 믿음과 사랑의 금은 찌꺼기가 하나도 섞여있지 않은 금이다. 참된 믿음, 순수한 믿음이야말로 하나님의 의를 얻게 해주는 것이며 우리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는다. 믿음도 주님께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받는 구원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구원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면 왜 예수께서 값을 지불하여 사라고 하셨을까?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아낌없이 자기 자신, 곧 영과 혼과 몸을 바치는 자들에게만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금을 사야 한다. 그리고 어떤 시련을 당해도 없어지지 않을 굳세고 강한 믿음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주시는 구원을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참된 증인이신 예수께서 뜨뜻미지근한 자들에게 사라고 권고하신 순수한 금 곧 믿음과 사랑은 참된 부이다. 세상의 모든 재물을 가지고도 영적 질병을 치유할 귀중한 치료제를 살 수 없다. 이 믿음이야말로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게 하는 참된 믿음으로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고 깨달을 때에 생기게 되며, 또 시련과 역경을 견디면서 더 강해지는 믿음이다. 이 믿음의 금은 순결해지기까지 연단을 받은 금인데, 이것은 연단을 받을수록 그 광채가 더욱 찬란해지는 것이다.


처방 2. 흰 옷

영적으로 벌거벗은 상태를 가리기 위해 처방하신 것은 흰 옷이다. 영혼의 헐벗음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옷을 입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혼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입을 수 있는 옷이 단 한 벌도 없다. 흰 옷은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순결하고 흠이 없는 품성을 표상한다. “또 그녀에게 정결하며 희고 고운 세마포를 차려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고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righteousness)로다, 하더라”(KJV 계 19:8). 흰옷은 품성의 순결, 곧 죄인에게 나누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 64:6)과 같고 인간이 만든 무화과 잎의 옷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의 직물로 짠 의의 옷, 흠없는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의로서 믿음으로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흠이 없는 품성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의의 두루마기를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에게 입혀 주신다. 그리고 하늘 베틀로 짠 이 두루마기에는 사람이 만든 실은 한 올도 섞이지 않았다.

예수께서 하신 비유의 이야기에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석한 사람의 이야이가 나온다(마 22:1~14). 혼인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은 심사를 받았다. 임금의 요구대로 예복을 입은 자들만이 잔치 자리에 앉도록 용납되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도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의는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의의 옷을 입을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예수께서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실 때,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과 정신이 그분의 뜻과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 생각이 주님에게 사로잡히게 되면, 마침내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흰 의의 두루마기를 입은 것으로 보게 된다. 믿음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을 선물로 나눠 받는다. 마지막 참된 증인이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벌거벗음을 보시고 그분의 의의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처방을 내리신다. 이 의의 두루마기가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수 없다. 흰 옷은 품성의 순결 곧 죄인에게 나누어 주는 그리스도의 의다. 우리는 믿음으로 매일 이 옷을 입고 살아야 하겠다.

처방 3. 안약

참된 증인께서는 눈이 멀어있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안약을 사라고 권고하신다. 안약은 양심을 민감하게 하고, 진리를 식별하고 깨닫게 하는 성령을 의미한다.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는 뜻은 양심을 민감하게 하고 진리를 식별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은혜로 비참한 상태를 먼저 볼 수 있게 되어야 우리는 고침을 받을 수 있다. 우리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한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자족한 상태에서 깨어나서 우리의 참된 영적 형편, 의의 옷이 없이 벌거벗은 형편을 보아야 한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눈이 멀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의 마음을 밝혀 주어야 한다.

눈은 예민한 양심이며, 내부의 빛, 곧 영혼과 마음의 빛이다. 온 영혼과 전 존재의 영적 건강은 사물을 보는 눈의 정확한 시력에 달려 있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하나님의 말씀인 안약은 그것을 양심에다 적용시킬 때 양심을 예민하게 한다. 성령의 안약은 우리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해 주며, 어떤 가면을 쓴 죄라도 알아낼 수 있게 하는 지혜와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에 지혜의 안약을 발라 분명하게 보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드러나 책망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안약을 바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라오디게아인들이 완전히 눈이 먼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완전히 눈이 멀었더라면 안약이 시력을 회복시키는 데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것은 예수께서 사라고 하시는 안약을 사기만 하면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호소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19,20).

처방약을 주시고 이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호소하신다.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고, 그리고 마음 속에 나를 영접하여 함께 생활하자고 호소하신다. 구원은 언제나 개인적인 문제이다. 예수님을 마음 문밖에 세워두고 있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관계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우리 각 개인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며 호소하신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희망은 참된 증인이신 그리스도의 책망과 권면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문 앞의 쓰레기를 치워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몰아내는 세상을 향한 우리의 애정, 세속적인 욕심, 교만 이기심 등의 쓰레기를 깨끗이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초청을 받아들여 주님께서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우리 영혼의 성전을 소유하시게 해야 한다. 우리는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들여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사는 경험을 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인 생명의 양식을 먹고 주님과 나누는 교제는 극히 사적인 경험이다. 남이 나를 대신해서 먹어 줄 수가 없다.
예수께서 집집마다 다니시며 모든 영혼의 성전 앞에 서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호소 하신다. 우리의 마음 문을 주님께 열지 않겠는가?

** 마치면서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입니다. 우리가 바른 진리를 알고, 또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그 사실이 우리를 구원해 주지는 않습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 형편 가운데 처해있는 우리들의 상태, 심각한 영적 병에 걸린 우리들을 진단하시고 처방약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영적 자부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 진단과 처방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의롭다는 영적 자만심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진정한 형편을 드러내주고 말해주는 진리에 화를 내고 메시야를 거절했습니다.
아집과 교만과 인간의 전통과 유전에 빠져 있는 완고한 유대인들의 모습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우리 마음 속에는 예수님이 좌정해 계신가요?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들여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그분과 산 관계를 맺는 사람, 순수하고 산 믿음인 금을 소유함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사람, 성령의 내재로 깨어서 늘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죄를 승리하고 마침내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이 진리되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던 유대인들의 형편과 같지 않게 되기를, 하늘의 진단과 처장을 거절하여 치유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그들과 같이 되지 않기를, 그 대신 문밖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그분과 항상 함께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계 동향 TOP NEWS

1. 중국 주도의 AIIB 은행과 새로운 세계 경제질서
중국은 브레튼우즈 체제(달러 패권)의 세계은행을 대체하는 BRICs 개발은행의 창설을 진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 개발은행(ADB)을 대체할 수 있는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AIIB) 설립을 진행시키고 있다. AIIB 설립은 기존 미국 달러 주도의 경제질서에 도전하는 것이라 미국은 동맹국들의 가입을 반대하고 있지만, 이미 인도와 뉴질랜드, 동남아, 중앙아시아 국가 등 모두 22개 나라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게다가 지난 3월 12일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영국이 가입을 발표한 후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연합(EU) 주요국가들이 거의 모두 AIIB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 지난 3월 19일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3월 말이 (AIIB 참여선언) 데드라인이기 때문에 그전에 정부방침을 정해 입장을 알리도록 하겠다"고 말해 우리나라의 AIIB 참여도 임박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미국 주도의 경제질서가 하나씩 재편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미국의 우방국들도 중국 주도의 새로운 경제질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브레튼우즈 체제 이후로 약 70년간 기축통화의 자리를 유지해 온 달러의 지위가 점점 흔들리고 있다.

2. 세계적인 물 부족 문제 ‘물 전쟁’ 인류 최대의 난제
지난 3월 22일은 UN이 정한 '세계 물의 날'이었다. 유엔은 지난 20일 연례 세계 물 개발 보고서를 발표해 수자원 관리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못하면 오는 2030년에는 전 세계 물 수요의 40%를 충족하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재 물 부족 현상은 사막이 많은 아프리카•중동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로부터 물이 넘쳐났던 브라질과 동남아시아도 물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최근 3년간 이례적으로 낮은 강수량과 기록적인 더위로 120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을 겪고 있다. 주 당국이 지난 3월 17일 비가 내린 뒤 48시간 동안은 외부 물 사용을 금지하고, 식당에서도 손님이 주문하기 전 물 제공을 하지 않도록 하는 비상 가뭄대책을 발표할 정도였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캘리포니아주 가뭄이 계속되면 남아 있는 물로는 기껏해야 1년밖에 버틸 수 없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물 부족 문제는 특정 국가만의 문제가 아닌 인류가 직면한 최대 위기 중 하나이다.

3. 부채 문제로 EU와 갈등 중인 그리스, 러시아에 지원 요청할까?
그리스인들은 지난 1월 25일 그리스 총선에서 급진좌파인 시리자 당을 선택했다. 지난 수년간 계속된 긴축정책으로 그리스의 실업률은 26%에 달하고 청년 실업률은 50%가 넘었다. 그리스 국민들은 긴축정책을 끝내줄 것으로 믿고 기존의 정당 대신 시리자 당을 선택한 것이다. 시리자 당의 총수인 알렉스 치프라스 총리는 그리스가 사실상 부채를 갚을 능력이 없다며 그리스가 긴축을 끝낼 수 있도록 부채를 탕감해 줄 것을 유럽연합에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2월 20일 결국 그리스의 긴축을 전제로 한 구제금융을 4개월 연장하는 것에 그리스와 유로권 재무장관들은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부채 위기는 4개월 미뤄진 것에 불과하며 구제금융을 받는 기간 중에도 긴축정책과 파산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4월 8일 치프라스 총리는 러시아를 방문할 계획이며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23억 파운드 신탁의 RIT 캐피탈 파트너즈의 78세 회장인 자콥 로스차일드는 세계는 2차 대전 후 가장 위험한 지정학적 상황에 빠져 있다고 투자자들에게 경고하였다. 워런 버핏과 헨리 키신저 등과 사업 협력을 하는 로스차일드는 말하기를 “중동에서 혼란과 극단주의, 러시아 공세와 확장, 엄청난 실업률에 위협을 받는 약화된 유럽, 유럽 연합을 구성하는 나라들 많은 곳에서 구조적 개혁을 다루는 데 실패하여 일어난 작은 조치들도 없는 것” 때문에 “아마도 2차 대전 이후 우리가 직면해온 위험한 지정학적 상황은 투자자들이 조심하여야 할 어려운 경제적 배경을 만들어왔다”고 했다. 로스차일드가 경고하는 것처럼 지정학적 위기가 경제적인 붕괴를 가져올 가능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4. 미 연준 금리 인상 가능성과 세계경제위기
세계 경제는 미국 연준의 금리 인상 시기를 주목하고 있다. 엄청난 부채를 쌓아가고 있는 세계 각국은 금리 인상이 진행될 경우 경제에 타격을 받게 될 전망이다. 지난 3월 18일 미국 연준(Fed)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이틀째 회의를 마친 뒤 발표한 성명에서 “통화정책 정상화(기준금리 인상)에 착수하는 데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을 것(be patient)”이라는 표현을 삭제했다. 이는 금리 인상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금리 인상 시기에 대해 스탠리 피셔 미국 연준(Fed) 부의장은 지난 3월 23일 뉴욕 이코노미 클럽에서 한 연설에서 "기준금리 인상은 연말 이전에 단행될 것으로 거의 장담한다"며 "(인상 시기가) 6월이냐, 9월이냐, 아니면 더 이후냐, 또는 그사이 어느 시점이냐 하는 것은 데이터(각종 경기•고용•물가지표)에 달렸다"고 말했다. 전 연준 의장 앨런 그린스펀은 지난 2월 26일 미국 CNBC와의 인터뷰에서 "실제 미국경제의 수요상황은 매우 나쁘다. 대공황에서도 최악의 시기와 같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금리가 올라가면 금융위기가 재연될지도 모른다"라고 경고했다. 금리가 오르면 부채를 가진 주체들은 이자 갚기가 더 어려워진다. 전문가들은 본격적인 금리 인상 전에 부채를 정리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5. IS의 계속되는 테러와 국제사회의 종교통합 촉구
IS(이슬람국가)는 지난 2월 요르단 조종사를 산 채로 화형시키는 영상을 공개하고, 일본인 인질 2명을 살해해 국제사회를 경악하게 했다. 지난 3월 18일에는 튀니지 박물관 총격 테러 사건이 발생해 23명이 숨졌고, 21일에는 시리아에서 쿠르드족의 신년 행사 '노루즈'를 겨냥한 자살 차량 폭탄 테러가 벌어져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해 45명이 숨졌다. 같은 날 시리아군 검문소와 진지도 공격당해 70명이 넘는 병사가 사망했다. 20일에는 예멘 수도 사나에 있는 이슬람 사원에서 자살 폭탄 테러로 14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IS는 1주일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저질러진 테러 사건들이 모두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2월 18일부터 이틀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세계 각국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폭력적 극단주의 대처를 위한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정상회의에서 오바마는 “유대교나 기독교, 이슬람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모두 한배에 탔습니다. 서로 도와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종교 간 단합을 촉구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폭력적 극단주의의 출현을 막고자 조만간 유엔에서 종교 지도자 회의를 열겠다고 밝혔다. IS와 같은 극단적인 테러단체들의 활동으로 종교통합을 위한 실제적인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신앙 간증_ 주님!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죄를 용서해주세요

저는 다섯 살에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엄마와 헤어졌습니다. 엄마 없이 자란 어린 시절은 친척 집을 전전하면서 살았던 것만 기억에 가물가물거릴 뿐입니다. 그러다 아홉 살에 재혼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죠. 새엄마는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지만 낯설고 어린 나이에 받은 상처로 인하여 마음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정마저도 열일곱에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므로 깨어지게 되었고 새어머니는 새 가정을 이루어 떠나버리셨습니다. (제가 아들의 노릇을 못하니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지난 시절 저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언제나 착하고 착실한 자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항상 원망과 불평,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런 마음을 달래고자 47세에 술로 돌아가신 선친의 전례를 알면서도 술을 즐겨 마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어머님께서 생모가 저를 만나길 원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동안 가까이에서 돌봐 주신 큰어머님의 말씀을 거절하지 못해 그 자리에 나갔습니다. 그때가 26살. 처음으로 만난 어머니였지만 저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느낌도 없는 그저 낯선 분에 불과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참회와 눈물로 비는 용서도 그동안의 저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저 돌덩이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를 하나님은 1987년 1월 1일에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모든 말씀은 제 마음을 만지시고 부드럽게 만들어 상처를 치료하여 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8)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14-15)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 27:10)

그리고 이 땅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죄”라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왜 우리의 삶이 고달프고, 많은 가정이 깨어지고,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가정이 불화하고, 화목하지 못하고, 다툼과 분쟁이 많으며 사랑해야 할 가족끼리 싸우고, 다투며 돈 때문에 늘 시끄러운 이유가 “죄”라는 것을 .....지난 세월 동안 원망과 불평, 불만 등 자신의 운명에 대한 모든 원인을 어머니 탓으로 돌리며 어머니를 원망하며 저주한 것이 얼마나 큰 죄였는지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당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주신 그 사랑을 깨닫고 운명을 저주하며 지낸 그 죄를 용서해달라고 다윗처럼 침상이 젖도록 눈물로 기도하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때에도 이미 나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깨달으니 어머니가 비로소 용서되었습니다. 그 후에 저의 삶은 변화되어 모든 삶이 신앙 중심으로 바뀌었으며 신앙생활은 천국 같았고 교회 일은 곧 하나님 나라의 일이었기에 모든 것에 충성하였으며 나의 주님이시며 아버지의 거룩한 사업이 모든 것의 우선이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교회 일에 묻혀서 잊고 기도만 하며 지내다 8~9년 전 어느 날 큰어머님이 생모의 연락처를 알려주시며 어머니가 교회 나간다는 기쁜 소식을 알려주셨습니다. “아! 주님이 드디어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구나!” 사실 1988년 7월경에 잠깐 어머니와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첫 만남에서 한평생 자식을 버린 죄책감에 불공을 드리며 살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든 탓에 그런 부질없는 참회는 그만두고 예수님을 믿으시라고 짧게 권하고 헤어졌었는데....

20여 년의 신앙생활이 지날 즈음 말씀을 대할 때마다 주님이 주신 사랑이 사라져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특히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을 대할 때 양심의 가책이 되었습니다. 저는 진리 안에 있다고 믿었기에 더욱더 그리하였어요.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아! 진리 안에 있다면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너무도 힘든 신앙생활이었습니다. 남을 탓하면 안 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는 더 이상 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제가 깨달은 것도 늘 제한적이었습니다. 진리로 채워지지 못한 제 심령은 점점 세상의 것으로 채우게 되었어요. TV 시청, 영화, 컴퓨터로 육신의 욕망을 즐기면서 그러지 말라고 호소하시는 성령의 탄식을 무시하였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알면서도 육신의 소욕과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늘 충성된 일꾼으로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 철야, 토요학생교사, 주일날 온갖 교회 일에 봉사하여 교우들에게 인정받는 집사였답니다. 이런 모순된 그리스도인 삶은 우리를 하늘로 인도하지 못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미래를 염려하므로 모든 것을 거둬가셨고 새로 시작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주님은 “땅엣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신앙을 찾기 위하여 주님께 엎드렸습니다. 길 잃어 죽어가는 양의 신음이 하늘 보좌까지 상달 되길 바라며....철저하게 깨어지고 부서지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 일 년간 계속되었지요. 그 때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약속을 주셨고 잠시 머무는 세상보다는 영원한 하늘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다시 신앙을 새롭게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될 즈음에 SOSTV의 월간지를 보게 되고 그 계기로 신앙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어요. 강 목사님의 설교와 여러 책자을 통해 그동안 이해되지 않던 말씀들이 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왜 처음에 순수하게 세상을 버리고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려는 마음이 변하여 세상과 짝하는지, 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지.... 이후 저희 가정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알아갈수록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그 사랑을 증거하길 원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거나 형제와 사화할 때 용서에 대한 잘못된 관념 속에 참된 용서를 경험하지 못할 경우가 많은데 저도 진정한 용서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오랫동안 저로 인하여 상처받고 고통당한 어머니를 향하여 철저한 사화와 용서를 빌어야 함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20여 년 전 첫 만남에서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을 때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까? 그냥 못을 뽑지도 않은 채 전화로 간단히 “못을 박아서 죄송합니다.”고 말한다고 과연 진정한 용서가 될까? 진정한 용서는 예수님 안에서 용서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복음의 비밀이었습니다. 이 비밀을 알기 위하여 갈보리와 아골 골짜기까지 주님을 따라서 맨발로 올라가는 경험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또한, 사랑으로 모든 구속의 경륜을 이루실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후 긴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주님께서 제 안에서 진정한 용서의 날을 이루실 때까지.....
오랫동안 주님께서 일하실 때를 기다리며 기도했는데 드디어 2014년 8월! 주님은 기도의 향연을 받아서 보좌로 올려주셨습니다. 27년 만에 다시 어머니와 만나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어머니, 오랫동안 마음고생 많으셨습니다. 지난 7~8년간 교회에서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하시며 주님의 용서를 구하고 구하였을 것이고...또 용서를 받았을 텐데...‘과연 아들이 용서를 받아줄지’ 라는 의문 때문에 마음에 평화를 누리지 못하셨음을 저는 압니다. 저는 이미 하나님의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에 용서했었답니다.” “ 다만 당장 찾아뵙지 못하였을 뿐”이라고 말씀 드리니 어머님의 얼굴에 평화와 기쁨이 깃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아, 고맙다”는 한 마디에 “죄송합니다. 벌써 용서하였는데....어머니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졌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를 드리며 두 딸에게도 할머니에 대하여 비로소 알려주었어요. 두 딸도 무척 기뻐하며 당장 만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2015년 1월 1일 새해 첫날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 누나 가족과 어머님이 재가하셔서 난 새 동생 가족과 함께 식사하며 반세기의 아픔과 상처를 이 땅에서 위로와 기쁨으로 갚아주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어머니와의 만남을 통하여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인도하시는 주님의 성실하심을 다시 신뢰하고 배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전에는 주님의 의를 이루고 선을 행하기 위하여 내 의지대로, 내 계획대로 하려고 방법을 세우다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의 계획을 믿고 기다리는 법을 알게 되었답니다. 주님의 역사를 보기 위하여 기다리는 것은 무척 힘들고 인내가 필요합니다. 가족이나 이웃과의 용서하는 문제도 주님의 경륜을 기다리며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참된 용서가 무엇이며 또,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주님이 주관하시며 주님께로부터 나오며 주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과 주님이 하시는 역사를 보는 것은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오랫동안 보잘것없는 저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경륜처럼 여러분도 그 사랑 속에 있음을 믿으세요. 또 주님이 하실 놀라운 은혜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믿고 기도드리면 반드시 자비로우신 하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반드시 주님이 계획하신 시간에 ......저의 간증이 작은 노래가 되어 하늘에서 기쁨의 찬양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길 바랍니다.

신앙 칼럼_ 행복의 비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행복한 인생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하버드 대학은 268명을 대상으로 20대부터 노인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들의 삶과 건강을 추적했습니다. 조사는 1938년에 시작되어 75년 동안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전 생애에 걸친 인간 발달 과정을 총체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성과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경제적인 풍요나 사회적인 특권, 혹은 우수한 교육 등이 아니었습니다. 행복은 좋은 학교, 재산, 명예에 있지 않다는 평범한 공식이 입증된 것입니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이 남몰래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하고, 학창시절 꼴찌를 맴돌던 사람은 항상 밝은 표정으로 동창회에 나와서 성공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삽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람은 노년기에 치매에 걸린 비율이 높았고, 아버지와 관계가 나빴던 사람일수록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연구 대상자들은 ‘부부끼리 서로 의지하며 산다’는 말을 자주 했고, 어린 시절의 나쁜 경험보다 좋은 경험이 이후에 삶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결국, 연구의 결과를 종합해 보면 ‘사랑’만 남습니다. 하버드대 연구팀은 ‘행복은 사랑을 통해서만 오며 더 이상의 것은 없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 주신 것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 3:16)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서 하늘 백성으로 영원히 사랑하며 함께 살고자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얼마나 행복하시겠으며, 우리는 또한 얼마나 행복할까요? 이처럼 사랑은 순수한 믿음과 소망을 간직하게 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아무 조건 없이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 때문에 주님의 계명을 순수한 동기와 태도로 자발적으로 좇게 됩니다. (요이 1:6)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소망이 생겨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겠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인간은 평생에 걸쳐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성장할 수 있고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합니다. 어렵고 힘들어서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주님과 사랑했던 순간을 되새겨 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진리 탐구_ “영적 이스라엘”육적 이스라엘의 교훈

1.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이유는 유대인들을 특별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진리의 말씀을 그들을 통해 세상에 전파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성경에 나오는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은 “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대민족의 선민상태를 유지하고 축복에 대한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한 조건이었습니까? 그것을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순종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고, 불순종하면 끊겨 나간다”는 것입니다.

2. 선민(택한 백성)의 자격박탈 원인
가. 말씀에 대한 불순종
그러므로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법과 말씀에 불순종하는 반역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군대에 포로로 잡혀서 끌려가거나 죽임을 당하는 고난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B.C.1446년 출애굽 시대부터 A.D.31년 주님의 십자가 사건까지 약 1500여 년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선지자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을 돌이키게 하시기 위하여 교훈과 책망을 하셨지만, 그들은 그 선지자들을 조롱하거나 죽였으며, 오히려 계속해서 죄악에 죄악을 더함으로써 결국에는 말라기서에 기록된 것처럼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성전과 제사법의 규례들이 더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더럽고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나. 구세주의 거절과 십자가의 죽임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맡기셨던 성전과 제사법의 규례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으셨기에 친히 육신을 입은 “메시아”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려 세상에 오셨지만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눅1:77) 마지막 순간까지 메시아를 거절하고 죽임으로써 구약의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이스라엘로서 선민자격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모세가 죽기 전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과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죽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겠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악을 행하게 될 것을 책망하면서 그렇게 하지 말 것을 마지막으로 당부하였습니다. 모세가 생존해 있을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불순종의 일이 있었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으며, 하물며 모세가 죽으면 어떠하겠습니까? 그 모든 불순종의 일이 더욱 악해짐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말세에 재앙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날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 ”(신 31:16~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너희가 돌이키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얼마나 원하셨는지를! 그러나 너희는 그 선지자들을 죽이고, 심지어 그 보낸 아들을 죽이는 백성이 되었다.” 선지자들과 그 보내신 아들을 죽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모세가 죽기 전에 예언하신 말씀과 같이 말세에 재앙을 당하게 되었으며 예수님은 특별히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날을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임을 거절함으로 유대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었고, 그 운명의 결정은 바로 온 세상을 위한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그리스도의 “교회 시대”가 열리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 46) 구약의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한 국가로서 하나님 앞에 선택받은 백성이 되기를 끝까지 거절하였기 때문에, 서기 34년 이후부터 유대 민족은 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자격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그들 또한 이방인과 같이 개인 단위로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유대인들)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 21:43) 구약시대의 유대 민족은 그 누구도 그 자리를 넘볼 수 없는 성경의 주인공이었으나 십자가 이후 그들은 영광스러운 주인공의 자리를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조건적이었습니다. 복음을 거절한 유대 국가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선민 국가로서의 특권을 박탈당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없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과 부르심을 대신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현재 지구 상의 중동의 육적 이스라엘 국가는 더 이상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고 믿음으로 된 새롭게 택한 족속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참 백성이란 것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육적 유대인의 사도였으며 한때는 이방인을 “부정한 자”로 여기셨던 베드로 사도께서는 영적 이스라엘에 대한 견해를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다음 호에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회사_태양신 숭배를 기독교화 한 로마 카톨릭 교황권이 제정한 부활절

성경에 딱 한 번 유월절과 무교절 기간 끝에 언급된 Easter는 부활절이 아니라 이교 이스터 절기이다.

“... 이는 이스터가 지나면(after Easter) 그를 백성 앞에 끌어낼 의도였더라.”(행12:4)는 내용은 유대인들에게 잘 보이려는 의도인데 유대인들이 증오하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일 수 없다.

2세기에 들어 태양을 숭배하는 황제들과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들은 이루려는 목표가 동일했다. 모든 종교를 “태양을 경배의 중심 대상으로 삼는” 종교로 통합하는 야심찬 계획이 세워졌다. 샤프는 이교 철학의 영향에 관해 말하면서 “이교 철학이 자신의 속에 믿기 어려울 정도의 강력한 불길을 타오르게 했다고 고백한 성 어거스틴에게까지도 큰 영향을 끼쳤음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마음속으로 화해를 추구하는 이교 황제들의 태도와 대중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알렉산드리아의 전도 방법들을 받아들인 로마의 주교들은 대중에게 인기 있던 이교 축제들의 인기를 떨어뜨리고 싶었다. 그들은 황제가 있는 수도에 있으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통해 연중 축제인 부활절과 태양 숭배를 위해 신성시되던 일요일을 교회로 들여와서 연중 가장 큰 축제로 만들기로 하였다. 수 세기에 걸쳐 맹렬히 이어진 부활절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구약의 유월절을 성력으로 정월 십사 일(연중 봄)에 기념하도록 정하셨다.
이교에서는 주전 여러 세기 동안 봄에 오는 태양의 분점을 기념하는 거짓 연중 축일을 지켜왔다. 이날은 봄의 여신을 의미하는 스칸디나비아어 “에오스트레(Eostre)”로 불리었다. 이 단어에서 “부활절(Easter)”이라는 단어가 유래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구약의 유월절에 해당하는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나 신약 성경의 말씀에서 그 어떤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데도 그 사건을 매년 기념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이 부활절이 이교의 봄 축제와 맞먹는 행사가 되었다. 하지만 유월절인 정월 십사 일은 오늘날 주중 아무 날이나 해당될 수 있다. 동방의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해마다 유월절 이틀 후에 기념했다. 그날이 어떤 요일이든 관계없이 매년 그 달의 십육 일에 해당하는 날에 부활을 기념했다. 이 같은 관습은 구약의 유월절에 관한 성경의 규정과 조화를 이루었다.
태양 숭배자들은 부활절 시기에 행하는 봄 축제에 더하여 매주 하루를 축일로 기념했다. 태양에게 바쳐진 신성한 날로 널리 인정받고 있던 주일 중 첫날의 이교의 화려함을 경쟁에서 이기고 싶던 로마 주교는 부활절을 이 날 저 날로 옮겨가면서 기념하는 교회들을 강력히 비난했다. 로마의 주교 빅토르 1세는 부활절 날짜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지중해 연안을 오르내리며 지역 종교회의들을 소집했다. 알렉산드리아 학교의 수장인 클레멘트는 자신이 모은 일요일 준수에 호의적인 전승들을 요약 출판하여 로마의 태도에 찬성했다. 클레멘트는 처음으로 일요일을 주의 날로 부른 사람이다. 동시에 빅토르는 이것을 지중해 연안의 모든 나라에 선포했다. 그는 이교도들과 점차 세속화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봄 축일의 날짜를 고정하는 일에 동의할 것을 알고 모든 지역의 성직자들에게 춘분 바로 다음의 만월이 지난 후 처음 오는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키도록 칙령을 내렸다. 기독교 성직자들은 그때까지 지역 협의체 자체 모임들에서 다수결에 의해 결의된 법령들을 따랐다. 빅토르 1세 이전에는 그 어떤 주교도 감히 지역 협의체의 수장을 무시하고 특정한 주교가 다른 주교들에게 자신의 법령을 따르도록 명령한 적이 없었다. 그 충격과 저항이 너무도 단호했기 때문에, 역사가 아키발드 보워는 “권력 찬탈을 위한 교황권의 첫 번째 시도”라고 묘사하였다.
동방 교회는 이 오만한 요구에 대하여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들이 지켜온 관습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확고히 선언했다. 그러자 빅토르는 격앙되어서 그들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동방의 성직자들은 형제라 부르기에 합당치 않다고 공표하고, 그들로 로마에 있는 교회와 그 어떤 형태의 교제도 못하게 했다. 동방의 교회들과 서방의 교회들 사이에 생기기 시작한 이 틈은 로마 주교가 가진 힘이 세질수록 더욱 크게 벌어졌다. 파파스가 앗시리아 교회의 수장으로 선출되었을 때는 그와 그의 교회가 이미 저주를 받고 파문을 당한 후였다. 오직 교황권 세력의 성장에 관한 역사를 주의 깊게 읽는 사람들만이 부활절에 대한 논쟁이 로마 주교들의 손에서 얼마나 강력히 조작되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Healing Story_민들레

민들레가 몸에 좋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검정 비닐봉지와 호미를 들고 밭과 들을 누비는 ‘민들레족’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식물이 살기 힘든 땅에서도 꿋꿋이 피어나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민들레, 아마도 우리에게 너무 유익한 것이기에 창조주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흰 민들레는 전 세계 식물 가운데 인간의 몸에 이로움을 주는 10대 식물 중 한 가지로 선정되었으며, 미국의 영향학자 로이 바타베디안은 3,000가지의 식물 가운데 가장 우수한 5가지 식물 중 하나로 민들레를 선정했습니다. 또한 동의보감에서는 민들레를 여성의 유방질환을 낫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소개하며, 한방에서는 모유가 잘 나오지 않거나 젖몸살, 유선염 같은 증상이 있을 때 민들레를 처방해 복용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 효능
1.간  
흰 민들레에는 실리마린과 콜리마린이라는 성분이 풍부합니다. 미국 콜로라도대학교 연구팀이 실리마린 성분이 간암 세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간암 세포가 자라는 것을 억제하고 이미 생성된 암세포는 제거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실리마린은 비타민E의 10배에 달하는 항산화 작용이 있어서 유해산소로부터 간세포와 조직을 보호하며 간을 손상하는 효소 류코트린의 생성을 억제하고, 간세포 재생을 돕기도 합니다. 이것은 민들레의 잎과 줄기에 풍부합니다.

2.담낭(쓸개)

민들레에 함유된 콜린 성분은 담즙(쓸개즙) 분비를 촉진하여 지방간과 간경화 등 여러 가지 간 질환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며 담낭기능을 좋게 하여 담즙의 흐름을 개선시켜 줍니다. 담낭기능이 좋지 않으면 담즙이 원활하게 배출되지 않아서 고이게 되는데, 그때 쓸개염, 빌리루빈, 콜레스테롤 등으로 구성된 담즙은 끈적끈적하게 되고 거기에 죽은 광물질이 결합하면 바로 담석이 되는 것입니다.
3.소화
식전에 먹으면 식욕 증진, 식후에 먹으면 소화력과 흡수율이 증진됩니다. 민들레는 꽃이나 씨보다 잎과 뿌리에 약효가 많은데, 잎에서는 모든 소화효소 분비를 증진시키는 효능이 있습니다. 우리 몸의 구강에서는 전분을 소화시키는 푸티알린, 위에서는 단백질을 소화시키는 펩신, 췌장에서는 전분과 지방, 단백질 모두를 소화시키는 효소가 분비됩니다. 또한 지방의 소화를 위해서 간에서 만들어진 담즙이 담즙관을 통해서 십이지장으로 배설되며 마지막으로 소장에서 여러 종류의 소화효소가 분비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소화효소의 분비를 증진시키는 것이 바로 민들레입니다.
4.변비
위와 장을 튼튼하게 하여 헛배 부르고 가스차는 것이 없어지며, 만성 변비 개선에 좋습니다. 
5.위무력증, 대장무력증
위나 대장이 무력하다는 것은 소화기에 있는 근육이 수축하고 이완하는 활동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민들레는 소화기의 근육을 자극하여 근육 자체를 활력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민들레와 더불어 대장 무력증을 치료해 주는 천연의 비결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활보를 하며 육체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걷기 시작했는데 가스가 나온다거나 운동을 하고 왔는데 화장실을 가고 싶은 느낌을 경험한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규칙적인 활기찬 운동은 우리 몸에 대단히 좋은 치료 효과를 가져옵니다. 오늘 1시간 하고 내일 쉬는 것보다 매일 30분씩 운동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6.비타민
비타민 C는 혈류 안에 있는 것과 하나하나의 세포 안에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포 내에 비타민 C씨의 결핍증이 있으면 여러 가지 신진대사에 큰 문제를 가져옵니다. 민들레에 있는 비타민 C는 세포 안으로 침투하여서 그 결핍증을 교정해 주는 일을 합니다.
또한 민들레에는 당의 신진대사에 꼭 필요한 비타민B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 어떻게 먹느냐?
1.민들레 차 : 민들레 차는 따뜻하게 마셔야 합니다. 맛은 구수하지만, 이뇨작용이 있어서 많이 마시면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됩니다. 만일 설사 증상이 보이면, 잠시 끊었다가 소량씩 시작하여 차츰 양을 늘려갑니다.
·꽃이 피기 전 또는 꽃이 진 후에 뿌리째 채취하여 흙과 불순물을 없애고 물에 살짝 씻습니다.
·3∼5cm가량으로 썰어서 햇볕에 말립니다.
·재료가 잘 마르면 한지 봉지 등에 넣어 통풍이 좋은 곳에 보관합니다.
·잘 건조된 민들레는 흐르는 물에 씻고 3분간 우려내 차로 마시거나 끓는 물에 1시간 동안 달여 물처럼 마시면 좋습니다.
·차의 분량은 물 600mℓ에 재료 8∼15g을 넣고 달이며 하루 2∼3잔으로 나누어 마시면 됩니다. 입맛에 맞추어 벌꿀이나 설탕을 약간 넣어도 좋습니다.
(꽃이 피기 전에 채취한 것이 약용이나 차용이나 모두 품질이 좋습니다.)
2.샐러드 : 민들레를 나물로 먹을 때는 꽃이 피지 않은 연한 것을 골라 조리하는데, 상추, 시금치 등과 함께 드레싱을 하여 먹으면 더 좋습니다. 드레싱으로 올리브유와 레몬을 넣어주면 레몬은 기름을 유화시키고, 기름은 레몬을 중화시켜서 신맛을 없애주기 때문에 소화과정에 지장이 없게 해줍니다.
3.민들레 주스 : 신선한 민들레의 잎사귀와 뿌리를 당근과 같이 주스를 짜서 식사 전후로 반 컵 정도 마시면 식욕과 소화력이 증진됩니다.
4.민들레를 말려서 가루를 내어 먹거나 꿀을 넣어 환을 만들어 먹습니다.
5.기타 : 예전에는 민들레를 구황식물로 반찬이 아닌 양식으로 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나물로 무치면 쌉쌀한 맛이 나며 쌈으로 먹거나 비빔밥에 생잎을 그대로 넣어 먹어도 좋습니다. 민간에서는 산모의 젖이 부족할 때, 최유제로 민들레를 나물로 먹거나 민들레 뿌리를 달여서 차로 먹습니다.
6.주의 : 손발이 차고 설사를 자주 하는 사람이 민들레를 복용할 경우, 오히려 몸을 더 차게 만들 수 있으므로 오랫동안 먹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