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권두언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계십니다.그것은 늦은 비 성령으로 무장한 백성들을 준비하셔서 최후의 선과 악의 대쟁투에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나아가 예언을 성취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첫 번째 성령의 역사보다 훨씬 더 놀랍고 능력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그 사람들이 비치는 빛으로 환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 계시록 18장 1절에 나오는 넷째 천사의 운동으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여자의 남은 무리들, 곧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이 나아가 하나님의 공의를 증거하고 바벨론의 영혼들을 불러내는 마지막 큰소리 외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늦은 비 성령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 여러분들은 성령에 대한 바른 개념과 가르침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을 받기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성령은 준비되지 않은 영혼 위에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린다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 연구하는 성령에 대한 주제가 여러분의 신앙과 성령을 받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 병국 목사

 

Love Letter_그런 편지가 되고 싶습니다

 

강 영은 

 

 

팔랑 떨어지는 마른 잎새 한 장이
우체부가 놓고 간 편지처럼
발 앞에 떨어집니다.
편지를 받고 싶은 계절입니다.

사르륵 내려앉는 늦가을 잎사귀가
받고 싶던 편지처럼
무릎에 내려앉습니다.
얼른 펴서 읽고 싶은 고향의 편지처럼…
편지를 쓰고 싶은 계절입니다.


편지를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그 편지 속에 담겨있는 색깔을…
편지를 펴면 읽을 수 있습니다.
그 편지 속에 서린 영혼의 빛깔을…

한가위 만월 같은 충만한 기쁨과
눈비 품은 잿빛 하늘처럼 어두운 절망과
꽃이 피어나는 화사한 행복과
잎이 시드는 쓸쓸한 슬픔이
편지에는 묻어납니다.


따뜻한 편지
슬픈 편지
외로운 편지
어두운 편지…

편지는 한 장의 종이라도
그 속에는 색깔이 있습니다.

편지를 펴면 맡을 수 있습니다.
편지 속에 서려 있는 그 사람의 냄새를…
편지를 읽으면 맡아집니다.
그 영혼이 건네주는 냄새를…


문장 끝 물음표에 찍혀진 뾰족함 속에서
문장 속 느낌표에 서린 넉넉함 속에서
문장 속 이야기에 담긴 은은한 사랑 속에서
영혼 속에 삭여진 냄새가 맡아집니다.

편지 속에는
그 편지를 쓴 사람의 영혼이 녹아 있습니다.
그 편지를 쓴 사람의 마음이 펼쳐져 있습니다.

바람에 우수수 날리는 잎사귀들이
전하고 싶은 편지처럼
받고 싶은 편지처럼
하늘로 날아갑니다.


내가 매일 쓰는 편지가
누군가에게 읽혀진다면 좋겠습니다.
내가 매일 쓰는 편지에서
하나님이 읽혀진다면 좋겠습니다.

내 인생의 편지 속에서
하나님의 색깔이 묻어나고,
내 인생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냄새가 묻어난다면 좋겠습니다.


나를 읽고 하나님의 사랑을 읽고
나를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나를 만나 하나님의 향기를 맡는다면 좋겠습니다.


내 인생의 편지가 하나님의 편지가 되고
내 인생의 편지가 하나님을 알게 한다면 좋겠습니다.

삶이 고스란히 스며 나오는 편지…
인생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편지…

오늘도 쓰는 나의 편지가
사망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로운 편지가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제1부_성령은 무엇인가?

 

총 제목: 성령을 받는 사람들

기독교 안에 성령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가 왜곡되어 가르쳐지므로 인해 거짓 성령의 체험이 교회 안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준비된 당신의 참 백성들 중에 성령의 역사를 크게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복음과 진리가 땅끝까지 전파되고 증거하는 일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의 마지막 은혜의 시간이 끝나기 바로 직전에, 아직 바벨론 가운데 남아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불러내는 큰소리 외침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일꾼,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아가 하나님의 사업을 마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성령에 대하여 올바르게 알 뿐 아니라, 진정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성령에 대하여 함께 연구합니다. 이 기사가 독자 여러분들을 성령을 충만히 받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기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1부: 성령은 무엇인가?

이 마지막 시대에 난무하는 온갖 오류와 거짓 가르침들 중에 하나가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다. 또한 현대 기독교회에 가장 혼동되어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성령에 대한 이해이다. 성령은 무엇이며, 성령은 누구인가?

1) 성령은 누구신가?

기독교 안에서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니시며, 다만 하나님의 생기나 기운, 능력, 생명의 힘일 뿐이라고 가르치는 주장들이 존재한다. 곧 삼위일체를 교묘하게 부인하는 가르침들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과연 성령은 하나님의 기운일 뿐인가? 아니면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신가?

1. 성령은 인격을 가지고 계시다

성령은 단지 하나님의 기운이나 능력이나 힘이 아니다. 성경은 성령을 비인격적인 어떤 힘이 아닌 한 인격체로 계시한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분을 별개의 인격체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4)라고 말씀하셨다.

2. 성령은 개성을 갖고 계신다

그분은 가르치시고(눅 12:12), 죄를 책망하시고(요 16:8), 교회 일을 지시하시고(행 13:2), 도우시며 중보하시고(롬 8:26), 성화 시키신다(벧전 1:2).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힘이나 영향력, 혹은 하나님의 속성에 의해 행해질 수 없다. 오직 한 인격체만이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

3.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 32). 이런 일은 성령이 하나님이실 때에만 진실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친히 이 말씀을 하셨으므로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다. 성경은 성령과 신적 속성들을 관련시킨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바울은 그분을 "생명의 성령"(롬 8:2)이라고 했다.
그분은 또 예수님과 같이 진리이시다. 그리스도는 그분을 "진리의 성령"(요 16:13)이라고 부르셨다.

4. 성령은 전능하시다

성령님은 영적 은사들을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고전 12:11)신다. 그분은 어느 곳에나 충만히 존재하신다. 그분은 영원히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실 것"(요 14:16)이다. 그분은 또한 전지하시다. 왜냐하면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고전 2:10, 11)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역들은 성령과 관련되어 있다. 창조와 부활 모두에 그분은 관여하신다. 욥은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 33:4)고 말했다. 또한 시편 기자는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시 104:30)라고 말했다. 바울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고 기록했다.

2) 성령과 삼위일체 하나님

1. 성령 - 삼위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 중에 셋째 위격으로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다.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하게 자존하시는 분이다. 삼위 하나님은 각각 동등하시며, 다만 행하시는 사업의 성격과 기능적인 면에서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에 조력하시는데, 특히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명에 집중하시고 그 구속이 효과 있도록 역사하신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시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개입하셨다(눅 1:35). 그리고 침례 시에 예수님의 공중 사역을 인정하셨고(마 3:16, 17),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과 부활의 유익을 인류에게 가져오셨다(롬 8:11). 성령은 구속의 계획을 완수하고 실현시키기 위해 일하시며, 집행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신다.

성령께서는 창조 시에 창조사업에 밀접하게 개입하셨고, 함께 그 사업에 임재하신 것을 알 수 있다(창 1:2). 생명의 기원과 유지에도 역사하시는데, 그분이 떠나가시는 것은 사망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 34:14, 15, 33:4 참조)고 성경은 말한다.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영혼 속에서 재창조의 사역을 이루신다. 우리는 성령의 그 활동을 통해 창조 사역의 추적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업을 창조주 성령을 통하여 개인 속에서 수행하신다. 성육신, 창조, 재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성령은 하나님의 의도를 성취시키려 오신다.

2. 말씀 속에 증거된 삼위일체

성령의 인격과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움직임들이 기독교에 일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때에 대한 경고의 말씀과 함께 거짓 선지자의 가르침과 미혹을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시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실례는 바로 예수님의 침례 장면이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이 장면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임하시고 아버지의 음성이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즉 침례를 받으시는 예수님과 말씀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비둘기처럼 임하시는 성령 이 세 분이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명하신 최후의 지상 명령에 포함된 침례에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명명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 20).

그런데 성령의 인격을 부인하는 주장을 펴는 기독교의 일단의 사람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들의 침례를 언급하며 성령의 인격을 부인한다. 사도들이 삼위일체, 곧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가 아닌 그냥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었으므로 성령은 인격을 가진 분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침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행 10:47,48).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 22:16).

왜 사도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하지 않고 그냥 예수 이름으로만 침례를 주었을까? 마태복음 28장 19절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라는 문구의 원어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분의 이름에 단수를 사용했다. 즉, 복수인 “ονοματα”(오노마타)가 아니라 단수인 “ονομα”(오노마)를 사용한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라는 의미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일체가 아니시라면 마땅히 복수인 ονοματα(오노마타)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복수를 쓰지 않고 단수를 사용한 것은 바로 하나님 세 분이 곧 하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3. 복합단일 단어로 표현된 삼위일체

세 하나님의 오직 한 이름은 무엇으로 대표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구약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이 없고 다만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라는 이름을 취하시기 전, 구약에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실 때는 오직 여호와이셨다. 즉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을 찾는 것과도 같았다. 마찬가지로 신약에 와서도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면, 그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예수, 성령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라고 한 이 말을 구약으로 표현하면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자들은 신명기 6:4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는 구절을 자주 예로 제시한다.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히브리어 중에 오직 하나, 단일을 표현하는 단어는 “야히드”이다. 그런데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라는 말씀에서 “오직 하나”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야히드”가 아닌 “에하드”가 사용되었다. “에하드”는 여러 개의 개체가 모여 이룬 통일된 하나를 표현하는 복합단일을 뜻하는 단어이다. 만일 하나님이 세 분 하나님이 아니시고 숫자상으로 오직 한 분뿐이시라면, 성경에 사용된 히브리어가 “에하드”가 아닌 “야히드”가 사용되었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야히드”는 절대 단일어이다. 신명기 6장 4절에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에 사용된 “에하드”는, 성경에서 둘 이상의 사람들이나 단체가 하나가 된 것을 표현하거나 그것이 이룬 한 몸, 한 소리 등에 사용된 단어이다.

창세기에도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구약은 하나님의 복수성을 시사한다. 때때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복수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창 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3:22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창 11:7 “우리가 내려가서”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엘로힘”인데, 이 말은 복수이다. 앞서 언급한 신명기 6장 4절의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에서 쓰인 하나님이란 단어도 “엘로힘”인 복수 명칭이다. 그 복수 명칭을 쓰시는 하나님이 곧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신 것이다. 절대 단일을 나타내는 말인 “야히드”는 성경에서 오직 하나인 여호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 일이 없다. 그래서 복수 명칭인 엘로힘이신 그분이 바로 지존자이신 “오직 하나”, 곧 에하드이신 여호와이시다. 여호와라는 말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신약 성경에서 계시해 주신 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로 계시는 엘로힘이신데, 그 엘로힘이신 아버지, 아들, 성령은 다 지존자시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하셨는데, 이것은 당신과 아버지 하나님과는 하나라고 하신 것으로, 분명히 두 다른 개체이지만 하나라고 하신 것이며, 이것이 바로 히브리어로 표현하자면 “에하드”인 것이다.

삼위일체와 성령에 대한 오해는, 지구 역사가 마칠 즈음 다시 한 번 도래할 두 번째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기 위한 사단의 효과적이 방안이다.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고, 진정한 영적 경험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성령에 대한 오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오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제2부_성령의 역사, 가장 큰 선물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시기 전에 두 가지를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은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과 재림에 대한 약속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이 주실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 성령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상에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면서 계속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성령)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또한 그분이 마치지 못한 일을 성령을 통하여 마치실 것과 성령을 통하여 영원히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구속 사업이 완성될 것과 구속사업이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적용될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기를 간절히 열망하셨다. 성령께서 어떤 일을 어떻게 하시기에 성령이 가장 큰 약속과 선물이 되는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연구해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함께 연구해보자.

*성령께서 하시는 일

1. 성령은 진리를 알게 하신다: 성령이 없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

2. 예수님을 보여 주신다: 우리는 성령이 없으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없고, 예수님을 모르면 그분을 사랑하거나 신뢰할 수 없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3. 죄를 회개케 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의를 알려주셔서 회개케 하신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4. 거듭나게 하신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주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5,6).

5. 예수님 안에 거하게 하신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으며 예수님 안에 거하므로 그분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게 된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6.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모르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해주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7. 순종하게 하신다: 성령의 감화와 인도하심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지만 순종할 능력도, 순종하고 싶은 마음 조차도 가질 수 없다.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7).

8. 거룩하게 하신다: 성령은 진리로 우리를 이끄시며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계속적으로 따라간다면 변화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신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9. 증인이 되게 하신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으며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우리의 전도는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10. 사랑을 주신다: 성령의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이다.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이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 사랑을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11. 변화되게 하신다: 인간은 무엇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렇게 변한다. 성령은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로 향하게 하시며 바라보므로 우리는 그분의 형상으로 변하게 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얼마나 놀라운 성령의 역사인가! 우리가 생각하고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에 성령께서는 관여하시며 역사하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성령을 받는 것과 진리를 받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과 성령의 가장 큰 은사가 사랑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성경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언명한다. 그러므로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성령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은 진리와 연관이 있으며, 진리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도구이다. 진리가 없는 성령의 역사는 있을 수 없고 성령의 역사가 없는 진리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우리는 다만 성경에서 성령에 대한 중요한 몇 가지를 찾아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외에도 성령의 역사와 하시는 일은 무한정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성령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도 무용지물이며, 우리가 진리를 이해할 수도, 죄를 회개할 수도, 말씀을 순종할 수도, 그분을 바라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성령의 필요를 느끼고 간구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반응하며 살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의 세미한 음성을 분별하고 있는가?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도록 성령을 구하자! 예수님을 알려주시고 그분을 닮게 해달라고 성령을 구하자!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고 말씀을 순종할 소원과 능력을 주시도록 성령을 구하자! 우리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쳐주시도록 매일 매 순간 성령을 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겠다.

 

제3부_진정한 방언의 목적을 아는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역사는 방언의 은사라고만 알고 있다. 그래서 방언을 받기 위해 애쓰며 기도원에도 가고 금식기도도 한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방언을 주시면서까지 전달하고자 하셨던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간과해버린다. 방언의 은사가 처음으로 성경에 언급된 것이 언제였는가? 오순절 성령의 역사 때였다. 오순절과 연관된 방언의 소식을 함께 연구해 보자.

1) 오순절의 경험

“오순절 날이 충만히 임하매 그들이 다 한 마음이 되어 한 곳에 있더니”(행 2:1KJV). 먼저 그들은 성령을 받기 전에 “한 마음”이 되었다(행 1:14).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바로 전까지도 서로 누가 높은가 다투던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과하면서 고난과 시련을 겪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까지 메시아에 대한 성경의 예언과 예수님의 생애를 연구하였다(행 1:3). 그 진리들은 새롭게 고리를 지어 연결되었으며, 그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구속의 경륜의 희미하던 것들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개인의 구주로서 다시 확신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삶으로 성취된 놀라운 예언들과 그분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깨달으면서 자신들의 심히 이기적이고 죄 되고 교만한 모습들을 발견하고 진정으로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진정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서로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며 하나로 연합되었다. 그때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여기에 (이론적인) 진리가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사랑이 있다”라고 말했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연합은 그들이 믿는 진리가 참됨을 증명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난 메시아, 자기들을 변화시킨 예수님을 전하고자 소원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중보하시며,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이 놀라운 복음을 전하길 원했으나 자신들에게 이 엄청난 진리를 전할 힘이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자신들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깊이 느끼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다. 그 때에 약속된 성령이 그들에게 부어졌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이 엄청난 복음을 전해야 할 제자들은 그 나라들의 방언을 몰랐다. 그 때에 방언이 주어져 그 천국 복음이 수많은 나라의 백성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제자들에게 임했던 그러한 성령의 충만은 이처럼 절실한 필요를 느끼며 마음이 정결케 된 자들에게 부어지는 것이다.

2) 방언 사용 목적과 메시지

오늘날 기독교회에 흥행하는 성령의 충만이나 방언은 과연 제자들이 경험했던 진실된 성령의 역사와 동일한 것인가? 슬프게도 현 기독교회에는 많은 경우에 사단이 만들어낸 가짜 성령 운동과 자기 자신조차도 알아듣지 못하는 거짓된 방언들이 난무하고 있다. 방언을 받기 전 제자들이 경험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방언을 통해 그들이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 자신을 살펴보자.

* 제자들의 경험

1. 그들은 성경의 예언과 함께 예수님의 생애를 연구하였다.
2. 그들은 말씀을 연구하면서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만났고 자신의 죄 된 모습을 발견하고 진정한 회심을 경험하였다.
3. 그들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서로에게 죄를 고하고 용서하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여 “한 마음”이 되었다.
4.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고 변화시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전하고자 소원했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무력함과 그들에게는 진리를 전할 지혜와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성령을 간구하였다. 그 때 성령이 충만히 임하였고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다.
5. 그들이 말한 방언은 문법이 제대로 갖추어진 다른 나라의 언어였다. 제자들과 외국인들 사이에 통역자가 필요 없었다. 방언의 은사는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6. 그들은 성경을 직접 인용하여 그 시대에 성취된 성경의 예언들을 설명하였다. (행 2:14~36 참조)
7.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가 참 메시아시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마 1:21) 구세주시라는, 죄에서 구원(승리)얻게 하는 복음을 전했다.
8. 그들은 진리에 대한 증인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말했고 그들 서로의 연합과 변화된 모습은 그들이 믿는 바가 진리임을 증거하였다.
9.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였다. 인간의 성정을 즐겁게 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진리 그대로의 복음을 전했다.
10. 사람들은 제자들의 방언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고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진정한 회개의 부르짖음을 발했다.

방언에 대해 더 참고할 것은, 방언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에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언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하여 내리는 은사라는 것이다. 오순절 날에 있었던 성령의 방언 은사는 다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이 은사는 다른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은사였다. 이것은 언어의 은사였지, 들음의 은사가 아니었다.

*성경에 나타난 방언의 3가지 기능

1. 첫 번째 예증 :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 “하늘의 언어”로서 오직 하나님과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과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 설교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11절).

2. 두 번째 예증 :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에게 전도한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 10:44~46). 사도행전 10장 1절에 보면 고넬료는 이태리 사람이었고, 베드로는 유대인으로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역사에 의하면 로마의 시종들은 여러 나라에서부터 잡혀 온 사람들이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났을 때, 그 두 사람 사이에는 언어 장벽이 있었음이 확실하며, 베드로는 아마 통역관을 세워서 통역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령이 고넬료와 그 집안사람들에게 내려졌다. 그 결과, 그곳에 있던 유대인들과 베드로는 그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성경은 유대인들이 그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말하는 “하나님을 높임”의 음성을 들었다고 적고 있다(행 10:46). 후에 베드로는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오순절 날)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행 11:15) 하였다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통하여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날 받았던 같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었다고 밝히고 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방언의 은사를 받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은 그들이 전에 전혀 알지 못하던 다른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3. 세 번째 예증 : 방언에 관한 마지막 예로는 바울이 12명의 에베소 사람들에게 전도한 일이다. 사도행전 19:6절에 말하기를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교육을 받은 사도였으며, 가장 많이 선교 여행을 하였던 사람이다(고전 14:18). 성령이 12명의 에베소 사람들에게 임하였을 때에 바울은 그들이 방언하고, 예언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들을 통하여 방언의 은사는 여러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그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내려진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 4장에는 2장에 나오는 오순절과 유사한 장면이 나타나 있지만, 방언의 은사는 내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모였던 장소가 흔들렸으며 사람들은 성령으로 감동됐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다른 언어를 쓰는 외국인들이 없었기 때문에, 방언의 은사는 내려지지 않았다. 사도행전 4:31절에 말씀하시기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하늘로부터 성령의 방언 은사가 내려지는 이유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니고, 전도하기 위한 능력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고 하신 것이다.

3) 인위적인 성령의 역사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인위적인 방법으로 억지로 짜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고자 성령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성령을 이용하려 한다. 마음이 정결케 되지 않은 사람들이 인위적인 방법으로 성령을 구할 때 그 허점을 이용하여 사단은 거짓된 느낌과 흥분을 주고 거짓된 부흥을 일으켜 그들을 기만한다. 그들은 군중심리와 감정적인 흥분과 느낌의 희생자들이다. 성령의 충만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만들어내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확신과 우리 성품에 나타난 사랑이다. 성령은 진리를 찾고 연구하는 자들에게 임하시며, 매 순간마다 성령의 감화에 굴복하는 자들 안에 예수님의 거룩한 형상을 새겨주시는데, 이것이 성령의 가장 큰 역사요 기적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자들의 경험이 우리의 경험이 될 때에 우리는 전해야 할 진리를 갖게 될 것이며, 그때에 성령의 큰 필요를 느끼고 간절히 구하게 될 것이다.

 

제4부_성령 충만의 의미를 아는가?

 

우리의 구원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화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하심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성령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며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을까?

1) 성령의 역사 방법

성령께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1. 말씀을 통하여: 성령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7). 왜 성경은 성령을 비 혹은 물로 표현하고 있을까? (시 72:6, 슥 10:1, 호 6:3 요 3:5) 비나 물은 성경에서 말씀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신32:2, 사 55:10). 그러므로 진리를 떠난 성령의 역사는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진리의 말씀으로 검증해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신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며 그 말씀이 자신의 삶을 꼴 짓게 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의 경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말씀 충만한 사람이다.

2. 감동을 통하여: 때때로 그분은 강한 감동과 인상을 통해 말씀하신다.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사 30:21). 이것은 우리 자신의 느낌이나 기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주시는 감동은 언제나 말씀과 일치하며, 또 그것은 말씀으로 정결케 된 양심을 통해서 역사하게 된다. 이 경험은 하나님과 친밀한 자들,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된 삶을 사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3. 섭리의 길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그분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결정하고 선택할 때에 항상 그것을 행하려는 참된 동기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나 자신의 이익과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나 자신이 손해 보고 희생하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질 때에 우리는 그분의 섭리의 이끄심을 보게 될 것이다.

2) 성령을 따라가는 삶

로마서 8장 13, 14절에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교회만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헌금을 많이 낸다고 해서, 전도를 잘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들의 삶 속에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이들이 성령의 사람이다. 우리 생애에 이런 열매가 없다면 우린 성령의 사람이 아니다. 성령 충만의 생애에는 반드시 그 결과와 열매가 보여야 한다. 우리는 매 순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린 좋은 교인이요 도덕가일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리스도인인 척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실생활과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열려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매 순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이다. 여기 중요한 말씀이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생애를 지배하시게 하라는 의미이다. 그럴 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했다. 욕심이 잉태하면 무엇을 낳는가? 죄를 낳는다.(약 1:14,15) 육체의 일은 현저한데, 그것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다(갈 5:19~21). 그러므로 죄에서 승리하길 원한다면 매 순간 성령을 좇아 행하고,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여 성령께서 우리를 주관하시게 해야 한다.

3) 성령을 받는다는 것

그러면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매일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작고 하찮은 일을 할 때에도 내 방법대로 내 생각 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방법대로 하는 것이다. 내 나쁜 성질이 올라오려고 할 때 그 성질을 버리고 성령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이다. 비난의 말을 하고 싶을 때에 덕이 되는 말을 하는 것, 불평하고 화를 내던 사람이 온유하고 오래 참게 되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께 굴복할수록 더 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성령께 굴복된 사람,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사람이 바로 스데반처럼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의 감화력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히 11:38). 그런 자들이 모여서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할 때 초대 교회 당시에 일어난 놀라운 성령의 부흥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성령의 음성에 굴복할 때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주신다(롬 5:5). 이것이 가장 큰 성령의 은사이다(고전 12:31~13:1~3), 죄된 인간의 성품과 삶 속에 하나님의 무아적 사랑이 실현되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가장 큰 기적이다. 말씀을 통해 성령의 세미한 음성이 들릴 때, 성령의 이끄심을 느낄 때, 저항하지 말고 굴복하자! 우리 자신을 주께 온전히 드리자! 이것이 승리하는 길이며, 변화되는 길이며, 성령 충만케 되는 길이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참 그리스도인이든지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사단의 추종자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그대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지 않은가?
성령을 따라가는 자들에게 주어진 다음의 놀라운 약속을 보라.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제5부_누구에게 성령을 주시는가?

 

“또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그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 주셨으니”(딛 3:5,6 KJV).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이미 부어 주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풍성히 부어주셨는데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연 어떤 이들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것인가?

1) 성령에 목마른 사람들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3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어떤 까다로운 조건은 없다. 빈부귀천 노유를 불문하고 누구든지 원하고 목말라한다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 얼마나 감사한가? 우리는 진실로 성령의 필요를 느끼고 있으며 그분의 능력과 도우심을 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 중요한 일을 위해서 하루에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가? 진리는 빛을 열렬히 찾는 자에게 주어지고 성령은 그분을 목말라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그대는 목마른가? 무엇인가 채움 받지 못한 허전함이 있는가? 주님께로 오라. 성령께서만이 그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에 우리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게 될 것이다. 또한 여기에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이라고 했다. 믿음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말씀을 인정하는 것 이상이다. 믿음은 어떤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얻어진다. 많은 이들이 입술로는 믿음을 공언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믿는 바를 삶을 통해 보여줘야 한다.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

2) 회개하는 자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나 자신의 교만과 고집, 나 자신의 뜻과 방법으로 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버렸는가? 아직도 주님께 굴복하지 못한 것은 없는가? ‘이것만큼은 안돼’ 라며 붙잡고 있는 죄악적인 습관은 없는가? 말씀대로 살고자 세상에 대해서는 포기했다고 하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포기를 못 한 사람들이 많다. 아직도 교회 안에서 인기와 평판을 추구하며 남이 나를 조금만 무시하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해도 기분 나빠한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그대에게는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함이 있는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이기심의 노예에서 자유하였는가? 그대는 교회에서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진실된 그리스도인인가? 침례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을 보라고 했다. 죄를 버리고 자신을 포기하기가 힘든가? 그렇다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죄의 참 모습과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고 회개하게 될 것이다(슥 12:10). 회개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

3) 순종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32).
매일 매 순간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는 자들, 성령의 역사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은 그들의 굴복과 순종에 비례하여 충만한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 대우를 해드려야 한다.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전능하시며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라고 하시는데, 인간의 작은 지혜로 감히 하나님께 저항하면 되겠는가? 내가 지금 힘들고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르자. 다시 강조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성경)으로 이끄시고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것은 성령을 거절하는 것이다.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4) 늦은 비 성령과 이른 비 성령

중동지방에서는 가을에 밀과 보리를 심는데 씨앗을 심은 후에 내리는 비를 이른 비라고 불렀다. 이른 비는 흙 속에 묻여 있는 씨앗이 싹이 나게 하고 자라게 한다. 보리의 수확기인 봄에는 늦은 비가 내려서 이삭들이 잘 영글어 수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성경에는 성령을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 6:3, 욜 2:23참조).

1.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적용

*개인적인 적용: 이른 비 성령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끌어 회개케 하시며, 말씀을 통해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앎으로 자라나게 하신다. 비는 식물에게 필수적인 수분을 주고 양분을 빨아들이게 해준다. 우리도 매일 말씀을 통해 성령 감화와 그분의 인도를 받고 자라나야 한다. 늦은 비는 인침의 경험이다. 늦은 비는 우리로 진리 안에 안착되어 더 이상 흔들림이 없게 해준다. 고정시켜 주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늦은 비는 환란 때에 굳게 서게 해줄 것이며 큰 힘과 능력으로 복음 사업을 마치게 할 것이다.

* 역사적인 적용: 이른 비와 늦은 비 성령의 부어주심을 역사적으로 적용한다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복음의 씨가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한 것을 이른 비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른 비 성령의 결과로 어떠한 역사가 일어났는가? 오순절에 한 단 한 번의 설교로 그리스도의 봉사 기간 내내 회개시킨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을 회개케 하였다. 그들은 단순 명료한 그 시대의 복음을 전했다. 그것은 어두운 마음속에 빛을 비추는 단순하고 웅장한 진리의 외침이었고, 하루에도 수천 명을 회개케 하였다. 그처럼 복음 사업이 마쳐지는 마지막 때에도 다시 한 번 늦은 비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통해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고 큰 능력으로 사업이 마쳐지게 될 것이다.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욜 2:28). 만약 요엘의 이 예언이 사도 시대에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면(행 2:16,17) 이 예언은 다시 더 분명하게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에 성취될 것이다. 정결케 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때에 그들은 도덕적 흑암 중에 빛이 될 것이며, 큰 빛이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반사되어 나갈 것이다. 사람들이 성령의 지배하에 자신을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큰 능력으로 일하실 것이다.

2. 늦은 비를 위한 준비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 때가 되면 예언이 성취되고 늦은 비의 성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늦은 비는 지금 개인의 삶 속에서 이른 비를 경험하는 자들에게 내린다. 죄로부터 완전히 정결케 된 자들에게 내린다. 또 성품을 통해 예수님을 충만히 반사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행 3:19-20). 우리의 품성에 하나의 점이나 흠이라도 있는 동안에는 우리들 중 아무도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품성에 있는 결함들을 고치고, 심령의 전에서 모든 불결을 정결케 하는 일이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 그것들이 고쳐지고 정결케 될 때,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이른 비가 내렸던 것처럼 늦은 비가 우리에게 내릴 것이다. 우리는 죄에서 완전히 정결케 되어야 하며, 제자들이 오순절이 되기 전에 서로 한마음이 되었던 것처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게 되어야 한다. 그때에 사람들은 복음의 확실한 “증거”를 보고 진리를 확신하게 될 것이다.


** 마치면서

예수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되기 위해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고 말씀하셨습니다. “증거되기 위해” 전파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단지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지 않고 증거되어야 한다고 하셨을까요? 복음의 능력을 입증해 줄 증인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성령을 받기 위해 우리 영혼을 정결케 하고 우리를 변화시켜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세미한 소리로 우리 영혼에 속삭이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음을 감사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매일 구해야 합니다. 오늘 회개하고, 오늘 더 열렬히 기도하고, 오늘 더 간절히 말씀을 연구하며, 순종하라는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도록 합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늘뿐입니다.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

성령이 없으면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늦은 비 성령을 받는 길만이 복음 사업을 마치는 길이고, 주의 오심을 촉진시키는 길입니다. 이 모든 일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을 바르게 알고,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 사업을 마치는 독자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마지막시대이슈_교황의 미국방문과 마지막 성경 예언들의 성취

 

지난 9월 말 교황 프란치스코가 미국을 방문하고 갔다. 중세기 로마 천주교의 핍박을 피해 도망 온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에 이번 교황의 방문과 미국 의회 연설은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며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의 도착은 대통령과 부통령 가족들의 대환영을 받았으며 지금껏 역사 속 그 어떤 외국 고관도 미국에서 받은 적이 없는 대접을 받았다. 심지어 비행기가 도착하기 전부터 레드 카펫을 완벽하게 깔기 위해 미리 예행연습을 한 일은 옛날 황제의 행차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모든 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인 미국에게 교황이 이러한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에는 엄청난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국내외 언론들은 모두 교황 프란치스코가 지상 교통수단으로써 선택한 경차 피아트 500L을 주목하며 그의 검소함과 겸손함을 찬양하였는데 가디언지는 “교황 프란치스코가 선택한 겸손한 차 피아트에는 천 단어가 담겨 있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내며 그의 겸손함을 찬양하였다. 그러나 바티칸이 조심스럽게 피아트를 선택하며 비친 메시지에는 정말로 천 단어 이상으로 표현해야 하는 이면이 있을지도 모를 것 같다. 왜냐하면 ‘피아트(Fiat)’라는 단어는 ‘명령, 지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피아트로 다스린다(to rule by fiat).’는 표현은 ‘절대적 권위로 명령을 내리며 다스린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에서 최고 극빈 대접과 오바마 대통령의 찬사를 받은 교황은 짧은 연설을 한 후, 헌법로(Constitution Avenue)에서 퍼레이드를 가졌는데 “미국의 수도 워싱턴D.C는 잠시나마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시(聖市)’로 탈바꿈해 있었다.”라고 언론들이 보도할 정도로 미국 방문 초부터 그의 인기는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의 방문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교황은 그 날 늦은 오후 스페인 출신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사제 주니페로 세라 신부를 성인으로 추대하였다. 이 일은 매우 유심히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주니페로 신부는 북미 원주민 대량 학살자로서 지목받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를 성인으로서 추대했다는 점에 대해 인디언 컨트리 투데이는 “만약 세라가 우리에게 여전히 전에 믿던 신앙을 계속 유지할지 기독교로 개종할지 선택권을 주었다면 교황의 결정을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라는 우리에게 기독교만 ‘제공’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강요했다. … 그는 그것으로 우리를 범했고 선택권을 전혀 주지 않았다.”라고 보도하였다. 오늘날 모두에게 매력적인 존재로서(all things to all men) 다가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교황의 조심스럽게 계산된 것처럼 보이는 모든 행동에서 주니페로 신부를 성인으로 추대한 것이 과연 실수였을까? 아니면 여기에는 더 깊은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과거에도 교황들은 5차례나 미국에 방문하였다. 그러나 교황이 의회에 선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 방미에서 교황이 미국의 의회에 초대를 받아 연설했다는 사실은 그 내용뿐 아니라 그가 그곳에 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실로 엄청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과거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유럽 연합 의회에 초대받아 연설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천주교에서 가장 높은 책임을 지고 있는 로마의 주교 교황인 나에게 이 자리에서 연설하도록 초대한 것은 국민과 국가들의 사회속 파트너인 교황청의 역할을 여러분이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이 국제적 책임으로부터 나는 여러분에게 자유국가의 법률 기초에 대한 내 생각을 나눌까 한다.”– 2011년 9월 22일 베를린 제국의회의사당,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연설 中

미국 의회에서 매우 철저하게 계산된 연설문을 통해 교황권의 신세계질서를 세우는 사상을 담은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그 누구의 심기도 건드리지 않고 의회의 기립 박수로 화답을 받는 데 성공한 것만큼이나 그가 그곳에서 연설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정교 분리 원칙을 가지고 건국된 미국의 입법 기관인 의회가 교황을 초대하여 그의 연설을 경청하고 기립 박수로 화답하였다는 사실은 세계 도덕적 리더로서 교황의 권위와 그 권위가 정치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과거 종교개혁가들은 모두 다니엘서 7장의 “작은 뿔” 즉 성경 예언 속 “적그리스도”를 로마 천주교 교황권으로서 지목하였는데, 그와 동일한 모든 특성을 가진 계시록 13장의 첫 번째 짐승인 교황권에 대하여 계시록 13장 2절은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고 표현하며 그 첫 번째 짐승인 교황권의 배후에 사탄이 있음을 설명하였다. 우리는 이 사실을 중세기 역사 속에서 교황권이 수많은 성도들을 살육한 사실에서 확인한다.

우리는 또한 성경 예언에서 짐승이 “국가” 또는 “정치적 세력”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다니엘서 7장에서 발견하는데, 계시록 13장 11절은 “정교 분리 원칙” 즉 종교의 자유라는 개신교주의 사상을 가지고 건국된 새끼 양 같은 두 번째 짐승인 미국이 결국에는 “용처럼 말”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국가가 말을 한다는 표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국가가 말을 하는 유일한 방법이 법령을 통해서란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면 이번 교황의 미 의회 연설 내용이 새로운 각도에서 다가올 것이다.
그의 연설은 “여러분의 책임은 입법 활동을 통해… 공통의 유익을 위해 국민의 존엄성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말로 시작했다. 의회의 기능을 지적하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성경 예언 속 적그리스도가 교황권이며 미국이 온 세상이 교황권에게 경배하도록 강요할 것이란 계시록 13장의 예언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의미심장한 언어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연설 내용을 살펴본다면 더욱 놀라운 예언의 성취가 이뤄지려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대략 그의 연설에 담긴 중요한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1. 이 세상은 폭력적 충돌이 가득한 장소가 되어가고 있는데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과 종교로 인한 미움과 끔찍한 참사가 있다.
2. 종교적이든 아니든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3. 현대 사회는 세상을 두 부류로 나누는 모든 종류의 양극화에 맞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4. 공통의 유익을 위해 새로운 형제애와 연대와 관대함 속에 하나가 되어 전진해야 한다.
5. 새로운 형태의 국제 노예와 불법은 새로운 정책과 새로운 형태의 사회 의견 일치로서만 이길 수 있다.
6. 약자의 인권 보호에 더 집중해야 하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
7. 모든 자원의 분배가 필요하다.
8. 나는 의심의 여지 없이 미국과 미 의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지금이 용감한 결정을 내려 문제들을 해결할 때이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미국의 역할이 특별히 중요함과 각종 사회적 이슈들을 언급하며 “지금이 용감한 결정을 내려 문제를 해결할 때”라고 미국의 입법 기관인 의회에 호소한 점은 성경 예언의 성취를 주시하며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미국이 교황의 주장을 완전히 수용하고 본격적으로 “용처럼 말”할 때는 즉 미국이 교황권의 주장을 완전히 지지하게 되고 그것을 법제화하여 문자적으로 모든 국가들로 하여금 교황권의 주장에 따르도록 강요하여 교황권을 경배토록 할 때는 계시록 13장이 예언한 “짐승의 표”의 환란이 임하는 때가 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번에 UN에서 교황이 연설한 자리 또한 새로운 역사를 쓴 자리였다. 과거에도 교황들이 UN에서 연설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세계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였다. 천주교회의 사회 정의 사상 즉 교황권의 신세계질서 사상을 담은 교황의 연설은 미 의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기립 박수로 화답을 받았는데, 이 장면에서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계13:3)란 예언이 더욱 분명하게 성취됨을 볼 수 있었다.
교황은 UN에 모인 지도자들이 대표하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인사한다며 그의 목표 청중이 온 세상임을 밝혔는데, UN에 관하여는 “천주교회가 이 기관(UN)과 이 기관의 활동들에 기대하고 있으며 중요시한다는 사실을 재천명한다.”라며 UN 또한 미국과 함께 다시금 천주교회가 세상을 호령하게 되는 일에 매우 중요한 역할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놀랍게도 성경 예언은 이 점에 대하여 이미 약 1900년 전에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는 사실을 예언을 연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목하여야 한다.

계 17: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UN은교황권과 함께 일시 동안 권세를 가지게 될 것이며 그 권세를 교황권에게 한 뜻을 가지고 줄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교황은 이번 연설에서 “UN 헌장이 존중을 받고 투명하고 성실하게 적용되며 … 의무적인 공의의 판단 기준이 될 때 … 평화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전 문장에서는 지난 15년간 UN의 활동에서 “국제 평균을 적용하는 효율성과 그것을 집행시키는 능력의 부제의 비효율성”을 언급하였고 교황의 연설 후 오바마 대통령은 UN에 더 강력한 군사력을 부여할 수 있도록 연합해야 한다 하였다. 즉 앞으로 UN이 더 강력한 군사적 권세를 가지고 “의무적인 공의의 판단 기준”으로서 세상을 통제할 때가 올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님 재림의 때가 완전히 무르익어가고 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살전 5:3)는 말씀처럼 온 세상은 각종 문제 해결과 특별히 “평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특별히 온 세상은 성경이 예언한 바와 같이 교황권을 기이히 여기며 쫓고 그의 말에 경청하고 있다. 지금은 깨어 근신하며 자아가 온전히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거듭나는 복음의 경험 속에 살아야 하는 때이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며 그 어떤 일이 올지라도 주님께 충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이 준비되어야 하는 때이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우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진리탐구_“영적 이스라엘”의 마지막 증거 “요한계시록” 1

 

이제까지 교회를 영적 이스라엘로 해석할 만한 근거의 말씀을 찾아 보여드렸으나 이번에는 성경에 정확하고 명확하게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로 기록된 말씀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교회 = 영적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무리 = 하나님의 성전 = 주님의 영적 신부 = 거룩한 성(城) 영적 예루살렘 = 믿음으로 선택된 영적 이스라엘 백성

성경은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으로 대표하여 말씀할 때가 있었고 이와 반대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을 대표할 때도 있습니다. 마치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포도나무가 주님을 상징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두 단어인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땔래야 땔 수 없는 상징적 표현으로 서로 둘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택하여 내 이름을 거기 두고 또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대하 6:6)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마 23:37)

그러나 그 중요도를 생각한다면 예루살렘 속의 이스라엘보다는 이스라엘 속의 예루살렘이 더욱 중요한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궁극적으로 예배드리며 살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서는 하나님께서 정한 절기에만 성회에 올라갈 수 있었으나,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신 16:16)

주님이 오신 뒤로 그 옛 언약은 전부 개혁됩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9~10)

이제는 누구나 언제든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살 수 있는 “시민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예루살렘에서 진정으로 살 수 있는 자들이 바로 믿음으로 선택된 참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여러분들은 이제 교회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무리인 것에는 다른 의견이 없을 것으로 압니다.

 

기독교회사_프란치스코와 종교재판

 

종교재판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교황 이노센트 3세 재위기간(1198-1216)이었다. 성경을 믿는 이들이 그 이전에 이미 수 세기 동안 로마 카톨릭에 의해 박해를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노센트 3세는 선임들보다 훨씬 철저하게 종교재판을 조직화시켰으며, 이교도들은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사람들이 자국어로 된 성경을 읽는 것을 금지시켰다. 1215년에 이노센트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신성한 성경을 번역하는 자 또는 비밀 집회를 여는 자 또는 그들의 최상급자들의 인가를 받지 않은 채 설교하는 자는 체포되어 심문과 형벌에 처해질 것이다. 그들에 대한 소송 절차는 어떠한 항의에도 구애받지 않고 시작될 수 있다”(J.P. Callender, Illustrations of Popery, 1838, p.387). 이 교황은 “이전의 율법에 따라, 거룩한 산을 만지는 그 짐승은 죽을 때까지 돌로 침을 당하듯이, 미천하고 교육(로마 카톨릭 신학)받지 못한 자들은 성경을 만져서도 안 되고, 그 교리들을 감히 가르쳐서도 안 된다고 선언했다.”(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I,p. 723).

깊은 흑암의 이 시대에는 카타리파, 파테린파, 리용의 가난한자들, 파사긴파
(Passagines), 조세핀파(Josephines), 베렌게리안파, 피터 브루이즈파, 로잔의 헨리파, 아놀드파(Arnoldists), 발도파 등 무수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한 파문에 처해졌다.


“이단”을 믿는다는 명목으로 화형당하고 있는 왈덴시스교도들
“이노센트 교황 시대는 사상과 예배의 모든 자유에 테러를 가하는 시대였다.”
(Blackburn, Church History, p.307). “이노센트 3세는 사방에서 [왈덴시안]을 추적하게 하였다. 메츠(Metz)의 왈덴시안들에게 쓴 교황의 편지에, 거기서 그는 가장 야만스럽게 그들을 쫓고 박해할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피터 발도에 의해 서민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는 자유를 누렸기 때문이다.”(Allix, Remarks upon the Ancient Churches of Piedmond, p.287).

“성경은 아주 드물게 번역되었으나, 그 일부라도 서민 언어로 번역된 곳에서는 어디라도 사람들이 그 빛 가운데서 기쁨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모셀[프랑스]의 메츠에서 한 감동적인 사건이 발견된다. 몇몇 리용의 빈자들, 또는 왈덴시안들이 불어로 된 몇 권의 쪽 성경을 그곳에 가져다주었다. 남녀들은 열심히 그것을 읽었다. 그들은 성경을 읽는 모임을 만들었다 ... 로마 신부들이 그 모임들을 중지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 회원들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위해서 그분의 말씀들을 주셨다. 이 책들은 당신들이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우리는 이것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며 완강히 모임을 유지하였다. 마치 고정된 이름인 양 그들은 발도파라 불려졌다. ... 그 결과, 이 성경을 읽는 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시토수도회 신부들이 메츠로 보내졌다.(특히 당대 뛰어난 연설가 버나드는 가장 악랄한 박해자의 선봉이었다. 그의 찬송시는 개신교 찬송가에도 몇 편이 있을 정도이다) ... 왈덴시안들에게 무력이 행사되고, 추적당했다. 가능한 한 그들의 성경역본들은 불에 태워졌다. 그들의 의견은 근절되었다. 피터 발도에 의해 발송된 로망스어로 된 성경들에 특별한 비난이 쏟아졌으며, 반드시 불태워져야 했다.”(Blackburn, Church History, pp.314,15).

성경이 서민들의 공통언어로 번역되어 등장하는 곳마다, 또한 카톨릭의 전통의 방해를 받지 않고 성경이 선포되었던 곳마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이 어둠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그 빛을 끄려고 노력했다. 평민들이 잘 모르는 언어인 라틴어로 된 성경밖에 구할 수 없었을 때는 로마 당국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공통어로 성경을 번역했을 때 그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발도의 피터와 또 다른 왈덴시안 무리들에 속해있던 순회 선교사들의 막강한 영향력에 대항해서, 교황 이노센트 3세는 두 개의 수도사 조직을 설립했다. 이 수도사들은 전도를 위한 포교사의 외형을 하고 각지를 돌아다녔지만, 로마의 비성경적인 교리들만 전달하였다. 이 수도회 중 하나는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 수도회(Francis of Assisi)였다(Faber, History of the Ancient Vallenses, p.477 f1). 이 프란시스(프란치스코)의 이름과 정신을 현 교황이 차용하고 있다. 사실 프란시스를 제외한 그 수사들은 대부분 부랑무식했으며 성경을 전혀 읽을 수도 없는 문맹이었다.

“이교도”들에 대한 악명 높은 십자군이 교황 이노센트 3세의 통치하에서 소집되었다. (비단 모슬렘으로부터 “기독교” 영토를 되찾기 위한 의도만이 아니라, 이교도라 불리던 분리주의 성경 신봉자들에 맞서서 십자군이 소집되기도 했다). 1209년에, 십자가를 든 한 무서운 군대가 40일 동안의 복무 기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모든 이교도들을 파괴할 예정이었다. ...이 십자군들의 잔악성에 가히 필적할 만한 대상이 없어 보인다. 몇 개월 동안 약 2십만 명이 희생되었고, 이노센트 3세의 허가를 받았던 모든 명목의 전대미문의 만행들이 자행되었다. 두 개의 큰 도시, 베지에르스(Beziers)와 카르카소네(Carcassone)는 재로 변했고, 다른 수천 명은 불타는 집에서 쫓겨나 숲이나 산에서 유랑하며 날마다 빈곤에 시달렸다(Orchard, Concise History of the Baptist, p.211). 이 십자군은 오늘날 미국을 중심으로 되살아나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준비되고 있으며, 성경만을 완강하게 믿는 신자들은 극단주의 혹은 근본주의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있다.

 

Healing Story_고구마, 버릴게 없네!


올해도 어머니께서는 작은 텃밭에 고구마를 심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침 식사로 늘 찐 고구마와 사과, 떡을 드시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어머니의 수고와 사랑이 가득한 고구마를 드셔서인지 아버지께서는 연세에 비하여 건강하신 편입니다. 고구마는 감자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배고픈 시절에 좋은 양식이 되어 주었던 구황작물입니다. 지금은 식사대용이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 먹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고구마는 2013년 미국의 허밍턴 포스트에 포도, 브로콜리 등과 함께 10대 슈퍼 푸드로 선정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장수 식품으로 인정받기도 하였습니다.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고구마, 그 효능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혈압과 콜레스테롤 조절 
​고구마는 콩, 토마토와 함께 칼륨이 많은 대표적인 채소입니다. 나트륨을 많이 섭취하면 고혈압을 일으키는데, 고구마에 함유되어 있는 풍부한 칼륨은 체내 나트륨의 배설을 촉진하여 혈압을 낮추어 주고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추어 주므로 나트륨 과잉섭취국인 한국인에게는 꼭 섭취해야 할 좋은 식품입니다. 하지만 칼륨은 신장에 부담을 주므로 신장 질환이 있다면 고구마 섭취를 건강 상태에 맞추어 적절히 제한해야 합니다.


2. 천연항암제
고구마의 항암작용은 전 세계가 주목할 만큼 뛰어납니다. 고구마는 당근, 호박 등과 함께 폐암을 예방하는 3대 적황색 채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도쿄의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고구마는 당근, 단호박, 샐러리 등 항암효과가 있는 채소 82종 가운데 그 효능이 가장 뛰어나다고 합니다. 또한 미국 국립 암 연구소는 고구마, 당근, 호박 등을 매일 먹는 사람은 전혀 먹지 않는 사람에 비하여 폐암 발생률이 반으로 줄어든다고 발표했습니다.


*베타카로틴

-고구마에는 100g당 113mg의 베타카로틴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베타카로틴은 유해산소로 인한 암, 동맥경화증, 관절염, 백내장 등과 같은 성인병을 예방해 주는 효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혈중 베타카로틴 수치가 높을수록 폐암에 걸릴 위험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강글리오사이드(ganglioside)

-강글리오사이드라는 암세포를 정상 세포로 환원하는 일을 합니다.
-혈액순환 개선을 통해 면역력을 강화시켜 줍니다.
-체내 염증성 인자를 억제하여 관절염이나 대장염의 개선에도 도움을 줍니다.
-두뇌기능 활성으로 기억력 개선 효과 등이 있습니다.
-고구마와 함께 녹용, 녹각, 모유 등에 많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3. 변비 예방과 정장작용
고구마에 들어있는 식물성 섬유질은 대장운동을 활발하게 만들어 배변 활동을 원활하게 합니다. 변비와 숙변 해소에 효과적이어서 정장 작용에 좋습니다. 

*얄라핀(jalapin)

-생고구마를 자르면 그 단면에 하얀 액체 성분이 조금씩 배어 나오는데, 이것이 고구마에 난 상처를 보호하는 얄라핀(jalapin)이라는 물질입니다.
-더덕에도 들어있는 얄라핀은 대변을 부드럽게 해주므로 변비 해소에 도움을 줍니다.
-장 안을 청소하는 기능이 있어 대장암 예방에 도움이 됩니다.
-혈액 내의 콜레스테롤을 저하시키는 작용과 함께 혈당치를 조절해 줍니다.
-고구마나 무우와 같은 근채류뿐 아니라 채소나 일반 나뭇잎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물질로, 열을 가해도 쉽게 변질되지 않아서 고구마를 찌거나 구워 먹어도 그 효과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4. 풍부한 비타민 C
비타민 C는 흔히 오렌지, 사과 같은 과일이나 야채류에 들었다고 생각되지만, 고구마에도 100g당 25mg 정도의 비타민 C가 함유되어 있어서 고구마 한 개를 먹으면 하루에 필요한 비타민 C를 모두 섭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구마를 즐겨 먹으면 면역력이 높아지고, 감기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특히 고구마에 들어있는 비타민C는 삶은 후에도 70~80%가 남아있어 조리 후에 섭취해도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5. 껍질째 먹어야 하는 이유
-고구마를 먹고 방귀가 잦은 이유는 고구마의 풍부한 식이섬유가 위에서 소화되기 전에 장으로 내려가서 발효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때, 고구마를 껍질째 함께 먹으면 껍질에 있는 전분을 분해하는 효소가 소화를 돕고 가스 발생을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껍질에는 혈관을 튼튼히 하고, 암과 노화를 억제하고 면역력을 강화하는 플라보노이드 성분이 풍부합니다. 때문에 고구마의 영양성분을 완전히 섭취하려면 껍질째 먹고, 가능한 한 줄기와 잎까지 먹는 것이 좋습니다.
-고구마의 껍질에 다량의 식이섬유와 비타민이 들어있습니다.


6. 줄기와 잎도 잊지 마세요
-고구마 잎에는 베타카로틴 성분이 고구마 뿌리와 줄기보다 훨씬 많이 함유되어 있으며, 필수 아미노산과 무기질, 비타민 성분도 풍부하다고 합니다.
-고구마 줄기는 고구마 줄기 김치, 고구마 줄기 볶음, 국밥에 넣어 먹기도 하며 살짝 데쳐서 말려두어 겨울에 물에 불려 묵나물로 볶아먹어도 좋습니다. 
-고구마 줄기와 마찬가지로 고구마 잎도 여러 가지 조리법으로 요리해 먹을 수 있습니다. 간장에 절인 장아찌, 갈아서 만든 수제비와 칼국수, 말려서 가루를 만들어 국이나 밥에 넣어 먹어도 좋습니다. 그 외에도 효소, 무침, 전으로 먹어도 좋습니다.

“추석 연휴 때에 고구마를 캐는 아이는 나밖에 없을 거여요.”라며 투덜거리던 딸이 9상자 가득 담긴 고구마를 보면서 흐뭇한 얼굴로 말합니다. “엄마, 할아버지 1년 식사가 해결됐네요. 할머니 허리도 아프신데 추석 때마다 우리가 와서 캐드리면 좋겠어요.”
고구마는 4000여 종이 있을 만큼 어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입니다. 어떤 시련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주신 사명을 다 하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다_마음을 넓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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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요리_잡채 김말이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