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권두언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높은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늘의 높으신 부르심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성품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다라도 또 다다를 곳이 있는 원대하고 끝없는 목표이자 큰 소망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40).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있어서 ‘온전함’을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받은 마지막 세대들은, 믿음의 조상들이 그렇게 바랐던 소망과 꿈을 이루어주는 마지막 주자들입니다. 하늘은 마지막 시대에 온전함을 이룬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야 끝이 오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죄 없고 완전무결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그와 같은 성품을 선물로 주십니다. 온전함을 이루기에 부족함 없는 구원의 경륜은 이 목표를 성취시키기에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은혜에 복종하기만 하면 완전이라는 그 큰 소망과 꿈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안에서 온전하게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저지르기 쉬운 모든 죄와 교만과 이기심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모든 옳지 못한 말과 행동을 극복하여 승리를 얻지 못한다면, 결코 완전함과 온전한 성품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있을 선과 악의 대쟁투에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할 증인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완전이라는 주제를 연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이 목표를 온전히 성취하는 독자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강병국 목사

 

Love Letter_한 해를 마무리 짓는 기도

 

강 영은

 

죽음을 앞두고는 버리지 못할게 없다지요
끝이라고 생각하면 비우지 못할게 없다지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불꽃처럼
아무 소리 없이 스러지는 유성처럼
세월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이 한 해 마지막 달에

주여
시한부 죽음을 준비하듯
우리 모두 뜻깊게 죽게 하소서

무덤에 장사 되었다 하면서도
수없이 고개 들고 일어났던 순간들로
버렸다 하면서도
놓지 않으려고 거머쥐던 날들로
비웠다 하면서도
가슴 한 켠에 서성이는 욕심들로 여울진
이 한 해

주여
생산치 못해 울던 라헬의 통곡처럼
우리 모두 부끄러워 슬피 울게 하소서

함께 있을 날 얼마나 많다고
키재고 돋우고 으스댔는지
같이 나눌 시간 얼마나 길다고
삐치고 켕기고 버성겼는지
아무리 넓다 해도 가는 길 좁은데
얼마나 사랑하며 손잡았는지

주님 따른다며
정신없이 달려온 이 한해 마지막 달에

주여
우슬초 흔들어 떨며
우리 모두 회개하게 하소서

마지막이라 생각하면 못줄게 없다지요
다시 못 본다 하면 풀지 못할게 없다지요

달랑 한 장 가벼워진 달력을 보며
비워진 숫자처럼 마음 비웠는지
겨울 논바닥에 드러누운 볏짚 밟으며
빳빳한 그루터기 아직 마음에 남았는지

주여
이 한해 마지막 달
사라져 갈 한 해를
갈무리하게 하소서

주여
이 한 해
베푸신 사랑 너무 따습고
받은 은혜 너무 황송해
몸 둘 바 몰라 당신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이 한 해
아무리 당신을 닮았다 해도
당신 곁에 서면
아직 우린 돌연변이

아무리 변했다 해도
당신 사랑 앞에선
아직 우린 빛도 못 내는 희미한 촛불

마지막 달이 없으면 새해도 없다지요
마지막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다지요

그래도 우리에게
끝은 희망이고
기쁨이고
소망입니다.

당신의 용서 속에 한 해를 묻고
당신의 자비 속에 또 한 해를 시작할 수 있기에…


어떻게 하면 죽는 줄은 알아
어떻게든 죽고 싶어
주여
이 한해 마지막 달
장례 치르듯
주님 앞에 우리를 장사합니다

쓰다만 일기처럼 부끄러운
한 해를 용서하시고
밝은 날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제1부_완전하라는 명령

 

총 제목: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꿈과 소망: 완전으로의 부르심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출발을 합니다. 매주 교회에 가고, 설교와 가르침을 들으며 교인으로 교회 안에서 자리 잡아 갑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봉사 활동하고, 헌금 드리고,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고백하고 십자가의 용서를 믿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착하게 살면 된다고 여기면서 그 상태에 만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그리스도인의 목적지는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히 6:1,2)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그 목적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확실한 목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완전한 데”는 어디이며, 무엇일까요?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목표와 꿈인 완전에 대해 연구해 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기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편집실 –


제 1부: 완전하라는 명령

열심히 살기는 사는데, 그리고 열심히 믿기는 믿는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표류하고 있다. 마치 목표를 잃은 배 같이… 기독교 안에서 영적인 바른 좌표를 제시하는 복음이나 영적인 바른 경험을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보기가 거의 힘든 시대가 되었다. 대신 영적 나태와 영적 표준의 퇴보가 특징을 이루는 영적 무감각 시대가 기독교에 열렸다. 오늘날 기독교가 당면한 가장 큰 위기는 그 위기를 인식조차 못하는 영적 무감각한 상태에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영적인 무감각한 상태 중에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매우 중대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완전해야 한다는 가르침과 필요성, 그리고 그 진리의 심각성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목표, 곧 그리스도인이 다다라야 할 완전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목표의 상실은 기독교에 영적 나태함과 타락을 초래하고 있는 요인이 되고 있다. 더 이상 추구해야 할, 더 이상 이르러야 할 이상이나 목표가 없는데,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더 성장한단 말인가? 뚜렷한 목표의 제시 없이 어떻게 더 뜨거운 그리스도인으로 변할 수 있단 말인가?

1) 완전에 대한 명령

누군가 여러분을 “모자란 사람”이라고 부른다면 기분이 썩 좋지 않을 것이다. 모자란 것, 불완전한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불완전하다’는 것은 떳떳한 것이 아니고 부끄러운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완전함에 머물고 싶어 하는 것일까? 왜 완전이란 말을 들으면 괜히 부담스러워 하고, 마치 하나님 앞에 불경죄를 지은 것처럼 불편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완전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완전이 무엇인지 모를 뿐 아니라, 완전이란 우리 자신 스스로 힘으로 이루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잠 20:7)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에 대해 높은 이상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상은 인간의 가장 높은 생각이나 이상이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명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 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지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만일 그 일이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면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명령하고 지시하실 때는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 일이 가능하도록 모든 것을 제공하시며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일종의 약속이다. 이 일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도록 우리를 도우시며 힘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은 우리를 사단의 권세에서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이다.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며, 회개하고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모든 자에게서 죄를 분리시키시는 회복의 사업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는 각 영혼에게 성령을 주셔서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만반의 대비책을 세우셨다.


2) 인성을 쓰신 그리스도의 모본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름과 같이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이상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인성을 쓰신 예수님의 생애가 완전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 생애에서 완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고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셨다.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이유 중에는 우리가 이해해야 할 매우 중대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본이 되시기 위해 인성을 쓰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난 자들의 모본,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본이 되신다. 예수님께서는 사단의 기만적인 주장을 깨뜨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사단은 하나님의 율법은 순종할 수 없는 것이며, 공의가 자비와 조화되지 않으므로 계명을 파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지킬 수 없는 불공평한 법을 만들어 놓고 피조물들을 강요하시는 분이며, 그래서 사람은 그분의 법을 순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인 계명을 없애버리려는 사탄의 기만적인 주장을 침묵시키기 위하여, 의심받은 하나님의 공의가 증명되기 위하여 무엇인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죄인의 죄를 속하시는 대속만으로는 넉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은 지킬 수 있는 것이며,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모본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줄 누군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거룩한 생애를 사시고 완전한 품성을 보여주셨다. 계명이 요구하는 의, 곧 의로운 생애와 완전한 품성을 보이시므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것이다.

3) 가능한 약속

예수님은 인성에 동참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없는 생애를 사셨고 성품에 흠이 없으셨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으나 죄 없는 생애를 사셨다(롬 8:3). 이 예수님의 품성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다.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여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고 하셨다. 여기서 “두루 행하여”라는 말의 영어 본문을 보면, “I will dwell in them, and walk in them”이라고 되어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함께 살고 거하시며 함께 걸으시겠다는 뜻이다. 마음 속에 예수님이 계신 사람,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과 항상 동행하고 같이 걷는 사람의 생애는 어떤 생애일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는 명령과 약속이 실현되는 삶이 아닐까? 주님의 지속적인 임재는 온전하라는 명령과 약속을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과 생애는 모든 회개하고 믿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있는 곳에 찾아오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승리하신 것은 우리로 당신의 본성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으로는 하늘의 보좌를 붙드시고, 인성으로는 우리를 붙드신다. 그리고 당신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품성의 영광에 이르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며 결론지으신 마태복음 5장에는, 먼저 천국 시민의 원칙과 법칙(팔복)이 먼저 나온다. 그 다음 의롭다는 것, 의가 무엇인가를 설명해주시고 보여주셨는데, 그리스도인의 실제적 삶에서의 의무에 대해서 언급하셨다. 곧 원수와 핍박하는 자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과 마음을 지니라는 것이다. 이 일은 우리 인간 속에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능력과 사랑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내고 소개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살 때에 우리 속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성이 꼴 지워진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주님의 임재를 통해 전달되어 그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비쳐 나오기 시작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하늘의 평화가 깃들고 그 사람은 하늘의 분위기에 둘러싸여 산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명령하셨다. 그것은 모든 것을 완전하게 창조하시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완전한 형상을 보기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보증이며 약속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이루기 위해 계속해서 그분 안에서 완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만일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작은 일을 가지고 울고, 조금만 힘들어도 업어달라고 하고, 떼쓰고 무서워한다면 완전한 어른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좀 모자란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사단이 옆에서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을 비웃지 않겠는가?

누구든지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완전하심을 매일 본다면 자신의 불완전함을 혐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완전하시고 흠이 없으신 예수님을 닮고자 소원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명령하셨다. 우리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하신 형상을 회복시켜 주신다니 이 얼마나 큰 약속인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하신 예수님을 닮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큰 소망인가!

 

제2부_완전과 완전의 결과

 

완전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단어로 매도되어 버렸다. 기독교 안에 들어온 오류의 가르침들의 결과로, 그리고 “완전”이라는 단어와 어휘의 오용으로 인해 그 의미와 그것이 주는 놀라운 교훈이 간과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완전”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과 미비한 영적 상태로 구원에 대한 불안감과 압박을 느끼게 되고 낙심과 초조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완전”을 하나님의 관점과 평가에서 생각해야 함에도, 인간의 눈으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거나 분석하여, 나는 완전하다거나, 또는 완전하지 못하다거나, 혹은 저 사람은 완전하고, 이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다고 인간의 생각과 평가대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완전에 대한 왜곡된 개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완전이라는 의미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게 하였다. “완전”이라는 단어에 그리스도인들이 거부감을 가지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작용하고 있는데, 비단 완전에 대한 왜곡된 개념 때문뿐만 아니라, 율법주의에 대한 두려움이나 완전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으므로, 그리고 교회 안에 자리 잡은 오류의 영향과 사단의 공격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완전의 개념이 거부감을 일으키고, 곡해된 데에는 자유주의 신학과 기독교에 들어온 거짓 복음이 기여한 바가 크다. 순종을 강조하지 않고 성화를 경시하도록 가르치는 현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대로 순종하고 살아야 하는 성도의 당연한 행실을 율법주의로 몰아가게 만든다. 그래서 성경의 순수한 가르침과 진리대로 순종하며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율법주의자’ 또는 ‘완전주의자’라는 도장이 찍힐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움츠리게 되었다. 변질된 복음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완전에 대한 가르침을 전혀 듣지 못해 왔고, 죄를 승리하는 믿음에 대해 배운 적이 없으므로 어쩌면 완전이라는 개념에 대한 무지는 당연한지도 모른다.
완전의 올바른 개념과 영적 의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자.

1) 완전이란 무엇일까?

완전이란 말을 영어로는 “Perfection”, 그리스어로는 “텔레이오오” 라고 한다. “텔레이오오” 란 말은 “완성하다, 달성하다, 이루다, 마치다” 라는 뜻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완성한다는 것일까? 바로 율법의 요구인 의를 이룬다는 것이다. 의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텔레이오오”는 “텔레오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단어에는 “결과, 끝, 결국, 종결” 등의 뜻이 있다. 그러면 완전은 무엇의 결과일까? 무엇의 끝, 무엇의 결말로서 오는 것일까?

대부분 그리스도인은 “완전”을, “모든 것을 다 성취하고 올라간 다 이룬 지점”으로 생각한다. 즉, 죄를 지을 수 없는 경지나, 죄를 짓지 않는 지점에 이른 것을 완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은 이르러야 할 어떤 지점이 아니다. “완전”이란 마음의 상태나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완전은 죄를 지을 마음이 전혀 없어진,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된 마음의 상태이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있는 상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되어 있는 마음의 상태를 “완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완전의 상태에 이를 것을, 이런 마음을 가지라고 언급하고 있다. 온전함과 거룩함은 같은 의미로 쓰일 수가 있는 단어이다.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근엄하고 경건하며 잘 웃지 않거나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거룩함이란, 자신의 전체가 하나님께 바쳐진 상태, 온전히 마음이 하나님께 굴복된 상태를 가리킨다.

완전이란 죄의 유혹을 전혀 느끼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거룩하고 경건하게 되어 더 이상 이룰 경지가 없는 지점이 아니다. 죄의 유혹을 받고, 고의적이 아니라 연약하여 쓰러질 때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며, 주님의 임재 속에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죄짓기가 너무 싫어지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고 싶게 된 상태가 완전한 것이다. 그런 상태야말로 마음의 동기와 방향이 완전히 변화된, 새언약이 생각과 마음에 쓰인 상태이다. 그것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인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폐하셨으므로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고 그냥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율법의 완성을 이루라는 더 높은 부르심과 명령이다. 성경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사랑은 완전하게 하는 띠니라”(골 3:14)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사랑이야말로, 사랑의 성품이야말로 완전의 상태를 확연하게 나타내주는 증거가 된다는 의미이다.

2) 완전이란 그릇 안에 들어 있는 것

완전에 대한 더 깊은 영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여기에 “완성”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것은 앞서 살펴보았던 “텔레이오오”, 곧 무엇의 결과나 끝을 의미하는 그 단어와 일맥상통하는 의미의 단어이다. 이 구절에서 “완성”이란 말의 의미는, 율법의 절정, 율법의 온전한 현시라고 할 수 있다. 물을 병에 흘러넘치도록 가득 채운 다음에 뚜껑으로 봉하는데, 그 맨 마지막을 봉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완전”은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것인데, 그 율법을 이루는 결과는 하나님과 똑같은 사랑의 성품을 갖는다는 것이다. 완전이란 그릇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마 5:46) “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사랑에 대한 결론으로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말씀하신 것이다.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랑, 율법의 완성인 무아적인 사랑이 우리에게 있는가? 아니다! 그러한 사랑은 우리가 스스로 아무리 만들어 내려고 해도 불가능하다. 그 사랑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받을 수 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이런 사랑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갖는 것이다.이 사랑은 예수님의 모든 행동의 동기였다. 이 사랑이 바로 빛이요, 의요, 생명이었다. 이런 사랑을 가지고 있는 상태, 이런 사랑이 우러러 나오는 마음의 상태를 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랑은 우리에게 결코 없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를 완전하게 하는 그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선하신 분, 온전하신 분, 참사랑을 가지신 분은 하나님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완전케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아 그분의 사랑을 희미하게 반사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완전하다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3) 무엇이 완전하게 되는가?

완전하다는 것은 무엇이 완전하게 된다는 말인가? 완전에 대해 연구하면서 우리들은 완전에 대한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1. 우리의 본성이 완전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완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완전이라고 하면 절대 완전을 생각한다. 절대적인 완전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사람들은 절대 완전을 떠올리며, 인간은 결코 절대 완전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 그 말은 맞다. 왜냐하면, 절대 완전, 즉 한계도 없고 미래에 실패할 가능성도 없는 절대적인 완전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절대 완전이란 피조물들에게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며, 인간이나 천사들을 위한 것도 아니다. 천사들의 완전은 하늘에서 실패하였고, 사람들의 완전함은 에덴에서 실패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절대 완전이란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사람들은 또한 본성적인 완전을 많이 생각한다. 우리의 죄 된 본성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야 제거될 것이며, 그 후에야 속으로부터 나오는 죄의 충동들이 없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완전이라고 하면, 죄의 충동이나 유혹조차 느끼지 않는 본성의 완전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죄에 대한 연약성이나 충동이나 유혹조차 느끼지 않도록 다른 본성으로 변하는 본성적 완전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일어나는 것이다. 성경적 완전이란, 죄의 충동을 받거나 유혹을 받아도 마음이 하나님께 굴복되고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동하거나 죄를 선택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 죄의 충동이나 유혹까지 본성적으로 제거되는 “본성적인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본성의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성품의 완전을 말하고 있다.

2. 인간의 영역에서의 완전

피조물인 우리는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과 똑같은 성품의 완전함을 가질 수는 없다. 우리가 수만 번 죽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완전한 속성과 성품과 무한한 사랑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 다만 희미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을 흉내 내고 그 사랑을 반사할 뿐이다. 그러므로 완전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에서의 완전이 아니라 인간의 영역에서의 완전을 뜻한다.

3. 온전한 마음과 성품의 상태

완전해야 한다면, 도대체 우리의 무엇이 완전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몸이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모습이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지식이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사람 앞에 드러나는 우리의 행위가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완전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동기가 거듭난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우리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워서 완전하게 되신”(히 5:8, 9) 예수님의 마음(빌 2:5)을 갖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무엇이 아닌 우리 심령의 완전을 요구하신다. 이러한 마음에서만이 온전한 성품이 계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그의 책 “그리스도인의 완전”에서 “완전은 의도의 순수성이며, 마음의 할례이요, 또 다른 각도에서 볼 때에 완전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말했다.

4. 완전한 성품

완전과 죄 없는 상태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그 정의를 성품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완전에 대한 정의를 논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완전의 개념이다. 성경은 우리의 성품을 말하면서 완전하라고 하는 것이다.
요약해 보면, 완전한 상태란
첫째는 죄로부터 영혼이 정결케 된 순결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며,
둘째는 그 정결케 된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이고,
셋째로 성령의 감화에 온전히 굴복된 마음을 통해, 성령께서 주관하시므로 성령의 열매가 성품과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상태를 완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상태는 완전한 사랑(고전 13장)을 가진 상태이다. 사랑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죄악적인 모든 것을 추방하며,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채워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을 지배한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동기는 순결하고 거룩해야 한다. 거듭난 마음에서만이 순결한 사랑의 성품이 계발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에 그분은 우리 안에 그분의 순결한 사랑의 성품을 창조하실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제3부_계속 유지되어야 하는 완전

 

성품의 완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이루어야 할 의무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품을 닮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시는데, 하나님의 계명은 지킬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성품과 생애로 증명할 증인들의 탄생을 통해서만 이 죄의 역사가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에 대한 개념을 바로 알고 그런 영적인 경험과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완전함” (perfection)과 “완전주의” (perfectionism)를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완전의 개념과 완전주의의 개념은 서로 판이한 것이다. 다 올라가서, 다 성취해서 무엇을 이룬 도착지의 개념은 완전주의에서 오는 것이다. 무엇을 행하고 이루어서 어떤 지점에 다다른다는 개념, 자신의 행위로 의를 쌓아 완전한 지점에 이른다는 것은 “완전주의”로서,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이며, 옛날 유대인들이 지향하던 바리새파주의 완전주의이다. 완전이란 죄짓지 않는 지점에 이른 것이 아니다. 완전은 지점이 아니고, 경험과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1)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 상태

에베소서 4장에는 은혜를 주신 이유를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엡 4:12)기 위함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완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완전이란 지점이 아니고 영적 마음의 상태이지만, 그것에는 영적인 자라남과 성장이 포함되어 있다. 곧 하나님께 바쳐진 마음의 상태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매 성장의 단계는 그 단계로서 완전한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빛에 순종하고 굴복한 그 상태 그대로가 바로 완전한 것이며, 그 상태를 하나님께서 완전하다고 봐주시기 때문이다. 새로 싹이 났다고 해서 그것이 아직 식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듯이, 새싹은 새싹으로서 완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새 생명 즉, 사랑과 의가 그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마음속에 받아들여진 사랑과 의는 더욱 광명한 데까지,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완전의 상태는 매 순간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2) 완전의 단계

완전의 단계를 굳이 나누자면 영적 성장의 단계를 고려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어떤 단계는 아직 완전에 이르지 못한 단계라고 판단하거나 비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명심해야 할 것이다.

1. 굴복된 성품

완전은 굴복된 성품의 상태이다. 이것은 우리의 생애를 그리스도께 완전히 굴복할 때 개심의 순간에 일어난다. 모든 죄를 회개하고 다 버리며, 하나님께 마음을 온전하게 바친 상태로서의 그 경험은 완전한 것이다. 그런데 그 단계와 경험에서 완전은 완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저 그리스도와 함께 걷기를 시작한 것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빛이 주어진 만큼, 곧 깨닫고 알게 된 모든 영적 지식과 진리에 전적으로 굴복하는 것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나 굴복된 성품은 완전한 것인데, 완전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굴복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성품을 계명에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에 순종하는 생애를 사는 사람이 완전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2. 장성한 성품

완전의 단계에 있어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또 하나의 개념은 장성한 성품이다. 장성한 성품이란, 개인의 생애에서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여 추수할 만큼 무르익은 상태를 가리킨다. 하나님께 굴복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더 이상 죄짓지 않기로 계속 선택할 때에 우리의 성품은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이 되어 가는 것이다. 반역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 사단의 편을 선택하지 않고 성령의 음성에 복종하는 선택은 어느 때에나 일어날 수 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안에 살아 계신다면 그분께서 우리의 생애를 주장하실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죄짓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도 죄짓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죄가 동시에 우리 마음의 보좌에 같이 앉아 우리를 다스릴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누인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장성한 완전의 상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주장하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반역적인 선택들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하시기에 능하신 분이 아니신가! 그리스도께서 승리를 위한 능력을 제공하시기 때문에 굴복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죄짓지 않는 성품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올바른 개념과 생각으로 볼 때, 완전함이란 실제적인 것이고,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 계속적인 성장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지식과 사랑 안에서 계속해서 자라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단계는 다 이루었다고 할 단계가 없다. 매일 매 순간 자라난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더 자라고 성숙해야 할 상태가 있다. 더 충만하게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 더 풍성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소유하게 되는 상태에 점점 더 이르게 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일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완전하게 되는 것은 하늘에서도 계속 되어질 것이다. 더 성장하고 성품에 있어서 더 발달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우리의 성품이 더 성숙할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반사하는 영광의 빛도 증가할 것이다. 하늘에 가면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놀라운 사랑의 경지, 이 땅에서는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랑의 분야가 열릴 것이다. 영화롭게 변화되어 승천한 의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이해하고, 주님을 더 닮을 수 있는 능력이 증가될 것이다. 하늘에 가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무한한 사랑의 오묘함을 깨닫게 되면 될수록, 구원받은 성도들은 죄인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신 은혜를 영원히 더 찬송하게 될 것이다.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완전이란 대낮의 밝은 태양 빛 아래서 잘 보이지도 않는 촛불보다도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되자!

3) 꼭 완전해야 하는가?

성경은 완전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을 점과 흠이 없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의 성품과 생애가 점과 흠이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던져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5).

성경은 분명하게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권면한다. 점과 흠이 없다는 의미는, 과거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고, 또한 현 상태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굴복된 상태로 있는 것을 뜻한다. 곧 마음과 영혼이 죄로부터 정결케 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꼭 그렇게 완전해야 하는가?

1. 하나님의 인을 받기 위해

마지막 예언이 성취되는 시대에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놀라운 특권이 부여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선과 악의 대 쟁투에서 담당해야 할 몫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몫과 사명이란 다름이 아닌, 마지막 하나님의 증인인 십사만 사천이 되어 거룩한 제사장의 무리로서 하나님과 그분의 법의 공의로움을 세계와 우주에 증거해야 하는 사명이다.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인, 어린 양의 흠없는 성품을 이룬 자들에게 쳐지는 하나님의 인이다.

우리의 품성에 하나의 점이나 흠이 있는 동안에는 우리들 중에 아무도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품성에 있는 결함들을 고치고, 심령의 전에서 모든 불결을 정결케 하는 일이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 그것들이 고쳐지고 정결케 될 때,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이른비가 내렸던 것처럼 늦은 비가 우리에게 내릴 것이다. 우리는 오늘 영혼의 정결과 성품의 완전을 위해 열렬히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성품에 어떠한 결점이나 흠이 있는지 살펴보고 우리 삶에 스며있는 죄의 습성들을 말씀으로 씻어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을 정결케 하고 순결한 성품을 갖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사업이 되도록 노력하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능력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남녀의 분량에 이르기 위해 우리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분의 품성의 완전함을 닮고자 애쓰며 계속 영적인 성장 속에서 그분의 충만함을 추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종들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을 충만히 반사하는 사랑의 성품이 될 때 이마에 인을 맞을 것이다. 우리는 완전하신 분을 닮기 위해 얼마나 간구하고 있는지!… 이제는 온 마음으로, 아니 목숨을 걸고 그분을 찾고 그분의 완전하심에 매료되며, 그분의 완전하심을 본받아야 할 때가 되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또한 우리는 이것을 바라노니 너희의 완전함(perfection)이라” (고후 13: 9 KJV).
우리가 완전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랑의 힘을 증명하기 위함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이다. 요한 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첫째 천사의 메시지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복음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성품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의 전쟁이 끝나려는 이 때에 미성숙한 어린아이 같은 그분의 백성이 아니라, 그분을 완전히 반사하는 성숙한 백성을 소유하여 이 세상과 마귀와 온 우주에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능력과 그분의 의로우심을 증명하길 원하신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은 그분의 백성의 성품의 완전함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예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의 성품을 완전케 하는 일에서 온전히 세워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진리의 모든 빛을 다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므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지만, 거기서 구속 사업은 끝나지 않고 하늘 성소와 지성소에서 중보 하신다고 히브리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우리를 완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분은 완전하게 된 한 백성을 소유하시기 위해 마지막 속죄사업을 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소 봉사 사업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분으로서, 그리고 순결케 하시는 분으로 계신다. 그분의 형상이 그분의 자녀들에게서 완전히 반사되면, 그들은 완전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되고 승천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 각자에게는 큰 일이 맡겨져 있는데, 그것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야 하는 일이다.

 

제4부_완전에 대한 오해와 정답

 

우리는 완전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질 뿐 아니라, 기독교에 만연하고 있는 완전에 대한 부정적인 개념과 오해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완전에 대한 네 가지 오해가 존재하는데, 함께 짚어보며 우리의 신앙의 신조를 굳게 하자.

1) 완전에 대한 오해

오해 1. 완전은 인간이 이루어내는 진화가 아니다

완전에 대한 첫 번째 오해는 완전이란 내가 죄를 버리고 열심히 순종하고 노력해서 얻는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곧 자신이 성품을 잘 변화시켜서 내가 이루어낸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완전은 나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 속에서 이루시는 하나님 은혜의 역사이며, 우리가 성령의 음성에 굴복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나 자신이 이룬 것은 결코 하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에는 인간의 의의 한 올이라도 섞여 있지 않다.

또한 어두움을 조금씩 몰아내 가는 것이 완전이 아니다. 빛은 어둠과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완전은 빛을 하나씩 받아들이고 어둠을 하나씩 몰아내는 것이 아니다. 빛 아니면 어둠이 존재한다. 빛은 완전한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도 완전한 것이다. 불완전한 의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것을 점점 더 의롭게 더 밝게 되도록 만들어가는 것이 완전이 아니다. 빛을 받아들이면 어둠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완전한 빛 속에서 더 완전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은 내가 진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 사람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완전케 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완전한 성품은 완전한 사랑을 가졌다는 의미가 된다. 그 완전한 사랑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완전 역시 우리 자신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의 선물일 뿐이다. 완전한 성품은 모두 예수님의 은혜로 이루어 주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래서 그분께만 영광이 돌려져야 한다.

요한 계시록 19장 8절에는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고 기록되어 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영문에는 “의”(Righteousness)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 의(세마포)를 하나님께서 입게 하셨다고 되어 있다. 즉 우리의 의, 우리의 완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오해 2. 나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

두 번째 오해는 완전하게 된 사람은 결코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완전의 단계에 도달하면 본성적으로 완전해져서 다시는 타락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과 성품의 완전하고 순결한 상태는 우리의 의지를 사단에게 굴복하여 마음에 죄가 들어오면 다시 불완전하고 더럽게 오염되고 만다. 완전은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순결하게 유지되어야만 하며 그러기 위해 하나님과 늘 연결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완전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완전한 성품은 계속해서 계발되고 증진되어 나갈 것이다.

오해 3. 완전에는 하나님의 커트 라인이 있다.

세 번째 오해는 완전에 대한 하나님의 어떤 기준선(커트 라인)이 있어서 열심히 노력해서 그 기준선에 도달한 사람만 하늘에 들어가고 거기에 조금이라도 못 미친 사람은 다 멸망 당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것은 큰 오해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의 생명을 주고 산 영혼들이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커트라인을 놓고 점수대로 커트시키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일 그 어떤 기준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거듭남일 것이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하늘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마지막을 사는 우리들에게 요구된 분명한 표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가지셨던 그 완전한 성품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능력 있는 구속의 경륜을 통해 우리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어 놓으셨다. 우리가 그 구속의 역사에 협력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그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모본으로 보여주신 그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살 수 있는 넉넉한 은혜와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백성, 그분의 성품을 충만히 반사하는 백성을 이 마지막 시대에 가지실 것이다.

오해 4. 완전은 점진적인 미래의 일

네 번째 오해는 완전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씩 우리의 잘못들을 고쳐나가고 이 말씀을 저 말씀을 다 순종했을 때에 그것이 완전에 도달한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즉 완전은 미래에 속한 일이므로 지금 완전해질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 안에서 계속 자라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가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은 없을 것인데, 우리는 하늘에 가서도 계속 완전하신 분을 닮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며, 따라서 미래에 일어날 일도, 먼 미래에 속한 일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성령의 감화에 굴복하므로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할 수 있으며, 예수님의 의를 소유할 수 있다.

2) 완전의 정답-예수 그리스도

1. 완전을 명하신 완전하신 분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고 말한다. 인간은 죄 되고 불완전하다. 하나님만이 완전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는 한 순간도 완전할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완전을 이루어갈 수 없으며 의를 단 하나라도 만들어 낼 수 없다. 우리 속에 임재하시는 예수님만이 우리의 의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우리 속에 계시는 예수님과 그 의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게 보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신 흠없는 의, 완전한 사랑이 우리를 완전케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우리의 완전이 아니요 예수님의 완전이며, 예수님께서 그분의 완전하심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말이다. 내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완전하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가진 의가 예수님의 완전한 의라면, 만일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이 그분의 완전한 사랑이라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 가운데서 계속 성장해 가야 한다. 점점 더 원만한 광명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완전이란 어떤 의미에서 불완전한 나를 버리고 완전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하게 보시는 것은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완전하신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며,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으며 그분의 의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완전케 하시는 분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명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라는 약속과 함께 그렇게 되기 위한 모든 은혜와 능력을 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순결한 사랑과 완전한 성품을 주시고자 기다리고 계신다. 히브리서 12:1절에는 예수님을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이”로 소개한다. 그러면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그분을 “바라보자”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온전케 하시는 분을 바라볼 때만 완전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산 믿음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그리스도께로부터만 얻을 수 있다. 진지하고 열렬하게 구하는 모든 사람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깨닫기 위해 강한 열망을 가지고 매일 주님을 바라보고 찾는 사람들은, 마침내 바라봄으로써 예수님의 모습으로 변화되고, 영적 생애가 향상됨에 따라 더욱더 그분의 모습을 뚜렷하고 충만하게 반영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아에게서 눈을 돌려 예수님을 바라보고, 비할 데 없는 그분의 사랑에 대하여 명상하며 그분과 교통해야 한다.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함으로, 하나님의 성품의 완전함을 명상함으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주장함으로, 우리는 주님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3) 완전하신 분의 소원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셨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함을 이루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그분의 소원이었다. 그 방법은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므로 가능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의 표준에 도달하라고 초청하시고 우리 앞에 그리스도의 품성의 모본을 두신다. 인성을 쓰시고 끊임없이 죄악을 저항하는 생애를 사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신성과의 협력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라도 품성의 완전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 주셨다. 이 사실은 우리도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보증이다. 예수님은 죄와 싸우는 전쟁에 있어서 모든 영혼들이 충분히 이기고도 남을 수 있는 충만한 은혜와 힘을 마련해 두셨다. 그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몸소 죄 없는 생애를 사심으로 그분의 능력 안에서 당신의 백성들도 역시 죄 없는 생애를 살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히 13:21).

완전의 정답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완전하신 분이시며 그분만이 우리 안에 온전함을 이루어 주실 수 있다. 우리는 완전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 안에 거해야 한다. 그 길만이 완전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완전으로 나아오라고 초청하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에게서 완전한 그분의 모습, 그분의 사랑의 충만한 모습을 보기를 소원하고 계신다. 날마다 우리의 불완전함을 버리고 그분의 완전하심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그래서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반사하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자!


** 마치면서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품성을 온전히 나타내고 증거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소원을 이뤄드리기 위해 우리의 힘과 정성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죄를 짓기보다는 어떤 비난이나 조롱, 고난과 고독과 핍박을 달게 받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매일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증거하는 완전한 믿음과 사랑과 성품을 소유한 한 백성을 가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인들에 의해 이 세상의 죄악의 역사를 마치실 것입니다. 그 귀한 백성 속에 꼭 함께 포함되는 독자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슈_태음력 안식일과 일출설, 하나님의 권위를 혼탁하게 하는 사탄의 기만

 

사탄은 말일에 무엇을 공격할 것인가?

성경은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계시록으로 끝나는 기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불변의 권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특히 창세기와 계시록에서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당신 자신의 권위의 표징으로 한 날을 세우신 이야기와 그 권위의 표징으로 세상 역사의 종결을 고하시는 섭리를 보여주고 있다. 창세기 1,2장의 천지창조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창조주 되심의 표징을 어디에다 심어놓으셨는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2:1~3)

창세기 2장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안식일 제도는 천지창조와 함께 제정된 하나님의 권위의 표징으로써 하나님은 이 안식일을 통해 당신 자신이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셨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실 때, 당신 자신이 창조주 여호와인 것을 안식일을 통하여 그들에게 알려주는 부분(출20:8,11)에서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성경의 제일 첫 부분인 창세기는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의 표징을 천지창조 사건과 함께 분명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성경의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권위의 표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그리스도와 사탄 간의 영적 전쟁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12:17)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계13:16,17)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계16:13,14)

요한계시록에는 사탄이 말일에 자신의 세력(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 그리고 열왕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권위에 대적하고 자신의 권위의 표징을 온 세상에 강요하게 된다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요한 계시록은 “전쟁”이라는 단어를 표현하면서 일대 대영적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은 권위의 싸움 즉 하나님의 권위의 표징에 대한 사탄의 일대 공격이 있을 것이란 예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권위의 표징에 대한 사탄의 집요한 공격과 방해전술은 마지막 때가 될수록 더욱 정교하고 더욱 치밀하게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기독교회 내에서 일어나게 될 것인데 그 방향성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위의 표징인 안식일에 대한 일대 혼란과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특별히 사탄이 하나님의 권위의 날인 안식일을 일요일로 변경한 것에 더하여 마지막 때에는 어떻게 더욱 안식일을 왜곡, 절단, 분해시켜 왔는지 확인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하나님의 권위가 어떠한 방식으로 훼파 당하고 있는가?

1) 안식일 일출설
하나님은 천지창조와 함께 일주일 제도를 제정하셨고 “밤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하루의 주기를 정하심으로 한 날의 범위에 대해서 분명히 하셨다. 즉 성경상의 하루는 그날 일몰부터 다음날 일몰까지다. 그러므로 진실로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안내하는 지침대로 하나님의 계명인 안식일을 발견할 때 자연스럽게 금요일 저녁부터 다음날인 토요일 저녁까지를 안식일로 지키려고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최근 일부 안식일 준수 교회들(안** 증인회 등)이 안식일을 성경상의 하루 기간이 아닌 일출로 기준을 잡아 일출 안식일이 참 안식일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권위를 어지럽히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시대 구원자 안** 님의 가르침에 따라 토요일 안식일 예배를 드립니다. 왜 하나님의 교회에서 드리는 안식일 예배가 유일하게 성경적일까요? 성경을 해석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하루의 시작을 저녁부터 보는 일몰설과 하루의 시작을 아침부터 보는 일출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님께서도 일출설을 기준으로 안식일 예배를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일출설에 따라 아침부터 안식일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안**님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교회만이 유일하게 성경대로 토요일 안식일 예배를 드리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있는 토요일 안식일 예배를 지키는 하나님의 교회로 오세요”

하지만 성경을 근거로 했을 때 우리는 성경상의 참 안식일은 일몰을 기준으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성경은 그 첫 창조 시부터 (어둠이 존재하는 기간 + 빛이 존재하는 기간) 즉 그 날 일몰부터 그 다음 일몰까지를 하루의 주기로 규정하고 있다.
"저녁이 되며(있고) 아침이 되니(있으니) 이는 첫째날이니라".. (창1:3)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 - the first day"

이렇게 성경은 하루를 어두움이 존재하는 기간에서 빛이 존재하는 기간으로 옮겨가는 한 주기를 하루의 기간으로 보고 있는데 그래서 성경 다른 기록들에서도 안식일(절기안식일 포함) 혹은 어느 하루의 기간을 그날 저녁부터 시작되는 것으로(일몰설) 명백하게 기록해 놓고 있다.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레23:32)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기간을 말씀하시면서 분명히 그 저녁(일몰)부터 다음 저녁(일몰)까지 지키라고 명령하신다.

이렇게 성경으로도 잘못임이 드러나는 일출 안식일을 지키는 무리들은 이에 더해 십자가에서 폐지된 절기를 꺼내어 유월절이 참된 하나님의 인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계명을 두고 벌어지는 영적 전쟁을 다른 방향으로 비틀어 놓으려는 사탄의 전략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거기에다 안** 인간 재림주, 장** 어머니 하나님까지 내세우고 있으니 하나님의 계명대로 안식일을 준수하려는 무리들을 세상정부와 종교들이 어떻게 바라보게 되겠는가? 이런 단체들 때문에 안식일 준수자들을 극단적 기독교 분파 근본주의 테러리스트로 분류하게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2) 태음력 안식일

태음력 안식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제칠일 안식일을 부정하고 매월 초승달이 뜨는 월삭을 1일로 정하여 뒤따르는 8, 15, 22, 29일이 안식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태음력을 기초로 안식일을 지켰지만 이런 유대인의 관습이 로마의 권력에 의해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매달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안식일을 정함으로 칠일씩 돌아가는 일주일주기가 깨진다. 그들은 안** 증인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안식일 일출설을 주장하며, 거기에 더해 제 칠일 안식일의 날짜까지 바꾸고 있다.

태음력 달력으로 날짜가 명시되지 않은 안식일에 대한 성경말씀은 많지만 태음력 달력으로 날짜를 알 수 있는 안식일에 대한 성경 이야기는 오직 두 곳뿐이다.(출 16:23-29, 마 28:1) 이 성경절만으로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안식일이 태음력 안식일을 따랐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리고 태음력 안식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몇몇 다른 성경절들을 확인해보면 그 날들이 안식일이라는 것은 그들의 추론일 뿐이지 확실한 근거가 없다.

달에 의해 안식일이 정해져 매월 8일, 15일, 22일, 29일이 성경상 안식일로 변함없이 지켜졌다는 주장은 비성서적인 주장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며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제정하셨지 달을 통해 안식일을 정하시지 않았다.(창2:1~3 참조). 태초의 첫 안식일은 창조 주간 첫날로부터 일곱째 날이며 달은 넷째 날에 창조되었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그들이 매월 월삭인 초하루(1일)을 기준으로 하여 그 때로부터 일곱째 날을 안식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비성서적임은 매월 마지막 29일부터 그 다음 달 안식일까지는 7일 후에 오는 안식일이 아닌 8일, 9일만에 오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신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안식일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 역사 전체를 살펴봐도 그리고 초대교회부터 기독교 역사를 살펴봐도 하나님은 일주일 제도를 벗어난 그런 안식일을 주신 적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런 안식일을 지킨 적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적으로 안식일에 생명을 거는 민족이다. 그들의 역사가 곧 안식일이 매주 일곱째 날에 온 것임을 증거한다.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유대 민족이 단 한 사람도 없이 이 땅에서 멸절되거나 사라진 적이 없었고 그들이 생명을 걸고 매주 일곱째 날마다 지켰던 제칠일 안식일은 그 누구도 모르게 단 한 번도 바뀌거나 변경된 적이 없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태음력 안식일 준수자들은 로마에 의해 태음력 안식일이 변경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로마의 영향권 아래 있지 않았던 수많은 유대인들과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가 태음력 달력을 변경시킨 것과는 상관없이 그들이 지켜왔던 안식일을 계속해서 지켜왔다.

지금은 일어나 머리를 들어야 할 때

이 외에도 태음력 안식일과 일출설 안식일은 성경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문제점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제 칠일 안식일 대신 일요일인 거짓 안식일을 만들어 온 세상을 속여 온 사탄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 마지막 때에 제칠일 안식일 자체를 더욱 혼탁케 하고자 또 다른 거짓 안식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안식일 주장들은 짐승의 표 환란의 때에 주님의 편에 설 자들이 준비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사탄의 기만인데 이는 영원불변의 진리인 하나님의 계명을 온 마음과 성품을 다해 순종하려는 하나님의 백성을 혼란시키고 미혹하려는 사탄의 영적 공격이다.

요한계시록 13장에 첫 번째 짐승으로 예언된 교황권은 하나님의 권위인 안식일을 자신의 권위인 일요일로 바꾸었다. 수많은 기독교인은 이미 교황권이 변개한 거짓 안식일을 따르고 있으며 현재 교황권은 자신의 권위의 표인 일요일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게 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세계가정대회를 통해 일요일을 높이고 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에 발표한 행복 십계명과 2015년 6월에 전 세계 사람들을 향해 반포한 교서(찬미를 받으소서)에서 일요일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 예언된 짐승의 표 환란은 준비되고 있으며 사탄은 그 날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설 자들이 준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기만적인 가르침들로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고 있다. 이런 일을 볼수록 우리는 세상의 끝과 짐승의 표 환란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일어나 머리를 들어 더욱더 주님의 말씀 위에 서야 할 것이다.

 

진리탐구_“영적 이스라엘”의 마지막 증거 “요한계시록” 2

 

“교회”란 단어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고백하고 따르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며 또한 주님 안에서 서로 지어져 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로 지어진 “영적 성전”이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준비되는 혼인 잔치의 신부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 19장7~8)

신부가 어떻게 성전이 될까요? 그 해답은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 말씀을 절마다 확인하면 참 흥미로운데 “거룩한 성 = 새 예루살렘 = 신부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으로는 뭔가 부족합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그래서 일곱 천사 중의 하나가 우리가 궁금해하는 요한계시록 19장의 어린양의 신부의 모습을 자세히 알려 주는데, 어린양의 신부라고 보여 주는 대상이 바로 거룩한 성 예루살렘입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계 21:9~10)

이 신부의 모습을 계 21장에서 보여주는데 그 신부가 바로 하늘의 예루살렘성이라 기록되었는데 말씀을 모아서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교회 = 영적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무리 = 하나님의 성전 = 주님의 영적 신부 = 거룩한 성 영적 예루살렘

이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영적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한다면 합당하지 않다고 하실 분이 혹시 있으십니까? 위와 같은 기록된 말씀의 증거들이 여러분의 믿음에 무슨 문제가 생기고 있으십니까? 만일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과 사도들께서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거듭났다는 그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백성인가?”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어느 나라 백성이며 어디에서 살고자 합니까?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 3:14~15)

이제 이 모든 것들이 증거되었으니 여러분들께서는 그토록 궁금해하시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144,000인”의 인봉된 말씀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다음 호부터는 “이스라엘 144,000인”의 인봉된 말씀이 우리 시대에 어떤 교훈을 주시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기독교회사_몽골 그리스도교와 교리와 신조

 

몽골의 통치자들이 오랫동안 지배적인 호의를 가지고 동방에 있던 교회를 대우한 것은 몽골 그리스도교의 교리들이 아시리아 교회의 가르침과 같았음을 암시해 준다. 그것은 이 주목할 만한 사람들의 후기 역사들을 고찰해 보면 더욱 그러함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권력의 시작은 중요한 사실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으로부터 그들의 통치 초기 몇 년 동안에 그들이 접촉했던 그리스도교가 어떤 유형이었는지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우리는 유명 인사였던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을 생각하게 된다. 프레스터 존의 이름은 1,000년경에 아시아 타타르에서 일어난 혁명과 관련되어 있다. 신뢰할 만하고 신실한 다수의 작가는 케레이트 족(Keraits)의 한 왕이 그리스도에게로 개심했다고 말한다. 그 왕은 존(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그와 그의 백성 수천 명이 동방 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의 나라는 성장했고, 계승되는 각 통치자도 역시 존이라 불렸다.

약 2세기가 지난 후에 칭기즈칸이 그 마지막 왕을 정복했다. 그 승승장구하던 몽골의 추장은 죽임을 당한 성직자 왕의 딸과 결혼을 했기 때문에 동방 교회의 가르침은 몽골인들 사이에 큰 영향력을 주게 되었다. See Neander, General History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Church, vol. 4, pp. 46-50.

모셰임(Mosheim)은 그 기독교 왕국의 부(富)와 힘과 행복에 관한 보고를 듣고 깊은 감동하였다고 말한다. 포르투갈 왕은 프레스터 존의 외교정책이 아비시니아 사람들의 외교정책과 같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아비시니아에 사절단을 보냈다. Mosheim, Institutes of Ecclesiastical History, b. 3, cent. 12, pt. 1, ch. 1, par. 7, note 12.

그 공사관들은 아비시니아인들 가운데서 프레스터 존에 관하여 보고된 내용과 흡사한 많은 것을 발견했다.

러시아가 정복될 당시에 그 나라는 끊임없이 서로 싸우면서도 명목상으로는 주요 군주나 황제의 공통 종주권 아래 다스림을 받던 수많은 작은 독립 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Pott, A Sketch of Chinese History, p. 81.

칭기즈칸의 군대들에게 파괴된 도시들은 사람의 눈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몽골의 지휘관은 그의 패망한 원수들에게 수없이 말했던 것처럼, 자기는 “하나님의 재앙”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칭기즈칸은 그의 군대가 동쪽으로는 중국의 북부 제국을 정복하고 몽골의 다른 군대는 인도의 북서부 지역을 정복하고 있는 동안, 그 자신은 러시아의 한 부분을 황폐시키면서 동시에 볼가 강 상류 지역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 전투 중에 죽음이 그에게 이르렀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박해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들 가운데 케라이트(Kerait)라는 여인은 기독교인 태생이었으며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중세 아비시니아 또는 동방 나라에 그리스도교 국가를 건설했다는 전설상의 왕)의 가까운 친척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Huc, Christianity in China, Tartary, and Thibet, vol. 1, p. 129.

칭기즈칸은 중국으로부터 시작하여 헝가리와 폴란드까지 이르는 자기의 광활한 제국을 자기 세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셋 가운데 하나인 오고토이(Ogotai)는 자기의 부친을 계승하는 왕 중 왕으로 선택되었다.

오고타이는 1241년에 사망했다. 왕자들은 새로운 황제를 선택하기 위해 전쟁터로부터 소환되었다. 그들이 모이는 동안 왕후는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 쿠유크(Kuyuk)가 선택되도록 열심히 노력했고, 그녀의 노력은 그가 선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쿠유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그의 평생에 그의 영토 내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명성은 매우 높은 수준에 있었다. Mingana, “Early Spread of Christianity,” Bulletin of John Ryland's Library, vol. 9, p. 312.

밍가나는 그의 진영이 교회 지도자들, 성직자들, 그리고 학자들로 가득했으며, 카다크(Kaddak)라는 이름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그의 국무총리였다고 말한다. 쿠유크 치하에서 칭기즈칸과 오고타이의 통치 특징이었던 대량 학살과 황폐는 즉시 종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쿠유크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최고 통치자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몽골인들의 분노가 더 확산하지 않았고 유럽도 황폐됨을 모면했을 것이다.

 

Healing Story_사과가 빨갛게 익으면 의사는 파랗게 질린다

 

“사과가 빨갛게 익으면 의사는 파랗게 질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사과에는 건강에 유익한 성분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전에는 몸에 좋은 것은 흔하지 않고 산속 깊숙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먹거리는 우리들 가까이에 있는 것들입니다. 좋은 것을 보물찾기 하듯이 숨겨두는 부모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대표적인 과일인 사과가 왜 의사의 얼굴을 파랗게 질리게 하는지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주요 성분
수분 87%, 당 11%, 유기산 0.5% (대부분이 사과산), 펙틴, 칼륨, 비타민이 풍부합니다.

* 효능
1. 항산화 작용
사과에는 케르세틴, 비타민 C, 페놀산 등의 항산화 성분들이 함유되어 있어서 활성산소로 인한 세포와 조직의 손상을 방지해 줍니다. 따라서 다양한 질병에 걸릴 수 있는 위험을 줄여주며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주어 피부를 맑게 해줍니다.

2. 뇌 질환 예방
미국 코넬 대학의 실험결과에 따르면 사과를 하루 한 개 정도 꾸준히 섭취하면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슨병 등의 뇌 질환을 예방한다고 합니다.

3. 위장 기능 향상
사과에 있는 유기산 성분이 위장 활동을 촉진하여 음식물의 소화와 흡수를 도와줍니다.

4. 변비와 설사 개선
사과에는 수용성 식이섬유인 펙틴이 풍부해 장운동을 도와주는데, 이 펙틴 성분은 껍질에 많이 함유되어 있으므로 사과를 먹을 때는 가능하면 껍질째 먹는 것이 좋습니다.

5. 피로와 스트레스 완화
사과에 들어 있는 주석산, 구연산 등의 유기산은 몸 안에 쌓인 피로 물질을 제거하여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숙면을 도와줍니다.

6. 암 예방
각종 실험과 연구의 결과, 사과는 대장암, 유방암, 전립선암의 예방에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7. 칼륨 풍부
염분의 배출을 도와주는 칼륨이 풍부하여 고혈압에 좋으며, 칼슘의 배출은 억제하여 뼈를 튼튼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 사과의 껍질
대부분 아삭하고 부드러운 사과를 먹기 위하여 사과의 껍질은 깎아서 내버리고 하얀 속사과만 먹는 것이 일반입니다. 하지만 사과의 유익한 성분을 제대로 취하고 싶다면 반드시 껍질을 먹어야 한다고 권하는 바입니다. 도대체 사과껍질에는 어떤 성분들이 있으며, 우리 몸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1. 케르세틴 : 항산화 효과가 뛰어난 폴리페놀 성분인 케르세틴은 사과의 과육에는 없고 껍질에만 있답니다.

2. ​펙틴 : 사과의 껍질에 많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펙틴은 대장의 운동을 촉진해 대변이 대장을 통과하는 시간을 단축해 줌으로 변비 예방과 치료에 좋습니다. 또한 대장 벽을 청소하는 빗자루 역할을 하므로 숙변 제거와 암 예방에도 좋습니다.

3. 플라보노이드 : 사과의 껍질에 많이 함유되어 있는데, 혈관에 좋지 않은 찌꺼기가 쌓이지 않도록 함으로 혈액순환을 돕습니다. 따라서 동맥경화 예방과 치료에 좋습니다.

* 사과에 대한 오해
1. 아침에 먹는 사과는 금이고 밤에 먹는 사과는 독이다.
밤에 먹는 사과가 독이 된다는 표현은 조금 과장된 것입니다. 사과뿐 아니라 모든 과일에 있는 비타민은 간에서 활성화하는데 최소 4-5시간이 걸리므로 활동이 왕성한 오후에 비타민의 효과를 보려면 아침에 먹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아침에 먹는 사과는 위액분비를 촉진해서 소화흡수를 돕고 배변 기능에 도움을 주어 건강에 유익하지만, 밤에 먹는 사과는 위장 기능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위액 분비를 촉진하여 속 쓰림이나 소화불량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이런 분들의 경우, 사과뿐 아니라 다른 과일도 저녁에 먹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2. 사과는 충치를 유발한다.
​사과는 자연적인 치약으로 충치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치아 플라크와 얼룩을 문질러 씻어내는 작용을 합니다. 그리고 수분이 풍부한 사과는 침을 많이 나오게 해주므로 입속 세균을 줄이는 역할을 합니다.

3. 사과에 꿀이 들어 있다.
​사과를 자르면 꿀이 찬 것처럼 투명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사과를 당도가 높아서 ‘꿀사과’라고 표현합니다. 투명한 부분은 천연 과당의 일종인 소르비톨(sorbitol)입니다. 이 성분은 햇빛을 잘 받은 과일에 많으며 당도도 높고 맛이 좋습니다.

4. 사과 껍질의 끈적끈적한 물질은 농약이다.
​사과껍질의 끈적끈적한 물질은 과피를 보호하기 위해 분비되는 불포화지방산의 일종입니다. 농약이 아니므로 안심하셔도 됩니다.

5. ​사과를 다른 과일과 섞어 보관하면 왜 안 되나요?
사과는 과일의 숙성을 촉진하는 천연 호르몬의 일종인 에틸렌을 생성합니다. 따라서 사과를 다른 과일과 함께 보관하게 되면, 사과에서 발생한 에틸렌이 다른 과일을 빨리 무르게 합니다.

붉은 사과를 보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이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천연계 가운데 당신의 사랑을 표현해 두셨습니다. 그것을 찾아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취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의 영안이 열리어 온 세상에 포장해 두신 사랑의 선물을 볼 수 있다면, 온종일 들려주는 사랑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 사랑을 맛보아 알고 우리의 십자가를 감사와 기쁨으로 지고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다_잊혀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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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요리_땅콩 떡볶이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