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권두언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또 다른 은혜의 해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주어진 삶의 순간들을 감사하면서 이 한 해는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해를 맞는 여러분의 결심은 어떠하십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을 위해 충성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이 세상의 누구라도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충성과 사랑을 빼앗아 가지 못할 만큼 여러분의 애정과 믿음은 굳게 서 있습니까? 어떤 일에도 영적으로 쓰러지지 않고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굳건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재림이 성큼 더 다가왔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사건을 위해, 주님을 만나기 위한 품성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힘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랑스럽게 우주에 내어놓으실 수 있는 산 증인이 되고, 마지막 시대에 쓰임 받는 종이 되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해 준비하는 한 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잠시 후면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입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하나님께 바치는 우리의 서원과 결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 드린 서약과 헌신이, 또한 스스로 약속한 결심과 다짐이 허지로 돌아가지 않도록 열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이 해가 승리로 마쳐지기를 바라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의 한 해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강 병국 목사

 

Love Letter_함께 가 주소서

 

강 영은                                   

 

새해 새 아침
새 지평선에 첫 태양이 떠오르고

새해 새날
새 마음에 첫 소원이 떠오를 때

주님,
청합니다.
함께 가 주소서.


당신 없는 시작은 아무 의미 없고
당신 없는 끝은 어떤 다다름도 아니기에,
당신 없는 발걸음은 턱없이 흔들리고
당신 없는 마음은 허공의 겨처럼 날리기에
주님,
청합니다.
함께 가 주소서.


지나온 길 뒤돌아보면
굽이마다 세워진 이정표…
사랑의 손으로 이끄신
은혜의 지계표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만,

출입할 줄 모르는 아이처럼
새로 떼는 발걸음 너무 떨리고
새로 여는 페이지 너무 두려워
주님,
기도합니다.
함께 가 주소서.


당신이 지켜보셨던 하 많은 날들이 가고
당신이 지켜보실 수많은 날들이 또 펼쳐질 때,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고전 4:9)가 될
그 숨죽이는 삶의 전율이 시작될 때,

한순간도 당신 없이 이길 수 없고
한순간도 당신 없이 승리할 수 없기에,
당신 없는 결심은 오기로 끝나고
당신 없는 실천은 만용에 그치기에

주님,
기도합니다.
함께 가 주소서.


주님,
함께 가 주소서.

상처 깊이 낼 원수의 화살 마음 가르고
갑작스런 회리바람처럼 시험 몰아칠 때,

주님 품은 아늑하고 견고한 성채,
당신 곁은 바람 자는 안전한 항구.

무서운 폭풍 닥칠 때 당신 품에 숨고
맹렬한 파도일 때 당신 곁에 숨고 싶어
주님,
간절히 청합니다.
함께 가 주소서.

새해 새 길이 보이고
새해 새 여정 시작될 때,
매 순간
당신과 충실히 걷는
순례의 사람이 되도록,
그리고
길 끝에 다다라 뒤돌아보면
나의 길이었지만 그것이 당신의 길이었음을 알게 되도록

주님,
이 새해에 함께 가 주소서.

 

제1부_서원1.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새로운 해가 밝았습니다. 묵은해를 보내듯이 죄된 생애를 청산하고 새로운 결심 속에서 주님과 첫발을 떼는 이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첫발이 주님과의 동행으로 계속 이어져 하늘까지 다다르는 발걸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분의 서원은 무엇입니까?
새해에 작정하는 여러분의 결심은 무엇입니까?

이 새해에 하나님께 바치는 우리의 서원이 거룩한 것이 되고 그 서원으로 우리의 삶이 변하여, 거룩하고 순결한 삶이 계속 영위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하면서, 이번 호 신앙 기사의 주제인 하나님께 드리는 새 서원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실 –

 

새해 첫 서원은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것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마지막 백성들의 특징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것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사랑은 이론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 그것이 신앙이며, 그것은 실제적인 행동과 말과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사랑이 여기에 있다”고 외치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증인과 하늘의 대표자로서 세상에 보이게 될 것입니다.

1) 사랑 있는 척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때로 온유하지 못하고 오래 참지 못하면서도 사랑 있는 체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릅니다. 은근히 남보다 내가 더 인정받기를, 남의 사업보다 내 사업이 더 잘되기를 욕심내면서 사랑이 있는 체하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내가 더 많이 진리를 안다고, 내가 더 믿음이 좋다고, 내가 더 정통 교인이라고 생각하면서 겸손한 척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 없이 율법만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아무리 철저히 말씀을 순종하고 계명을 지켜도 사랑이 없으면 거기에 예수님도 안 계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 앞에 체면과 위신을 먼저 세우고 싶어 사랑이 있는 체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선교사업을 하고, 예언을 잘 풀이하고, 복음을 잘 전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소리나는 징과 같음을 알면서도 그래도 진리는 전해야 한다면서 사랑은 뒷전이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하고 싶지 않았던가 봅니다. 내가 먼저 손해보기 싫었는지 모릅니다. 내가 먼저 자존심을 버리고 무릎 꿇기 싫었던가 봅니다. 가장 공정한 방법으로,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는 방법으로 이기고 싶었는가 봅니다. 언젠가는 사랑해야 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먼저 사랑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날 갈보리를 보았습니다. 거기서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한 분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날 위해 버리신 한 분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했던 것임을……. 이웃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나 자신을 잘 보이고 싶었을 뿐임을….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닌 가짜 사랑이었음을….
십자가가 진정으로 마음에 들어왔을 때 드디어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오래 믿었어도 사랑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사랑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 11).

이제는 누군가 나를 사랑해주어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동안 사랑은 사랑으로만 일깨워진다고 생각하면서 누군가 나의 사랑을 일깨워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자책하며, 이제는 먼저 다른 사람의 사랑을 일깨워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내가 먼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성내지 않는 사람, 내가 먼저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함께 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 자신의 유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언제나 진리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3)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원칙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받지 않으면 우리 마음속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사랑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자아가 그리스도 안에 잠겨 사라져 버릴 때, 참된 사랑이 우러나오게 됩니다. 참된 사랑은 감정이나 충동이 아니라 성화된 의지의 결단입니다. 매일 나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거하게 하려고 이기적인 내 뜻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원칙이 내 마음속에 흐르게 해야 합니다. 사랑은 감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온 마음과 영혼과 품성의 변화에 있습니다. 그 품성은 자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산 품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심어진 성품입니다. 삶 속에서 실제로 역사하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갖는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친절한 말과 유쾌한 표정으로 이기심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며, 내 뜻대로 하고 싶을 때 주님의 뜻에 복종하며,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싶을 때 다른 사람을 생각하여 양보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은 하늘에 그 근원을 둔 귀한 속성으로서 나누어 주는 정도에 비례해서 그 향기도 더해갑니다.

인간의 사랑이 아무리 위대하고 크다고 해도, 사람의 심령 속에 열린 긍휼과 사랑의 모든 샘들은 하나님의 무한하고 다함이 없는 사랑과 비교해 볼 때, 끝없는 대양에 대한 작은 실개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혀로도 말할 수 없고, 붓으로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이 사랑을 명상하고, 그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 부지런히 성경을 탐구하며 우리의 모든 노력과 힘을 총동원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주셔서 세상을 위해 돌아가게 하신 그분의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결코 완전히 깨달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원 자체도 그것을 결코 완전히 드러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사랑의 희미한 한 줄기 광선만을 볼 뿐입니다.


* * * * *
주님, 새해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닮고 싶어 매일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렵니다. 제 안에 오셔서 사랑의 근원이 되어 주시기를, 제 안에 하늘의 생명의 빛 사랑을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새해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제2부_서원2.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새해에는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인간이 범죄한 후에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바로 남을 비판하고 자신을 변명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불리한 입장에 처했을 때나 책임을 회피하고 싶을 때, 혹은 남보다 더 나은 평판과 인정을 받고 싶을 때 비판하게 됩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할 때에 우리가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 사신 귀한 영혼을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비판할 때에 우리 하늘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에게는 남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와 분별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숨은 동기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동기와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만의 결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약점과 잘못에 대해 비판할 때에 우리 자신도 다른 부분에서 똑 같은 약점과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해볼 것이 아니라 말씀과 나를 비교해보고, 하나님의 성품에 나를 비추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1~3).

1)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아마 우리는 남의 비판에 잘 끼어들지도, 쉽게 판단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을 비판하고 명예를 실추시키고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린다면, 특히 자녀나 가족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퍼뜨린다면 어떠합니까?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정의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나 자신의 분노와 감정을 드러낼 때가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그러한 때에도 하나님께 대한 변함없는 신뢰를 나타낼 수 있을까요?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도 함께 맞장 떠서 비판하는 대신에 ‘하나님은 다 아시겠지’라고 믿으며 상대방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시 119:75).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나를 비판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그 사람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며 믿어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롬 14:1).

비판을 극복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말은 적게 하고 기도는 많이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잘못됐다고 정죄하고 비판하기 전에 나의 행동과 삶으로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묵묵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마디 비판의 댓글, 제 삼자를 의심하게 만드는 한 마디의 은근한 암시, 상대방으로 부정적인 추측을 하게 하는 제스처와 표정들이 한 영혼을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비판의 말을 하기 전, 비판의 행동을 하기 전에 나의 언행이 그 영혼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 것인지, 나의 이 언행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잘 알다시피 비판은 또 다른 강력한 비판을 일으킬 뿐입니다. 말은 적게 하면서 기도는 많이 하고 그 기도한 것을 실천합시다! 그러면 잘못한 사람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그 스스로가 잘못한 것을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2) 비판의 사촌– 불평과 흠잡기

비판의 사촌 정도 되는 것이 있는 데 바로 불평입니다. 비판을 잘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불평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비판을 극복하기 전 우리는 먼저 비판의 사촌인 불평을 잡아야 합니다. 불평을 극복하는 방법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주위를 바라보는 대신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자꾸 하늘로 향하게 해야 합니다. 불평은 비판의 분위기를 가져오지만 감사는 이해와 화평의 분위기를 가져옵니다.

흠 잡는 일도 비판의 한 부분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타인의 결점을 잘 찾는 사람에 대한 설명인데, 품성이나 생활에서 결점을 발견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 몹시 조급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행동을 마치 눈의 티와 들보와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십니다.

‘침소봉대’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의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회개와 굴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여는 감화를 끼치지 못합니다. 그들은 삶에서 복음의 따뜻하고 친절한 정신을 잘못 나타내며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귀한 영혼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흠을 잡는 사람은 그가 비난하는 사람보다 더욱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일한 죄를 범할 뿐 아니라 거기에 자만과 비평이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표준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품성만이 우리의 표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표준으로 삼는 사람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위치에 놓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요 5장 22절)셨으므로, 사람들의 동기를 비판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의 특권을 다시 찬탈하는 것이 됩니다. 신앙 경험에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도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냉랭하고 사랑이 없고, 예수님의 임재의 빛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부지런히 활동하고 그리스도와 무관한 열성을 아무리 나타낸다 해도, 이 부족을 메꿀 수는 없습니다. 타인의 결함을 찾아내는 데 남다른 지각과 예민함을 가진 사람들과 그런 정신에 빠져 있는 각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3) 가장 좋은 판단은?

사실 우리는 동료 인간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한 치 앞일도 모르는 인간이 동료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판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판단 받기 바라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판단해주는 것입니다. 사단이 누군가를 통해 비판으로 우리를 공격해 올 때, 그것을 나 자신을 살펴보는 기회로 삼고 온유함과 감사함으로 대응한다면 사단의 공격은 수포가 될 것입니다.

* * * *
주님, 새해에는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누가 나를 비판해도 그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비판하는 대신 기도해주고 불평하는 대신 감사하는 새해가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제3부_서원3. 용서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기를 즐겨하십니다. 우리가 죄 많고 속절없고 궁핍한 상태 그대로 주님 앞에 나가면, 연약한 상태 그대로 나가 죄를 슬퍼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면,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팔로 우리를 두르시고 기뻐 우리의 상처를 고쳐 주십니다. 새해에는 예수님을 본받아 용서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1)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피차간에 대하는 방법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랑과 자비, 동정심을 가지고 인간을 대하십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용서에 대한 얼마나 귀한 약속의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집을 떠나간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했을 때 어떻게 영접을 받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눅 15:20)고 표현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한 아름다운 용서와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도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완전히 말해 줄 수는 없습니다.

2) 용서한다는 것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용서하는 일에 결코 싫증을 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시면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어떤 형제가 우리에게 잘못하면 우리는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 형제가 와서 죄를 자복할 때에 그의 겸비가 너무 부족 하다거나 그가 진정으로 자복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조금이라도 조롱하고 비웃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억양이나 태도에서도 조롱하는 기색이 전혀 나타나지 않도록 하며 그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하나님께 더 큰 빚을 지고 용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3) 어떤 용서의 이야기

어느 날 어떤 아버지의 외아들이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들은 곧 아버지 회사의 부장으로 승진을 앞두고 있었고 아버지에게 있어서 아들은 그의 모든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조사 결과 아들의 사고는 누군가에 의한 고의적인 사고로 밝혀졌고 아버지의 슬픔은 복수의 마음으로 변해갔습니다. 하루하루를 증오에 사로잡혀 살다가 그는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 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약 1년이 지난 후에 그는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범인은 부모도 형제도 집도 없는 아직 스무 살도 채 안 된 청년이었습니다. 흉악한 얼굴을 가졌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범인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었고 자기를 용서해 달라며 울었습니다.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범인은 이 사건 외에도 여러 건의 전과가 있었고 모두 1억이 넘는 돈을 훔쳤습니다. 범인을 보면서 아버지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법정 심문과 조사를 위해 범인과 여러 번 만나면서 아버지는 이 청년에게 좋은 환경과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어느 날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범인이 형벌을 받는다고 해서 죽은 아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이런 일들이 무슨 소용인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이 그 범인을 위해서도 흘려지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소송을 포기하고 오히려 범인을 변호하기 위해 나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범인은 비교적 적은 형량을 받았습니다. 범인이 수감되어 있는 동안 아버지는 그가 저지른 죄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범인이 훔친 돈들을 갚아 주고 범인이 다치게 한 사람들을 찾아가 용서를 빌었습니다. 아버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수감되어 있는 범인을 찾아가 필요한 것들을 넣어주고 그의 말동무가 되어주었습니다. 어느 날 범인은 자기를 아들처럼 생각한다며 자주 찾아왔던 그 노인의 발길이 뜸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출소를 며칠 앞둔 어느 날 한 낯선 변호사가 찾아왔습니다. 변호사는 그 노인이 몇 주 전 질병으로 작고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가 놀램과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에 변호사는 더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노인은 범인을 양자로 삼았으며 그가 법적인 상속자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 같은 원수를 상속자로 삼다니!...” 이 엄청난 용서 앞에서 청년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그가 출소했을 때에 다시 예전의 습관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용서는 그를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4)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용서합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뿐입니다. 우리 자신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않으면 우리는 전혀 남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외치시는 한 분을 볼 때에만, 나를 용서하기 위해 지급 된, 이 세상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그 엄청난 용서의 대가를 보아야만 남을 용서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럴 때에 나 같은 사람이 용서받았다면 내가 용서해주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가 어려울 때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 바쳐진 놀라운 희생을 생각합시다! 그분은 아직도 우리를 용서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누군가 내가 피땀 흘리며 모아온 재산을 모두 가져갔을 때, 억울하게 나의 명예를 훼손시켜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상처를 입혔을 때에, 나 자신에게 한 것은 어느 정도 참아 줄 수 있었는데, 누군가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다치게 했을 때 그런 이들을 용서한다는 것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용서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먼저 용서를 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늘 자신의 정당함을 변호하며 잘못은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 우리들…. 내가 한 번 더 생각하고, 내가 한 번 더 참아주고, 내가 한 번 더 이해해 주었으면 되었을 것을 못난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겸손히 고개 숙이면 될 일을 내 위신과 명예를 챙기기 위해 며칠 혹은 몇 달을 불편한 관계로 지내는 일이 많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말로는 이미 용서했다고, 화해의 손을 내밀면서 속으로는 이미 저 사람은 내 편이 아니야 라고 단정 지어 놓은 적이 많습니다. 먼저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하면서, 내가 먼저 그 속사정을 경청해주지 못하면서 늘 잘못은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내가 먼저 용서를 빌지 못하면서 그가 먼저 와서 용서를 빌면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 * * *
주님, 새해에는 용서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니 용서하는 사람이기 전에 먼저 용서를 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용서받은 사람 그래서 진정으로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제4부_서원4.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새해에는 마음과 감정을 다스리며 사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신앙의 밑바탕이 되는 중요한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과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성경은 그 일을 용사가 성을 빼앗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감정을 다스리는 일은 죄를 승리하는 일과 직결되어 있고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는 일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마음을 바치는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하늘의 모든 보화를 쏟아 부어주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도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 곧 혼과 영과 몸을 다 바쳐서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에는 동기, 애정, 감정, 욕구, 의지 등의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애정을 통제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일, 감정과 충동을 조절하고 욕망과 욕구를 절제하며, 의지를 바르게 사용하는 일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감정을 자제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격한 감정과 분노를 표출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 아니라, 오히려 현시대에는 자기감정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는 일을 솔직하고 용기 있는 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격정이나 분노를 제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잠 25:28). 마음을 제어하지 않고 감정을 고삐 풀린 것처럼 방황하도록 놓아둔다면, 마치 성벽이 무너진 성읍과 같이 사단의 유혹과 세상의 죄악에 그대로 노출되고 방임되어 사단이 조종하는 대로 끌려가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정과 욕망을 자제하고 생각과 마음이 방황하지 않게 되기 위하여 마음을 늘 하나님께 바치고 성령님의 음성을 따라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2) 화를 내는 것

예수님께서는 미워하는 것과 분노를 살인으로 취급하십니다.
화를 내는 것과 미워하는 것, 그리고 격정적인 말들은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냄새’ 같아서 그것을 발하는 사람 자신뿐만 아니라 온 주위를 오염시킵니다. 분노의 정신에 사로잡힐 때 사단은 한동안 그 사람을 완전히 장악합니다. 사단은 영혼을 활활 타오르는 분노 가운데로 몰아넣을 수 있을 때 매우 기뻐합니다. 사단은 한 번의 눈 흘김, 한 번의 몸짓, 하나의 억양까지도 포착해서 그것을 받아들인 심령에 상처를 주고 독을 퍼뜨리기 위해 그런 것들을 자신의 화살로 사용합니다. 사람이 분노의 정신의 지배를 받게 되면 그것은 마치 입술에 술잔을 대는 것처럼 취하게 만들고, 그렇게 되면 이성이 쫓겨나가게 되고 심령은 통제할 수 없는 격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됩니다. 증오와 복수의 정신은 원래 사단에게서 나온 것이어서 그 정신을 품는 사람은 불행해지고 더 심한 악을 초래할 뿐입니다.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보다는 무고를 견디는 쪽이 훨씬 낫습니다.

급한 성벽과 분노의 기질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 편에 놓고 주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성급한 기질과 쉽게 분노하는 습관을 극복하는 데는 강한 의지력이 필요합니다. 마치 영적으로 사지를 잘라내는 듯한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좋지 않은 성벽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고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지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자신의 분노나 혀를 제어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분노에는 침묵으로 대응하는 것이 좋습니다. 침묵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성난 사람에게 대꾸하는 말은, 대개는 분노를 더 타오르게 하는 불쏘시개처럼 작용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혀를 재갈 물리고 사납고 참지 못하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해야 합니다. 분노를 식히는 온유한 말,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 얻는 온유와 진정한 겸비는 주위에 축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비결이 됩니다.

3) 부정적인 감정에 싸이는 것

그리스도인이 마음을 지키는 데 있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생각과 어두운 감정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생각과 감정은 사람의 성품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 원하는 사람은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제어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죄악 세상에 살고 있어서 때로 슬픔과 낙담과 좌절을 맛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자신의 잘못과 실패와 실망에 대해 거듭 생각함으로 마음이 근심과 낙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과거의 삶 속에 있었던 모든 불유쾌한 추억들과 실망만을 모아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한탄하게 되면 우리의 심령은 점점 더 낙담에 빠지게 됩니다. 낙담된 심령은 흑암으로 가득 차게 되고 하나님의 빛이 그 심령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버려서 자신만 어두운 감정에 싸이는 것이 아니라 주위와 다른 사람의 길에도 암영을 던져 줍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신과 낙망 가운데 빠지게 할 수 있을 때에 아주 좋아합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그분의 소원과 능력을 의심할 때에 기뻐합니다.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는 인간을 해롭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 또 하나님을 긍휼과 동정이 없는 분으로 생각하게 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는 신앙 생애가 우울한 것이 되게 하고, 그것이 고생스럽고 어려운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이 괴롭다고 불평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불신으로 사단의 기만에 찬동하는 것이 됩니다. 우울함과 슬픈 것만을 생각하고 원망과 불평만 하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생애를 잘못 표시하는 것이 됩니다.

4) 마음 밝게 가꾸기

우리는 사단이 의심과 불신을 갖고 유혹해 올 때에 마음 문을 닫아야 합니다. 그 대신 우리의 눈을 영원한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들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삶의 밝은 면을 바라본다면, 우리를 명랑하고 행복하게 만들 것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에 생각할 명랑한 제목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복된 증거와 약속들을 모아 가지고 그것들을 늘 바라보며 감사합시다! 슬픔과 난관들을 골똘히 생각하기보다는 명랑함을 계발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들을 세어보며, 기억의 전당에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은혜의 선물과 축복의 추억들을 모아서 기뻐합시다!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품고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약속들 안에서 쉬도록 합시다!


주님, 감정을 제어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모든 유혹과 시험을 물리치는 지름길이 됨을 압니다. 새해에는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이 결심이 가능하도록 힘주시옵소서!

 

제5부_서원5. 승리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매일 죄를 이기는 삶을 사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에는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시대를 위해 주어진 예언서 요한 계시록에는 이기는 자에게 주는 놀라운 약속들이 적혀 있는데,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며(계 3:5),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시고(계 3:21), 하나님의 새 예루살렘 성전의 기둥이 될 것과 그 이름을 그 위에 새겨주시겠다는 약속(계 3:12)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기는 자들에 대해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싸워야 할 싸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과 치러야 할 싸움입니다. 우리는 사단과 그가 주는 죄의 유혹과 세상과 자아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이기고 극복한 사람만이 하늘 보좌에 앉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의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올바로 이해해야 할 것은 의지의 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의지를 어느 편에 두고 어떤 목소리에 순종하느냐에 따라 영적 전쟁에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들은 죄를 승리하기를 원하지만 도덕적 힘과 의지가 약해 자주 쓰러지고 죄악적 습관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의지의 참 힘은 인간에게 주어진 결정력이며 선택하는 힘으로서, 이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여부에 따라 승패가 결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고치고 죄악적인 습관이나 세속적인 악한 경향들을 벗어날 힘이 없지만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오직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편에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를 하나님께 바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의지를 그리스도께 바침으로 우리는 정사와 권세를 초월한 능력과 연결됩니다. 믿음으로 굳게 설 힘을 위로부터 얻어 새 생애 곧 믿음의 생애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매일 의지를 되돌려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파괴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의지의 활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움을 받지 않는 인간의 의지는 악을 대항해 이길 수 있는 참된 힘을 가지지 못합니다. 사람은 죄에 대한 방어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죄를 승리할 힘을 받아야 합니다. 유전적인 연약성과 후천적으로 배양된 기질로 인해 우리의 의지는 더럽혀졌고 연약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순결하고 깨끗하게 된 상태로 다시 돌려받기 위해 매일 그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또 하나님께서 하늘의 능력을 주시도록 우리의 의지를 그분과 연결시켜 놓아야 합니다.

사단이 사람의 의지를 꼴 짓도록 내버려두면 그는 그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그것을 사용합니다. 죄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의지를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을 눈을 빼 버리거나 손을 베어 버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 평생을 병신이나 절뚝발이로 보내기로 동의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자주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병신이 되고, 상처를 입고, 절뚝발이가 되더라도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욱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의지를 바치는 데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고상한 것을 위하여 저속한 것을, 신령한 것을 위하여 세속적인 것을, 영원한 것을 위하여 사라져 없어질 것을 버리는 아름다운 희생입니다.


3)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선과 악의 쟁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음으로써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가 협력할 때에 그것은 전능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하시는 것은 어떤 것이든 그분의 능력으로 다 성취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힘입을 때 가능하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의지가 무한하신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할 때에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악의 세력을 깨뜨릴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보혈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우리의 타락한 성정의 경향을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놀라운 능력의 근원과 연결될 때에 우리가 갖게 될 능력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과 육신, 그리고 마귀를 대항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까지 알지 못하던 힘의 근원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도움을 구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 근원에서부터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력에 대하여 말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그의 능력에 대하여만 말하도록 합시다! 승리를 위한 하늘의 모든 보화가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4) 예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죄를 승리할 힘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정복하고 애정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메마르고 생명이 없는 것같이 보이는 가지가 산 나무에 접붙임을 받으면 다시 사는 것처럼, 우리도 참 포도나무의 산 가지가 되어야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연합이 이루어진 후에도 승리하는 삶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계속적이고 열렬한 노력을 기울여 이 연합이 보존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산 포도나무의 줄기에서 옵니다. 죄를 승리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매일 매시간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연합하고 그분과 교통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주님께 붙어 그분의 능력으로 사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 즐겨 순종하는 자는 모든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분을 통해 이기고 또 이기는 생애를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 * *
주님,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 죄를 이기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한 능력을 구할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즉시 이길 힘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의지를 바치오니 주님께서 주관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과 하늘로부터 오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죄의 파워와 소욕을 단 순간에 이길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새해에는 승리하는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제6부_서원6. 헌신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참된 신앙에는 반드시 헌신이 따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주님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 것입니다. 지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그에 따른 개혁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1) 주님께 바치는 것

하나님께서는 온 마음과 애정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현재 바치는 것보다 훨씬 이상의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첫째와 가장 높은 관심을 주님께 두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더 적게 바칠 수 있을까가 아니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바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소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모든 것, 생명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사랑을 받을 아무 가치도 없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온 마음을 주님께 바치기를 아낄 수 있겠습니까? 삶의 모든 순간마다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온 자들로서, 우리 죄 때문에 찔림을 받으신 주님을 보면서도, 우리의 온 마음을 다 바치지 않고 남겨 놓는 무관심을 나타내면 주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실까요?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너무 큰 희생이라고 생각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주셨는가?”
갈보리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이 희생을 치르셨는가? 범죄의 고통과 절망의 공포에서 나를 구원하여 천국으로 들이시기 위해, 나를 죄의 치욕 속에서 구원하여 말할 수 없이 행복하게 해주시기 위해 이런 굴욕과 수치와 비난을 견디시고 잔인한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셨는가?”
죄 때문에 찔림을 받으신 분을 바라볼 때 우리는 마음속에 단호한 결심을 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주님을 슬프시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나의 존재 자체를 나를 그처럼 사랑하여 생명을 바치신 분에게 드릴 것이다”라고….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친다 해도, 우리처럼 죄가 많고 실수가 많은 자를 위해 거룩한 몸을 모두 주신 분에게 바치기에 너무 작고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2)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바칠까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데, 엄밀하게 생각해보면 그 버리는 것과 바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로 더러워진 마음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주님께 헌신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더러운 마음을 먼저 드립니다. 죄로 더러워진 심령을 드려 예수님의 피로 깨끗이 씻겨져 순결하게 되고, 무한한 사랑으로 죽음에서 구원받게 되기 위해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더러운 마음을 받아 주시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께 온 마음과 완전한 애정을 드릴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온전한 것처럼, 그분은 우리에게 온전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나누어진 마음이 아닌 온전한 마음 모두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어서 유익될 것은 아무것도 버리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분은 항상 자녀들의 행복을 염두에 두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3) 자원하는 사람

우리는 하나님께 헌신할 때 우리의 모든 것을 온전히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육체적, 지적, 도덕적 힘을 합한 전인적 봉사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값으로 사신 바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소유권은 모두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위탁해 주신 모든 달란트를 다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헌신에는 거룩한 표, “여호와께 성결”이란 표가 모든 행동에 새겨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는 여호와의 목소리가 들릴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사 6:8). 구원의 비밀을 알게 하신 은혜가 감사하고, 진리의 복음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를 느끼는 사람들은 다른 영혼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고 오류와 죄 가운데 방황하는 영혼들을 무관심하게 내버려둘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핍박과 어려움이 오더라도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열심을 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헌신한 모든 사람은 그분께서 무한한 희생을 치르시며 이루어 놓으신 영혼 구원사업에 큰 열성을 가질 것입니다. 절대로 “나는 내 것이므로 내 시간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그리스도의 모본을 좇아 자진해서 일하는 주님의 동역자, 날마다 구주께서 일하신 것처럼 성령을 받아 실패와 낙망함 없이 일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헌신한 사람입니다.

자아를 버리고 마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순복하며 하나님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한 생애를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무한한 축복의 자원들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구원의 물을 풍성한 냇물처럼 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한 종들이 준비된다면, 지금 한 명이 있는 곳에 백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 새해에는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고 헌신하게 하소서.
제 마음이 늘 신앙의 열기로 불타오르고, 가는 곳마다 하늘의 거룩한 광선으로 세상과 만민을 덮은 어둠을 환히 비추는 산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 마치면서

새로운 한 해를 새로운 서원과 헌신으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신 사랑과 선물에 비하면 하나님께 어떤 서원을 드려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갚을 길 없기에 우리의 서원은 드려도 드려도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드린 서원이 하나님 앞에서 지켜지고, 그래서 한 해를 다 살고 뒤돌아보면 부끄럽지 않은 한 해였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떼는 이 한 해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발이 본향에 닿는 그 날까지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기를 기도하면서, 독자님들의 서원이 꼭 지켜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시대이슈_프랑스 파리 테러, 신세계질서와 짐승의 표 환란으로 가는 길

 

지난 11월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너무나도 참혹하고 끔찍한 테러가 발생했다. 이 날 파리 시민들에게 있어서 세 시간가량의 시간은 끊임없이 들려오는 헬기와 사이렌 소리, 사람들의 비명과 번쩍이는 불빛으로 가득 찬 공포의 시간이었다. 바타클랑 공연장, 스타드드 프랑스 경기장, 그리고 이 외에도 여러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IS 극단주의 무장 이슬람 단체에 의해 테러가 감행되었는데, 테러가 일어난 장소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이번 테러의 피해자는 ‘일반시민들’이었다. 금요일 저녁, 친구들과 모여 식사를 하던 사람들, 평소 좋아하던 밴드의 공연을 보며 즐거워하던 사람들, 축구 경기를 구경하며 환호성 치던 사람들, 이런 일반 시민들 중 약 200여 명이 중상을 입고, 130여 명이 사망한 엄청난 희생의 날이었다.

사실 이번 프랑스 파리 테러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세계질서에 귀추를 주목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번 테러 사건은 종교적 극단주의가 유럽의 톨레랑스(관용주의)를 공격한 사건으로써, 종교적 극단이 관용주의를 위협하며 인류의 평화와 연합과 화합을 깨뜨리는 위험한 존재들이라는 인식을 온 세상에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모든 일은 신세계질서를 세우기 위해 온 세상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도록 만들기 위해 계획된 일이다. IS가 생성되는데 미국의 공이 지대하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저널리스트들이 보도한 바 있고, 절묘한 타이밍에 발생하는 미국의 총기 혹은 폭탄 테러 사건들 또한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들이 아니란 사실은 미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은 “오르도 압 카오(Ordo Ab Chao)” 즉 “혼돈에서 질서를 세운다.”는 프리메이슨 사상의 실현으로서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한다.”는 예수회가 역사 속에서 교황청 중심의 신세계질서를 세우기 위해 진행해온 헤겔 철학 게임의 일환이다. 그들은 이러한 사건이 있기 전에 이미 반테러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외치며 이런 테러들이 벌어질 것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대비하는 훈련을 하며 우리에게 앞으로 이런 일들이 발생할 것을 암시해왔었다. 파리에서 발생한 경악스러운 도심 연쇄 테러 사건도 전 세계적으로 극단분자들을 소탕하는 법을 세우기 위한 계획된 시나리오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이러한 일련의 테러활동들이 어떻게 교황청 중심의 신세계질서 하에서 성경이 예언한 짐승의 표 환란으로 이어질지 생각해 보자. 먼저 지난 9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세계는 폭력적 분쟁과 증오와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과 종교의 이름을 거론하는 잔혹함과 악랄함이 가득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 그 어느 종교도 이런 형태의 개인적 망상 또는 이념적 극단으로부터 면역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즉 우리는 특별히 모든 형태의 근본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종교적이든 아니든 어느 형태든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미 전에 “근본주의자가 가진 정신적 구조는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의 발언에서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지만”에 우리는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지목한 테러리스트는 IS와 같이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 테러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타깃이 어떤 사람들일까?

세상의 사전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근본주의자”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특별히 “성경의 무오성을 믿고”, “성경 기록들을 문자 그대로 믿고”,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신 것을 믿고”, “예수님께서 육체를 가지시고 부활하셨고 실제로 재림하실 것을 믿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속죄하셨음을 믿는다.”면 즉 기록된 말씀대로 믿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안식일 준수자 포함)은 특별히 “폭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기준, 특별히 교황청의 기준에서 볼 때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연합을 방해하는 테러리스트 근본주의자가 된다.

사탄이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신세계질서를 세우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겉으로는 사회정의를 세우고 평화를 유지하고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를 소탕할 목적으로 신세계질서를 수립 운영하려는 것 같지만 사실 사탄의 목표는 단 한 가지다. 요한계시록에 아래와 같이 예언되어 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즉 예수의 믿음(거듭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하나님의 참된 마지막 백성(여자의 남은 자손)을 박멸하기 위한 것이 사탄의 유일한 목표이다. 겉으로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보면 마치 전쟁이 이슬람과 서방세계 간의 싸움처럼 보이지만 이는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불과하다.

과거 중세시대에도 로마 교황권은 이슬람 타도라는 명목하에 십자군 원정을 감행했었다. 겉으로 보이는 국제정세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세력과 서방세력 간의 무력충돌이었지만 사실 당시 사탄의 목적은 십자군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참 신자(여자의 남은 무리(특히 왈덴스인들)를 박멸하는 것이었다.

““이교도”들에 대한 악명 높은 십자군이 교황 이노센트 3세의 통치하에서 소집되었다. (비단 모슬렘으로부터 “기독교” 영토를 되찾으려는 의도만이 아니라, 이교도라 불리던 분리주의 성경 신봉자들에 맞서서 십자군이 소집되기도 했다). 1209년에, 십자가를 든 한 무서운 군대가 40일 동안의 복무 기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모든 이교도들을 파괴할 예정이었다. ...이 십자군들의 잔악성에 가히 필적할 만한 대상이 없어 보인다. 몇 개월 동안 약 2십만 명이 희생되었고, 이노센트 3세의 허가를 받았던 모든 명목의 전대미문의 만행들이 자행되었다. 두 개의 큰 도시, 베지에르스(Beziers)와 카르카소네(Carcassone)는 재로 변했고, 다른 수천 명은 불타는 집에서 쫓겨나 숲이나 산에서 유랑하며 날마다 빈곤에 시달렸다.”(Orchard, Concise History of the Batist, p211).

이번에 파리에서 발생한 테러는 신세계질서가 세워지는 속도를 크게 가속화 할 것이다. 왜냐하면 파리의 테러는 EU 연합의 톨레랑스(관용주의)를 공격한 것이며 극단이 관용주의를 위협하며 인류의 평화와 연합과 화합을 깨뜨리는 위험한 존재들이라는 인식을 온 세상에 심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앞으로 모두가 신세계질서 아래 연합하기를 원할 때까지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계속해서 발생할 것을 우리는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배경 하에서 성경의 예언들(다니엘서의 개국 이래로 없던 환란, 요한계시록의 짐승의 표 환란)이 역사의 반복으로 성취될 것이다. 기록된 성경 말씀대로 살려 하고,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품성을 닮고 싶어 하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로 마음을 굳게 정한 사람들(여자의 남은 후손)에게 사단은 또다시 극단적 종교 근본주의자들이라는 누명을 씌어서 핍박을 가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떠한 믿음과 신앙으로 서 있어야 할까? 바로 기록된 말씀만이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2

 

진리탐구_“영적 이스라엘” 요한계시록 이스라엘 12지파 144,000인

 

우리는 지금까지 “7년 환란”과 그 안에 중요한 교리인 “환란 전 비밀휴거”를 알아보기 위해 참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7년 환란의 거짓과 오류를 알기 위해 먼저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증거하며 긴 글로 여러분께 호소하였습니다.이러한 모든 글들이 이해가 되셨다면 여러분들께서는 오늘날 기독교 단체에 서서히 퍼지고 있는 “메시아닉 쥬”와 “예루살렘 회복운동” 등이 얼마나 성경적 관점에서 부질없는 것인 줄 알게 되셨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 24:1-2).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과 각 12지파와 140,000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진정 무엇일까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원칙과 말씀의 동일한 교훈이 있어야 하는데 “7년 환란”을 주장하는 단체는 그 교리에 맞추기 위해 자신들의 유익한 점이 있는 말씀만 사용하고 그와 반대되는 말씀은 철저히 무시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에게 올바른 성경의 말씀을 증거하게 되면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결국 그들 스스로 말씀을 부인하게 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 16장·17장·18장에 할애 되어 있는 “바벨론”은 영적인 교훈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벨론은 과거 역사 속의 나라이며 오늘날에 존재하지 않기에 성경의 영적 교훈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백번 천번 옳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바벨론은 영적 교훈이라 하면서도 굳이 이스라엘은 육신적 이스라엘로 한정지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앞뒤가 맞지 않는 성경해석으로 인해 예언의 말씀에 덧붙이거나 가감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바벨론을 영적 교훈으로 받아들인다면 이스라엘도 영적 교훈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 해석이 비성경적이거나 여러분들의 영혼구원과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껏 함께 연구한 “영적 이스라엘 백성”의 말씀을 토대로 하여 정말 많은 교회들과 그리스도인이 궁금해하는 요한계시록의 144,000인에 대해서 상고하려고 합니다. 144,000인의 주제에 대하여 성경적 의미를 연구하면 이단이나 잘못된 사람으로 취급받는 불편한 생각들이 오늘날 기독교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144,000인의 말씀에 대해서 그동안 가려졌던 인봉의 말씀이 서서히 풀리는 시대의 시기에 살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144,000인은 재림을 준비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바른 믿음을 갖게 하는 하나님의 확실한 예언의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144,000인의 사람들 속에는 매우 귀중한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이스라엘 12지파의 144,000인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사명은 무엇인가를 함께 성경을 통해 연구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계6:11).

 

기독교회사_세기를 이어진 박해, 순교, 그리고 복음의 확산

 

발도의 피터와 또 다른 왈덴시안 무리들에 속해있던 순회 선교사들의 막강한 영향력에 맞서서, 교황 이노센트 3세는 두 개의 수도사 조직을 설립하였다. 그 수도사들은 전도를 위한 포교사의 외형을 하고 각지를 돌아다녔지만, 로마의 비성경적인 교리들만을 전달하였다. 이 수도회 중 하나는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 수도회(Francis of Assisi) 였다.(Faber, History of the Ancient Vallenses, p.477 f1)

“이교도”라 불리는 왈덴시안들에 대항한 악명 높은 십자군이 교황 이노센트 3세의 통치 하에서 발군되었다. (명분은 모슬렘으로부터 “기독교”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십자군을 소집한 것이라 하지만, 이교도라 불리던 분리주의 성경 신자들에 맞서서 소집되기도 하였다). 1209년에, 십자가를 든 한 무서운 군대가 40일간의 짧은 복무기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든 이교도들(비카톨릭인)을 파괴할 예정이었다. ...이 십자군들의 잔악성에 가히 필적할 만한 대상이 없어 보인다. 몇 개월 동안 약 2십만 명이 희생되었고, 이노센트 3세의 허가를 받았던 모든 명목의 전대미문의 만행들이 자행되었다. 두 개의 큰 도시 베지에르스(Beziers)와 카르카소네(Carcassone)는 재로 변했고, 다른 수천 명은 불타는 집에서 쫓겨나 숲이나 산에서 유랑하며 날마다 빈곤에 시달렸다. (Orchard, Concise History of the Baptist, p.211)

왈덴시안들에게 가해졌던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세기 이내에 프랑스와 이태리를 포함하여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 시기의 박해는 그 잔인함에서 후대의 것들에 비해 결코 덜하지 않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1211년 알사스에 있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는 80명의 남녀 왈덴시안이 화형에 처해졌다. 1214년 스페인 머리락(Maurillac)에서는 7명이 화형 당했다. ...독일에서는 1231년부터 1233년까지 왈덴시안들에 대한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가 자행되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왈덴시안들의 확산은 계속되었다. 그들이 정기적으로 예배드리던 건물들이 적발되었을 때, 1260년 오스트리아의 남, 북부지역에는 50개를 상위하는 곳에서 왈덴시안 ‘모임들’이 발견되었다. 1315년 남부 오스트리아에 있는 한 작은 행정구역에는 36개의 중소도시에 왈덴시안들이 있었다. 전 오스트리아 공국 내에서 그들의 수는 80,000명을 상회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들은 또한 보헤미아, 모라비아, 카린시아, 스티리아(오스트리아 영지들)와 실레지아, 브란덴부르그(근대 프러시아), 포메란니아, 폴란드에서 성공적인 사역을 실행하였다. 1315년에 비엔나 부근 함부르그에서 화형당한 왈덴시안 감독 뉴메이스터(Neumeister)의 진술에 따르면, 그들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숫적으로 매우 강했다. 실레지아의 한 마을, 슈바이드니츠(Schweidnitz)에서는 50명 이상이 1315년에 화형당했는데, 그중에는 다수의 여자들과 젊은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309년 경에는 폴란드에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다. 그 세기의 말엽을 향해갈 무렵, 헝가리에는 많은 왈덴시안이 있었고, 트란실바니아로 계속해서 확산되었다. 색소니와 멕클렌부르그에서는 약 50년 후에 왈덴시안들이 발견되었다.

1400년을 약 10년 앞두고, 왈덴시안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가 상기 열거한 지역들과 나라들에서 시작되었다. 남겨진 극소수의 박해에 대한 기록만으로도, 이 나라들에서 알비젠스들의 세력이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볼 수 있다. 남부 보헤미아에서는, 전 마을들이 왈덴시안 신앙을 수호했다. 모라비아에서는 그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로마 카톨릭 교계제도가 그 상황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브란덴부르그, 포메라니아 그리고 메크렌부르그에서는, 1393년에 443명 이상이 왈덴시안 ‘이교도’로 체포되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그 부모들도 이미 왈덴시안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왈덴시안으로 고발당해서, 두꺼운 세 권의 재판의사록을 가득 채울 만큼 심문을 해야 했다. 38명의 왈덴시안이 1393년에 바라비아의 여러 지역에서 처형당했다. 1416년 색소니의 여러 지역에서 300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1446년에 12명이 노르드하우젠에서 화형 당했고, 1454년에 22명이 색소니의 상거하우젠에서 화형 당했다. (John Horsch, Mennonites in Europe, pp.7,8)

이제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이때에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Healing Story_하지 정맥류

 

* 혈액의 순환
혈액은 심장에서 강력한 힘으로 우리 몸 구석구석까지 보내어져서 모든 조직과 세포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일을 하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때, 심장에서 몸으로 나아갈 때는 동맥을 통하여 가고, 다시 심장으로 들어올 때는 정맥을 통하여 오게 되는 것입니다.
       심장---->동맥---->온몸의 조직들---->정맥---->심장
​* 정맥
팔다리에 있는 정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①심부 정맥(Deep vein)- 근육 사이에 분포되어 있는 큰 정맥
       ②관통 정맥(Perforating vein)-심부 정맥과 표재 정맥을 연결하는 정맥
​       ⓷표재 정맥(Superficial vein)-피부 바로 밑으로 보이는 정맥

​*하지 정맥류
일반적으로 표재 정맥이 늘어나서 피부 밖으로 돌출되어 보이는 것인데, 종아리 뒤쪽이나 다리의 안쪽 등 하지에서 많이 발생하므로 하지(下肢)정맥류라고 합니다.​ 정맥 내부에는 판막(Valve)이 있어서 항상 혈액이 모든 조직에서 심장 쪽으로 일정하게 흐르도록 도와줍니다. 하지 정맥들은 중력과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흐르게 되어 있겠지요?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정맥의 탄력이 감소하여 확장하게 되고, 정맥 내의 판막도 약해져서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하게 되면 심장으로 가던 혈액은 반대로 역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맥 내부의 압력이 높아지고 정맥이 확장되어 정맥류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원인
 ① 연령 : 연령이 증가하면, 정맥 내의 판막은 약해지고 찢어질 수 있으며, 결국에는 판막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서 혈액이 역류하게 됩니다.
 ② 성별 : 남성보다 여성에서 정맥류가 더 많이 발생합니다. 이는 임신, 생리 전, 폐경기의 호르몬의 변화가 원인으로 여성 호르몬이 정맥을 확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③ 유전 : 가족 중에 정맥류가 있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발생 가능성이 증가합니다. ④ 비만 : 과체중은 하지 정맥에 압력을 증가시키므로 정맥류 발생 가능성을 높입니다.
​ ⑤ 장시간의 직립 자세 : 보통 40대 여성 주부들에게 많이 오는 질환 중 하나였지만 장시간 서서 근무하는 비서직이나 선생님, 매장 직원 등에서 비율이 더욱 증가하고 있으며, 같은 자세로 오랫동안 앉아있는 회사원들이나 20대 학생들에게서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장시간 서 있는 자세로 인해 하지의 혈액이 원활하게 흐르지 못하게 되어 정맥류를 유발하거나 악화시킵니다.
⑥ 운동부족

2. 정맥류의 형태와 증상
​ ① 거미줄 모양의 정맥류 : 피부 표면 가까이에 있는가는 정맥들이 확장되어서 붉은색, 파란색, 보라색을 띤 거미줄 형태의 실핏줄입니다. 주로 허벅지나 종아리, 발목 부위에서 많이 발생합니다.
  -다리나 발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처럼 무거운 느낌이 들며 조금만 걸어도 쉽게 피곤함을 느낍니다.
​  -다리가 저리고 당기는 느낌이 있습니다.
​  -취침 중에 쥐가 나는 듯한 경련성 통증으로 잠을 깨기도 합니다.
​  -때로는 칼로 찌르는 듯한 아픈 느낌이 듭니다.
​ ② 정맥의 판막 부전으로 인한 정맥류 : 거미 모양의 정맥류보다 굵고 색이 짙으며 더 심해지면 피부 궤양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주로 발목 안쪽 부근에서 많이 발생합니다. 
​  -정맥이 피부 밖으로 돌출되어 울퉁불퉁 튀어나와 있습니다.
  -만져보면 부드럽기도 하지만 어떤 곳은 통증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피부색이 검게 변합니다.
  -만성적인 하지통증 및 부종이 있습니다. -치료를 해도 피부 궤양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정맥염이 발생하여 후끈후끈한 발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3. 진단과 치료
 ① 심하지 않은 경우에는 특별한 치료 없이 다리를 높게 올리고 누워 있으면, 증상이 완화되고 부기도 빠지게 됩니다. 그 외에도 운동, 체중 감소, 꽉 끼는 옷을 입지 않기, 장시간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을 피하는 정도로 정맥류를 예방하거나 증상을 감소할 수 있습니다.
​ ②그러나 위와 같은 노력을 해도 증상이 더 심해진다면 혈관외과 전문의를 찾아가 도플러 초음파 검사(Duplex ultrasound)를 통한 정확한 진단을 받고 상의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행히 정맥류의 치료는 장기간의 입원이나 복잡한 치료 과정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임신으로 발생한 정맥류는 출산 후 수개월이 지나면 점진적으로 호전될 수도 있습니다.
​  -압박 스타킹 착용(Compression Stockings)   압박 스타킹은 발등부터 무릎 또는 장딴지까지 환자의 증상에 따라 혈관 외과 전문의의 처방으로 착용을 하게 되는데 이것만으로도 증상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약물 경화 요법(Sclerotherapy)   하지 정맥류가 있는 정맥 안으로 경화제를 주입해서 인위적으로 염증을 일으켜 혈액의 흐름을 다른 정맥 쪽으로 유도함으로써 결국 늘어난 정맥이 막히도록 하는 치료법입니다.
​  -정맥 내 레이저 요법(Endovenous Laser Therapy, EVLT)   늘어난 정맥 내로 가느다란 광섬유를 넣은 다음 레이저를 발산하여 정맥류가 생긴 정맥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도 고주파 전류를 써서 정맥을 막는 방법도 나왔는데, 모두 수술에 비해 상처를 덜 남기고 회복도 빠르다는 장점입니다. 그러나 의사들 사이에서는 레이저나 경화요법이 수술보다 재발률이 높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  -수술 요법   사타구니와 무릎 아래에 몇 군데 작은 피부 절개를 한 다음 병든 정맥 조직을 수술로 제거하는 방법으로, 입원 및 마취가 필요하고 피부 절개 상처가 남긴 하지만 가장 확실한 치료법입니다. 정맥류가 생긴 정맥을 묶은 뒤 제거하는 것입니다.

4. 예방
​인간은 직립 보행을 하는 존재이기에 정맥류를 완벽하게 예방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혈액순환과 근육의 긴장도를 향상시키면 정맥류 발생의 위험을 줄이고 증상을 호전시킬 수는 있습니다. ① 운동 : 걷기 운동은 다리 근육의 수축운동으로 혈액 순환을 도와줍니다.
​ ② 체중 조절 : 체중을 감량하는 것은 정맥 내부의 압력을 낮추어 주는 역할을 하므로 좋습니다.
 ③ 의복 : 하이힐처럼 굽이 높은 신발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허리나 골반 주위에 꽉 끼는 옷을 입으면 표재성 정맥 순환을 방해하므로 정맥류를 발생시키거나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④ 다리 올리기 : 다리를 심장보다 높이 올려놓는 것은 다리 부종을 감소시키고 정맥의 순환을 촉진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⑤ 장시간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을 피하기 : 적어도 30분의 한 번 정도는 움직이는 것이 좋으며, 다리를 꼬고 앉지 않도록 합니다.
 ⑥ 식이요법 : 변비는 복압을 상승시키어 정맥류와 유사 질환인 치질을 유발시키기 때문에 지방질이 많은 인스턴트 식품보다는 섬유질이 풍부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 정맥류는 병든 혈관입니다. 혈액이 생명을 주는 심장으로 흘러가야 하는 데 반대로 자꾸 새어나갑니다. 그래서 새로운 영양분과 신선한 산소를 몸에 전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길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병든 자요, 죽은 자입니다. 병들어 계십니까? 선한 의원이신 주님께 나 자신을 내어 맡기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입니까? 부활이신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다_쳐다보고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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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요리_연근 흑임자 샐러드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