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편집실

 

세상의 수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싶다고 고백은 하지만 진정으로 믿는 것을 죽기 전까지 미룹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구원과 영생에 관한 주제가 그들에게 가끔씩 떠오르는 때가 있지만, 세상에 속하여 살기 원하는 마음의 욕구가 그들을 더 많이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많은 기독교인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으며, 또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스스로 확신하면서 그저 그렇게 안일함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자신의 타고난 육신의 본성을 부인하거나,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들을 극복하려는 영적 갈망이 없을뿐만 아니라 악한 죄의 소욕을 버리려는 투쟁도 없습니다. 그렇게 스스로가 만든 기만적인 구원의 확신 속에서 안일하고 편안한 넓은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성경의 진리를 더 많이, 더 깊이 알기를 두려워합니다. 왜냐면 아는 만큼 더 큰 책임이 따르고 세상의 쾌락을 더 많이 포기해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죽기 전에만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십자가 상의 강도처럼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연 죽기 전에만 믿어도 될까요? 그리고 여러분은 죽기 전에 극적으로 회개하여 구원받은 십자가 상의 강도처럼 그러한 찬스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번 신앙 기사에는 성경적인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성경의 여러 이야기를 통해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았습니다. 함께 연구하고 숙독하므로 믿음과 구원에 대한 올바른 개념과 확신을 얻고 활기찬 신앙생활을 하는 독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1부_십자가 강도의 믿음에 대한 오해

 

예전에 성경적인 참된 구원을 깨닫게 되면서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기독교인들과 구원에 대해서 토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은 아닌 것 같다. 입으로 시인만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닌 거 같아." 그러면 어김없이 쏟아지는 반론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폄하하지 마라, 십자가의 강도는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 십자가 상의 강도 이야기가 나오면 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 상의 강도는 영락없이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구제받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잠깐 오해했었네요. 역시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구원도 공짜로 주시는 분이시군요. 오해를 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젠 믿기만 하라고 말하는 목사님이나 교회도 오해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를 더 깊이 알면 알수록 십자가 상의 강도의 믿음은 단순히 죽기 전에 ‘아멘’만 하는 믿음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일 저 강도였다면 과연 저 옆에서 죄인들과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한 초라한 인간을 메시아라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그 강도의 믿음이 단순히 ‘아멘’만 하는 지적인 동의 수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조롱하고 비웃고 심지어 그를 따르던 제자들까지 도망가 버린 저 비참한 한 인간을 나는 과연 뭘 믿고 메시아라 고백할 수 있었을까? 온 세상이 그를 향하여 등을 돌렸고, 자신이 아버지라 부르던 하나님마저 등을 돌린, 세상에 웃음거리가 된 저 죽어가는 인간을 내가 무슨 믿음으로 메시아로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저는 정말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제 모습에 반사된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소망했던 아브라함의 믿음과도 일맥상통하는 믿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강도에게 그런 아브라함과 같은 산 믿음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가를 영감의 말씀들을 통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회개는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강도는 죄와 하나님 사이에서 오래 전부터 갈등하다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대제사장을 비롯한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야유하고 반대했습니다. 그 당시 온 교회가 예수님을 반대한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까지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이 땅에서 가장 볼품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마에 박힌 가시관과 손과 발에 박힌 못 때문에 얼굴과 온 몸이 피투성이 상태이고,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한 채 매맞고 온갖 모욕을 당한 뒤여서 얼굴과 몸은 형편없이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그분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며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는 죄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상의 강도는 사람들에게 얻는 인기나 예수님의 외모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성품을 보고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무리를 위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부터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는 세상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시는 메시아의 슬픔과 고뇌의 눈빛을 보았고, 십자가를 메고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메시아의 무거운 발걸음을 느꼈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등을 돌린 이 세상을 향하여 안타까워 탄식하는 고난의 절규를 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죄 많은 인생을 마감하려는 강도에게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죄와 저주, 슬픔과 고뇌의 그림자가 자기 옆에 있는 이 한 사람에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진정한 해방감을 맛보았으며 하늘 아버지의 가납하심과 용서하심의 메시지를 읽고 온 마음으로 굴복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인생 마지막 순간을 송두리째 메시아의 고난의 초청에 이끌린 바 된 그는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리고 조롱하는 분위기에서도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인정하는 믿음, 모든 사람이 반대해도 홀로 서서 예수님을 따르는 반석 위에 세워진 굳건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상의 강도의 믿음은 간단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온 세상이 깜깜한 암흑으로 뒤덮여 있을 그 때에라도 하늘로부터 임하는 한줄기 빛을 볼 줄 아는 장성한 자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저도 매일 십자가에 달려 탄식하시던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세상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저주하며 등을 돌려도 끝까지 당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믿음을 소유하게 해주세요. 죽기 전에 “아멘”하는 비굴한 믿음이 아니라 온 생애가 당신의 용서와 사랑에 붙들려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굴복하는 그런 십자가 상의 강도의 믿음을 갖게 해주세요. 그리고 아버지시여 연약한 이 믿음, 당신이 흘리신 사랑의 보혈의 피가 생명의 연료가 되어 날마다 타오르게 해주세요.“

제2부_어떻게 믿는 것이 진실로 믿는 것인가?

 

우리는 길거리나 지하철 역에서, 그리고 상점들 앞에서 열심히 전도하는 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하나님 믿으십니까?” “믿고 천당 가세요!” 미국에서는 큰 길이나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다음과 같은 간판의 글씨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저 믿기만 하시오! 오늘 예수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 드리시오! 그리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믿는 것이 진정으로 성경대로 믿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믿으라는 성경의 말씀을 받아들였으면, 같은 성경이 어떻게 믿으라고 말씀하는지 그 말씀까지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 보기로 합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 목회자, 또 그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하면서 주위의 이웃들과 친구들에게 여전히 좋지 못한 감화를 끼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 주위에 수많은 교회 십자가의 네온싸인이 밤거리를 밝히고 있지만, 우리 주위의 삶이 그만큼 깨끗하게 달라져 있나요? 더 정직하며 진실한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는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상대방이 교인이라고 믿었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말을 간혹 접하게 됩니다. “저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라고 내뱉는 말들을 가끔 듣게 됩니다. 그것은 많은 경우에 정말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신자들에게서 비롯되는 일들입니다. 믿을 때 우리 마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며, 어떠한 변화를 수반하게 되는지를 제대로 가르침 받지 못한 신자들의 경우에, 자신의 생활에 진정한 변화도 없이 구원 받았다고 주장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행함의 열매가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그 믿음을 참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말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한번은 가장 순수했던 초대 교회에 신학적인 위기가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고 일부 교인들 가운데 오해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의 거듭남의 경험을 자신들의 거듭나지 못한 경험으로 해석하여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자유(무법)주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무법주의가 확산되어 가자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후서 3장 14절에 “점도 흠도 없이 깨끗하게 되기를 힘쓰라”고 권면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구원이다” 가르침-필자 주)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벧후 3:15,16,17)

오해된 사도 바울의 말씀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절들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위의 말씀들은 당시 시대적 배경 즉 유대(할례)파 그리스도인들과 사도 바울 간의 신학적 갈등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당시 바울의 커다란 숙제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선민)이 되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니는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원과 영생의 대주제를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바라보지 않고 여전히 유대의 의식과 전통들(특히 할례)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선민의식의 틀 속에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율법의 의’라 지목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실로 의롭게 변화되는 하나님의 의,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소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가식적인 행함(율법의 의)에 대비하여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하나님의 의)을 통하여 참된 행함이 나온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 행함이 필요 없는 기만적인 믿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말씀 때문에 잘못된 오해가 생길까 봐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첨언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 3:31).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5, 16).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5,6,13).

그 당시 자유(무법)주의 위기가 초대교회에 임했을 때에 예루살렘 총회의 지도자로서 위치하고 있던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 역시 각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써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하여 야고보서를 기록하게 되었고, 그는 자기의 편지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교회 안에 존재하게 된 오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책망하고 격려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14, 17-24).

야고보의 말씀은 그 당시 교회 안에 오해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에 대하여 균형지게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마귀도 하나님을 믿고 떨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마귀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정도의 믿음과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우리의 인정과 동의를 지나서 우리의 마음과 사상과 생활을 바꾸어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 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믿음과 행함과 구원의 삼각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아들 이삭을 낳기 이전에 자신과 아내 사라가 너무 늙어서 아이를 전혀 가질 수 없는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듬해에 다른 여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늙은 사라를 통하여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아들을 통하여서 택함 받은 한 나라를 이루시고 그를 통하여서 메시아를 이 땅에 탄생하게 하시겠다는 약속, 자기의 자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어 그 수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그는 굳게 믿었습니다. 그것을 믿는 일은 엄청난 믿음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어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그저 머리로만 인정하고 동의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머리로 어떠한 사실이나 가르침을 인정하거나 동의하는 수준 이상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었을 때에 그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브람이란 이름은 “높아진 자”라는 뜻이었고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습니다. 자식이 하나도 없던 아브라함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름을 “열국의 아버지”라고 소개하고 다닌 사실은 굉장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고 그가 20세가 되었을 때에 청천 벽력같은 말씀이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자기의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죽여 희생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과연 그러한 명령을 하실 수가 있을까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몹시 고민하여 떨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그 말씀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이삭을 아침 일찍 깨워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간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말씀이 아무리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들릴 때에라도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 아시고 당신의 사랑과 뜻을 따라 행하신다는 주님의 권위를 아브라함은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드릴 때에는 주님을 우리는 우리의 왕과 주인으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을 때에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과 진리와 그분의 모든 계명을 다 받아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즉시 멈추도록 명하시고 그가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알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감동적인 이야기는 창세기 2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아울러 후 세대에 사는 우리에게도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하여 주시기 위하여 그러한 시험을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것이었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러 주셨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바로 이 경험을 실례로 들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심지어 “아브라함이 믿음만 가지고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행함은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가 없는 삼각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배를 저을 때에 한 쪽 노만 저으면 배가 제자리를 맴돌게 되는 것처럼 믿음과 행함이 함께 병행하여야 구원의 배가 하늘 포구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행함으로가 아니지만 동시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행함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값아 주리라.”(마 16:2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 2:6).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계 2:23).

여기에서 한가지 살피고 지나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악하고 불순종하는 마음이 우리의 본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새 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는 매일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죽고 매일 그리스도의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사는 경험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뜻과 율법을 지켜 순종하는 생애를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힘으로 가능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루어집니다. 나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에 우리는 그 사랑이 강권하는 힘이 되어서 주님의 말씀을 다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4:15). 그러나 우리의 순종이나 행함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공로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죄의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이지 우리의 행함의 쌓은 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며, 진리를 따라 깨끗하고 진실된 변화받은 생활을 살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을 낳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순종하고 존경한다고 해서 그 부모의 자식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순종과 존경이 없는 사람은 그 부모의 자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우리는 흔히 믿음 장이라고 부릅니다. 거기에서 사도 바울은 역대 믿음의 조상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그들의 믿음과 함께 그들의 믿음을 증거하는 행함도 동시에 적고 있는데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비를 본적이 없던 시대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홍수가 온다는 사실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예비하기 위하여 그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노아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많은 조롱과 손가락질을 당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어디로 갈지를 몰랐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그 우상의 땅을 떠나 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믿음 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가르침이 마틴 루터나 요한 웨슬레, 로저 윌리암스, 리챠드 백스터, 요한 칼빈, 진센돌프 같은 훌륭한 종교 개혁자들이 살고 가르쳐 온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지적인 동의 수준의) 믿기만 하면 된다는 잘못된 가르침이 기독교 안에 들어와 수많은 기독교인과 믿지 않는 자들까지 혼란케 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만의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된 믿음에 대한 진리를 분별해야겠습니다.

제3부_믿음으로만 구원받는 이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될까요? 또한 무엇을 어떻게 믿으라는 말인가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이미 이루어 놓으신 역사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자식을 갖는다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밤하늘의 별을 보이시면서 앞으로 네 자손이 이렇게 많아지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보면서 자신에게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많은 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늙은이에게 자식을 생산할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넉넉히 지키실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예수를 알고 또한 그분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수박을 겉만 핥고 그 속은 먹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도 우리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가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3:1-2). 초대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믿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받은 증거로 기적의 은사들을 주장하지만, 기적은 성령을 받은 확실한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마귀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무엇일까요? 성령을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리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 승리하는 능력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성령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3:14).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임하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순종의 열매를 우리의 삶 속에서 생산해 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이 믿음이 없고,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성령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을 때 우리 속에 성령(그리스도의 영)이 계신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에도 고린도후서에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 확인해 봐라. 너희 속에 성령이 없으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성령의 능력

우리가 아무리 믿는다고 공언해도 우리 속에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진리와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을 생산해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시편 119편을 읽어 보세요. 거기서 우리는 율법에 대한 다윗의 존중심과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성령의 역사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마음에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은 이제 더 이상은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4). 바울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되 그것을 자신의 노력과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바로 이것이 갈라디아서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요약입니다. 여기에 그 공식이 나옵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5:4-6). 예수님 안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는 삶을 살게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 것도 그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우리에게는 이기적인 사랑은 있으나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은 없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율법을 지키는 근본정신인데, 성령께서 이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셔야만 우리가 드디어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인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성령을 통하여 받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의로운 생애를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절). 이것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이 나를 지배하면 성령이 우리를 떠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한가지 문제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힘에 의해서 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힘을 잃어버리고 주관됨으로서 새 생활을 시작한 후 구원받고 그 순간 우리의 생애가 끝나든지 예수께서 재강림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성령 충만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마귀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온갖 수단, 즉, 몸의 고통, 직장, 자녀문제, 경제문제 등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죄를 이기는 것이 가능할까요? 성경의 대답은 물론 “YES”입니다. 요한일서 2장과 3장에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범죄할 수가 없다는 놀라운 말씀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귀와의 실전에 약하기 때문에 쓰러지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예화를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비가 올 경우 가끔 정전이 발생됩니다. 천둥번개가 쳐서 3초만 전기가 나가도 아주 귀찮은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FAX에 있는 시간, 디지털 전화에 있는 시간, 주방의 오븐에 있는 시간들을 모두 올바로 교정해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라는 순례길을 걸어가다 가끔 원치 않는 천둥번개에 맞게 됩니다. 그러면 잠시 정전이 되어 믿음이 나가고 성령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쓰러지면 우리 힘으로 발버둥을 치다가 다시 주님께 나가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걸어가는 인생길에서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죄는 반드시 이길 수 있으며, 정복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 모두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약속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부족으로 인하여 가끔 넘어진다고 해서 죄와 유혹을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한번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받아야 합니다. 오늘의 구원은 내일의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주님께 굴복하고 날마다 믿음을 새롭게 하고 날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역사를 믿음으로서 성령을 받고, 또 그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짜 믿음이고, 또한 이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실수하여 범죄하였을 경우에도 하늘에 중보자가 있으니 낙심하지 말라는 보증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고후5:5). 보증이란 무엇인가요? 보증이란 앞으로 더 크고 좋은 것이 온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 더 좋은 것을 위해서 매일 보증을 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무엇인가요? 오직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오르락 내리락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자들, 그리고 성령을 받고 예수를 마음에 모신 자들은 때때로 넘어질지라도 그들의 정신이 다른 것에 분산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에 집중됩니다.
예수께서 재강림하시기 직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환난과 핍박이 엄습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환난과 핍박이라는 용광로 속에 집어 넣으셔서 정결케 하신 후에 그들을 완전한 자로 인치실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이 마지막 핍박과 환난 후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14:1-5를 보면 계13장의 짐승의 표의 환난을 통과한 이후에, 드디어 인침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흠없이 서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러한 인침받은 자들, 즉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을 환난에서 보호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때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단12:1). 성경은 최후의 승리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12). 그러므로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주님 안에서 성령의 약속을 매일 받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제4부_그대는 물 위를 걸을 수 없는가?

 

1) 물 위를 걷는 믿음
그대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까? 물론 그대는 걸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 스스로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믿는 그 믿음이 그대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대는 예수님께서 그대에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새벽 미명의 갈릴리 바다를 살펴봅시다. 희뿌연 회색 빛을 뚫고 다가오는 희미한 존재가 있습니다. 배 위에는 무서워 떨고 있는 열두 명의 남자들이 있습니다. 그때, 파도를 가르며 상쾌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갑자기 생기를 얻은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만일 당신이시거든 나로 물 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하소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라.” 베드로는 차갑고 시퍼런 파도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과 예수님과의 거리를 측정해 보았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어떻게 물 위를 걸어. 그는 망설였습니다. 순간적으로 의심이 그를 삼키어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도 물 위를 걸었던 적이 없었어.”

이 장면은 베드로에게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파도 위로 그의 발걸음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가 물 위를 걷는 장면을 통해서 믿음에 관한 놀라운 교훈을 배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길들여진 가짜 믿음
서커스단에서 길들여진 코끼리는 어릴 때부터 쇠사슬에 묶어 놓는다고 합니다. 한쪽 다리를 얇은 쇠사슬에 묶여 자유스럽게 다니지 못하며 자란 코끼리는 커서 거대한 코끼리가 되어도 한쪽 다리에 얇은 쇠사슬만 묶어 놓으면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그 한 곳에만 매여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코끼리는 모든 구속력, 즉 울타리와 쇠사슬을 극복하고 도망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소유하고 있지만, 자신이 그런 일을 결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어릴 때부터 길들여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커서도 쇠사슬과 말뚝을 힘없이 뽑아버리고 달려나갈 수 있지만, 그렇게 하기엔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힘이 너무나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실제에 있어서 코끼리는 쇠사슬과 말뚝에 의해서 구속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에 의해서 구속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작고 연약한 쇠사슬과 말뚝이 코끼리의 자유를 빼앗은 것처럼, 그들의 삶에 있어서 반신반의 하는 믿음으로 인해서 죄에 대한 승리를 빼앗기고 있습니다. 다음에 서술하는 한 사람의 경험은 자유를 빼앗긴 코끼리의 모습을 우리에게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나는 20살이 되기 전 소년기에 침례를 받았는데, 그 당시 나는 매우 신실하여서 100%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원했었다. 나는 다니엘서까지 연구를 했으며, 그 공부는 예수님에 관한 믿음과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나의 이름은 교회의 교인명부에 기록되었으며, 그 후 자아와 죄에 대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탄의 강력한 동맹자인 자아와 죄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나의 결심을 쉽게 허물어뜨렸다.

환멸과 실망이 그 뒤를 이어서 찾아왔다. 나는 젊은 시절 동안, 계속 교회 안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동안 나의 실망과 좌절의 곡선은 위 아래로 오르내렸다. 어떤 때는 심하였고, 어떤 때는 약하게.... 그러나 여전히 나는 신실하였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나의 소원은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신학교의 학생이 되었고, 후에 목회자가 되었다. 내가 성경을 연구할 때에 때때로 나는 모든 죄를 정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지만, 유혹에 대한 만성적인 패배감으로 인한 고통과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의 신앙 상담에서 들은 말들( 죄, 즉 이기심, 질투, 인내치 못함 등등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우리 생애에서 계속될 것이라는 위로의 말)은 죄를 승리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하도록 확신시켰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투쟁하겠다고 결심했지만, 실제적인 생애에 있어서 죄에 대한 충실한 승리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쇠사슬은 만들어졌으며, 말뚝은 땅에 꽂혀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죄에 대한 승리를 약속하는 성경절들을 읽었지만, 그 약속의 글은 오히려 나를 혼돈케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그 글이 말하고 있는 바는 다른 의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승리의 가능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성경의 글들은 자유를 약속하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는 믿음일지라도 죄를 승리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나의 신조에 의해서 나는 묶여지고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3) 지식보다 먼저 가는 믿음
다시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대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물 위로는 걸을 수 없다고 단정지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그대도 걸을 수 있다는 충분한 증거를 보았을지라도, 그대는 그것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대는 그 약속과 증거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과거 그대의 육적인 경험을 통하여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성경의 약속과 증거보다는 그대 자신의 경험과 신조를 더욱 신뢰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경험을 앞서간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행함으로써 믿음을 활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지식과 경험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경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인간은 항상 “먼저 나에게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증거를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성경을 통해서 계속 되풀이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두 명의 소경들이 예수님에게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 9:27).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그들에게 치유를 베풀기 전에 그들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마 9: 28).

한번은 마귀들린 소년의 아버지가 예수께 나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막 9:22) 라고 말하는 가운데 자신이 가진 의심을 드러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이 부족함을 보여주시면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막 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의심이 자기 아들을 치유 받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깨달은 소년의 아버지는 열정적인 갈망으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라고 예수님께 외쳤습니다. 그 장면에서 믿음이 포기되거나 취소되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행사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제5부_“오라!”


“오라!” “만일 주님이시거든 내게 물 위를 걸어 오라고 말씀하소서.” 베드로의 호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허락이 아니라, 명령이었습니다. “오라!”

예수님께서는 그 이상의 어떤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만한 증거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존하여서 확신을 이끌어내야만 하였습니다. 거룩한 확신이 가득 찬 주님의 명령은 베드로에게 영감적인 확신을 불러일으켜 주었으며, 그리하여 베드로는 신속하게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그것은 자주 구체적 내용과 설명이 아닌 부르심으로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1) 명령으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이제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산중에서 내가 네게 알려줄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 (창 22:2). 이 성경절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을 만한 내용이 담겨 있을 뿐입니다.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 4:18,19). 이것이 그 사람을 부르신 말씀의 전부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 9:9). 여기서는 오직 두 단어만을 말씀하셨습니다.

38년 동안, 한 앉은뱅이가 베데스다 연못으로 매일 들려져 왔는데, 그는 연못이 요동칠 때에 치유를 얻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6-9). 잠시 후에 그가 자신을 고쳐준 사람을 찾아보니,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리를 피하신 후였습니다. 이 모든 경우들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분에 대한 믿음을 활용해서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각 사람들을 남겨둔 채 그 자리를 떠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믿음을 요구하심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예화를 생각해 볼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큰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도 경험한 적이 없는 불가능한 행동을 당신의 제자인 베드로에게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길을 쉽고 평탄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앞서 보았던 것처럼,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어떠한 확신을 주는 언급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생명을 취하지 않으시겠다고 미리 보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마태에게 먹고 살만한 적당한 수준의 월급을 지급하겠다는 보증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의도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믿음을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요구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을 충족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전적인 헌신과 굴복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분의 명령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길고 구체적인 설명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직접 귀로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영혼을 울리는데, 그 소리는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조용하고 은은하게 우리의 귀를 울립니다. 우리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아브라함, 안드레, 마태, 중풍병자, 그리고 베드로처럼 주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여, 배에서 내린 다음 물 위를 걸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조용히 저를, 또는 그대를 찾아와서 “나를 따르라!”고 지금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믿고, 굴복하여,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것들이 주님께서 그대와 저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입니다. 믿음과 헌신, 또는 굴복은 결과적으로 동일한 것입니다. 믿음은 그대가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는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신뢰인데, 그것은 굴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대가 믿음이 있다면, 굴복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대가 굴복한다면, 더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계속적인 굴복 없이 계속적인 순종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굴복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은 순종을 통해 나타남
베드로의 믿음은 그의 순종에 의해서 인정받았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순종을 통해서 인침을 받습니다. 사실, 참된 순종만이 참된 믿음을 시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은 올바른 지침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런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뇨?” (약 2:14). 야고보의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못한다” 입니다. 야고보는 또 다시 다음과 같은 도전을 던지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8). 야고보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과 굴복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는 행함과 순종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의혹이나 타협하는 일 없이 당신께 순종할 수 있는 충분한 확신을 소유하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에 대한 증거들을 보여주시고, 들려 주십니다. 당신을 찾고자 하는 자들이 그분께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한 증거들을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 위를 걸으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눈 앞, 또는 우리의 손 안, 또는 우리의 발 아래와 같이 가까운 곳에서 항상 확실한 증거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순종할 때만 그러한 증거들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실제로 물 위를 걸을 때까지 그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보증을 받았던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뢰할 만한 명령인 “오라!”라는 말씀의 증거 외에 어떤 다른 증거도 없었습니다. 가끔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에 대한 완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물 위를 걸을 것을 요구하시는 데에는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물 위를 걷지 않는다면, 우리의 발 밑에서 느껴지는 물을 결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순종을 통한 경험에서 우리로 하여금 귀중한 체험을 소유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경험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믿음을 더욱 더 깊고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 갑니다.

4) 순종을 통해 시험을 받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마음의 동의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동인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또한 그러한 행동을 하는 데에는 믿음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가 또는 하지 않는가에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한 개인의 믿음의 상태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죄에 대해서 승리하기를 소원하며, 믿음과 평화와 사랑 같은 거룩하고 영적인 요소들을 소유하기를 원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게 되는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여, 나로 하여금 물 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하소서” 라고 입으로 외치고 있지만, 주님께서 “오라!”고 명령하시는 호소에는 결코 응답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만, 배 위를 서성거리면서 불분명하고, 두려워하면서,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안에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을 찾으려고 하지만, 자신 안에 그러한 원천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은 우리 자신의 능력 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결코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근거로 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원천을 제공해 주시는 그분을 온전히 신뢰함으로써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순종에 의해서 시험 받게 됩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무슨 말로 변명할지라도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트리취라는 사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할 수 있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오직 믿음이 있는 자만이 행할 수 있는 순종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만이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없이는, 그는 파도 위에 서있는 그분을 신뢰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너무도 바보스럽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때 그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었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만이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게 해줍니다.

로마서 8장 2~4절을 통해서,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더 높은 법에 의거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인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없도록 하였던 물의 수압에 대한 물리적인 법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있는 보편적인 수압의 법칙에서 해방된 자들만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어 물 위를 걷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그분처럼 물리적인 수압의 법칙이 아닌 하늘의 믿음의 법칙에 의거하여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또한 우리로 하여금 불가능한 것을 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모본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경험에 있어서 우리는 물 위를 걷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확신을 잃어버리고 아예 배를 포기하고 떠나려고까지 합니다. 즉시로 죄의 물결과 싸워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그러한 죄의 물결을 감당할 만한 믿음이 없음을 보고 좌절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과 상태에 처하게 될 때,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죄를 완전히 정복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야. 물 위를 어떻게 걸을 수 있겠어?” 그리하여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고자 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물속으로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너희의 믿음대로 될지니라”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런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합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음을 잘 알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믿음을 활용해야 합니다. 믿음을 말할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에 관한 모든 의무는 우리에게 있지만, 순종을 위한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것이라도 그를 대신해서 해주시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배에서 뛰어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고, 계속해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물의 부력을 전혀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근거로 해서 베드로를 위해서 일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믿음은 언제나 물 위를 걷는 것
베드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현실화하였습니다. 그는 그 이전이나 후에 어떤 사람도 하지 못했던 것을 성취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인정하는 과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절대 불변의 물리적 법칙에 대항하여 걸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물 위를 걸을 수는 없습니다. 수력학 법칙은 인간이 물 위를 걷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였을까요? 조그만 개구리의 무게조차도 가라앉아 버리는 물의 표면 위에서, 성장한 인간의 무게를 버티게 하였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요?

그것에 대한 대답은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확신이 이루어내는 자기달성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소유하는 완전한 확신인데, 이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적을 창조해 내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 저에게 불가능한 것을 행하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물 위로 걸어서 당신에게 가도록 명하여 주십시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의 참된 생애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 속에서 불가능한 것들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사람은 아직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리스도인 생활이 단순히 종교적인 형식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일종의 자아훈련을 통해서 그것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생애가 전혀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마음속에 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모든 죄와 악한 것을 이기고 정복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호소하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명하사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는 저의 생애에서 죄를 극복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질투심, 원망, 분노, 조절되지 않는 식욕, 그리고 원한을 버리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 지긋지긋한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는 물 위를 걷기를 원하지만, 제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를 주님께 가도록 명령하여 주시옵소서.”

6) “오라!”

이런 소원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항상 “오라!” 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이러한 분명한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나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 경험에 근거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하신 말씀만을 의지하여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우리를 살려내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하신 명령과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물 위를 걸어가게 하실 수 있다는 그 믿음 말입니다.


마치면서
많은 사람은 성경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영감적 통찰 없이 믿음을 단순한 사전적 개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죽기 전에 믿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은 한 순간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빛을 거절할 때마다 양심이 무뎌지고 점점 더 회개하고 구원받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사람이 주님 곁에서 온전히 회개하고 믿기를 미루다가 멸망 당했습니다. 아간, 게하시, 가룟 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리를 믿을 기회를 주셨지만 마음에 품은 죄를 회개하지 않다가 결국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머리로 어떠한 사실이나 가르침을 인정하거나 동의하는 수준 이상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그 말씀대로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비춰주시고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기회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은혜의 시간은 반드시 그 끝이 있습니다. 또한 이 시대 자체가 그 은혜의 때가 마쳐질 시간임을 성경이 가리키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아니 더 이상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의 명령 듣기를 거절하므로 화인 맞아 굳어지기 전에 주 예수님의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를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오늘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따라가는 독자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혜의 시간이 주어진 것을 감사하며 참된 믿음을 소유하여 이 타락한 세상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들로 서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늘 나그네

 

하늘 나그네- 강병국목사

나그네 나그네 하늘 나그네, 좁은 길 마다않고 걸어가시는 나그네 나그네 하늘 나그네.

한 고개 넘고서 허리를 펴고 두 고개 넘고서 심호흡하는 나그네 나그네 하늘 나그네.

위에서 나리는 만나를 먹고 조용히 맺혀진 이슬 축이며 본향 찾아가시는 하늘 나그네.

세상을 등지고 위를 향하여 꾸준히 걸어간다. 하늘 나그네.

나그네 나그네 하늘 나그네 좁은 길 마다않고 걸어가시는 나그네 나그네 하늘 나그네.”

 

본향 찾아가는 마음으로 몇 자 적어 보았습니다.

나그네에게는 서러움이 있습니다. 자기 집과 자기 땅, 자기 동네가 없다는 것입니다. 떠돌이 신세이지요. 참 힘들고 고된 생애입니다. 한 곳에 머물러 말뚝을 박을 수 없기에, 늘 외로움과 불편함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그네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목적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향을 향하는 일편단심은 모든 괴로움과 고생을 무릎 쓰고 한 곳을 향하여만 걸어가게 만듭니다.

본향에 이르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풍파와 고난들을 이길 수 있도록 삶의 목적을 주어 온 그곳 말입니다. 그곳에 가면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닙니다. 더 이상 떠돌아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나를 기다려 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반기며 영접하여 줄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 곳을 나의 돌아갈 본향으로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거기가 아름답고 좋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내가 함께 살 수 있는 영원한 벗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곳이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나와 대화가 통하고 마음이 맞는 이들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지요. 그래서 나는 오늘도 본향 찾아 길가는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가나안 땅에 거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를 본향 찾는 나그네라고 불렀던 모양입니다. 가나안 땅도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우리가 돌아가 안겨야 할 품 속, 우리가 가장 사모하는 분으로 여기며 살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으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 받는 것을 이 세상의 보화나 죄악의 낙보다 더 좋아했던 모세. 그야말로 진정한 나그네의 표상입니다.

세계동향


1.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대다수 언론의 예상을 깨고 지난 11월 9일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민주당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을 제치고 미합중국 제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동안 미국은 탈산업화와 금융자본의 성장을 통해 전체적인 부는 증가했지만 그 부의 대부분은 상위계층에 집중되었습니다. 부의 양극화는 점차 심화되었고 지난 몇 년간 중산층의 몰락이 더 빠르게 진행되어 국가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빈민층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국의 경제 상황에 불만을 품은 미국 국민들은 미국의 상위계층인 금융자본가들의 지원을 받는 힐러리 대신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택했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로 미국 국채 금리 및 세계 각국의 금리가 급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내년 1월에 출범할 트럼프 시대를 맞아 소수의 금융자본가들에게 이익이 되는 ‘금융완화’보다 대부분의 미국 서민들을 위한 ‘재정정책’이 선호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금리가 인상되면 천문학적으로 쌓인 미국 부채 때문에 미국 정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이자비용이 늘어날 수 있으며, 그동안 값싼 금리로 부채를 늘려온 기업들과 가계들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여러 경제전문가들은 앞으로 세계 경제가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2. 인도의 화폐 개혁과 현금 없는 사회
인도 정부가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겠다며 고액권 화폐개혁 조치를 내놨습니다. 지난 11월 8일 인도 정부는 갑자기 화폐개혁 조치를 발표하며 500루피(약 8675원) 이상의 기존 고액권을 9일부터 쓰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대신 2000루피짜리 화폐가 새로 생깁니다. 기존 고액권을 가진 사람들은 12월 30일까지 우체국과 은행에서 신권과 교환해야 합니다. 교환 시에는 ID카드를 제시해야 하며 큰 금액은 기록을 남깁니다.
이 같은 갑작스런 개혁 조치에 큰 혼란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해외에 거주하는 고액 루피화 보유자들은 인도에 당장 들어가지 않으면 교환 받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갑작스런 화폐개혁 발표에 고액권 사용이 중지되기 전인 11월 8일 밤에는 고급 시계와 명품 가방을 사려는 소비자들로 백화점이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현금이 많은 부자들이 자신의 자산 규모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환금성이 좋은 상품을 사들인 것이죠.
일부 경제전문가들은 이런 일들이 현금 없는 사회로 가는 단계 중 하나라고 지적합니다. 현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시행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자신의 돈을 은행 같은 곳에 예금해놓게 하는 것이죠. 현금 없는 사회가 되면 국가는 각 사람의 자산을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됩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세계 각국에서 현금 없는 사회로 가는 정책들과 기술발전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3. 프란치스코 교황, 루터교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예배 참석
프란치스코 교황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지 500주년이 되는 2017년을 2개월 앞둔 지난 10월 31일에 스웨덴 남부 룬드에서 열린 종교개혁 500주년 관련 기념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으로서 이런 행사에 참여하는 최초의 교황이 됐습니다. 교황은 이날 예배에서 “우리(카톨릭과 루터교)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많다”며 “기독교를 갈라놓은 오해를 뛰어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교황은 이날 카톨릭과 루터교 간의 관계 증진을 서약하는 공동 선언에 서명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종교통합 행보는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4. 일본, 한국 지진 발생
지난 11월 22일 새벽 일본 후쿠시마 현 앞바다에서 규모 7.4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이번 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는 최대 높이 1m 40cm가량으로 예상보다 약해 피해는 크지 않았습니다. 일본 기상청은 이번 지진도 동일본대지진의 여진으로 보인다며 앞으로도 대규모 지진의 추가 발생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번 지진으로 후쿠시마 제 2원전 3호기의 사용 후 핵연료 등을 보관하는 풀의 냉각용 펌프가 작동을 정지해, 핵연료의 냉각이 정지되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1시간 40분 뒤인 오전 7시 50분께 재가동됐으며, 후쿠시마 원전 및 원전 주변에 이상은 없다고 운용사인 도쿄전력은 밝혔습니다.
한국에서는 지난 9월 12일 규모 5.8의 지진이 경주에서 발생했습니다. 수도권에서도 진동이 느껴질 만큼 한국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강진이었습니다. 지붕이 부서진 한옥만 2천 100가구가 넘었고 첨성대, 불국사 등 국보급 문화재가 부서지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세계 각 곳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지진들은 자연재해로부터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진리탐구_144,000인의 신앙관

1.144,000인의 신앙관
1)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함
2)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3)

이 말씀은 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심장한 교훈을 주는데 이 말씀에서 말씀하신 “노래”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노래는 바로 십사만 사천 인 각 개인들이 겪은 경험에서 나온 노래이며, 그것을 체험한 사람 외에는 부를 수 없는 경험의 노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경험이란 또한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복음으로 인한 고난의 경험입니다.

어린양 되신 예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겪은 고난과 핍박의 경험들입니다. 십사만 사천은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그들을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순종하고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간다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이면, 어느 곳이라도 순종하며 따라간다는 말인데 이는 “예수님께서 가신 길” “예수님 께서 당하셨던 경험”을 그대로 하며 따라가며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더 자세히 말씀 드린다면 주님을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을 버리는 일, 주님을 따르는 길에 닥쳐오는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견디는 일, 또한 진리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 자아를 포기하는 일과 세상의 우상들을 포기하는 일, 그리고 세상의 쾌락이나 재물이나 명예를 포기하는 일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십사만 사천인은 무엇이든지 주님의 뜻이면 순종하고 따라갑니다. 그렇게 주님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고난을 견디며 극기와 인내를 배우며 그리하여 그 모든 과정을 견디며 그들은 그들만의 경험의 노래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흉내 낼 수 없고, 또 부를 수도 없는 경험의 노래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어디까지 따라가야 합니까?

“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 6:9-11)

다섯째 인에서“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은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에 진리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수많은 순교자들과 종교 개혁자들을 가리키며, 진리를 지키고 진리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은 순교자들입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계 20: 4-6)

위의 성경 말씀들을 통해 여섯째 인의 마지막 때,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도 주님을 위하여 진리를 전파하고 믿으며 순교의 피를 흘리며 추수를 위한 사업에 동참하는 수많은 순교자가 있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저희의 가진 증거, 곧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확신과 자신들만의 신앙의 간증과 체험을 가진 자들로서 죽기까지 충성하며 중세기에 있었던 많은 순교자처럼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는 사람들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 26,27)

144,000인 그들이 바로 오늘날, 주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과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하는 마지막 시대에, 자기 생명까지 아끼지 않으며 믿음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정_그리스도인의 가정 생활

인간의 회복과 향상은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부모의 일은 다른 모든 것의 기초가 됩니다. 사회는 가정들로 구성되고 그 가정들의 행위에 따라 좌우됩니다. “생명의 근원”(잠 4:23)은 마음에서부터 나옵니다. 지역 사회와 교회와 국가의 심장은 가정입니다. 사회의 안녕과 교회의 성공과 국가의 번영이 가정의 감화에 달려 있습니다.

옛날의 족장들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장막을 치는 곳마다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각 가정마다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들과 자녀들을 위하여 겸손히 탄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주 기도해야 합니다. 아내와 자녀들은 기도와 찬송에 연합하는 동시에 아버지는 가족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제단에 조석으로 희생을 드려야 합니다. 이런 가정에 예수님께서 머물기를 좋아하실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거룩한 빛이 비쳐 나와야 합니다. 사랑이 행동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은 사려 깊은 친절과 너그럽고 이기심 없는 예절 가운데 나타나 모든 가정적 상호 관계 가운데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 원칙이 실천되는 가정들 곧 하나님을 예배하며, 가장 참된 사랑이 그를 다스리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이런 가정들에서 아침저녁의 기도가 아름다운 향기처럼 하나님께 올라가고 그분의 긍휼과 축복이 아침 이슬처럼 간구자들에게 내려옵니다. 질서 정연한 그리스도인 가정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실재를 증거하므로, 불신자가 감히 논박할 수 없는 유력한 논증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녀들을 감화시키는 감화력이 그 가정에 역사하고 있으며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청년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의무는 그들의 가정에서 애정과 참된 관심을 가지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와 자매들에게 복을 베푸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그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봉사하는데 극기와 무아의 정신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한다고 해서 여성들의 신분이 결코 낮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신성하고 고상한 직분입니다. 언니가 그 동생에게 끼치는 감화는 얼마나 클까요? 누이가 바로 행하면 그는 동생의 성품을 결정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기도, 친절, 애정은 가정에서 큰 감화를 끼칠 수 있습니다.
자매들이여, 이러한 고상한 성격이 먼저 여러분 자신 속에 내재해 있지 않는다면 결코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지 못합니다. 마음의 만족, 애정, 친절, 명랑한 성품은 각 사람의 마음에 젖어들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그것이 다시 여러분에게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을 주관하시지 않으면 거기에는 불만과 도덕적 결함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주기를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기심입니다.
영혼을 시험하고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비단 큰 사역과 큰 싸움만이 아닙니다. 생애의 일상에는 때때로 곤란과 시험과 실망이 다가옵니다. 자주 인내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하찮을 것 없는 일상 업무들입니다. 모든 곤란을 대항하고 정복하는 데는 자신감과 결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서셔서 어디서든지 여러분의 위로와 안위가 되도록 하나님을 굳게 붙잡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Healing Story_기침에 좋은 차

 

찬바람이 불며 시작된 마른 기침은 그칠 줄 모릅니다. 여름과는 달리 건조한 겨울 공기는 호흡기 점막에 좋지 않아서 만성 기침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이렇게 시작된 잔기침을 더욱 악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관지에 좋은 것으로 따뜻한 차를 만들어 마실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따뜻한 차를 수시로 마시면 목 안에 수분이 공급되어 기침은 물론 각종 호흡기 질환도 예방할 수 있습니다.

1. 홍삼차
홍삼은 코와 인후, 기관지에 좋은 음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충북대학교의 한 연구팀은 기도 염증과 기도 과민성에 홍삼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 연구를 하였습니다. 홍삼을 먹인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으로 나눈 뒤, 두 그룹 모두 배기가스를 흡입하도록 하여 기관지염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 그룹에 기도 과민성을 높이는 약을 투입해 갑작스러운 호흡곤란 발생 상황을 재현했는데, 홍삼을 먹지 않은 그룹은 기도 과민성이 100%나 상승했지만, 홍삼 섭취 그룹의 기도과민성은 50% 상승하는 데 그쳤다고 합니다. 홍삼의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물에 달여 먹는 것보다 홍삼을 통째로 잘게 갈아 먹는 것이 더 좋다고 합니다.

2. 도라지차
도라지차는 기침뿐 아니라 비염이나 천식에도 좋은 차입니다.
도라지는 오랫동안 한방약재로 쓰여 왔는데, 폐나 기관지에 뛰어난 효과를 보이는 약재로 가래나 기침약으로 많이 쓰여 왔습니다. 도라지에 함유된 사포닌 성분과 플레티코닌 성분은 가래와 인후통, 기침과 같은 기관지 질환에 효과적입니다. 오래 묵은 도라지는 인삼에 버금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도라지는 건조시켜서 도라지차로 마시면 됩니다. 또한 배와 꿀을 이용해서 즙을 내서 먹어도 좋습니다.

3. 모과차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이 있듯이 생김새는 못생겼지만, 그 효능만큼은 뛰어납니다. 모과에는 사포닌, 사과산, 구연산, 비타민 C 등이 함유되어 있는데 특히 비타민C 함량이 월등히 많아 피로회복과 감기예방에 좋습니다. 또한 공기가 건조하여 목이 아프거나 기침, 가래 증상을 보이는 기관지 질환에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과를 자주 섭취하면 오히려 변비가 올 수도 있으며 신장 질환이 있는 사람에게도 좋지 않다고 하니 주의해야 합니다. 모과를 잘게 썰어서 말리거나 모과청을 담아두었다가 차로 마시면 됩니다.

4. 돌배차
감기에 걸렸을 때 배즙을 먹는 것과 같이 돌배는 가래나 기침 기관지 치료에 좋다고 합니다. 자연산 돌배는 약성이 매우 우수하여서 기관지염, 천식, 폐 질환에 대표적인 약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햇볕에 잘 말린 돌배 30g을 물 1리터에 넣고 물이 끓으면 약한 불로 10~15분 더 끓여서 식힌 후에 물 대신 수시로 마시면 됩니다.

5. 오미자차
오미자는 몸에 있는 독소나 노폐물 배출을 원활하게 돕는 효능이 있어서 기침과 가래, 각종 호흡기 질환 예방에 좋다고 합니다. 말린 오미자 30~40g을 잘 씻어서 찬물 1리터에 넣고 냉장고에서 24시간 우려내어 줍니다. 우려낸 물을 하루 2~3잔 정도 복용하면 됩니다. 오미자는 따뜻한 물에서 우려낼 경우에 충분히 우러나지 않을 수 있으며 떫은 맛이 강해지고 영양분이 파괴될 수 있다고 하니 꼭 차가운 물에서 우려내야 합니다.

6. 귤피차
귤피차는 호흡기 점막을 자극하여 분비물을 증가시켜 가래를 희석시키는 효능이 있어서 겨울철 감기에 좋습니다. 그리고 귤피에는 헤스페리딘이라고 불리는 비타민 P가 있는데, 이는 비타민 C의 기능을 보강하여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하며 순환을 촉진하고 항균작용을 해줍니다. 비타민 P는 체내에서 합성되지 않기 때문에 음식으로 섭취해야 하며 귤, 레몬, 오렌지, 살구, 체리, 메밀 등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감귤의 알맹이에 붙은 흰 섬유질에 풍부한데, 수용성이어서 몸 밖으로 쉽게 배출되기 때문에 많이 섭취해도 부작용 염려가 없습니다. 비타민 P가 부족하면 모세혈관이 약해져 가벼운 충격에도 쉽게 멍이 들고, 코와 잇몸 등에 출혈 양상을 보이곤 합니다.
귤피차를 만들려면 카바이드나 왁스처리 가능성이 있는 일반 귤껍질을 사용하기보다는 유기농이나 무농약 귤을 권하고 싶습니다. 귤껍질을 잘게 썰거나 적당한 크기로 뜯어서 햇빛에 바싹 말린 뒤에 기름 없이 살짝 볶아서 밀폐 용기에 넣어 냉장 보관합니다. 감귤 껍질을 실내에서 말리면 향긋한 귤향과 함께 천연 가습기 역할도 해주므로 그것도 좋을 듯 합니다. 잘 말려진 귤피를 뜨거운 물에 넣어 우려먹거나 끓는 물에 넣어 끓인 후에 차로 마시면 됩니다.
겨울철 기침에 좋은 차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우리 앞에 펼쳐 놓으신 주님의 사랑에 말문이 막힙니다. 어느 것 하나 무익한 것이 없고, 작은 감귤 하나에도 여러 가지 유익함으로 가득 채워 놓으신 주님의 마음! 마치 시골집에 가면 보따리 보따리 넘치도록 채워서 보내시는 어머님의 손길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 중에 천 가지 만 가지 형태로 우리를 도우시고 챙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성령의 안약을 발라서 밝히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보다 그 도우심 안에 사는 자가 정말 복된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