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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

 

교회가 핍박을 당하던 시대가 오히려 그 순결과 신실함을 유지했던 찬란한 시대였음을 우리는 역사에서 살펴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투옥과 칼과 고문과 사형 명령 등 모진 시련의 칼바람이 진짜 그리스도인들과 가짜 그리스도인들을 구분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핍박과 시련이 사라지자 자아만족과 돈과 세상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가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실생활에서 부인하는 가짜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점점 세속화 되어가는 현대 기독교는 이제 세상과 별 차이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보며 실망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이 무엇인지를 이번 기사를 통해 깊이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부_누가 예수님을 진짜로 믿는 사람들인가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아니면 어느 인간의 학설을 따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좋은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모본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자들입니다. 세상을 살기에 편리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또한 제시하여 주신 길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길과 세상의 길 사이에는 항상 투쟁이 있기 마련입니다.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드릴 때에는 동시에 예수님을 자기의 주인이요, 왕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 안에는 예수님을 자기 편리한대로, 자기 마음대로 믿고 사는 가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있는 이상한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기업이 되어 가는가 하면 어떤 교회들은 사회 친목 단체나 클럽처럼 변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좌표를 다시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겠습니다. 과연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어떠한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7:13,14)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일이란 참으로 많은 희생이 필요되는 생애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기쁨과 즐거움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거듭나서 취미와 좋아하는 것들이 바뀌어 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쉽게, 그리고 편하게 사는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3: 1-3).

세상에서도 재미를 보고 하늘도 가겠다는 태도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길에는 중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적당히 믿는 사고방식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성경과 진리는 피 묻은 것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자기들의 생명을 바쳐가며 신앙과 진리와 그리고 표준을 고수하여 왔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는데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눅13:23)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궁금증은 한결같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 즉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어떠한 각오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길인지를 아주 명료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13:24)라고 말씀 하시고는 길을 가시다가 뒤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을 향하여 다시 더 자세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 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여 다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 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 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5-33).

예수님의 제자의 부르심은 아주 명백합니다. 따르기 전에 먼저 어떠한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부모 형제 사이에 선택하여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먼저 선택하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정욕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를 때에 자연히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따르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길입니다. 그 길은 어떤 의미에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옛날에 십자가를 지는 일이 그러했던 것처럼....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또한 주님의 축복 때문에 그것들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재산이나 시간이나 달란트(재능)들은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따르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러한 제자됨의 댓가에 대한 가르침이 타협되거나, 가르쳐 지지 않고 망각되어 버렸을 때에 교회는 곤두박질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세상 사람들과 교인들 사이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로 눈앞에 두고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예비하는 생활을 살아야 하는 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을 만나기를 예비하라.” (암4:12). 우리는 하늘에서 거룩한 천사들과 이웃이 되어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초림하셨을 때에도 그 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던 선지자 침례 요한도 회개의 기별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오시는 메시야를 마음속에 받아 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서 그들의 생애의 개혁과 부흥을 촉구하는 회개의 기별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사명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이렇게 예언해 두었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눅3:4-6)(사40:3-5).

그렇습니다. 산처럼 높아져 있는 우리의 교만한 마음들이 낮아져야 하겠습니다. 골짜기처럼 깊숙하게 들어가 있는 음흉한 마음들과 이기심들이 돋아져 평평하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타협하며 적당하게 살아가는 굽은 마음들이 곧바로 펴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돌들과 파인 곳들이 많은 길처럼, 거칠고 모나며 세상의 잔재들로 가득찬 성품들이 치워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시는 길이 평탄하여 지도록 말입니다. 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눅3:7-9).


마태복음 13장에는 또 다른 예수님의 호소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4-46). 보화가 감추인 밭의 값은 얼마였는가요? 백만불? 천만불? 아닙니다. 그 밭의 값은 그 농부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습니다. 진주의 값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진리와 영생의 댓가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의 댓가는 자기의 옛 생애를 완전히 다 포기하고 예수님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을 좁은 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가장 즐거운 길입니다. 그 길은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길입니다. 그 길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쉼을 주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워야 하는 길입니다. 진리를 발견하려고 헤메던 인간이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만나고 나면 과거에 살던 죗된 길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신기루와 같은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에 속임 당했던 자신을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것이 거듭난 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영생의 길이 그렇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 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1:21,22)라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합세하여 우리들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사모하라...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 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3:10-12,14).

제2부_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인가요?

 

A.W.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 같은 목사님이 계셨던 것은 기독교계에 큰 축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평판을 들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부패한 현실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타협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선포했습니다. 토저 목사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깊이 있는 말씀의 이해와 박식한 신학적 이해를 눈물의 기도로 반죽하여 개혁의 메세지로 전할 때에 많은 그리스도인의 가슴을 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써만 심령을 부흥시키는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평생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혁과 부흥에 관한 40여권의 명저들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라는 복음주의 교단의 목사였습니다.
그는 물질만을 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가 생산해 낸 교회의 자본화와 그리스도인의 가야할 길인 성화 대신 평안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오염된 신앙, 명예는 추구하지만 십자가는 부인하는 가짜 신앙, 그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부흥을 기획하지만 성령이 메마른 교회, 신자 수의 증가를 위한 비즈니스적인 영업법을 도입한 회개 없는 그리스도 영접, 체험은 있지만 신학이 없는 신앙과 죽은 정통만을 간직한 채 하나님을 만난 뜨거운 감격이 없는 신앙으로 전락한 현 시대의 신앙의 허상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진짜 신앙과 가짜 신앙을 정직하게 파헤친 그의 글들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진단해 봅시다!

1) 진짜는 험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진리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과학, 철학 및 그 밖의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것들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역설적이며, 기독교의 신앙 체계의 뿌리에 놓여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증명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신앙이 필요 없습니다. 신앙은 실험이나 논리적 증명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십자가는 자연인, 곧 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완전히 대립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철학은 자연인의 사고와 정면 충돌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고전 1:18 참조).

그리스도인의 역설, 하나
그리스도인의 역설은 여러가지 면에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믿지만 전보다 더 충만한 삶을 누리며, 또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활동하지만 동시에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거듭난 후에는 더 이상 이 땅이 고향이 아님을 믿습니다. 공중에서는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땅에 내려오면 서툴고 보기 흉한 쏙독새처럼 그리스도인은 천상의 자리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살아가는 방법들과는 잘 조화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아들로서 이 땅의 사람들 중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세상의 방법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안전하기 위해서 오히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며,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잃어버립니다. 만일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시도한다면 오히려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합니다.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하고 낮아지기를 거부한다면 이미 낮아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낮아진다면 이미 높아지고 있는 것이며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하고, 가장 강할 때가 가장 약합니다. 가난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부유해지면 그 능력이 사라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역설, 둘
남에게 가장 많이 주면 자신이 가장 많이 소유하게 되고, 가장 많이 소유하려고 하면 가장 적은 것이 남습니다. 가장 낮아졌다고 느낄 때 가장 높이 있으며, 자신의 죄를 가장 많이 깨달을 때 가장 죄가 적습니다.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때 가장 지혜로우며, 자신이 가장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믿을 때 가장 무지합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많은 일을 하는 것이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 가장 멀리 가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기뻐할 수 있으며, 슬픔 중에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원을 얻었다고 믿지만, 장차 구원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소망 중에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공포심을 갖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완전히 압도되어 자신이 망했다고 느끼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에서 깨끗케 되었음을 알지만, 자신의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음을 알고는 괴로워합니다.
그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분을 가장 사랑하며, 자신이 비록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존재이지만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분과 친구처럼 대화합니다. 그는 자신이 본래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느끼면서도 그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치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확신하며, 하나님에게는 가장 보배로운 존재인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놀라운 존재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비관주의자이며, 동시에 낙관주의자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는 비관주의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십자가에서 영광의 주님에게 쏟아진 심판이 모든 사람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심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밖에서 인간적인 소망을 찾으려는 시도를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는 인간의 노력이 아무리 고결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비관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평온한 낙관주의자입니다. 십자가가 온 세상에 유죄선고를 내린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온 우주에서의 선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국 모든 사람들의 문제들이 전부 해결될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이 궁극적인 승리를 기다립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그리스도인들은 믿기 힘들 정도로 참으로 놀라운 존재입니다!

험한 십자가의 길
그러나 예수님을 받아들이는(영접하는) 행위로써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한다는 주장이 맞는 말이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기독교는 받아들임과 거부, 긍정과 부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것은 회심하여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뿐만 아니라, 그 후에 신앙생활을 계속할 때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평생의 싸움을 다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날마다 이 진리는 적용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미워하시는 것들을 모두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부르실 때, 결코 쉬운 길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지금 전도할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꺼리는 것들을 주님의 제자들에게 서슴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전도자들 중 주님처럼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13)라고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요? 그리고 안타깝게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토록 험하고 힘든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도덕적 능력 자체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도덕적 풍토는 우리 주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엄하고 질긴 신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현재 종교적 온실에서 만들어지는 허약하고 깨지기 쉬운 신자들은, 과거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죽어간 성도들에 비교하면 참으로 한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희생 없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유약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재미있는 것들로 즐겁게 해주어야만 교회에 나옵니다. 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죄를 미워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거부해야 하며, 선한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악한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언제 깨달을 것인가요? 이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앞으로 전진할수록, 그리고 높이 올라갈수록 우리 앞에는 더 많은 어려움이 놓여 있고, 우리 영혼의 공격이 더 거세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어려움과 고난의 길을 즐거움으로 가며, 또한 그 고난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성령 충만한 삶은 강도들이 창궐하는 숲을 통과하는 순례의 길이요, 마귀와 처절하게 싸우는 전쟁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언제나 갈등이 있게 마련이며 때로는 자신의 본성과 사력을 다해서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승리하는 방법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2) 진짜는 솜사탕을 거부하고 가시면류관 복음을 믿습니다.

생사의 문제
세상에는 극소수이지만 생사의 문제처럼 필수적인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은 바로 생사가 달린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며,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오직 그분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적용되어야 하고,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영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질문은, 객관적으로 제공된 구속이 어떻게 하면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진 구원이 되는가? 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일이 어떻게 내 안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세 가지입니다. 이 중대한 질문에 대해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리스도를 당신의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여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라의 세 가지 답을 내 놓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대답들은 사실 다 동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영접은 만병통치약?
우리는 영적으로 게으릅니다. 그래서 신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할 때 가장 쉬운 길을 택하려는 쪽으로 기울어지며, 그리하여 그리스도 영접을 만병통치 약처럼 사용하여 보편적으로 적용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순간적인 마음의 충동에 의해서, 고통이나 손해 없이, 평상시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수고 없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태도는 생사를 가르는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만일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이 유월절의 피를 받아들인(영접한)후에 계속해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겠다고 고집했다면,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인(영접한) 후에 계속 먼 나라의 돼지들 틈에서 생활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요?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거기에 따르는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뜻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험은 아주 독특한 경험으로서, 이 연합은 지적인 측면, 의지적인 측면, 그리고 감정적인 측면을 포괄합니다. 지적인 면에서 신자는 예수님이 자신의 주시요, 그리스도라고 확신합니다. 의지적인 면에서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결과 감정적인 면에서 그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오는 큰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주로 인정하는 데는 많은 혁명이 따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일부분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분 이외의 다른 것들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친구들을 우리의 친구들로,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우리의 원수들로, 그리스도의 방법들을 우리의 방법들로, 그리스도의 거부하시는 것을 우리가 거부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미래를 우리의 미래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람을 안고 사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은 바람을 받으며 세상을 거슬러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람이 불지 않는 산허리 양지 바른 곳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성장시키고 비신자를 구원하겠다는 우리의 결의가 최근에 현대의 세일즈맨들이 사용하는 기법을 교회에 들여와 사용하는 죄를 범하게 한 것 같습니다. 세일즈맨들은 상품의 좋은 점들만 이야기하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것처럼 지도자들과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분이 마음의 평안을 주시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사업이 번창하게 해 주시고, 가정을 지켜 주시고, 언제나 행복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말을 믿고 교회에 나온 사람에게 첫 찬바람(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생기는 시련이나 어려움)이 몰아치면 그들은 떨면서 카운슬러에게 찾아가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말해 줄 지를 모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진리에 충실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복음서에 보면 그분은 진리의 전모를 제시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엄격한 진리에 너무나 부담을 느껴 돌아설 때, 따라가서 장미빛 약속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아담의 후손들에게 인기가 없을 것을 아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인기를 얻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분과 동행하는 사람들도 그분의 얼굴에 몰아치는 바람을 역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 신앙이야? 가짜 신앙이냐?
솜사탕처럼 달콤한 복음을 제시하면서 산허리 양지 바른 곳을 약속하는 것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속이는 것입니다. 소위 ‘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복음을 제시할 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들에서 많은 ‘쌀 그리스도인’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시는가요? 그분은 죄사함, 내적 청결, 하나님과의 화평, 영생,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 유혹의 극복, 부활, 영화롭게 됨, 하나님과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처소들을 약속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영적인 축복이지 물질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진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기 때문에, 그 승리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반면, 가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바람이 싫고, 산허리의 양지 바른 곳이 좋다라는 확신만 있을 뿐입니다.

3) 진짜는 행복보다 거룩을 열망합니다.

참된 영성의 척도
영성의 개념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마다 서로 다릅니다. 어떤 모임에서는 신앙에 대해서 끊임없이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또 어떤 모임에서는 열심있고 활기에 찬 사람, 또는 가장 먼저, 가장 길게, 가장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이 영성 있고 영적인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습니다. 열렬한 간증, 빈번한 기도, 큰 찬양이 영성과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들 자체는 영성도 아니고, 영성의 증거도 아닙니다.
참된 영성의 척도는 우리에게 주로 나타나는 욕구들이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욕구들은 언제나 우리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욕구들로, 우리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우리의 삶을 통제할 만큼 강력합니다.

* 첫째: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욕구
자신들이 남보다 더 거룩하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갈망은 실상 그들이 거룩하지 않다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정말로 신령한 사람은, 기쁜 일이 생겨나도 교만해지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부어 주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존 웨슬리는 초기 감리교 단체들 중 한 단체의 구성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진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떻게 하면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즐기기 위해 교회에 오기 때문입니다.”
* 둘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
이 세상에서 스스로 고난과 수치를 당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신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늘 그분의 영광을 갈망합니다.
* 셋째: 스스로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
역경과 환난은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찾아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르지만, 사실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가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되는 환난을 그리스도를 순종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주권적 지배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 넷째: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하려는 욕구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고, 하나님께서 단지 표면만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 보고 평가하시듯이 그것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의 표시입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우쭐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곤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를 고집합니다.
* 다섯째: 의로운 삶에 대한 욕구
신령한 사람의 특징은 옳게 사는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세상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집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이 땅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남은 인생을 가치있게 살며,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여생의 길이를 결정하시도록 맡기고 평안을 누리며 삽니다.
* 여섯째: 기꺼이 희생하려는 마음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은 주목받지 못해도 그들이 향상되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시기심이 없습니다. 그의 형제들이 영예를 얻을 때 그는 기뻐하는 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이 그의 지상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그도 역시 기뻐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보다 높아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는 자신의 낮아짐을 얼마든지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 일곱째: 시간을 초월하는 마음
영적인 사람은 시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신앙에 의해서 세상의 풍조와 시간의 유한성을 초월한 그는 마치 이미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에 도달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법을 배웁니다. 이런 사람은 유명한 사람보다는 유용한 사람이 되고,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제3부_참된 그리스도인이 가는 길

 

우리는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는 세상의 편한 방법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상과 마찰 없이 지내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깊은 잠에 빠진 기독교에게 이제 깨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1) 세상의 비웃음과 따돌림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 세상과 타협하며 미지근하게 살지 않습니다.

과거에 세상이 교회를 따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주도권을 쥐고 앞장서 나갔으며, 세상은 교회를 뒤따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반대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무릎을 꿇고 세상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과거의 교회는 어린양의 아름답고 혈색 좋은 신부였으나, 지금의 교회는 쪼글쪼글한 늙은 걸인 같습니다. 지금의 교회는 세상의 거리로 나가 세상 사람들에게 동전 한 닢을 구걸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한때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요?

오늘날 교회는 ‘제발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면에서 당신들과 똑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세상에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성경적 기독교와 세상을 섞어놓은 기독교, 즉, 혼혈(混血) 기독교를 전하지 않는가요?

명심하세요. 십자가의 기독교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아첨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교회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이오니 우리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성경적 원리 위에 우뚝 서서 세상에게 성령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올 것입니다. 당신은 세상에 적당히 적응하면서 현재의 미지근한 상태에 계속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의 미지근한 상태에 계속 머물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진리를 깨닫고 신앙의 열매를 맺고 또한 편안히 죽어서 그리스도를 떳떳하게 만날 수 있다고 믿습니까?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미지근한 신앙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 미지근한 신앙 상태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령충만을 받아야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의 경험을 한 사람은 그런 경험이 있기 전에 누구나 자기를 비우는 단계를 거쳤습니다. 이 단계에서 그들은 공허감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위대한 설교가 중 하나였던 D.L.무디는 성령의 강력한 능력에 의지하여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역 초기에 자신에게 있는 텅 빈 공허감에 시달렸기 때문에 더 성령 충만을 사모했고, 그 결과 그는 큰 영적 능력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험과 불안과 공허감이 찾아올 때, 감정의 기복에 따른 신앙을 하기 때문에 그 기회를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분의 성령으로 마음을 채우는 경험을 하지 못하고 불안해합니다.

공허감이 찾아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찾아 오셔서 쟁기질을 하셔서 돌밭 같은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드시는 작업을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때로는 여러 가지 사건이나 싫은 사람을 통하여 우리 마음을 쟁기질 하시며 우리 마음 밭을 엎으십니다. 다윗은 이런 체험 후에 밭가는 자가 내 등에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시 129:3)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를 비우시고 마음을 뒤엎으시는 하나님의 작업을 깨닫고 그 시련의 기회를 성령 충만함을 받는 기회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날마다 죽어야합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처럼 기독교는 날마다 죽어야 하는 종교입니다. 신앙생활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얼굴에서 항상 슬픔이 베어 나와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육체적으로는 고난이 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기쁨이 충만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이런 영적 즐거움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에서 싸구려 기쁨을 사다가 거기에다 예수라는 이름을 붙인 다음 예수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기쁨으로서, 육신을 죽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고 난 후에 주님의 임재와 동행함으로 얻는 하늘의 평안한 기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육신을 죽이는 것은 자아를 비우는 것이며 우리 속을 비우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을 그분의 성령으로 채우실 수 없습니다. 우리의 뜻과 육신의 욕망을 버리고 대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채우심을 받고 그분의 뜻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만이 뜨거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2)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만큼 두려워한다면,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칭찬을 받든 비판을 받든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 의하여 좌우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뜻대로만 살도록 결심해야 합니다.

- 능력을 얻는 비밀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사 8:13). 어떤 시대이든 간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음성만을 들었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 것(사 8:11)을 강력하게 경고하시며 이사야에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자가 되라는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말씀은 “너는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가지 말라. 그들의 행동 방식을 따르지 말라. 대신 여호와를 거룩하다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거룩한 피할 곳이 될 것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여호와를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흐름이 어떻든지 하나님의 뜻과 음성에만 순종하고 따르는 사람만이 능력의 사람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흐름에 맞지 않을지라도 과감히 버리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 하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성경적인 지식이나 진리 위에 서지 않고 이상한 감정적인 체험만을 고집하는 위험스러운 사람들 때문에 신앙적 체험이라는 말이 거부감을 줍니다.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경의 진리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체험 없이 성경만을 아는 것은 하나의 지식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체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셔서 행동하고 느끼고 일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이 땅에 오셨다 할지라도 그분은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와 똑같이 행동하고 느끼고 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찬식에서 떡을 먹는 것처럼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우리는 날마다 먹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소유하고 나의 영혼 안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입이 음식물을 섭취하여 위로 넘기듯이, 우리의 영혼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며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을 소유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세요.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려는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라고....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들을 추종하는 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화목하게 지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엽고 보기에 안쓰러운 일은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목회자가 가장 좋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지역의 유명한 목회자를 찾아다니면서 식사를 대접하는 것을 보는 일입니다. 필요한 교육을 받고 하나님을 위해서 준비되었다면 다만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드리세요. “오, 하나님! 제가 준비되었습니다”라고. 그런 다음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그곳에 가서 일하라고... 윗사람을 찾아다니며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지 말고.....

사람들의 아첨에 넘어가지 말고 그들의 비판에 흔들리지 마세요. 정당한 비판도 있지만,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칭찬을 듣든, 비판을 받든 우리는 사람들의 손에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미래와 우리 자신을 사람들의 손에 맡기지 마세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며 주님의 지도와 인도하심을 구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의 의견이나 판단이나 평판에 자신을 맡기지 말고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맞으면 무슨 일이든지 두려움 없이 착수하며 그분 안에서 확신 있는 삶을 살아가세요.

-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세요.

오늘날 종교 세미나나 여러 가지 종교 행사에 참석해 보면 많은 지식들을 얻는 듯이 생각됩니다. 예언, 유대의 역사, 기독교 교리들을 다루며, 심지어 헬라어나 히브리어까지 곁들인 세미나들은 우리들 스스로가 유식해졌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세미나, 교리, 성경지식, 종교적 형식들이 중요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면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숭모하기 위한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단지 죄의 형벌에서 건짐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실현시키는 종교인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란 하나님을 닮은 자녀들이 창조주를 깊이 사랑하여 진정으로 그분을 섬기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그분은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며, 지혜가 되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세요.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분 밖에서 찾겠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7) 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깨달음이 주어지는 곳은 바로 성소입니다. 그곳, 중세의 저술가들이 페너트레일리어 (penetralia)라고 불렀던 곳에서, 당신의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자신에 대하여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것을 모두 당신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가장 좋은 자리를 내어드리고 당신 자신을 그분께 드리세요. 온 정신과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당신을 얽매어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줄들을 끊어버리고 그분만이 당신의 모든 것이 되게 하세요. 예수님은 모든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찾았는가요? 예수님은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님께 당신을 온전히 바치지 않겠는가요?

 

3) 깨끗한 인격으로 성령과 동행합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인격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분이므로 우리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이 언제나 거룩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그분은 깨끗한 마음의 성소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과 동행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암 3:3).

- 동행의 조건

첫째, 가는 방향에 대해 합의해야 합니다. 만일 가려고 하는 방향이 다르면 동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둘째, 목적지에 대해 합의해야 합니다.
셋째, 그들은 어떤 길을 택할 것인지에 대해 합의해야 합니다.
넷째, 서로 동행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 천국 가기 위한 보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령과 동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기독교를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원하는 것은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불하는 보험료는, 주일에 불편하지만 참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헌금을 드리고 저질스러운 쾌락을 삼갑니다. 그들은 보험이 무효 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작은 불편들을 감수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이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를 자기들 편한대로 해석합니다. 성경에 나온 엄하고 두려운 말씀들은 그들의 손에 의해 제거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된 신앙을 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목적이 아니라 사교적인 목적을 위해 교회에 출석합니다.

- 성령은 깨끗한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성령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체적인 인격으로 다가오십니다. 가장 구체적인 설명을 우리는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데, 성경은 추상적으로나 공상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성령을 붙들면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하나이신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알리십니다. 우리의 생각들은 그분의 성소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곳은 우리의 사고요, 의지요, 감정이요, 지성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과 동행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인격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분은 악의, 이기주의, 속임, 어리석음, 교활함, 음란한 말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만일 당신이 이런 것들에 빠진다면 그분은 침묵하실 것이며, 당신은 그분의 은혜롭고 아름다운 임재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도와주지 않으실 것이며 그분이 당신 안에 계속 머물고 계시지만, 그분은 상처받은 채 거기에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성령과 동행하려고 한다면 성령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이 언제나 거룩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그분은 깨끗한 성소를 원하시며 그분의 처소를 영광스러운 곳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은 불경스럽고 더러운 전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 문제가 되는 것은 끊으세요.

당신의 영적인 진보를 방해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생활을 위한 실제적이고 유용한 원리요 성경의 교훈입니다. 영적으로 건강 하려면 영적으로 해가 되는 것을 끊으면 됩니다. 당신은 성령과 즐거운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는가요?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제까지 즐기던 것들을 끊으면 불편할 뿐 아니라 남들에게서 비웃음과 따돌림을 당할 까봐 망설이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겁쟁이가 되어버렸는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고, 야고보는 칼로 죽임을 당했고, 바울은 목이 잘렸고, 또 많은 제자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냉대와 핍박과 순교의 역사가 아닌가요?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가 이런 교회의 역사를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의 따돌림을 두려워하는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를 지고 남들과 다르게 살아라”라는 말에 놀라서 비웃음을 당하기 싫으니 “내게 편한 길을 좀 보여주세요” 라고 말하려 합니까?

- 말씀을 묵상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우리는 성경말씀 안에서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범하기 쉬운 잘못 중의 하나는 묵상보다 연구를 중요시 하는 것입니다. 연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묵상이 더 중요합니다. 머리로써 성경에 접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으로써 접근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진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변화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면 하나님께서 주신 책을 깊이 묵상해야 하며 진리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세요.

우리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니콜라스 헤르만(Nicolas Herman, 1605~1691, ‘하나님의 임재 연습’의 저자)은 그의 저서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짧은 시간이 주어질 때 그것을 놓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라고 했으며, 심슨 박사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대해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나침반의 바늘이 항상 북극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바쁜 생활과 와중에서 복잡한 삶을 살아갈 때에도 우리의 주의를 빼앗기지 말고 늘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다. 원하기만 하면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분의 임재를 연습하며 항상 동행하라.”


마치면서

우리는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대로가 아닌 세상의 성공과 출세의 방법대로 운영되어 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좌표를 다시 돌아보며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이 무엇인지를 되짚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을 때에 과연 무엇을 의미하신 말씀이었는지를 다시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부르심이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취하라는 간절한 호소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벧후 3: 11~18)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들어 주님을 바라봄으로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독자 분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신앙인_율법과 복음의 완전한 조화의 삶을 보여준 요한 웨슬리

 

당시 영국에 나타난 영적 쇠퇴는 율법 폐지론의 교리가 빚어낸 결과였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도덕률을 폐지하셨으므로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벗어났고, “선을 행해야 할 책임감”에서도 해방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영원성을 인정하면서도 목사들이 사람들에게 율법을 순종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무용한 일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택한 사람들은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과 덕성을 실천하게 되고, 이와 반대로 영원히 버림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능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택함을 받은 자들은 은혜를 받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은총을 박탈당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이 범하는 악행은 참된 범죄가 아니며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으로 여길 것도 아니므로 그런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고백하거나 회개로써 그런 죄를 끊어버릴 필요도 없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큰 위반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라도 만일 택함을 입은 자가 범한 것일 때에는 “하나님께서 죄로 간주하지 아니하신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택함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거나 율법에 금지된 것은 어떤 것이나 행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본질적이요 뚜렷한 특징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괴상한 교리는 본질적으로 후세의 일반 교육자와 신학자의 가르침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의의 표준인 하나님의 율법이 결코 불변(不變)의 것이 아니라 도덕의 표준이 사회 자체의 현실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항상 변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성격을 변경할 수 없도록 고정시켰다는 하나님의 선고에 대한 교리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실상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게 하였습니다.

웨슬리는 율법 무용론자들의 그릇된 의견을 단호하게 반대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의문의 율법과 함께 십계명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 “도덕적 율법은 주님께서 결코 폐지하지 아니하셨다. 그분께서 오신 것은 그 율법의 어떤 부분을 삭제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이 율법은 결코 폐할 수 없는 것이며, ‘충실한 증거자로서 하늘에 굳게 설 것’이다. …그 율법은 태초부터 있었는데, 그것은 ‘돌판에 새기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인류의 자녀들이 창조자의 손에서 나올 때 그들의 마음에 모두 새겨졌다. 그리고 한때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문자로 기록되기까지 하였지마는 오늘날에는 죄로 말미암아 그것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선악에 대한 의식이 다소나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한 그 율법은 완전히 폐지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율법의 모든 부분은 각 시대의 온 인류가 지켜야 할 의무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와 환경에 따라 좌우될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 그리고 그 상호 간의 변경될 수 없는 관계에 의하여 좌우되어야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율법과 복음의 완전한 조화를 아래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율법은 끊임없이 복음을 위한 길을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로 가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복음은 항상 우리를 인도하여 율법을 더욱 정확히 성취하도록 한다. 예컨대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성결하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모든 요구에 대하여 부족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으로는 불가능하지마는 이처럼 사랑을 주고, 겸손하고 성결케 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게 된다. 우리는 복음, 곧 기쁜 소식을 붙들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진다. 곧 ‘율법의 의’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게 된다.”

또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장 큰 원수 가운데는 ‘율법을 기탄없이 공격하고’, ‘율법을 악한 것으로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깨뜨리도록(율법에 대한 의무를 폐기하는 것) 가르치되, 율법의 가장 큰 조항이나 가장 작은 조항뿐 아니라 율법 전체를 온전히 깨뜨리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허망한 일 가운데도 가장 놀라운 일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율법을 전복하면서도 그것을 높이는 줄로 믿고, 주님의 교훈을 폐하여 버리면서도 그분의 사역을 확장하고 있는 줄로 여기는 일이다. ‘주여 평안하니이까’라고 말하면서 입을 맞춘 유다와 같이 행동한 그들이 예수님을 과연 높이고 있는가.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네가 입맞춤으로써 인자를 파느냐’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님의 보혈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분의 면류관을 벗기는 일과 그분의 복음을 발전시키는 체 하면서 율법의 어느 부분을 삭제해 버리는 일은 입맞춤으로 그분을 배신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믿음을 전하는 자로서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순종하여야 할 어떤 적은 부분이라도 제해 버리려는 태도를 취하거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을 조금이라도 약하게 하거나 무효로 만드는 자는 유다에게 한 정죄의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복음을 전하면 율법의 모든 목적을 다 하는 것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그것을 전연 부인한다. 복음은 소위 율법의 첫째 목적, 곧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아직도 음부의 구덩이에서 그냥 잠자고 있는 자들을 깨우는 일을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죄를 깨닫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속량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진정으로 느끼지 아니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건강한 자, 혹은 스스로 건강한 줄로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의원을 부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대들은 먼저 그들에게 그들이 병든 사람인 것을 깨닫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그대들의 수고에 대하여 그들은 감사히 여기지 아니할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가 완전하다고 생각하고 아직 그 마음을 깨뜨리지 아니한 자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웨슬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한편 “율법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2∼3시간씩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생활 습관은 일평생 계속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그의 감정을 건드려도 자제할 수 있는 침착한 사람이었으며 매사에 꼼꼼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였습니다. 반대자들이 아무리 그를 공격하여도 두려워하거나 요동하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남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에는 그는 항상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주었고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다 주었습니다.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종의 신앙과 겸손, 불굴의 열성, 극기, 헌신은 오늘날의 교회에 그대로 반영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철저한 헌신자였으며 항상 낙천적이고 밝은 마음과 겸손하고 절제 있는 생활을 하였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나이 80세가 넘은 만년에 가서, 곧 반세기 이상의 봉사의 생애를 통하여 50만 명 이상의 영혼들을 신자로 얻었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였으므로 영광스러운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정_참된 가정 건설의 기초

1.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곳 ― 부모는 자녀의 장래 행복과 유익을 조심성 있게 보호할 막중한 책임과 가정을 가능한 매력적인 곳이 되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재산이나 금전을 얻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아이들에게 가정은 세상에서 가장 매력 있는 곳이 되어야 하며 특히 어머니가 계신 것이 가장 큰 매력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민감하고 사랑스런 천성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기뻐하고 슬퍼합니다. 친절한 교훈과 사랑의 말로 어머니는 자녀의 마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가정은 쾌활해야 합니다. 가정 분위는 항상 자녀의 마음에 그들의 어린 시절 가정을 하늘 다음으로 화평하고 행복한 곳으로 생생하게 기억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부모에게 화평과 행복을 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2. 깨끗하고 단정하고 규칙적인 곳 ― 신자들은 비록 가난할지라도 자신이나 가정이 깨끗하고 단정하고 규칙이 있어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올바른 가정 관리에 꼭 필요한 요건입니다. 병은 원인 없이는 오지 않으므로 깨끗이 하는데 게으르면 질병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청결의 규칙을 가장 중요한 자기 의무로 여겨 전력을 다하지만, 자녀의 신체 발달과 정신적, 영적 훈련을 등한히 하는 슬픈 잘못을 범하면 안 됩니다. 높고 거룩한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들은 반드시 순결하고 단정한 심령을 갖도록 배워야 합니다. 또한 섬기는 천사들이 진리가 생애를 변화시키고 심령을 정화시키며 취미들을 세련 시켰다는 확증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의 의복과 가정의 모든 일에 퍼져야 합니다. 진리를 받은 후 말과 처신과 옷차림과 생활환경에 아무 변화가 없다면, 자신을 위해 살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청년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 몸가짐과 가정의 모든 일을 단정하고 매력 있게 단장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워야 합니다.

3. 질서 있는 행복한 곳 ―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무질서하고 느슨하며 철저하지 못할 때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아내와 어머니는 질서를 사랑함으로 품위를 유지하며 가정을 잘 관리하여 유쾌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이 부족하다면 지금 곧 이 방향으로 자기 자신을 교육해야 하며 가장 부족한 점들을 계발시켜야 합니다.

4. 조심성과 근면성이 연합된 곳 ― 자신을 충분히 주님께 드린다면 가정생활의 단순하고 평범한 의무를 참으로 중요한 것으로 인식할 것이며, 그 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실행할 것입니다. 깨어 인자의 오심을 기다리며 부지런해야 합니다. 기다리면서 동시에 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둘은 연합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품성을 조화되게 하며 잘 계발되고 균형지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밖에 아무 일에도 게으르지 말아야 하며, 묵상하고 연구하며 기도하는 일에도 그럴 것입니다. 분주하고 조급하고 힘겨운 일 때문에 자신의 경건성을 등한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균형 있게 기다리며 경계하고 일해야 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5. 노력을 절약하는 조건을 갖춘 곳 ― 많은 가정의 부인과 어머니는 자신의 수양을 위한 독서나 남편과 교제, 자녀의 마음을 계발시키는 데 간섭할 시간이 없으며, 존귀하신 구주와 친밀한 친구로 사귈 시간과 장소가 없습니다. 그는 차츰 가족을 위한 일꾼으로 전락해 힘과 시간과 취미를 다 세상에 붙은 쓸데없는 것에 빼앗깁니다. 자신이 거의 손님이 된 것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습니다. 한때 자기 것이었던 ‘자녀를 고상한 삶으로 인도할 소중한 기회’는 영원히 지나가고 맙니다. 가정을 위해 더욱 지혜로운 계획으로 생활하고자 결심해야 합니다. 즐거운 가정을 만드는 것을 첫째 목표로 삼으십시오. 수고를 덜고 건강과 즐거움을 더할 조건을 반드시 갖추도록 하십시오.

기독교회사_데살로니가 교회와 예수님의 재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거기서 그들이 거룩하고 행복한 백성으로 정착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히 3:19)하였습니다. 반역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광야에서 죽고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 허락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렇게 지체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와 슬픔의 세상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불신은 그들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가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일을 거절했기에 다른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긍휼히 여겨 죄인들에게 경고 받을 기회를 주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기 전에 주님 앞에서 피할 곳을 찾게 하시려고 주님의 오심을 지연시키십니다.
지나간 시대처럼 오늘날도 이 시대의 죄와 오류를 책망하는 진리를 증거하면 반대를 당할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요 3:20)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서입니다. 많은 사람이 성경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할 수 없음을 알고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것을 옹호하기로 결심하고 인기 없는 진리를 옹호하는 이들에 대하여 악의로써 그 인격과 동기를 공격합니다. 이런 일은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는 말을 들었고, 예레미야는 배반자라는 욕을 들었고, 바울은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는 무고를 당했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진리에 충성하는 자들은 치안을 문란케 하는 자, 이단자, 분열을 좋아하는 자 등의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예언의 확실한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자들은 유행을 따르는 죄를 담대하게 책망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의심없이 믿어버립니다. 이런 정신은 계속 증가될 것입니다. 성경은 장차 국가 법과 하나님의 율법이 서로 상치되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순종하는 자는 누구든지 악을 행하는 자처럼 비난받고 벌을 받을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밝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 필요하다면 세상이 싫어하는 진리라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 세상에 보편화되어 있는 죄악을 견책하기를 꺼리지 않는 자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오직 지혜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개인적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만이 성경을 이해하고 그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우게 되므로 그들의 겸손과 순종이 그들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리의 지식을 그들에게 맡길 때 그들에게 영광을 주셔서 세상의 어떠한 명예와 인간적 위대함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해주십니다.
그런데 재림을 기다리는 어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를 거듭해서 정하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사건에 관한 정확한 시일이 예언되어 있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잘못된 견해를 받아들였을 때 사도 바울은 그들의 희망과 기대를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엄밀히 검토하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일어날 사건들을 알려 주는 예언들을 인용하여 그들의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밝히 알려 주었습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살후 2:3)는 말씀이 바울의 경고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성경에 의하여 인정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한다면 그들의 행동은 잘못된 데로 이끌려가게 되고, 실망으로 불신자들의 조롱을 받게 되고 낙담하는 위험에 빠져 결국에는 그들의 구원에 필수적인 진리까지도 의심토록 시험 받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향한 권면에는 말세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중요한 교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많은 신자들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분명한 시간에 그들의 신앙을 두지 않으면 준비하는 일에 열렬해지거나 부지런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이 아무리 여러 번 생겨날지라도 그 때마다 그것이 무너져 버린다면 그들의 믿음은 결국 예언의 큰 진리를 거의 깨달을 수 없을 만큼 타격을 받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첫째 천사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심판에 대한 분명한 시기를 전파한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첫째 천사의 메시지의 근거가 되는 예언적 기간의 계산은 2300주야가 마치는 시점이라는 사실은 아무 의심 없이 입증됩니다. 그러나 재림에 대한 분명한 시간을 정하거나 그와 같은 가르침이 널리 보급되면 될수록 더욱 사탄의 목적에 잘 부합될 뿐입니다. 그 시기가 지나가자 사탄은 재림을 주장하던 사람들을 조롱하고 모독하도록 자극하여 그 오류를 고집하던 사람들은 마침내 그리스도의 재림을 지나치게 먼 장래에 속한 일로 결정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릇된 안일에 빠지고 많은 사람들은 기회가 다 지나갈지라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재림운동에 일치 협력하여 활동했던 사람들이 셋째 천사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 복음을 전파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통하여 크게 역사하셨을 것이며, 온 세계를 환하게 비췄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벌써 여러해 전에 지상 거민들에게 대한 경고는 끝나고 마지막 사업은 완성되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시러 이 세상에 오셨을 것입니다.

진리탐구_144,000인의 신앙관

1.144,000인의 신앙관
1)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함
2)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3) 처음 익은 “첫 열매”

성경은 십사만 사천인을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사만 사천은 마지막 시대에 구원 얻을 자들을 표상하는 추수의 첫 열매들이며,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로서 “첫 열매”라는 단어는 앞에서 이미 살펴봤습니다. 첫 열매가 생겨야 추수를 할 수가 있는데 십사만 사천이 첫 열매가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입니다. 십사만 사천, 제일 먼저 잘 익은 첫 열매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 있기 전에는 마지막 추수도 시작될 수가 없는데, 우리가 사는 이 마지막 시대에도 진리를 통하여 먼저 알곡이 되고 예수님의 마음이 준비되어 인침 받은 144,000인이 준비되기 전에는 세상 끝의 추수 사업이 시작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의 첫 열매들을 기다리고 계시는데, 이 첫 열매들이 바로 십사만 사천인으로서 그들은 예수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경험을 먼저 하는 자들입니다. 첫 열매 되신 예수께서 성령 충만하시어 모든 죄의 유혹에 승리하셨던 것처럼 온전히 죄를 승리하는 경험을 먼저 하는 첫 열매로서 그들은 여자의 남은 무리라고 불리는 것이며, 그래서 그들의 특징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만 보더라도 “환란 전 휴거”가 얼마나 비성경적인 교리인 줄 아실 것입니다.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
입에 흠이 없는 사람은 완전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인데 말은 그 사람의 생각과 성품을 드러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성경은 십사만 사천은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라고 설명하는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흠 없는 성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언 29:20),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잠언 25:28)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어려운 일, 괴로운 일, 불쾌한 일들 대부분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데 원인이 있으며, 그 다스리지 못한 감정으로부터 나오는 말이 화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혀를 재갈 먹이고 사납고 참지 못하는 말은 하지 않기로 마음을 결심을 굳게 하여야 합니다. 자기의 입의 말과 혀를 제어하는 사람은 통과하도록 부름을 받은 모든 인내의 시험에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와 그분의 능력으로 생각과 말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생활하며, 우리를 상관하시는 분의 눈앞에 모든 생각이 공개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빛처럼 투명해야 하며, 또한 우리의 마음이 진리이신 주님의 인도를 끊임없이 받지 않는 한 진리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너희 말은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골 4:6)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 29)

그리스도인들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예하지 말아야 하며,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에서도 정직하고 참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듯이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면, 철저한 회심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속에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그분 자신에게 복종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지만, 논쟁의 힘이나 명령의 소리로 순종을 요구하지 않으셨으며, 그분은 선을 행하시고, 평화와 사랑에 속한 것들을 가르치고 다니셨으며, 투쟁을 불러일으키지 않으셨고, 개인적인 상처에 분개하지 않으셨으며, 모욕과 거짓 고소와 잔인한 채찍질을 겸손하고 온유한 복종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범이시며, 그분의 생애와 가르침은 실제적인 신앙생활의 예표와 증인이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선을 행하고 악을 극복하기 위한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었습니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말과 행동은 하늘에 속한 흠 없고 순결한 것이 될 것인데 특별히 마지막 시대 하나님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매일 자아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144,000인 믿음의 본질인 세상의 거짓된 종교로부터의 정절과 어린양의 인도에 대한 순종과 거짓말 없고 흠이 없이 살기 위해 애쓰시며 살아오셨으며, 사도들께서도 이런 신앙의 삶을 사셨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을 통해 기록하셨습니다. 이분들의 신앙의 성품이 오늘날 뜻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2)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

Healing Story_팥과 콩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죽 한 그릇이 생각나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한여름 더위에 시원한 콩국수가 좋은 보양식이 되었다면 겨울에는 새알심 동동 떠 있는 팥죽이 있습니다. 팥과 콩은 겉보기에는 그 색과 모양이 확연히 다르지만 우리 몸에 끼치는 유익은 매 한가지인 것 같습니다.


팥의 주요 성분은 탄수화물과 단백질이며 그 외에도 여러 비타민과 무기질, 식이섬유가 풍부하게 들어있습니다. 팥은 곡물류 중에서 항산화 성분이 상당히 뛰어난 식품 중 하나입니다.

팥의 보라색 성분인 안토시아닌
팥에는 비타민C보다 50배, 비타민E보다 20배나 뛰어난 프로안토시아닌 성분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활성산소로 인한 세포파괴를 예방하여 몸의 노화를 방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입니다. 또한 항산화 작용을 촉진해서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고 콜레스테롤을 감소시키며 혈관에 생기는 침전물을 억제하여 뇌졸중, 심장질환 등 각종 질병 위험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팥의 껍질에 풍부한 사포닌
팥에 함유된 사포닌은 이뇨작용이 뛰어나서 몸속 노폐물을 배출하여 몸의 부기를 가라앉히는데 효과적입니다. 또한 혈전을 제거하고 체내 콜레스테롤의 수치를 낮춰 주어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만들어 피를 맑게 정화시켜 주기 때문에 동맥경화나 고혈압, 고지혈증 등 성인병을 예방하는데도 좋습니다.

피로 회복에 좋은 비타민 B1
비타민 B1이 부족하면 당질대사가 원활하지 못해서 몸에 피로 물질이 쌓일 뿐 아니라 식욕도 떨어지고 소화불량, 수면장애 등의 증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비타민 B1이 풍부하게 함유된 팥을 섭취해주시면 피로 회복과 더불어 식욕증진 등의 효능을 기대하실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팥에는 식이섬유와 올리고당이 배변을 부드럽게 해주고 배변의 부피를 증가시켜주기 때문에 변비에 걸렸을 때 섭취하시면 변비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콩은 40%의 단백질, 30%의 탄수화물, 그리고 20%의 지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미네랄과 비타민, 식이섬유부터 인체에 좋은 활성물질이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육류에 비하여 구성된 아미노산의 종류도 손색이 없다고 하니 밭에서 나는 고기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콩에도 부족한 것이 있는데, 바로 필수아미노산 중 하나인 메티오닌 성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쌀에서 채울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현미에 콩을 섞어 만든 콩밥을 먹으면 완전 단백질 식품을 섭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콩에는 비타민 B군이 특히 많고 A와 D도 들어 있으나 비타민 C는 거의 없다.

항암 효과
콩 식품을 많이 먹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위암, 폐암, 결장암, 직장암, 유방암, 전립선암 등의 발병 위험이 훨씬 낮다고 합니다. 특히 호르몬 관련 암이 그러한데, 이는 콩에 함유되어 있는 이소플라본 중 하나인 제니스틴 때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니스틴은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화학구조가 매우 유사한 성분이며 발암물질에 노출된 비정상 세포가 악성종양 세포로 진행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효능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심혈관 질환에 좋은 콩 단백질
콩 단백질은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어 동맥경화, 심장병 등 혈관 질환의 발생 위험을 줄여줍니다. 따라서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콩 단백질에 혈관 보호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제품에 그 내용을 표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합니다. 또한 콩에는 동맥경화를 예방하는 오메가-3 지방산도 많이 들어 있습니다.

여성호르몬과 유사한 이소플라본
콩에 들어 있는 이소플라본은 체내에서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비슷한 작용을 하므로 안면 홍조, 우울증, 기억력 감퇴 등 갱년기 증상을 호소하는 폐경기 여성들의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됩니다. 특히 쥐눈이콩은 일반 콩보다 5∼6배나 많은 이소플라본을 함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소플라본은 뼈의 파괴를 막고 골밀도를 높여주며 손상된 골세포 재생 및 치료하는 작용을 합니다.

두뇌의 영양이라고 말하는 레시틴(lecithin)이 풍부
콩에 풍부한 레시틴은 체내에 흡수된 후 분해되어 뇌세포의 활동에 관여하는 '아세틸콜린'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의 원료가 됩니다. 그 외에도 콩의 풍부한 식이섬유는 급격한 혈당 상승을 억제하여 당뇨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두유
이렇듯 건강에 좋은 식품인 콩을 가장 간편하게 즐기는 방법 중 하나가 두유로 만들어 먹는 것입니다. 콩을 통째로 갈아서 먹는 전두유는 하루 1~2잔만으로도 콩이 지닌 모든 영양분을 그대로 섭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유 만드는 방법① 깨끗이 씻은 콩을 물에 담가 하루 정도 불립니다.② 불린 콩을 삶는데, 한 번 끓어오르면 불을 꺼줍니다.③ 삶은 콩과 콩 분량의 1.5배의 물을 넣고 믹서로 갈아줍니다.④ 개인의 입맛에 맞게 소금이나 설탕을 넣어 마시면 됩니다.
시중에 파는 두유를 살펴보면, 두유액(대두 고형분 5% 이상, 대두: 수입산) 90%와 같은 문구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5%의 콩 분말에 물을 섞어서 90%의 두유액을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식품첨가물을 전혀 넣지 않은 건강한 두유를 섭취하기 위해서는 100% 국산 콩을 통째로 갈아 만든 전두유를 먹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만든 두유는 그냥 버려지는 콩 껍질과 배아까지 곱게 갈아내므로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 이소플라본 등 몸에 좋은 미량 영양소도 가득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