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 달의 말씀

"복음의 원칙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활 속에 거하시는 것이며 곧 살아 움직이는 원칙으로 실생활의 어떤 부분과도 분리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경험과 활동은 품성 속에 나타나 선한 일을 하도록 해주는 그리스도의 덕성인 그분의 생애를 대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열한시 소개글]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 3시, 6시, 9시에 장터에 나가 일할 사람들을 불러옵니다. 하지만 일이 마쳐지지 않았는데 해가 저물어 가자 급히 11시 일꾼들을 투입시킵니다. 이 내용은 비유로 끝나지 않고 역사에서 실체화되는 말씀입니다. 11시에 부름을(소명)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의 시대, 인류 역사의 문을 닫기 1시간 전에 긴박하게 투입되어 적그리스도와 짐승의 표의 정체를 밝히고, 하나님의 영광의 사본인 십계명의 회복과 인간 성소의 정결(죄를 승리하는 거룩한 삶)에 대한 복음,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우주적인 대 전쟁, 재림 전 심판과 영원한 복음,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하는 사명을 맡은 남은 무리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召命)과 사명(使命)을 위해 11시 백성은 오늘도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여깁니다.

신앙기사 1부_하나님과 인간을 분리했다

신앙기사 제목: 사탄의 분리작전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 세운 사탄의 분리작전을 아십니까? 그의 최초의 작전은 죄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사탄의 분리작전은 계속되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분리하고 그분의 율법과 복음을 분리하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믿음과 순종을 분리하므로 더 나아가 신앙과 생애를 분리하는데 거의 성공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진리가 그 효력을 잃게 하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죄와 분리해 하나님과 다시 연합시키려고 하십니다. 또한 그분의 백성을 바벨론으로부터 분리해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은 죄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다시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사탄이 벌려놓은 분리작전을 식별하고 그에 대처해야 합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사탄의 분리작전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기사가 우리의 신앙을 제자리로 찾게 만드는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실 -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2).

사탄이 제일 처음 사용한 분리작전은 인간을 하나님과 분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에서 분리됨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하는 것은 딱 하나, 바로 죄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인간으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탄이 온 우주의 보물인 인류를 자신의 손안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으로 죄짓게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만일 인간이 죄를 짓게 된다면 하나님의 마음에 그리고 온 우주에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초래할 것이며 인간은 죄의 값을 치러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하는 작전에 돌입하였습니다. 사탄은 인류를 속여서 죄를 짓게 하므로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죄는 생명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을 분리시켰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성경은 하나님만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 반대로 피조물인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창조주에게서 생명을 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존재하실 수 있는 생명이신 하나님에게서 분리된다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빌려 주신 생명입니다. 그러나 죄가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줄을 끊어 놓았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됨

생명이신 하나님에게서 분리된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이르러 오는 것은 빛과 의와 생명과 사랑입니다. 사랑과 율법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롬 13:10). 사랑이 거하는 마음에서만 하나님의 율법이 진정으로 존중되고 율법에 대한 순종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죄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서 나온 순종의 행위가 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분리될 때에 우리 마음에는 사랑이 없고 율법을 즐거워할 수 없고, 의를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죄뿐입니다. 인간 스스로에게 생명을 주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매일 생명과 사랑, 의의 마음을 받지 않는 한 우리는 육체는 살았으나 영으로는 죽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리되게 하는 죄

죄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 “불법”(요일 3:4)-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한 번 맛보는 일이 뭐 그리 큰 죄인가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인간 세상에 이르러 왔습니까? 한번의 불순종으로 인해 어떠한 불행이 인류에게 닥쳐왔습니까? 죄는 불의요 이기심입니다. 죄는 우리 마음에서 사랑을 없애고 이기심으로 채웁니다. 죄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기심, 나의 욕심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어질 때에 평화와 행복이 사라지고 불안과 두려움, 헛된 욕망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그 텅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죄된 것으로부터 만족을 얻으려고 방황하게 됩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는 길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끊어 놓은 생명줄을 다시 연결시켜주셨습니다.

사탄은 오늘날도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하고자 우리 주위를 온갖 유혹으로 둘러놓았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분리되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된 삶을 살기 위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선택을 해야겠습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내가 좀 손해보고 무시당하고 바보처럼 되더라도 사랑을 선택하도록 합시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를 내는 모든 것들을 버리도록 합시다!

신앙기사 2부_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분리했다

사탄의 중요한 분리작전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분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인간으로 더 쉽게 죄를 짓게 하기 위해 많은 것을 고안해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성품을 곡해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매우 잔인하고 까다롭고 강압하는 분으로 나타내는 반면, 한편으로는 너무 너그럽고 부드러워서 우리의 회개와 믿음과 순종에 상관없이 무조건 은혜로 구원 얻게 하는 분으로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교회를 다니고 헌신을 많이 하는 사람은 특별한 축복을 주시고 죄를 좀 지어도 봐주시지만, 불신자는 저주를 받고 지옥에 넣어 무조건 영원히 형벌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비상식적인 분이실까요? 성경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해서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온 기복신앙

사탄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분리하므로 하나님을 아주 편협하고 비상식적이고 이기적인 분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에 기복신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슬프게도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또는 그분을 사랑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심판이 두려워서 혹은 축복이나 구원받기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재산을 잃게 되고, 가족들이 병에 걸리게 되고, 비난과 조롱을 받게 되고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면,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고 감사드릴 수 있을까요?

욥은 하루 만에 소와 낙타와 양들, 즉 평생 모은 모든 재산을 다 잃고, 종들과 심지어 사랑하는 자녀들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그에 더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듯 온몸에 종기가 나고, 남은 유일한 가족인 아내마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을 믿어서 복을 받기는커녕 최악의 저주를 받다니…. 그때에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복주시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설령 나를 구원해 주시지 않으신다 해도, ‘그분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요, 오직 나는 그분 앞에서 나 자신의 길들을 유지하리라’(욥 13:15)”고….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그의 신앙의 동기는 얼마나 순수하고 진실된 것이었습니까! 그러나 기복신앙은 이러한 신앙의 정신과 동기를 변질시켰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니면서 시기 질투하며 부정직하게 산 사람을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구원하시고, 하나님을 모르고 양심대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산 사람을 멸망시키신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실까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마 13:49)시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오해

사랑은 우리의 죄를 봐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 마음에 역사하여 죄 자체를 버리고 승리하게 해주는 원동력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즉 율법과 일치하는 마음을 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해 주실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억지로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하나님만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하나님만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셔야 합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너무도 이기적이고 제한적이고 차별적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분의 모든 말씀에 기쁘게 순종하게 합니다. 그러한 순종의 결과는 성화와 거룩함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공의와 사랑의 입맞춤

성경은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고 말합니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시 89:14).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시 50:6). 공의가 있기에 진정한 사랑이 있습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즉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공의와 사랑이 입 맞춘 곳이 바로 십자가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공의는 율법이 죄인에게 요구한 영원한 죽음을 인간에게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 율법의 정죄의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게 하셨습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라고 했습니다. 공의가 없다면 우주의 질서는 파괴되고 하나님은 말 그대로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만 감싸고 도시는 편협한 분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은 공명정대하십니다. 모든 사람들, 아니 온 우주 거민들 조차도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해서 “왜 이렇게 했습니까?’라고 물을 자가 없습니다. 그분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분이 하시는 일이 너무도 합리적이고 공정하고 자비로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존재들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사랑과 진실함이 온 우주에 평안과 안전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신앙기사 3부_계명과 복음을 분리했다

사탄이 행하는 분리작전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결과를 거둔 것이 계명과 복음을 분리하는 것이었습니다. 18세기의 신학자요 청중교회 목사였던 에드워즈 A. 파크 교수는 종교계가 당면한 위기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험의 한 가지 원인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강조하는 일을 게을리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강단이 양심의 소리가 메아리치는 곳이었다…가장 유명한 설교자들은 주님의 본을 따라 강단에서 계명과 그 교훈과 그 엄숙한 명령을 명백히 가르쳐 줌으로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항상 두 가지 큰 원리를 반복하여 말하였는데, 그것은 계명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나타내는 사본이며, 계명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복음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두 가지의 큰 원리를 반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계명은 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참 품성을 반사하는 하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이 계명을 사랑하지 않는 위험은 죄의 흉악성, 죄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 죄의 결점들을 과소평가하는 위험을 가져온다. 계명을 거역함으로 조성되는 악은 그 계명이 지닌 의에 비례 됩니다…”

“이미 언급한 위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과소평가하는 위험이다. 오늘날 강단에서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경향은 하나님의 공의를 하나님의 자비와 분리하고 그 자비를 원칙으로 높이지 않고 하나의 감정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기독교에 들어온 자유주의 신학, 이른바 신신학은 하나님께서 결합해 놓은 것을 산산조각으로 해체시켜 버렸다. 하나님의 계명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물론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도 선한 것이다. 왜냐하면 공의는 계명을 집행하게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과 공의, 인간의 불순종과 죄의 범위를 과소평가하는 습관 때문에 사람들은 죄를 속하기 위하여 마련된 은혜도 과소평가하는 습관을 이루기 쉽다.”

계명의 속성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으로 계명을 폐하셨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 사람이 계명의 요구에서 해방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중 어떤 사람들은 계명을 마치 무거운 멍에처럼 나타내고 계명의 속박과 복음 아래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대조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시 119:45)라 하였고, 사도 야고보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후에 십계명을 “최고한 법” 또한 “온전한 율법”이라고 말했습니다(약 2:8, 1:25).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 반세기 후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영어 흠정역 성경에는 ‘계명을 지키는 자’로 번역되었음)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으로써 하늘 아버지의 계명을 폐하셨다는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계명이 변경되거나 폐지될 수 있었다면 사람을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계명을 폐지하기는커녕 계명의 불변성을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을 크게 하며 존귀케”하(사 42:21 난외 주석)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을) …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 18)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 본질상으로 불변입니다. 그것은 계명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품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그분의 계명도 사랑입니다. 계명의 두 가지 큰 원칙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사람에게 대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계명의 완성”(롬 13:10)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은 의며 진리입니다. 그의 계명의 본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시 119:142, 172)니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이 계명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의 표현이므로 그 창시자와 같이 영구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계명의 역할

하나님과 화목하는 첫째 계단은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죄인이 죄를 깨달으려면 먼저 자기의 품성을 하나님의 위대한 의의 표준에 비추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계명은 의로운 품성의 완전함을 보여 주는 거울로서 죄인에게 그의 결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나 계명이 사람에게 그의 죄를 나타내 보여주기는 하지만 죄를 치료해주지는 못합니다. 계명은 순종하는 자에게 생명을 약속해 주는 반면에 계명을 범하는 것이 죽음임을 선고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죄의 선고와 더러움에서 사람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사람은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용서를 받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양자의 영을 받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여도 무방한 것일까요?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계명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계명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고 하였습니다. 새로 남, 거듭남으로써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계명과 일치됨과 동시에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이 위대한 변화가 죄인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면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에서 성결로, 범죄와 반역에서 순종과 충성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멀어져 있던 옛 생애는 끝나고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화목의 생애가 시작됩니다. 그리하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계명의 요구를 이루어지게”(롬 8:4)합니다. 그 때에 심령에서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고 외치게 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시 19:7) 합니다. 계명이 없으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성성과 순결, 그리고 자기 자신들의 죄와 불결에 대하여 올바른 관념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죄에 대하여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자로서의 자신의 속절없는 상태를 알지 못하고 속죄하는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함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도, 생애의 개혁도 없이 기독교 종교를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피상적인 회개가 보편화되고 결코 그리스도와 연합한 경험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됩니다.

복음의 역할

복음은 사람을 하나님의 계명의 원칙과 일치되게 해줍니다. 태초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과 본성에 완전히 조화를 이루었고, 의의 원칙이 마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창조주와 사람을 분리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계명의 원칙과 반대되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창조주와의 조화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져야 하고 위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새로 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이 일을 이루어주었습니다. 복음은 능력이라고 했습니다(롬 1:15,16). 계명의 요구를 이루어 주어 우리를 계명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위치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복음의 힘은 사람을 하나님의 성품의 사본인 계명을 사랑하게 만들어주고 계명을 즐거워하고 누릴 수 있는 동기와 능력을 줍니다.

그러나 사탄은 계명과 복음을 분리하므로 복음은 반쪽 복음이 되었고,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계명의 권위와 중요성은 상실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의 성격과 영속성과 그 의무에 대한 그릇된 개념이 회개와 성화에 대한 오류, 즉 참 복음에 대한 오류를 가져왔고, 그 결과로 교회 내의 경건의 표준이 낮아졌고 교회와 세상과의 구분 선이 흐려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다시 그 정당한 위치를 회복할 때만이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개혁과 경건의 부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신앙기사 4부_칭의에서 성화를 분리했다

사탄의 사용한 분리작전 중에 하나는 칭의에서 성화를 분리한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회개할 때에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죄를 용서를 받을 때에 의롭다는 칭함을 받게 됩니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과거의 죄를 다 청산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거듭남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구원은 칭의에서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은, 정말 그의 생애가 온전히 의롭게 되고 그 의로운 생애를 계속 유지되게 해야 합니다. 거듭남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계속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칭의를 받도록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온 생애를 지속적으로 바치고, 또 거룩하게 변화되는 경험을 “성화”라고 합니다. 사탄은 그저 믿기만 하라,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과 순종은 필요가 없다는 분리작전을 사용하여 기독교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진리로 성화됨

참된 성화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5:23)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성결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구주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요 17:17)고 기도하셨습니다. 바울도 신자들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롬 15:16)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요 16: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계명에 나타나 있는 의의 큰 원칙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집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며, 완전하신 하나님을 그대로 나타내주므로 그 계명에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품성도 또한 거룩하여집니다. 그리스도는 그런 품성의 완전한 모본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요 15:10, 8:29)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그분의 거룩한 율법의 원칙과 일치한 품성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성화입니다. 이 일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내재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서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 13)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것을 대항하여 싸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연합될 때 믿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고전 15:57)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성경은 성화의 과업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짐을 분명히 알려 줍니다. 죄인이 회개하여 속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해질 때부터 그리스도인 생애가 시작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완전한 데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 14)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성화를 얻는 계단을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 1:5-10)고 기록하였습니다.

성화의 참 뜻

진정한 성화의 경험을 한 사람은 겸손한 정신을 나타낼 것입니다. 성결의 두려운 위엄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세처럼, 무한하신 하나님의 순결하심과 완전하심에 비해 그들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됩니다.

선지자 다니엘은 참된 성화의 모본이었습니다. 그의 일생은 주님을 위하여 바친 고상한 봉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하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단 10:11)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존경받는 선지자는 자신의 순결과 성결을 주장하는 대신에 자신을 죄많은 이스라엘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이렇게 탄원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함이니”,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그는 다시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서 교훈을 주셨을 때에 그는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다고 하였습니다(단 9:18, 15, 20, 10:8).

욥도 폭풍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또 이사야는 스랍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하고 창화하는 소리를 듣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3, 5)고 크게 외쳤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로 이끌려가서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은 후 자기 자신을 가리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고후 12:2; 엡 3:8)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사랑을 받은 요한은 그분의 영광을 보고 천사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것같이 되었습니다(계 1:17 참조). 이렇게 참된 성화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거룩하다거나 죄 없다고 자만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그늘 밑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자고하거나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으스대는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파열시킨 고뇌의 원인이 자기들의 죄였다는 것을 느끼며, 그런 생각이 그들을 스스로 겸비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생애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죄악과 약점을 가장 분명히 깨닫고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구주의 공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의 종교계에서는 많은 경우에 칭의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성화를 좀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무효시키는 가르침과 병행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성경상의 참된 성화와는 거리가 먼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성화가 순간적인 것이며 오직 믿음으로만 완전한 성결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믿기만 하면 구원은 그대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받는 자 편에서는 그 이상의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 듯이 생각하게 가르칩니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를 부인하고 그들이 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에서 해방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품성과 뜻의 표현이 되는 원칙에 조화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품성과 뜻에 일치하는 성결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흠 없는 제물이 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 중 한 가지를 고의적으로 범하면서 거룩해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합니다. 죄인 줄 알면서 고의로 죄를 범하게 될 때 깨우쳐 주는 성령의 음성을 침묵케 하고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가게 합니다. “죄는 불법이며”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요일 3:4, 6)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또한 요한은 계속해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요일 2:4, 5)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모든 사람의 신앙 고백을 검토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서 성결의 표준으로 정해 주신 유일의 척도로 재어 보지 않고서는 어떤 사람도 성결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 율법의 가치를 느끼지 않는 자들, 하나님의 계명을 소홀히 하거나 등한히 여기는 자들,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범하고 또 그렇게 남을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눈에 존중히 여겨질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순결과 성결에 대한 진정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품성과 일치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때, 또한 예수님의 순결과 고상한 모습, 그리고 사악한 죄의 성질에 대해 진정한 개념을 가지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성결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와 그리스도와의 거리를 멀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품성과 그분의 요구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자신이 자기 자신의 눈에 의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설명한 성화는 전인, 곧 영과 혼과 몸을 다 포함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편지하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희생 제물들은 모두 엄밀히 검사되었습니다. 만일 제물로 드려진 짐승에게서 어떤 결점이 발견되면 그것은 거절당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제물은 “흠 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마음과 몸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주를 위한 봉사에 부적당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이 아닌 것을 드릴 때에 기뻐하실까요? 그리스도께서는 “네 마음을 …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애로써 하나님께 최선의 봉사를 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능력을 촉진시켜 줄 계명과 조화되고자 그들의 모든 역량을 다하여 끊임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그들은 정욕이나 식욕에 빠짐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제물을 약화시키거나 더럽히지 아니할 것입니다.

회개와 성화의 열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타락한 아담의 자손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히 2:11)하십니다. 그리스도인 생애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승리와 기쁨의 생애가 되어야 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 믿음이니라”(요일 5:4). 하나님의 종 느헤미야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고 한 말은 진실한 말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러한 일들이 성경상 회개와 성화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 가운데 나타난 의의 큰 원칙을 일반 그리스도교계에서 매우 등한히 여기게 가르쳤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와 성화는 아주 드물게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일찍이 신앙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던 하나님의 성령의 심오하고 영속적인 역사를 거의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바라봄으로써 변화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품성의 완전하심과 거룩하심을 사람들에게 밝히 보여 주신 거룩한 원칙들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교훈과 이론에 집착할 때, 교회 안에서 산 경건성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초래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다시 그 정당한 위치를 회복할 때에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초대 교회가 가졌던 믿음과 경건의 부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렘 6:16).

신앙기사 5부_신앙과 생활을 분리했다

사탄은 오늘날 신앙과 생애를 분리해 놓는 일에 크게 성공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이름뿐이며 생활과는 별개의 것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만 신앙을 하는 사람은 아닌지, 우리 개인 생활에서, 가정과 이웃들에게, 직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표할 수 있는 신앙인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현대의 바리새인들

고대의 바리새인들은 신앙과 삶을 분리해서 살므로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매우 경건한 척하면서, 회당과 거리에서는 매우 거룩한 척하면서 그들의 삶은 온갖 악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회칠한 무덤”같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어떤 무덤들은 속에는 송장이 있으나 무덤의 겉은 회로 칠하여 매끈하고 깨끗하게 손질해 놓았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8). 다음의 엄중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3-26).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적인 신앙도 문제였지만, 그들은 눈에 보이는 신앙적 의무를 행하므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만족하는 것이었습니다. 속마음에는 분노가 있어도, 이웃과 싸웠어도, 용서를 못한 사람이 있어도 겉으로 드러난 신앙적 의무를 행하므로 그들은 안위를 얻었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혹 교회에서의 삶과 가정에서의 삶이 다른, 이중인격을 가지고 위선적인 신앙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고대의 바리새인들처럼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서의 의무를 행하므로 신앙적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충실하고 열심히 봉사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들 개인의 삶에서의 죄악들을 봐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안 볼 때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의 입으로뿐 아니라 그들의 삶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바벨론의 관습에서 분리되라

베드로는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고 말합니다. 죄악적인 갈망을 만족시킬 때마다 신체의 기능이 마비되고 영적?지적 감각력이 죽고 하나님의 말씀 혹은 성령의 감화는 마음에 빈약한 인상을 끼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갈 5:22, 23)와 같은 성령의 열매에 “절제”를 부가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이익을 추구하고 유행을 따르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들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탐식과 음주와 금지된 쾌락을 통하여 고상한 인간성을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를 견책하는 대신에 오히려 물욕과 연락을 사랑하는 마음을 부추기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공급할 수 없는 교회의 자금을 보충하기 위하여 너무도 흔히 세속적인 방법들을 사용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오늘날의 교회에 오셔서 종교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고 있는 연회와 부정한 거래들을 보신다면, 그분께서는 일찍이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내쫓으신 것과 같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런 자들을 내쫓지 않으시겠습니까?

세상은 자아 방종에 빠져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고상한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세속적 만족과 죄악적 습관을 완전히 내버리지 않으면 성화는 진실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조건에 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후 6:17, 18)는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잠 4:18)릅니다. 의의 태양 되시는 그리스도의 밝은 빛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비칠 때 그들은 그분의 빛을 반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의 은혜와 그분의 품성의 순결이 그분의 증인들의 삶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깨닫기를 바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가장 의미 깊은 말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소유할 놀라운 능력과 지식을 열어서 보여 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그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것이 그들의 특권이었습니다. 사도는 이어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간절히 구하였습니다(엡 3:16-1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높은 표준이 여기에 밝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표준에 도달할 때 우리는 그분의 요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느뇨”(롬 8:32).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셨으므로 우리들도 그 영으로 충만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믿음과 순종을 분리한 결과

신앙과 생애를 분리하기 위해 사탄은 먼저 믿음과 순종을 분리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오직 믿음만을 주장하게 하고, 오직 믿음이 아니면 그것은 이단이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주장하는 율법주의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너무 지나치게 자신의 노력과 헌신과 희생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어보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매우 무겁고 엄중하며 감사와 기쁨과 행복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과 순종을 분리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얻었고 그의 믿음을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일을 통해 증명하였습니다. 순종은 믿음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순종은 사랑의 반응입니다. 믿음이 말씀을 통해 이르러 오는 선물이라면 순종 역시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게 하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누구나 지식적으로는 얼마든지 믿을 수 있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믿기만 하는 것은 사탄도 합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19-22).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믿음이 그의 행함(순종)과 함께 일”한다고 가르칩니다. 믿음과 순종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신앙과 생활

성경은 분명히 신앙과 삶이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 복음을 입술로만 말하지 말고 삶으로 보여주도록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인터넷만 검색하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씀과 진리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성경의 진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진리를 위해 목숨 거는 자들이 없습니까? 진리의 지식이 아니라 진리화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얼굴만 봐도 이 사람은 진리를 가진 사람이구나,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참이라고 생각할 사람, 진리로 거룩하게 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그대의 믿음은 그대의 삶 속에, 이웃들 속에, 가정 안에서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되고 있습니까? 그대의 믿음은 순종을 통해 온전하게 되고 있습니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므로 우리의 삶이 신앙이 되도록 합시다!

 

마치면서

사탄의 분리작전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되게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연결되게 하는 것들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되게 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지나치기 쉬운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 기도로 하나님과 연결되셨습니다. 그분은 매 순간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 자신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되게 하는 것들은 기도와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길뿐입니다. 기도로 하루를 열고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항상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해야 합니다. 길을 걸을 때나 일상적인 의무를 행할 때에도 우리 마음이 늘 하늘을 향해 열려 있게 합시다! 때로는 기도할 마음이 없을 때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정말 우리 영혼의 호흡이 되었으면 합니다. 침묵의 기도로 끊임없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갈망과 소원을 올리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고 성령의 역사를 이루게 하며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다. 신앙생활에 힘이 없고 낙망하게 되는 이유는, 말씀을 등한히 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이 강하게 느껴지고 목적 없이 방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말씀 안에 거하도록 합시다! 말씀에서 영적 생명을 취합시다!

때때로 말씀을 읽을 때에 우리는 기도할 준비가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문제는 말씀을 등한히 함에서 시작되므로 문제의 해결은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해주시고, 양심을 통해, 섭리를 통해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고 믿음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나 자신을 굴복하는 것, 그분의 말씀에 아멘 하며 기쁘게 순종하는 것은 때로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처럼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꺼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큼 하나님과의 연결을 확고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순종을 통한 고난은 우리를 연단케 하여 주님을 더욱 반사하게 해줄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되게 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와 순종을 통해 하나님 안에,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포도 가지가 원줄기에 연결되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열매가 맺히듯이, 우리 삶에도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성경 Q&A_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나요?

Q.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나요? 그는 이방인의 편인가요?

“율법 없는 자들에게 율법 없는 것같이 된 것은 (비록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오히려 그리스도께는 율법 아래 있지만) 내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KJV, 고전9:21)

A.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에 기울인 충성은 어떤 사람보다도 열성적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구약 성경을 완전히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을 접근하면서 그들의 반감을 사는 졸렬한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유대인들에게 나사렛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명 및 그분의 사업에 대한 예언을 먼저 자세히 소개하였습니다. 그는 점점 청중들을 깊은 문제로 이끌고 나가다가 하나님의 율법의 중대성을 다시 소개하였습니다. 의문의 율법에 대하여도 상당한 경의를 표하고, 유대인의 모든 제도와 제사 제도를 세우신 분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구주의 초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끝으로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제사의 목적이 성취되었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기분을 상해 놓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초가 잘 놓여지고 때가 이르러 그들의 마음이 부드럽게 되면 요한의 말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던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그러나 이방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먼저 말하고 하늘 왕국의 율법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였습니다.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에서 반사되는 빛이 모든 유대인의 제도에 얼마나 깊은 의미와 빛을 주었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를 설교하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구원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주신 선물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나타시려고 매우 값비싼 희생을 치르신 구속주의 사업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마음을 뜨겁게 한 후에 바울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웅변적으로 모든 인류인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굴복시킴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녹고 굴복되며 그들은 자신을 주님께 바쳤으며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들의 순종의 시금석으로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영혼을 구원하는데 사용했던 방법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때와 경우에 따라 일하는 방법과 복음 전하는 법을 달리했습니다.

만일 바울이 성급하고 허술하게 말씀을 취급했다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간에 복음을 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진리를 보게 하였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 왜 그처럼 큰 희생이 요구되었겠느냐?”는 질문을 하고 그 다음 바울은 표상으로 돌아가서 구약 성경을 죽 섭렵해 내려오면서 율법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나타내어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을 그리스도께 회개케 하고 하나님의 법칙으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신앙 간증_나를 소생케 한 복음

글 미무라 히로코

저는 친구의 권유로 “십계”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감동했습니다. 그 무렵에 교회에서 십계의 강연회가 있으니 가지 않겠냐고 권유를 받았습니다. 감동하였기 때문에 가기로 했습니다. 교회에 가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처음 교회에 참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상냥하고 따뜻하게 맞아 주신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뒤 가끔 친구의 인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친구는 아끼던 강아지를 잃어버리고, 아주 괴롭고 슬픈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어렸을 적 한 번 가본 교회를 생각하면서 ‘교회에 가면 죽음의 의미를 알 수 있을지도 몰라.’라는 동기로 교회에 다니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친구는 성경을 점점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성경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당연하였습니다. 예배 중에 계속 졸고, 끝나면 깨어나는 식이었습니다. 그래도 친구가 없는 나에게는 교회에 가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적힌 천지 창조의 부분은 조금이나마 믿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천지 창조의 하나님의 힘이 우리를 전혀 새로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이 복음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배울 수는 없었습니다. 또 죄 자체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에 내 마음을 재창조 받아야 한다는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구원 받았다고 멋대로 생각하고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48년 동안 시간을 허비하며 죄를 저지르고 예수님의 마음을 몇 번이나 갈가리 찢는 인생이었습니다. 죄의 두려움과 죄의 용서와 죄로부터 해방되어 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되는 영원한 복음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 예배와 기도회, 성경 연구회 등 거의 빠지지 않고 계속 다니고 있었음에도 내 마음은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천지 창조의 진짜 하나님을 알았다고 기뻐했습니다. 기쁨이 있는 동안 가족을 줄줄이 교회로 이끌고 회사 동료도 전도하여 동생 며느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죄악에 대해서 깨달음이 없었던 저는 죄를 짓고 마음이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전혀 무방비 상태였던 것입니다.

한때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진짜 기독교인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 아니라 그 사람에게 신뢰를 두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한 것입니다. 큰 죄입니다. 그 교회에서는 흔히 “뉘우치고 또 뉘우쳐라”라고 배웠습니다만, 저는 진정으로 뉘우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과거를 한탄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또 “악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라는 생각에서 뒤엉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18년 정도 되어서야 그 교회에 있을 수가 없어 떠나게 됐고, 신앙 자체에도 희망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마트 앞에서 자동문이 열리기를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팔짝 뛰어 보았지만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작은 아이가 오니 쓱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 문조차도 나를 생명체로 생각지 않는구나. 살아있지만, 전혀 생명체로서의 반응이 없을 만큼 몸도 마음도 죽은 상태였습니다. 성경이 든 가방이 무거워 들지 못하고 요리도구, 조리용 나무 젓가락도 쥐지 못할 정도로 심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SOSTV 일본 사역자의 집으로 초대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괜찮아 히로코 씨, 신앙은 천성도 학력도 부모도 다 관계가 없어요.”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말과 미소 속에 한 줄기 빛이 어둠을 뚫고 통과했습니다. 의심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가 보았고 곧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서 말씀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졸기만 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싫은 얼굴 하나 하지 않고 종아리 마사지를 1시간 가까이 받았습니다. 그러고서야 간신히 눈이 떠질 정도로 당시는 몸과 마음이 죽은 상태였습니다. 마사지해주신 카즈에 상은 풀타임으로 일하는 직장인인데 자신도 힘들었을 때에 저를 정성스레 안마를 해 주었습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드디어 48년 만에 겨우, SOSTV 일본에서 출판하는 도서로 참 진리의 복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의』라는 책에 베드로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베드로를 타락하게 만들고 바리새인으로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게 막은 악이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멸망시키고 있다. 교만과 자부심만큼 하나님께 더 가증스럽고 사람의 심령에 더 위험한 것은 없다. 교만은 모든 죄 중에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고치기 어려운 죄이다. 베드로의 타락은 갑자기 된 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자부심은 그가 구원을 얻었다는 생각을 하게 했고 그로 하여금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도록 만들어 마침내 자기 선생님을 부인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자아에 대한 확신을 하거나 시험에 대한 위험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안전치 못하다. …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최초의 확신을 하고 ‘나는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의지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볼 줄 모르며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 우리의 유일한 안전책은 언제든지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다. … 사람들로 죄를 범하게 하고 그들로 절망과 공포 속에 빠져 용서받기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사탄의 특별한 계책이다.”

제가 바로 이런 베드로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또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제 마음속에는 많은 우상이 있었습니다.

1 자신이 가고 있는 교회는 진짜이며 진리 교회 신자이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2 교단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고 있으니까 잘하고 있다. 3 훌륭한 박사학위를 받은 목회자들과 훌륭한 크리스천의 선배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4 예수님을 믿고 교리를 알고 있으니 구원받는다.

또 하나의 우상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각이나 지식, 그리고 감정의 고양 등의 우상입니다. 이러한 큰 바벨론은 모조리 마음속에서 몰아내야 할 것입니다. 유일한 하나님의 복음을 통하여 말씀과 성령의 힘이 없다면 쉽게 사탄의 먹이가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만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습니다.

SOSTV에서 출간한 마가렛 여사의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라』를 읽고 있었지만, 읽으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자 이전의 “뉘우치는 마음 없는 자는 안 된다”나 “악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 “성경은 악인이 읽으면 안 된다”라든가, 여러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마가렛 여사의 아들이 예수님이 믿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가렛 여사는 바로 『선과 악의 대쟁투』라는 책을 읽도록 권유하고, 그러자 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신앙을 가졌다고 합니다. 또 가출해서 마약을 하는 남자와 동거하던 마가렛의 조카가 신앙에 눈을 뜨게 된 장면들을 읽었습니다. 거기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회개하라는 말이 아니라 “당신이 예수님을 실제에 따르겠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죄를 버리고 그 죄를 버리고 이 죄를 고치고 그 죄를 고치겠다는 식으로는 결코 시작하지 말아라. 우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어라.”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기도하면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는 “예수님, 저는 멸망 당해도 당연한 사람입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도 모르겠어요. 신앙도 모르겠는데요. 잘 가르쳐주세요. 제가 열심히 구하지 않은 것과 진지함도 없이 살아온 것을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진심으로 뉘우치는 마음이 솟아올랐던 것입니다. 회개하는 마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정성을 다하고 모든 것을 주셨는데 나는 배신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습니다.

그 뒤 『오! 그리스도』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말씀에서 인용한 부분도 찾아 읽으면서 책을 읽어 갔습니다. 글쎄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읽은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깨달음이 없어 다 도중에 그만뒀는데 이번엔 읽을 때마다 감동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니!’ 압도당했습니다. 감사와 동시에 하나님께 죄송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완전히 영적인 장님이었습니다. 더 알고 싶어서 읽다가도 약한 체력 탓에 문득 졸음이 오곤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안 된다’라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또 다시 읽는 일은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읽어갈 때에 사탄이 주는 생각에 빠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사탄이 주는 생각에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하나님 말씀만을 믿고 읽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자신과의 투쟁을 하는데 몇 개월을 보냈습니다. 이제는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여전히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를 때는 있습니다. 그럴 때도 역시 이 생각에 따라가지 말고 빠지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읽는 도중 제게 필요한 답을 주셨습니다. 주님께 감사합니다. 게으른 나였지만 단숨에 각 시대의 대쟁투를 다 읽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믿을 수 없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쓰인 대로 내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뉘우치고 다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전에 보지 못한 것도 보게 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진리를 대할 때는 진지한 태도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몰랐던 자신의 죄도 점점 깨닫게 되고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게 되는 마음을 조금씩 강하게 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저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모와 자녀_하나님의 축복은 "지금"

글 이영신

지금까지 하늘학교의 교사인 주님께 지속적으로 배운 교훈 중 하나가 지금의 가치입니다. 나의 형편을 아시고 도우시는 살아계신 주님의 은혜가 내게 허락된 유일한 시간이며 이 때 나타낸 나의 선택이 나와 이웃의 구원에 밀접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녀의 영생의 유익을 위해 도우시는 주님을 먹고 마실 수 있도록 허락된 수많은 지금들을 놓치고 있는 동안 나와 가족들은 나의 죄 된 사랑으로 매일 고통으로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사랑해온 남편과 아들과 딸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주님은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며 지금 주님을 바라보는 법과 그 가치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는 나의 매일 매 형편에서 가족을 향한 나의 잘못된 사랑을 드러내시고 나의 죄 된 사랑으로 받은 그들의 상처와 돌처럼 단단해진 그들의 숨겨진 마음을 보게 하시며 지속적으로 주님의 성실하심과 친절하심이 베풀어지는 바로 지금 쉬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마치 낯가림을 하는 어린 아이가 엄마 치맛자락 꼬옥 붙들고 엄마 뒤에 숨듯이 처음엔 가족들을 통해 드러나는 나의 죄 된 사랑의 결과들을 감당할 수가 없어 한 순간도 주님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나를 아시고 매일 매 순간 주님을 바라봄으로 얻는 행복한 즐거움 맛 보이며 가르쳐 주신 주님의 은혜로 이제 나의 모든 것 아시고 오직 영생의 유익 위해 도우시는 주님 바라볼 수 있는 지금이 늘 가장 행복합니다. 죄와 죄인을 구별하사 죄는 정죄하고 죄인은 죽기까지 사랑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아 그 사랑 안에서 더 자라가게 하시는 사랑하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오늘 지금을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 주님만 더 바라봅니다. 매일 매 형편에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남편을, 아들을, 딸을 정죄하며 주장하던 습관적인 죄를 씻기시고 또 씻기시어 나와 같은 죄인을 주님의 방법으로 사랑하게 하시고, 그 사랑하심으로 그들의 단단하던 마음 부드럽게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찬양합니다. 나의 죄 된 사랑의 결과 기계적인 관계에 놓여졌던 한없이 위태로운 엄마와 아들의 관계까지 매일 매 형편에서 아시고 도우시는 주님의 치유의 은혜로 이제 아들과 엄마는 그 형편의 분량만큼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의 사랑에 반응하며 자라갑니다. 때론 더뎌 보이나 분명히 역사하시는 주님의 사랑은 아들과 나누는 소소한 대화에서도 분명히 만져져 감사합니다. 엄마 품속의 어리광을 놓쳐버린 어린 시절을 회복시키시는 양 19살된 다 큰 아들은 장년의 부끄러움도 없이 불룩한 배를 내보이며 자랑하고 자기 일상의 소소함을 간극 없이 조잘조잘 자기의 흉허물들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아들이 며칠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 동안 함께 하는 이들은 대부분 건강식을 하시는 분들입니다. 건강식을 기피하는 아들의 형편을 아는 터라 먹는 것으로 인해 고생했을 아들의 여러 어려움이 보여 제일 먼저 묻게 되는 말이, “먹는 건 어땠어?”입니다. 참고로 아들은 버섯을 정말 싫어합니다. 라면은 정말 좋아하며 돌솥비빔밥과 소면은 싫어하지 않은 정도입니다.

“먹는 건 어땠어?” “점심 때 버섯전문점 간다고 해서 아예 먹기를 포기하고 갔는데 다행히 다들 돌솥 비빔밥 드시더라구요, 그래서 나도 먹었어요!” “버섯은 없었어” “아니요 골라내고 먹었어요!” “그런데 엄마 OO사람들은 희한하게도 어떤 음식에도 버섯을 넣어요. 그것도 표고버섯으로!” “건강을 생각하시는 분들은 버섯에 영양성분이 많으니까 보충하려고 버섯을 많이 사용하게 되지~~” “심지어 라면에도 버섯을 넌다니까요!” “그럴 땐 어떻게 해?”“골라내고 먹죠. … 엄마 한번은 OO누나가 소면을 끓여 주었는데 소면 속에 팽이버섯이 들어 있는 거에요. 하마터면 모르고 같이 먹을 뻔 했어요”(가슴을 쓸어 내리며) “OO누나가 버섯 못 먹는 거 몰라?” “아는데 팽이 버섯은 먹는 줄 알았나 봐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 안 먹었어?” “어떻게 그렇게 해요? 미안하게! 골라내고 좀 먹었어요! 골라내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둘 다 색깔도 같죠? 모양도 같죠? 팽이버섯 머리 찾아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다고요!”(아마 충분히 굉장히 그랬을 아이다) “다음부터는 OO갈 땐 라면을 따로 챙겨 가야 할 것 같아요. 컵라면이랑~” 아들의 여러 형편을 알기에 진심으로 “우리 아들 고생 많았겠네!” 했습니다.

지난 3~4년간 매일 매 형편에서 함께 하시며 홀로 설수 없는 죄인 자녀에게 지속적으로 가르치신 하늘 아버지의 신실하신 교훈 “오늘” 바로 “지금” 인간으로 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심! 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엄마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들의 여러 부족들로 인한 시험이 있으나 아들을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아들 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아들이 나타내는 모든 부족과 염려를 기꺼이 주께 드리고 즐거움으로 아들을 의탁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땅히 내가 할 일 주님의 사랑 나타내는 일을 즐거움으로 하게 하십니다. 그 동안 이 죄인을 단 한번도 정죄하지 않으시고 다만 살리시기 위해 그 처한 매 형편을 아시고 베푸신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주님 바라봄으로 나의 분량 것 감사함으로 행하게 하십니다. 아들 안에서 아들의 영생을 위해 일하시는 주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가 아닌 돕는 자로서 행하기만을 간절한 두려움으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들의 여러 연약한 형편을 통해 살아계신 주님은 지속적으로 나의 맘에 교훈하십니다.

어떤 것에 대한 싫어진 마음! 어떤 것에 대한 경계하는 마음! 어떤 것에 대한 원수 된 마음! 어떤 것에 대한 도무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바로 적개심 즉 증오심에 대한 교훈입니다. 아들이 버섯에 대해 갖고 있는 마음! 죄에 대해 내속에 생겨진 마음!

그 마음을 심는 대상과 그 마음이 드러내는 결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적개심의 유일한 대상은 죄 즉 불법을 통해 죄인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영원히 분리시키는 원수 사탄이며 사탄을 대적하게 하시려 주시는 성령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더할수록 사단에 대한 적개심도 더해 갑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창3:15)”고, 인류의 첫 조상이 듣는 가운데 공포된 이 선언은 그들뿐 아니라 우리 모든 죄인 각각에게 구속에 대한 분명한 약속이 됩니다. 주님은 “지금” 그 일을 이루시며 그 축복은 우리의 매 선택이 결정합니다. 에덴에서 선포한 구속의 약속을 우리 각자 안에서 이루시는 신실하신 주님의 구원에 매일 매 순간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가득 건강식탁_딸기 핑거 푸드

글 김영신

이현맘은 수많은 아름다운 창조물 중 딸기가 너무 사랑스럽고 예뻐요~ 도저히 싫어할 수 없는 그 색깔과 모양하며.. 맛은 또 어떻구요~^^ 아무 생각 없이 접시위에 올려놓아도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훌륭한 장식이 되는 딸기입니다. 원래 노지 딸기는 늦봄에 수확하지만 요즘엔 겨울과 초봄까지가 딸기철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드네요. 모양과 맛과 색이 훌륭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딸기로 디저트를 만들더라구요. 이현맘도 예쁜 딸기를 더 돋보이게 하는 핑거푸드를 만들어 보았어요.

재료

원하는 만큼의 통밀식빵, 식빵과 같은 개수의 딸기, 바나나, 코코넛 파우더

도구: 밀대, 머핀틀

만들기

1. 식빵의 네 면과 네 귀퉁이를 잘라준 다음 밀대로 얇게 밀어주세요. 2. 머핀틀에 예쁜 모양으로 넣으시되 밑면이 바로 설 수 있도록 신경 써서 모양을 잡아주세요. 3. 오븐에 200도 온도로 6분 정도 구워 주세요. 4. 모양 잡힌 빵에 바나나를 으깨서 채워 주시구요, 5. 그 위에 딸기를 올린다음 코코넛 파우더를 뿌려주시면 완성입니다.

mom’s tip

아주 간단하지만 이벤트를 더욱 빛나게 해 주는 요리입니다. 통밀 식빵은 흰 밀 빵에 비해 글루텐 함량이 조금 더 높아요. 그래야 부풀어 오른 빵이 모양을 유지한답니다. 따라서 흰 식빵에 비해서 얇게 밀어지지는 않아요. 그래도 이현맘은 모양과 색 보다는 건강을 선택하겠습니다.

mom’s note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타락함이 생기고 천연계의 아름다움이 많이 손상되었지만 그래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은 아름답고 경이롭습니다. 철마다 다른 색깔의 식물들, 다른 모양의 과일들, 바람의 세기와 방향조차도 달라지는.. 참 섬세하시고 자상하시며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대수롭지 않게 접하게 되는 천연계의 사물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고 감사가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힐링스토리_효소저지물질

입춘이 지난 지 오래지만 두꺼운 패딩잠바를 벗어놓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겨울과는 다르게 한 자락 스치고 지나가는 따뜻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아직 멀었다고 말하면서도 겨우내 무심히 버려두었던 텃밭으로 자꾸 눈이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디에 무엇을 심을지, 또 얼마나 심어야 좋을지 생각으로는 이미 밭에서 삽질을 하고 있습니다. 더디 온다 하여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봄이 오듯이 주의 오심이 더디다 하여도 분명히 많이 가까워졌음을 부인할 길이 없는 요즘입니다.

*효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것, 오늘은 인간의 생명유지에 꼭 필요한 효소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효소는 살아 있는 모든 동식물에 함유되어 있으며 체내에서 항염, 항균, 해독, 살균, 혈액 정화, 소화, 흡수, 분해, 배출 등의 일을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재배 방식과 조리 과정으로 음식에 함유된 효소가 턱없이 부족하거나 파괴된 체 식탁 위에 오르고 있으며 그로 인해 체내 효소 부족 현상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효소의 분류

효소는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체내에서 생성되는 소화효소와 신진대사 효소, 체외에서 음식물을 통하여 공급되는 음식효소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소화효소- 타액, 위장, 췌장, 간, 장샘에서 나오며 음식물을 빠르게 분해하여 우리 몸에 잘 흡수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2.대사효소- 필요에 따라서 신체에서 생성되며 우리 몸의 모든 생명 활동에 관여합니다. 3.음식효소- 곡식, 과일, 채소 등 모든 식품에 존재하며 음식을 섭취하므로 얻을 수 있습니다.

*음식효소 섭취의 중요성

음식효소를 충분히 섭취하지 않으면 그만큼 소화효소와 신진대사 효소를 많이 사용하게 되고 그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지며 많은 질병에 쉽게 노출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싱싱한 과일, 야채와 견과류, 콩류, 통곡식을 먹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효소저지물질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냥 먹기만 한다고 음식효소가 다 섭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 견과류와 씨앗 등에는 자물쇠로 잠가둔 것처럼 음식효소를 꼼짝 못하게 묶어놓는 물질이 있는데, 그것을 효소저지물질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효소저지물질을 제거하여 비활성화 되어 있는 음식효소를 활성화 시켜주는 방법은 없을까요?

*물에 담그기

1. 효소저지물질을 제거하는 방법은 의외로 아주 간단합니다. 견과류와 씨앗을 일정 시간동안 물에 불려주면 효소저지물질이 중화되어 음식효소들이 활성화 되고 비타민, 무기질 등의 소화 흡수가 쉬워집니다. 또한 효소저지물질 외에도 콩류, 나무의 열매, 곡류의 외피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천연식물 항산화제인 피트산이 없어지는데, 피트산은 무기질 흡수를 방해하는 성분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호두죽을 만들기 위하여 호두를 물에 불렸다가 껍질을 깐 적이 있는데 요리를 끝내고 보니 마치 시멘트를 만진 것처럼 손이 뻣뻣해져 있었습니다. 호두 속껍질에 있는 피트산 때문입니다. 2. 얼마나 물에 담가 두어야 효소저지물질이 제거될까요? 아몬드-12시간  호두, 피칸-4시간  캐슈넛, 해바라기씨, 호박씨-2-3시간  아마씨-6시간 ?특히 여름철이 되면 해바라기씨는 싹이 잘 나므로 시간을 잘 지키셔야 합니다. 효소저지물질을 뺀 아몬드를 3시간 정도 채에 바쳐서 물기를 완전히 뺀 뒤에 얇게 썰어주게 되면 아몬드 슬라이스가 됩니다. 3. 물에 불리는 방법   사용하는 물은 반드시 정수 혹은 염소가 제거된 물이어야 합니다. 효소는 열(섭씨 48도면 파괴됨), 화학물질, 방사선 등에 약하기 때문에 수돗물의 염소성분은 좋지 않습니다. 견과류 등을 물에 담가둔 용기는 뚜껑으로 완전히 밀폐시키지 말고 숨을 쉴 수 있도록 천으로 덮어줍니다. 또한 냉장고에 넣어두지 말고 상온에 두는 편이 좋으나 후덥지근한 여름에는 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4. 건조기에 말리기   물에 불린 견과류와 씨앗은 깨끗이 씻어서 물기를 빼고 말려줍니다. 아몬드우유 등 견과류 우유를 만들 때에는 젖은 상태 그대로 사용해도 되지만, 장기간 보관하려면 햇빛 자연건조 혹은 건조기를 이용하여  41도의 온도로 건조시켜 줍니다. 볶는 것은 효소와 영양소를 파괴하고 소화 흡수에 방해가 되며 산화된 것을 먹게 됩니다. 건조해서 잘 마른 견과류와 씨앗은 유리병에 넣어서 냉장고에 보관하도록 합니다. 효소는 열에 의해 파괴되기도 하지만 얼어서 죽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냉동 보관이 아니라 냉장 보관이어야 합니다.

견과류만 드시면 속이 불편하셨던 분들이 계시지요? 바로 효소저지물질 때문입니다. 이제 물에 불려서 잘 건조시킨 견과류를 맘 편히 드시고 건강도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들, 죄로 인해 아름다운 형상들이 일그러져 버렸습니다. 그 죄의 짐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우리의 모습 속에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하여 세상의 빛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