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 학교의 교과서

하나님 학교의 교과서

하나님께서는 학교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학교는 매우 특별한 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서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입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에는 입학은 있지만 졸업은 없습니다. 이 학교의 교육과정은 하늘나라까지 이어져 그곳에서도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 학교의 특징은 각 개인에게 개별적인 교습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학교의 교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각 학생들에게 가르치시려고 하는 교과과목을 마련하시고 각 개인이 그 과목을 다 이수하기까지 그 사람을 교육하십니다.
이 학교에서는 과연 무엇을 배울까요? 하나님의 교육과정은 무엇일까요?
이번 호 신앙기사에서는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과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레슨에 대해 연구해봅니다. 하늘까지 연결될 하나님의 학교에 모두 입학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생애의 빛 편집실에서

하나님의 교육은 어떻게 다를까요?

하나님 학교의 교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10).

교육은 인간에게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교육은 사람들의 사상과 정신과 마음을 꼴지을 수 있으며, 교육에 따라 사람은 개조되고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한국은 교육열이 매우 높은 나라입니다. 교육을 위해 보이는 한국 부모들의 도에 지나칠 정도의 관심과 열심, 그리고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부모들의 희생과 헌신은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에 있어서 많은 경우에 그릇된 목표 달성을 위해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는 많은 부모들에게 있어서 교육은 출세와 더 나은 지위와 재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육은 지적인 지식을 연마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젊은 시기에만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은 누구에게나 끝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육에 대해 연구해 보면, 인간의 교육의 개념은 너무 편협되고 그 범위가 제한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좁은 의미의 교육 개념밖에는 가질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교육 원칙과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신선하고 새로운 도전이 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교육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우리는 교육에 대해 더욱 넓은 이해와 높은 목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교육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범위가 너무 좁고 그 정도가 낮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개념 속에 교육은 단지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교육’하면 어릴 때부터 청년 시기까지 지식을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하나님의 교육 개념은 어떨까요? 하나님의 교육 원칙은 인간의 교육과 너무 다릅니다. 참된 교육의 개념은 지식이나 어떤 연구 과정을 이수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이 세상의 생계수단이나 생활을 위해 준비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육 개념은 전인교육이며, 평생교육입니다. 영과 혼과 몸, 곧 지적, 도덕적, 신체적 능력이 일생에 걸쳐서 균형지고 원만하게 발달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교육 개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육은 이 땅위에서 받는 교육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국에까지 계속되는 것으로, 이생에서 내세의 삶에 맞도록 인간을 꼴짓고 훈련시키고, 하늘에서도 거기서 계속되는 교육입니다.
하늘에 가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죄는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고 거의 말살시켰습니다. 하나님의 교육은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태초에 창조받은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인간의 마음과 영혼 속에 재현시키는 것이며, 하나님과 교통하고 살던 태초의 그 영적이고 고상한 존재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인류를 위한 구원의 계획이 세워지고 유예의 생명이 허락된 것은 이것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육의 목적은 인간이 처음 창조 받을 그 때의 완전함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구속의 놀라운 계획을 마련하시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사상과 마음을 가진 새사람으로 재창조 받아 하늘에 살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이상은 사람의 생각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보다도 더 높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가지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입니다. 교육의 최대 목적은 품성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그분을 아는 것이 모든 참 교육의 목적과 기초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서 그분의 품성과 일치하는 품성으로 점점 형성되어 가는 것이 참된 교육의 목적과 기초입니다.

사람이 이러한 하나님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열심과 소원을 가질 때, 하늘처럼 높고 우주처럼 넓은 교육, 곧 현세에서 끝나지 않고 내세에서까지 계속될 하나님의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땅의 예비 학교에서 보다 높은 단계의 하늘 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춰주는 참된 교육에 들어가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협력하는 사람은 참된 교육과정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교육의 목적과 개념을 이해한 사람들 앞에는 더 이루어야 할 목표, 더 도달해야 할 표준이 항상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살아갈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 목표와 표준에 도달하기 위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닮기 위한 참 지식을 갖기 위해 매일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정진할 것입니다. 품성 형성이라는 참 교육은 단순한 지적 훈련과 육체적 훈련 이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매일 가르침을 받고, 성령의 역사 속에서 영혼과 마음이 매일 새롭게 거듭나고, 영적 지식 속에서 자라나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점점 꼴 지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교육을 받을 때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받는 교육 중에서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게 되는데,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과 이 세상에서 받는 훈련은 영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의 과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학교

지상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학교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창 2:8).

이 세상이 시작될 때에 이미 하나님의 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교육의 모형과 원칙을 실제로 보여 주시기 위해 시범학교를 시작하셨는데, 그 학교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의 보금자리였던 에덴에 설립되었습니다. 에덴 동산은 그들의 최초의 교실이었고 그 학교의 교사는 창조주 하나님이였으며 그들은 최초의 학생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시작과 함께 세워진 하나님의 교육제도는 후에 계속될 모든 시대의 교육에 모범의 실례가 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최초의 학교와 학생
에덴 동산이 창조주의 손에서 지음 받을 당시에는 온 땅이 한없이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학교로 세우신 에덴 동산은 주님의 완전한 창조를 훼손시킬 죄의 흔적이나 죽음의 그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께서 지구 전체가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지 보여 주는 모본이었고, 하나님께로부터 계속적으로 교육을 받을 때에 이루어질 이상적인 학교의 표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세우게 될 다른 가정과 학교들이 이 모본과 같이 되도록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지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일을 배우는 가정과 학교로 가득 차게 되고, 이곳 학생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세세토록 반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학교에 있던 최초의 학생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창조주의 손으로 지음을 받았을 때 육체와 지능과 영성에 있어서 하나님을 매우 닮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창 1:27).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으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높은 품위에 합당한 자질을 부여 받았습니다. 그들은 육체뿐만 아니라 지적이고 영적인 모든 면에서도 창조주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오래 살면 살수록 더욱 완전히 창조주의 형상을 나타내고 그분의 영광을 보다 충분히 반영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사람의 모든 재능과 능력과 활력은 무한한 발달 가능성이 있었으며 끊임없이 증진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관심을 가지시고 친히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때때로 천사들의 방문을 받고 그들로부터 권면과 교훈을 들었으며, 때로는 서늘한 때에 동산을 거닐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과 대면하여 교제하는 큰 특권을 누렸습니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변치 않았더라면, 그 모든 특권이 영구히 우리의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시간을 보내면서 계속적으로 새로운 지식의 보화를 얻고, 행복의 새 샘을 찾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힘에 대하여 더욱 더 밝은 개념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창조함을 받은 목적을 보다 완전히 성취함으로써 창조주의 영광을 더욱 잘 나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최초의 교과서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는 죄의 흔적이 전혀 없는 아름다운 천연계 속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아담과 하와 앞에 생생한 실물 교훈들을 펼쳐 놓고 있는 천연계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마련하신 교과서였습니다. 꽃과 나무들, 호수와 산,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 땅과 하늘과 바다와 그 모든 것들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 땅과 물에 사는 생물과 동물들의 존재의 신비를 배웠고, 하늘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질서있게 운행되는 무수한 별들, “구름의 평평하게 뜬 것”(욥 37:16)들, 빛과 소리와 밤과 낮의 신비들을 연구하였는데, 이 모든 것들은 이 지구의 첫 학교의 학생들이 연구할 대상들이었습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연계의 법칙과 생태계는 물론, 영적 세계를 지배하는 위대한 법칙들을 그들 앞에 밝히 제시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 가운데서 지적, 영적 능력이 발달되어 가며 최고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에덴 학교의 폐교와 복학의 계획
그러나 인간이 직접 하나님을 통해 배우던 학교는 문을 닫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해 에덴의 학교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통해서 배우던 길이 끊어지게 되었으며, 인간은 그 최초의 학교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은 이 땅에 슬픔과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에덴의 학교로 데려오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그들을 어떻게 죄로부터 구속하셔서 하늘의 학교로 복학시키실 계획을 발표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인간을 위해 세우신 구속의 계획은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셔서 다시 하늘의 학교에 복학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었습니다.

지상 학교의 개강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 잃어버린 에덴의 학교, 창조주 하나님과 대면하여 직접 가르침을 받을 학교에 다시 복학할 날을 고대하며 이 땅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와 마찬가지로 에덴의 학교에 입학할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충성과 사랑을 증명하고 테스트 받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육의 원칙에 입각하여 하늘의 학교에 들어가서 생활할 수 있는 거룩한 품성을 이 땅에서 기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각 개인들을 교육하시기 위해 그분의 학교를 열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그 학교에 입학하여 그분의 레슨과 공과들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더욱 더 훌륭한 교과서도 마련해 주셨는데, 그것은 천연계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잘 설명해 주는 성경 말씀을 주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교사로 하늘로부터 파견해 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연계라는 거대한 책의 페이지마다 지금도 그분의 창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천연계는 여전히 그것을 창조하신 분에 대하여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타내는 것들은 부분적이며 불완전한데다가, 타락한 상태에 있는 연약한 사람의 지력과 통찰력으로는 하나님의 실상을 바로 알고 해석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기록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의 완전한 표준이며, 교육은 이 말씀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늘까지 이어지는 가장 가치 있는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나 있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체험적인 실습의 공과들도 배워야 합니다.

지상에서 배우는 하나님 학교의 과목 온유와 겸손

지상에서 배우는 하나님 학교의 과목
온유와 겸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 11:29).

지상에서부터 하늘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학교에 입학하기 원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그분의 학교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파견된 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 땅에서 반드시 배워야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하는 이 과목들은 각 개인의 사정과 성격과 시간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그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그 이유는 하늘에 적합한 성품과 자질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필요한 훈련과 영적 교훈들이 같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훌륭한 교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기 위해 가르치시는 공과들에 대해 연구해보기로 합니다.

제일 먼저 배워야 하는 과목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 11:29).
예수님께서는 온유를 천국에 들어가는 첫째 조건으로 삼으실 만큼 이 덕성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온유한 자들이 모인 곳만이 분쟁이 없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우리는 맨 처음으로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데, 이 귀한 덕성은 예수님의 생애와 품성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온유와 겸손
하나님과 근본적으로 동등하시고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빌 2:6)셨습니다. 예수님은 생애의 온갖 미천한 경험을 통해 온유와 겸손을 보여주셨는데, 그분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다니시되 왕으로서 충성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 종이 되셨습니다. 천사보다 더욱 위대한 특성을 소유하셨지만 예수님의 신성하고 거룩한 품성에는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이끄는 온유와 겸손이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는 어디에도 자아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시면서 이제 우리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명령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품성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자신을 더욱 낮은 자로 평가할 것입니다. 주님의 놀라우신 영광을 보고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최고의 자격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래서 그 많은 재능이나 학문, 또 박식한 지식과 활동이 주위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낸다고 해도, 만일 그 은사들에 온유나 겸손이 연결되어 있지 못하다면 거기에는 자기 칭송과 자기 찬양이 나타날 것입니다. 각 은사와 자질들이 온유와 겸손으로 주님께 바쳐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주께서 보시기에 무익한 종들이 될 것입니다.

교만과 반대되는 온유와 겸손
사람의 본성을 보면 언제나 자기 과시를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해 배운 사람은 이기심과 교만과 지배욕을 멀리 합니다. 제일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투쟁하거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밀어낼 생각도 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발아래 앉는 것을 제일 높은 자리로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 속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손이 이끌어 주기를 잠잠히 기다립니다.
지상에서의 예수님은 비록 투쟁의 와중에서 보내셨지만 평화의 생애였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소동이나 사탄의 분노도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으로 얻어지는 안정은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 그분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마음의 평안과 쉼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자아가 살아 있으면 언제나 그것이 굴욕과 모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방어 태세를 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고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추어질 때는, 무시나 경멸을 개의치 않게 될 것이며, 비난에 대하여 귀머거리가 되고, 조소와 모욕에 대하여는 소경이 될 것입니다. 원수진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보다는 억울함을 참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증오와 복수의 정신은 원래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정신을 품는 자에게는 불행이 초래될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얻게 되는 마음의 겸비와 온유는 진정한 축복이 됩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우리의 첫 조상이 아름다운 이 지상 곧 그들의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자아를 높이고자 한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것을 속량하는 것은 자기를 낮추신 희생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학교에 들어와 온유와 겸손을 제일 먼저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온유와 겸손의 공과를 배운 사람들만이 하늘의 학교에 들어가게 될 것인데, 그 품성의 특질은 모든 품성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으로부터 온유와 겸손의 공과를 배우고 계시나요? 하늘의 학교에 입학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겸손해지지 않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처해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가르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상에서 배우는 하나님 학교의 과목-믿음

지상에서 배우는 하나님 학교의 과목
믿음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 5:6).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품성의 요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하늘에 들어가 끊임없이 계속될 하나님의 영원한 학교 수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냥 예수님의 이름만을 믿고, 교회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머리로 인정하는 피상적인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단순히 세상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명목상의 믿음은 결코 심령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믿음이란 불가능한 것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주님께서 우리를 악한 죄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주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상과 마음과 동기를 가진 새 피조물로 창조해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믿을 때에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제일 좋은 것을 행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머리로만 동의하는 의견으로 여깁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자신들을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로 결합시키는 거래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바치고 그분의 뜻대로만 생애를 살아가기로 순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분께서 모든 주도권을 가지고 삶을 책임지시도록 바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산 믿음은 주님만 의지하는 신뢰를 의미하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를 승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자신의 길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길을 택하고 따라가게 됩니다. 믿음은 우리의 무지 대신에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의 약한 것 대신에 하나님의 힘을, 우리의 죄된 것 대신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축복을 받아들이며, 믿음을 통해 우리의 생명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연습과 활용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단순히 진리에 대한 단순한 지식인 동의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알기까지 믿음을 활용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자체에는 무엇이거나 허락하신다는 선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눅 8:11). 도토리나무가 도토리 속에 포함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물은 그분의 허락 가운데 확실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허락을 받아들일 때, 그 선물은 우리의 소유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또한 그 약속이 허락하는 선물들을 단순한 믿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아빠를 신뢰하듯이 하늘의 아버지를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원하고 순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할 때에 하나님의 모든 힘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나 있는 허락을 내 소유로 하기 위해 믿음을 행사할 때 믿음은 자라납니다.

믿음을 강하게 하려면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접촉해야 합니다.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과 성품을 잘 인지하게 될 때에 그분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성경의 역사들을 연구하게 되면, 이 세상의 역사와 제국의 흥망성쇠와 정세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그 때에 그분의 섭리의 손길이 세상을 주관하고 계신 것을 알게 되어 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또한 성경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예언과 그 성취를 볼 때에, 예수님의 생애와 구속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볼 때에 우리의 믿음은 더 강하게 됩니다. 믿음은 기도를 통해 잘 활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자라게 됩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분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훈련을 받는 것은 믿음이 점점 강하게 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겸손히 탄원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위하여 영혼이 주린 것처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리라는 것을 믿고 나아와야 합니다.

살아있는 참된 믿음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며 영혼을 순결하게 하는 믿음입니다. 사랑으로 역사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볼 때 생기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 사랑에 감격할 때에 생기는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그 신비한 사랑을 볼 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게 됩니다. 그것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데, 그 믿음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정원에 가서 나무를 볼 때에 만일 그 나무가 생기가 없고, 나뭇잎들이 싱싱함이 없고 꽃이 피지 않고 줄기나 가지에 생명의 징후가 없다면, 우리는 “이 나무는 죽었다! 정원에서 그 나무 뿌리를 뽑아내야 하겠네. 정원의 자리만 차지하고 있군!”하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면서도 영적 생명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불붙는 믿음의 징후가 없다면, 만일 산 믿음으로 자라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성품과 삶과 행동에 아무 영향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주님의 계명을 행하도록 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산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며, 그분 안에서 연합되는 참된 믿음을 가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그리스도인 품성의 근본적이고 능력 있게 역사하는 요소입니다.

믿으십시오

우리는 단순하게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죄를 씻어주시고 새 마음을 주시기를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그렇게 하실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은 우리가 받은 줄로 믿어야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의 권능을 믿을 때에 그들의 질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마 9:6).

많은 사람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직접 또는 개인적으로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버리십시오! 아무리 죄가 많은 자라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 안에서 힘과 순결과 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로 더러워진 옷을 벗기고 의의 흰 두루마기를 입혀 주시려고 기다리십니다.
단순한 믿음은 우리의 생애의 매 발걸음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 믿음의 발걸음은 결국 우리를 하늘에까지 이르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을 배우고 계십니까? 떨리는 발걸음을 믿음으로 디디십시오! 여러분의 앞에 있는 모든 장애물이 사라지는 경험을 할 것입니다. 작은 믿음의 발걸음이 큰 믿음의 발걸음이 되도록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지상에서 배우는 하나님 학교의 과목-사랑

지상에서 배우는 하나님 학교의 과목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 3:16).

이 땅에서 사랑의 교과를 배운 사람만이 하늘 학교에 입학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 품성의 핵심이며,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사랑의 공과를 배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학교의 다른 과목들을 다 이수했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근본 동기는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던 것입니다. 인류를 사랑하시므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아들을 죽도록 내어 주신 사실은, 죄인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도 더 강한 것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사랑을 창작할 수도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사랑 중에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불리는 어머니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큰 대양의 물 한 방울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의 시간을 두고 연구해도 아주 희미하게 밖에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가서도 죄로부터 인간을 구속하신 그 놀라운 사랑에 대해 영원히 배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모본

인간은 천성적으로 이기적이며 냉담합니다.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사랑의 생애를 모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게 될 때, 그리고 십자가에 나타난 그분의 사랑을 보게 될 때, 주님을 찌르고 죽게 만든 우리 자신의 죄의 흉악성을 깨닫고 애통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때에 그분의 사랑은 우리 심령에 새 생명을 지어주게 됩니다. 사랑은 사랑을 일깨우며,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보아야 우리는 사랑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어주시면서까지 사랑하신 다른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세리와 이방인들도 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사랑, 곧 자기를 괴롭히고 망하게 하는 원수를 사랑하며,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며, 자기를 핍박하고 저주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차원 높은 사랑입니다. 정말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 용서를 받은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줄 때만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용서해야 할 어떤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단순히 우리를 정죄에서 면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고,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하는 놀라운 능력의 용서입니다. 곧 마음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용서인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가 남을 용서했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모든 용서는 공로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사랑을 얻기 위해

사랑은 감정이 아니고 원칙입니다. 곧 사랑은 느껴지는 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의 영의 제어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 속에 임재하실 때에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되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게 되면, 우리의 사상과 욕망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복하게 되어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는 그분의 형상으로 새로 지음을 받고, 우리 생애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면(롬 5:5), 그리하여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이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면(빌 2:13), 우리는 저절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사랑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우리를 통해 나타내신 까닭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에만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랑을 갖게 되고 남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실 때 그 그치지 않는 사랑의 샘물은 우리 속에서 그치지 않고 흐르게 될 것이며, 그 사랑의 원칙이 변하지 않는 우리의 원칙이 될 것입니다. 사랑의 법칙을 배운 사람만이 사랑의 법칙이 지배하는 하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랑의 공과를 가르치시기 위해, 사랑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 배치하실 때,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음으로 그 사랑을 잘 나타내므로 하늘 학교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상에서 배우는 하나님 학교의 과목-고난

지상에서 배우는 하나님 학교의 과목
고난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7).

하나님께서 하늘 학교에 입학시키시기 위해 준비시키시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세상의 고난의 학교에서 예비 훈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책임이 중하면 중할수록, 봉사의 직임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시험은 더욱 더 철저하고 그 단련은 더욱 혹독합니다. 그러나 그 시련과 고난은 우리를 정금같이 나오게 해주는 고마운 도구입니다.

시련과 고난의 이유

고통과 시련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세속의 찌끼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받는 중요한 교육의 일부분입니다. 괴로운 경험이 닥쳐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장애물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훈련의 방법이며 그분께서 정하신 성공의 조건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세상의 좁은 길을 걸으며, 고난의 도가니에서 정결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동안 쓰라린 투쟁을 경험하며, 극기를 감내해야 하며 처절한 실망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죄의 악함과 죄로 인한 비애를 가르쳐 주므로, 그들은 죄를 가증하게 보게 됩니다.
마음을 읽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아는 것보다 그들의 약점을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이 올바른 교훈과 수업을 받는다면, 주님의 사업의 발전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을 아시며, 하늘에 들이시기에 적합한 품성을 가지게 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섭리로 사람들을 원치 않은 지위와 여러 가지 환경에 처하게 하셔서 자신들이 모르고 있던 결점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점들을 극복하고 주님의 나라에 적합한 자격을 갖출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순결하게 하시기 위해 고통의 불이 타오르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택하신 자녀들을 쉬지 않고 돌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현세와 내세의 유익에 긴요한 것 외에는 어떤 고통도 닥치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시련과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며 더욱 깊은 경건과 더욱 큰 힘을 얻게 됩니다.

고난의 과정을 지낸 사람들

우리의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고난의 과정을 지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 시대를 통하여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해 왔습니다. 그는 그들을 고문하고 죽였으나 그들은 죽음으로써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확고부동한 믿음으로 사탄보다 더 강하신 하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사탄은 고문하고 몸을 죽일 수는 있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은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사탄은 그들을 감옥의 벽 속에 감금 시킬 수는 있었으나 정신은 속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둠 저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베드로는 한 때 그리스도의 사업에서 십자가를 보기를 원치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구주께서 제자들에게 임박한 당신의 고통과 죽음을 알리셨을 때에 베드로는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그리마옵소서!” 고통을 피하고 싶은 자기 연민이 베드로로 이런 말을 하게 한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길은 고난과 굴욕을 통과하는 길이라는 사실은 베드로에게 쓰라린 공과였고 그는 그 공과를 배우는 데 느렸습니다. 그러나 풀무불의 열기 속에서 이 교훈을 배우고 오랜 세월의 수고를 겪은 후 그는 이렇게 편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욥과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니엘, 다윗 등 믿음의 선조들의 경험을 연구해보면, 그들은 모두 고난의 과정을 통과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택했을 때, 그는 광야에서 배은망덕한 백성들에게 무고히 핍박과 모함과 반역을 당했습니다. 사울 왕의 질투로 광야로 쫓겨 다니던 도망자 다윗도 온갖 질고와 질시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다윗은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모든 도움으로부터 차단되었을 때, 그리고 광야 생활의 불안과 불확실함, 계속적인 위험과 빈번히 도망해야 했던 고달픈 삶이 연속될 때에, 하나님을 더욱 온전히 의뢰하는 법을 배웠고 그의 믿음은 더욱 견고하게 되었습니다. 기다림과 위험의 여러 해를 통해 다윗은 안위와 그를 향한 지지와 평안을 하나님 안에서 찾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므로 그분의 영광에 참예하는 자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으셨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시험에서 우리를 지키시리라는 약속과 함께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신 33:25).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해 뜨거운 풀무불 속을 지나가게 되었다면, 그분께서는 바벨론에서 다니엘의 신실한 세 친구와 함께 계셨던 것처럼 여러분 곁에 계실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굴욕과 치욕을 당할 때마다 기뻐할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분을 위해 받는 고통을 달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었던 욥은 시련을 다 견딘 후에 그가 말하고 믿은 대로 되었습니다. 그는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하였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끈기와 인내로 자신의 경건한 품성을 나타내었고, 그렇게 하므로 그가 대표하고 있던 하나님의 품성을 옹호하였던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견딘 사람들은 불이 섞인 유리 바닷가에 서서 고통 속에서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면서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학교에 입학하여 배우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애에 여러가지 서로 다른 경험들과 일들이 일어납니까? 그 모든 일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인데, 여러분들의 품성을 하나님의 품성으로 꼴 지어 하늘 학교에 들어가도록 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만이, 이 땅에서 이수해야 할 과목들을 훌륭하게 다 배우고 이수한 사람들만이 하늘 학교에 들어가 더 높고 원대하고 놀라운 과목을 계속해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하늘은 학교입니다. 연구 분야는 우주이며, 교사는 무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곧 구속의 경륜이 성취될 때 하나님의 교육은 다시 에덴 학교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늘 학교에 입학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고전 2:9)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 의를 따르라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의를 따르라

모두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함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그대의 염려와 시련이 무엇이든지, 그대의 사정을 주님 앞에 내놓으라. 그리하면 그대의 정신은 넉넉히 인내하게 될 것이다. 난처하고 어려운 일에서 스스로 해결될 길이 그대에게 열려질 것이다. 그대 자신이 연약하고 속절없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그분의 능력 안에서 그대는 더욱 강해 질 것이다. 그대의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그대의 짐을 져 주시는 분에게 그 짐들을 맡김으로써 얻는 안식은 더욱 복될 것이다.
환경이 친구들을 헤어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넓은 바다의 출렁거리는 물결이 우리와 그들 사이에 가로놓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환경도, 어떤 거리도, 우리를 구주와 분리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분께서는 우리 우편에 계셔서 우리로 쓰러지지 않게 해 주시고, 옹호해 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위로해 주신다. 그리스도께 구속받은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욱 크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 안식하면서 “그분께서 나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셨으므로 내가 그분을 의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인간의 사랑은 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변할 줄을 모른다. 우리가 도움을 얻고자 그분께 부르짖으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당신의 손을 펴신다.
그리스도께서 멀리 떠나 계시다고 결코 생각하지 말라. 그분께서는 언제나 가까이 계신다. 사랑스러운 그분께서는 그대 주위에 계신다. 그대가 당신의 옷자락을 만지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교통을 통하여 당신과 동행하기를 바라신다.


너희는 스스로 팔렸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사 52:3.

죄는 하나님과 분리시킬뿐 아니라 인간의 심령 속에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소망과 역량을 모두 소멸시킨다. 죄로 말미암아 전 인체의 조직은 어지럽게 되고 마음은 타락하고 생각은 부패되고 영혼의 기능은 퇴화되었다. 순결한 신앙, 마음의 성화가 부족하다. 하나님의 개심시키는 능력은 품성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하지 않으셨다. 영혼이 약하고 승리할 도덕적 능력의 부족으로 부패하고 저하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참전하고 있는 대쟁투에 관련된 문제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진리의 가치와 대기만자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거기에서 떠나가도록 허용하는 위험을 더욱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구속을 위하여 요구된 무한한 희생의 가치는 죄가 무서운 악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죄로 말미암아 사람의 모든 육체적 조직에는 이상이 생기고, 정신은 왜곡되고, 상상력은 부패되었다. 죄는 사람의 능력을 퇴하시켰다. 밖에서 오는 유혹은 마음 속에서 공명을 얻고, 발길은 부지 중에 죄악으로 향하게 된다.
우리를 위한 희생이 완전하였던 것처럼 죄의 더러움에서 회복되는 것도 완전하여야 한다. 하나의 악행도 하나님의 율법은 면제해 주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불의도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의 윤리는 하나님의 품성의 완전성만을 표준으로 인정한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율법의 모든 교훈을 완전히 성취하셨다.


죄인들은 포로로 잡힘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딤후 2:26.

마음 속에 비그리스도인적 특성이 살아 움직이도록 허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마음 속에 품은 한 적은 죄는 점점 품성을 저하시켜 그 고상한 모든 능력을 악한 욕망에 복종시킨다. 한가지의 양심의 방벽을 제거하고, 한가지의 악습에 방종함으로 한가지의 고상한 의무의 요구를 게을리하면 영혼의 방벽은 무너지고 사단에게 길을 열어 주어 우리로 길을 잃게 한다. 유일의 안전한 길은 다윗이 “나의 행보를 주의 길에 굳게 지키사 나의 걸음이 실족치 않게 하소서”(시 17:5영문성경)라고 한 것처럼 우리 기도가 날마다 성실한 마음에서 흘러 나오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악마적인 마법의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원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방책을 세우지 않은 모든 영혼들의 주위에 음란의 마술을 걸 것이다. 유혹들이 엄습해 올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원수를 대항하기 위하여 경계하고 자제력과 순결성의 균형을 유지한다면 유혹하는 영혼들이 우리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유혹을 조장하는 일들을 전혀 행하지 않는 자들은 유혹이 이를 때에 그것을 저지할 수 있는 힘이 있으나 스스로 악한 분위기 속에 처하는 자들은 정복을 당하고 실패하게 될 때 저들 스스로 원망할 수 밖에 없다.
우리들은 참된 신학과 상식에 의해서 지도를 받아야 한다. 우리 영혼들은 천국의 분위기에 둘러싸여야 한다. 남녀들은 스스로 살펴야 하며 계속적으로 경계함으로 저희의 선행이 악한 평가를 받을 어떤 말이나 행동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자는 스스로 경계하여 순결을 지키고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더럽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그의 감화력은 향상적인 것이어야 한다.


마음이 거짓됨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 17:9.

거짓된 성결, 곧 위장된 성화는 오늘날도 오히려 속이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것은 루터 당시와 꼭 같은 정신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냄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성경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법도를 순종하기보다는 오히려 저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따르도록 이끌고 있다. 이것은 진리와 순결이 비난을 받도록 하고자 사단이 고안해 낸 가장 성공적인 것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극기와 겸손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다니엘이 인자와 같은 이를 볼때에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듯하”다고 말한것과 같이 될수 밖에 없을것이다. 우리가 영광으로 생각하는 독립과 자존은 사단의 속박의 표로서 진정으로 비열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사람의 근성은 항상 싸우고 자기를 표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우는 사람은 자기를 비우고, 교만과 높고자 하는 애착을 비움으로 영혼안에는 조용함이 있다. 성령의 뜻에 자신을 굴복시킨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높은 지위를 얻고자 열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밀어내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우리의 구주의 발아래 있는 것을 가장 높은 자리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고 그의 손이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기다리며, 그의 음성이 지도하시도록 귀를 기울인다.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자신을 사랑함이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굴욕과 모욕을 당하는 것을 대항할 준비를 하고 서 있으나 우리가 죽고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 있으면, 우리는 경멸과 소홀히 여김을 조금도 괘념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비난에 대하여 귀먹어리가 되고, 조소, 모욕에 대하여는 소경이 될 것이다.


육의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됨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8:7,8.

사람은 본래 고상한 능력과 공정한 마음을 부여 받았다. 그의 본성은 완전하였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융화되었다. 그의 사상은 순결하였고 그의 목적은 신성하였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의 능력은 악용되어 사랑의 자리는 이기심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천성은 범죄로 말미암아 너무 약하여졌으므로 그 자신의 힘으로는 악의 세력을 저항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사로잡힌 자가 되었다. 만약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시지 아니하셨더면 그는 영원히 그대로 사로잡힌 자가 되었을 것이다. 인류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실패하게 하고 이 세상을 재화(災禍)와 황폐로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 유혹자 곧 사단의 목적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 모든 재화가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신 사업의 결과로 된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사람이 죄 없던 상태에 있었을 때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골 2:3)있는 자와 더불어 즐거이 교통하였었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한 이후로는 신성한 것을 즐기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피하려 하게 되었다. 지금도 중생하지 아니한 자의 마음은 역시 그러하다. 그 마음이 하나님과 융화되지 못하므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통하는 가운데서 기쁨을 얻지 못한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수 없고 거룩한 자들과 같이 사귀기를 꺼리게 된다. 비록 그가 천국에 간다고 해도 거기서 아무 기쁨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기심 없는 사랑이 지배하는 거기서, 각자의 마음이 무한하신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의 마음과 서로 통하는 거기서, 죄인의 심금(心琴)에는 아무런 공명(共鳴)도 없을 것이다. 죄인의 사상과 취미와 동기도 거기 사는 무죄한 자들을 고무(鼓舞)시키는 사랑과 취미와 동기와는 배치될 것이다. 그는 하늘의 “멜로디”에는 거칠은 음조가 될 것이다.



스스로 밉게 보이리라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겔 36:31.

어떠한 외형적 준수라도 순진한 믿음이나 또는 자신을 온전히 버리는 일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비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하여 주시도록 그에게 우리 마음을 허락할 것뿐이다. 우리가 그렇게 허락하면 우리의 심령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게 될 것이다. “주여 저는 제 마음을 주께 드릴 수 없사오니 주께서 제 마음을 취하소서. 제 마음은 주의 소유물이오니 주께서 그것을 깨끗이 보존하소서. 저는 당신을 위하여 그것을 보존할 수 없사옵나이다. 비록 제가 연약하고 그리스도와 같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저를 구원하여 주소서. 저를 형성하사 당신의 사랑이 저의 심령 속을 통하여 흐를 수 있는 순결하고 거룩한 분위기 가운데로 끌어 올리소서.”
이와 같이 자신을 버려야 하는 일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처음으로 시작할 때에만 할 것이 아니요 천국으로 걸어 나아가는 발걸음마다 거듭되어야 한다. 모든 우리의 선행은 우리 자신 밖에서 오는 능력에 달렸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일과 항상 간절히 죄를 통회하는 마음으로 자복하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낮추는 일이 있어야 한다. 오직 항상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에만 우리는 무사히 걸어갈 수가 있다.
우리가 예수께 가까이 나아가서 그의 품성의 순결함을 더욱 똑똑히 볼수록 우리의 죄가 심히 가증한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고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생각이 더욱 없어질 것이다. ...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있어서 우리의 회개는 그 전진하는 발걸음마다 더욱 깊어지게 될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고 하신 주의 말씀은 곧 주께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경건한 근심은 회개를 이룸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그로 말미암아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안에서 기뻐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신다. 과연 우리는 통회하는 마음으로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우리의 짐을 내려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생애의 시련은 우리의 품성 가운데서 순전치 못하고 거칠고 모난 것을 없이하는 하나님의 공작이다. 채석되어 깎기우고 새기우고 갈리는 것은 다 쓰라린 경험이다. 가는 기계 안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하늘 성전을 짓는데 채울만한 자기의 자리를 준비하여 가지고 나오는 것이다. 주께서는 가치 없는 물품 위에는 그와 같이 주의하여 완전하게 되도록 노력하시지 않는다. 오직 그의 귀중한 돌 만이 모퉁이의 아로새긴 돌 같이 아름답게 다듬어 지는 것이다.
주께서는 자기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일하신다. 신실한 자는 명예스러운 승리를 얻고 귀한 공과를 배우고 고귀한 경험을 체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동정심 있고 사랑이 있는 구세주이시다. 그의 붙드시는 능력 안에서 남녀들은 악을 저항할 수 있도록 강하게 된다. 죄를 깨달은 자가 죄를 볼때에 그것은 그에게 심히 죄악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에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오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 그는 자기의 잘못들이 반드시 정복되어야 하며 그의 식욕과 정욕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그는 정욕을 쫓아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이기어 신의 성품에 참예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을 회개하면서 그는 열심히 죄를 이기려고 분투 노력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능력을 나타내고자 애쓰며 구세주와 더불어 개인적 교제에 들어 가게 된다.


회개하는 자는 살리라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겔 18:21.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늘 생각하며, 그분의 작은 선물에도 무관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쁨의 띠를 띠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찬양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받는 날마다의 축복들과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행복과 천국을 주시고자 오시려는 예수의 죽으심이 끊임없는 감사의 제목이 되어야 한다. 잃어버린 죄인인 우리를 그분 자신과 연결시키시고 귀중한 보배로 삼으심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동정하시고, 얼마나 큰 비할데 없는 사랑을 나타내심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게 하시려고, 우리 구주께서는 어떠한 희생을 당하셨는가! 우리는 구속의 경륜 가운데 우리 앞에 제공된 복된 소망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우리는 하늘의 유업과 풍부한 약속들을 인하여 그분을 찬송해야 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려고 살아 계시는 데 대하여 그분을 찬송해야 한다.
나약하고 때때로 중단하는 노력으로는 잘못들을 바로잡을 수 없고 품성에 개혁을 단행할 수 없다. 오랜 끈기있는 노력, 괴로운 훈련, 엄한 투쟁으로만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하루도 다음에 올 우리의 투쟁이 얼마나 강하리라는 것을 알 수 없다.
사도들과 선지자들 중 아무도 일찌기 죄가 없다고 주장하지 못하였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생애한 사람들, 고의로 악행을 하기 보다는 차라리 생명 그 자체를 희생하고자 한 사람들, 하나님께서 거룩한 빛과 능력으로 영화롭게 하신 사람들도 그들의 성질에 죄악이 충만함을 고백하였다. 그들은 육신을 신뢰하지 아니하였고 자신들의 의를 주장하지도 아니하였으며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러할 것이다.


그분의 선하심은 회개로 이끄심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롬 2:4.

사람이 혹시 저희가 그리스도께로 이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 전에라도 저희의 죄악적 행실을 부끄러워하여 어떤 악습들을 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이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진정한 욕망으로 저희 생애를 개선하려고 힘쓰는 일이 있을 때마다 저들을 이끄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능력인 것이다. 저들이 알지 못하는 한 감화력이 저들의 심령에 작용하여 양심이 각성되고 외부적 생애가 개선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저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쳐다보고 저희 죄 때문에 못박히신 자를 주목하게 하실 때에 저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저희 생애의 악함과 저희 심령에 깊이 뿌리박힌 죄가 저희에게 밝히 드러나게 된다. 저희는 그리스도의 의를 얼마큼 이해하기를 시작하고 이렇게 부르짖는다. “죄가 무엇이기에 죄를 범한 자를 구속하기에 그처럼 큰 희생이 요구되는가? 우리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이 모든 사랑, 이 모든 고난, 이 모든 굴욕이 요구되었는가?”
죄인이 이 사랑을 배척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께로 끌려 가기를 거절할 수도 있을 것이나 만일 죄인이 거절만 하지 않으면 그는 예수에게로 끌리어 가게 될 것이다. 구원의 경륜에 대한 지식은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고난을 당하게 한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동시에 십자가의 밑으로 이끌리게 할 것이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보이는 감화력과 보이지 않는 감화력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아무 만족을 주지 못하는 죄악적 쾌락에서 저들이 당신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축복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끊임없이 일하신다. 이 세상의 터진 웅덩이에서 마시려고 헛되이 애쓰는 이런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기별은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계 22:17)


죄악을 멀리 버리라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욥 11:13, 14.

그러나 아무든지,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자비가 크시므로 그의 은혜를 저버린 자라도 구원하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속지 말라. 죄가 심히 악하다는 사실은 다만 십자가에 비추어서만 헤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선하시므로 죄인을 버리시지 않으신다고 사람들이 주장할 때에 저들로 하여금 갈바리를 쳐다보게 하라. 그리스도께서 불순종한 인류의 죄를 걸머지시고 죄인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은 사람을 구원할 별다른 방법이 없은 까닭이요 또한 이 희생이 없이는 인류는 죄의 더럽히는 권세에서 벗어나서 거룩한 자들로 더불어 하는 교제를 회복하기 불가능한 인류가 다시 영적생애를 할수 있는 자가 되기 불가능한 까닭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과 고난과 사망은 다 죄의 무서운 흉악성을 증거하는 동시에 사람이 그 마음을 그리스도께 바치지 않고는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더욱 고상한 생애를 살 소망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자들을 들어서 말하기를 “나도 저들만큼 선하다. 저들은 저희 행실에 있어서 나보다 별로 더 극기하고 단정하고 근신하지 못하다. 저들도 나처럼 오락과 방종을 좋아한다”는 말로써 저희 자신을 변명하는 때가 있다. 이와 같이 저들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가지고 저희의 할 의무를 등한히한 것에 대한 핑계를 삼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이 아무 사람의 핑계도 될 수 없다. 그것은 주께서 허물이 많은 인간을 우리의 모본으로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지체하는 일을 삼가라. 그대의 죄를 버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마음의 순결을 얻는 일을 지체하지 말라.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 실패를 하여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사 1:16.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하늘 나라의 영광에 마음이 이끌리나 그것이 자기의 소유가 될 유일한 조건에는 움추린다. 넓은 길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저들이 걸어가는 길에 만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저들은 죄의 속박을 깨뜨리기를 사모하며 자신의 힘으로 저들의 죄악적 습관에 대항하기를 힘쓴다. 저들은 험한 길과 좁은 문을 바라보기는 하나 그러나 이기적 쾌락과 세상에 대한 사랑과 교만심과 성화되지 못한 야망들이 구주와 저들 사이에 담을 쌓아 놓는다. 자기의 의지와, 택한 애정과 사업의 대상을 저들이 버리려면 희생을 요구하는데 이것에는 저들이 주저하고 비틀거리며 돌아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기 위하여 구할 것이나 그러나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저들은 선을 사모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얼마큼 노력은 하나 그러나 선을 택하지 않고 모든 것을 희생하여 선을 얻으려는 확고한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우리가 이기고자하면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결합시키고 날마다 시간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협력하여 일하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우리는 자아를 그냥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가 거룩함에 도달하려면 그것은 자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아들임으로 될 것이다. 교만과 자아 만족은 못박혀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요구된 값을 지불할 마음이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시킬 마음이 있는가? 우리가 자원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변화시키시는 은혜가 우리에게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 디디어야 하는 첫 계단이다.




목을 곧게 하지 말고 굴복하라
“그런즉 너희 열조 같이 목을 곧게 하지 말고 여호와께 귀순하여 영원히 거룩케 하신 전에 들어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 그 진노가 너희에게서 떠나게 하라” 대하 30:8.

만일 자기의 결점을 숨기거나 핑계하는 자들이 사단이 그들에 대하여 얼마나 기뻐하며 그리스도와 거룩한 천사들을 조롱하는지 볼 수 있으면 그들은 속히 죄를 자복하고 버리게 될 것이다. 사단은 사람의 품성의 결함을 발판으로 온 마음을 사로잡고자 활동한다. 사단은 사람이 만일 그 결함들을 고집하고 버리지 아니하면 사단 자신이 성공할 것을 안다. 그러므로 사단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죄를 이길 수 없다는 치명적인 궤변으로 저들을 속이려고 항상 힘쓰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찔림을 받은 당신의 손과 상함을 입은 몸으로 인류를 위하여 탄원하시며,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 그러므로 아무도 자기의 결점을 고칠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길 믿음과 은혜를 주신다.
오늘날 우리는 대속죄일에 살고 있다. 표상적 의식에 있어서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속죄의 봉사를 하는 동안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겸손한 태도로써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었다. 그와 같이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도말되기를 원치 아니하는 모든 사람은 그들의 은혜의 시기가 얼마 남지 아니한 오늘날 죄를 슬퍼하고 진정으로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해야 한다. 그들은 심각하고 철저하게 마음을 살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부허(浮虛)하고 경박한 정신은 반드시 버려져야 한다. 지배권을 장악하고자 일어나는 악한 경향들을 이기고자 하는 모든 사람 앞에는 반드시 격렬한 투쟁이 있다.


내가 다시는 범죄치 아니하겠나이다
“누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치 아니하겠나이다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한 자가 있느냐” 욥 34:31,32.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께로 오라. 그대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자복하고, 모든 죄악을 버려라. 그리하면 그대은 그분의 모든 약속을 그대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무서운 하나님의 분노의 책망이 그분께 불충성하기로 고집해 온 모든 자들에게 내릴 날이 올 것이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율법을 범한 자들에게 의로써 말씀하시고 무서운 일을 하시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하나님의 분노 아래 놓일 자들 사이에 속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다.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비취는 빛은 지금 분명하고 밝은 빛으로 빛나고 있으며,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드러내 주고 있다. 내가 그대 앞에 제시해 준 약속들을 읽을 때, 그것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과 자비임을 기억하라. 무한한 사랑을 가진 위대한 마음은 끝없는 긍휼로써 죄인을 이끌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이 그대를 도우시는 분이심을 믿기만 하라. 그분은 사람 안에 그분의 도덕적 형상을 회복시키기를 바라신다. 그대가 고백과 회개로써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면 그분은 자비와 용서로써 그대에게로 가까이 오실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빚지고 있다. 그분은 우리의 주가 되신다.
그대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러면 지금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가 그대의 죄를 씻어 버리시고 그대에게 새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라. 그리고 그가 허락하셨으니 그렇게 하실 것을 믿으라. 이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가르치신 교훈이니 즉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은 우리가 받은 줄로 믿어야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야곱의 회개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 호 12:4,5.

야곱은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겼다”(호 12:4). 이 죄와 과오가 많은 인간이 겸손과 회개와 인종(忍從)으로 하늘의 임금과 겨루어 이겼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떨리는 손으로 붙잡았으니 무한하신 사랑이 그 죄인의 호소를 물리칠 수 없으셨다.
그러나 야곱의 역사는, 죄에 빠졌다가도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그분께서 간과하지 않으시리라는 보증이 된다. 야곱이 자신의 힘으로 싸워서 얻으려고 하다가 놓쳤던 것을 얻은 것은 자신을 내맡기고 신뢰하는 신앙으로 말미암았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가 갈망하던 축복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만이 그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의 종에게 가르치셨다. 말세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을 것이다. 위험이 저들을 둘러싸고 절망이 영혼을 억압할 때에 저들은 오직 속죄의 공로에 의지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무력하고 무가치한 가운데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세주의 공로를 의지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고도 멸망하는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의 길고도 검은 범죄의 목록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눈 앞에 있다. 그 기록은 완전하다. 우리의 죄는 하나라도 빠진 것이 없다. 그러나 옛날 당신의 종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분께서 약속하셨으니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실 것이다.
야곱은 인내하고 결심하였기 때문에 승리하였다. 그의 경험은 끈질긴 기도의 능력을 증거한다. 우리가 힘있는 기도와 불굴의 신앙의 교훈을 배워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에스라의 회개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스 9:6.

주의 사업의 바로 심장부에까지 음험하게 기어들어간 죄악들의 대한 에스라와 그의 동료들의 슬픔은 회개를 이루게 하였다. 범죄하였던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어느정도 그들은 죄의 흉악함과 하나님께서 죄를 보시는 심한 증오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반포하신 율법의 신성성을 깨달았고 많은 사람들이 저희 범죄를 생각하고 떨었다.
이 일은 놀라운 개혁의 시작이었다. 에스라와 그 동료들은 무한한 인내와 재치를 가지고 관련된 모든 개인들의 권리와 행복에 대한 세심한 사려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회개하는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노력하였다. 무엇보다도 에스라는 율법의 선생이었으므로 모든 경우에 대한 조사에 개인적 주목을 기울이면서 그는 이 율법의 신성성과 순종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축복으로 백성에게 감명을 주고자 노력하였다.
사단이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의무적인 요구에 대하여 남녀들의 눈을 멀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현 시대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떨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범죄자들을 크신 입법자에게 향하게 하고 그들에게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케 한”다는 것을 가르칠 참 개혁자들이 필요하다. 성경에 권위 있는 사람, 그들의 모든 말과 행동이 여호와의 법도를 높이는 사람, 믿음을 굳게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마음을 성경에 대한 경의와 사랑으로 감동시킬 교사가 매우 필요하다.


느헤미야의 회개
“그러나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 행하셨음이니이다” 느 9:33.

슬픔에 억눌린 느헤미야는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어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금식하”였다. 슬픔 중에 그는 거룩하신 도우시는 분에게로 향하였다. 충실히 그는 자신의 좌와 자기 백성의 죄를 자복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사업을 유지하게 하시고 그들의 힘과 용기를 회복시키시고 그들을 도우셔서 유다의 황폐된 곳들을 건축하게 하시도록 그는 탄원하였다.
느헤미야가 기도할 때에 그의 신앙과 용기는 강하게 되었다. 그의 입에는 거룩한 논증이 가득하였다.
필요한 때에 느헤미야가 기도한 것처럼 기도하는 것은 다른 형태로 기도하기가 불가능한 환경 아래서 그리스도인이 구사(驅使)할 수 있는 기지이다. 곤란에 싸여 거의 압도된 생활의 분주한 걸음 중에서도 일꾼들은 하나님의 지도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탄원을 드릴 수 있다. 해로와 육로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어떤 큰 위험을 당하였을 때에 이와 같이 자신들을 하늘의 보호에 의탁할 수 있다. 돌연한 곤란이나 위험을 당할 때에, 당신의 충실한 신자들이 당신을 부를 때는 언제든지 저희를 도우시려 오실 것을 친히 약속하신 하나님께 저들의 마음은 도움의 부르짖음을 보낼 것이다.
어떤 환경이나 어떤 상태 아래서도 슬픔이나 근심이나 맹렬히 엄습해 오는 시험으로 억눌린 영혼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끊임 없는 사랑과 능력 안에서 확신과 지지와 구조를 찾을 것이다.
이 현명한 숙려(熟慮)와 단호한 행동의 모본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한 교훈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부지런하고 신중한 주의를 기울여 일하여야 한다.


다윗의 회개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 40:12, 13.

후 세대 이방인들은 이 어두운 오점을 가지고 다윗의 성품을 지적하였고 의기양양하고 조롱하는 뜻으로“이 사람이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다!”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다윗의 역사는 범죄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불리운 것은 그가 하나님의 권고를 따라 행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범죄하였을 때에 그는 그렇게 인정받을 수 없었고 그가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올 때까지 그러하였다... 비록 다윗이 죄를 회개하고 여호와께 용서와 가납하심을 받았으나 그는 자신이 심은 씨의 해로운 수확을 거두었다. 그와 그의 집에 내린 형벌은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범죄의 역사를 가지시고 당신에게 크게 축복과 은총을 받은 자들이라도 안전함을 느끼고 깨어 있어 기도하기를 게을리 아니 해야 할 경고를 삼으시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계획하신 교훈을 겸손히 배우려고 노력한 자들에게 입증되었다. 각 세대를 통하여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이리하여 유혹자의 세력에서의 자신들의 휘험을 깨닫게 되었다.
다윗의 회개는 성실하고 깊은 회개였다. 자기의 죄악을 변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의 기도에는 위협받는 형벌을 피하려는 욕망이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그의 범죄의 흉악함을 보았고 그의 영혼의 더러움을 보고 그의 죄를 미워하였다. 그가 기도한 것은 용서만을 얻고자 함이 아니요 마음의 정결을 위함이었다.


솔로몬의 회개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전 2:11.

꿈에서 깨어난것과 같이 솔로몬은 양심의 깨우침을 받아 자신의 어리석음을 사실 그대로 보기 시작하였다. 정신과 마음에 징계를 받고 몸은 약하게 된 그가 세상의 터진 웅덩이에서 피곤하고 갈증이 나서 한번 더 생명의 샘에서 마시려고 돌이켰다. 마침내 고통의 징벌은 그를 위하여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오랫 동안 어리석음에서 돌아설 가능성이 없는 까닭에 완전히 멸망당하리라는 공포심으로 번민하였으나 이제 그에게 주신 기별에서 한 줄기의 희망의 빛을 분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으시고 죽음보다 더 잔인한 속박, 그가 스스로 자유하게 할 능력이 없는 속박에서 그를 구원하시려고 서셨다.
솔로몬의 생애는 청년들에게 뿐 아니라 성년이 된 사람들과 인생의 언덕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과 인생의 황혼을 맞이한 사람들에게도 경고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젊은 시절-옳은 일과 그릇된 길과, 그들에게 너무나 강한 것으로 판명되는 악한 정욕의 조류사이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불안정에 대하여 보고 듣는다. 성년 시절에는 이 불안정과 불충실을 기대하지 아니하고 굳게 세워진 품성과 확고히 뿌리박은 원칙들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실례에서 깨어 기도하는 것이 젊은이나 늙은이를 위한 유일의 안전이란 사실을 배워야 한다. 안전이란 높은 지위나 큰 특권에 달린 것은 아니다.
솔로몬의 배도에 대한 경고에 주의하는 사람들은 그를 넘어뜨린 그런 죄악의 첫번째의 접근을 피할 것이다.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순종만이 인간을 배도에서 보호할 것이다.


삭개오의 회개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눅 19:8.

삭개오는 매우 가치 없는 그에게 몸을 낮추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양을 보자 감동되고 놀라서 침묵하였다. 이제 새로 발견한 그의 주님에게 사랑과 충성을 나타내려고 그는 입술을 열었다. 삭개오는 그의 자복과 회개를 공포할 것이다.
삭개오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기 전에 그로 하여금 참된 회개를 나타내게 한 사업을 시작했다. 사람에게 고소 당하기 전에 그는 그의 죄를 자복하였다. 삭개오는 성령의 깨우치심에 복종하였으며 우리들과 또 고대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록하신 말씀의 가르침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주께서 오래 전에...“너희는 서로 속이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 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구름기둥에 싸여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삭개오의 첫 응답은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동정하는 데서 나타났다.
개혁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자복하지 않고 버리지 않은 죄를 덮는 가면이 아니다. 품성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제어함이 생애의 원칙이다.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전체를 바치는 것이며 마음 속에 있는 하늘의 원칙에 마음과 생애를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불의한 상업 거래를 통하여 다른 사람을 해하였거나 매매에서 속였거나 어떤 사람에게라도 사기를 했으면 비록 이 일이 법의 테둘이 안에서 이루어졌을지라도 우리는 잘못을 자복하고 힘이 미치는 한 배상하여야 한다.


바울의 회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

사울이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자신을 완전히 굴복시킬 때에 자신의 생애의 잘못을 알았고 하나님의 율법의 원대한 요구를 깨달았다.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거만한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은 이제 어린 아이와 같은 겸손과 단순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 자신의 무가치함을 고백하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구세주의 공로를 간구하였다. 사울은 아버지와 아들과 완전히 조화되고 교통하게 되기를 갈망하였으며 용서와 가납에 대한 그의 열렬한 소망을 은혜의 보좌 앞에 탄원하였다.
참회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헛되지 아니하였다. 그의 마음의 가장 깊은 사상과 감정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고 그의 고상한 능력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일치하게 되었다.
사울의 회개는 죄인들을 책하시는 성령의 기이하신 능력에 대한 한 현저한 증거이다. 사울은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였고 그의 제자들에게 율법은 폐지되었다고 가르치신 줄로 참으로 믿었었다. 그러나 사울은 회개한 후에 예수는 당신의 아버지의 율법을 옹호하시는 분명한 목적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분으로 인정하였다. 그는 예수께서 유대의 전 희생 제도의 창시자이심을 확신하였다. 십자가 상의 죽음으로 모형은 실체와 만났으며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속자에 관한 구약 성경의 예언들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바울은 알았다.
예수께서 이 모든 일을 바울을 위하여 직접으로 행하실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시는 것이 그의 경영이 아니셨다. 바울은 그가 멸하려고 미리 생각하였던 사람들에게 자복을 하여야 하였고 또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할 사람으로 정하신 그들이 하여야 할 특별한 일이 있었다.


네 죄가 언급되지 않으리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겔 18:22.

야곱이 고난 중에 천사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청하였을 때에 하늘의 사자도 그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하여 그의 죄를 회상시키시고 그를 피하시려고 노력하셨다. 그러나 야곱도 떨려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고 그분의 자비에 자기 자신을 의탁하였다. 그는 자기가 죄를 회개한 것을 지적하고 해방시켜 주시기를 탄원하였다. 자기의 생애를 되돌아 볼 때에 그는 거의 절망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천사를 굳게 붙들었다.
악의 세력과의 저들의 최후 투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할 경험도 이와같은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신앙과 저들의 인내와 저들을 구원하시는 그분의 능력에 대한 저들의 신뢰심을 시험하실 것이다. 사단은 저들이 아무런 희망이 없고 저희 죄는 너무 커서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이르켜 저들을 위협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큰 것과 자신들의 성실한 회개를 기억하고 저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찌할 수 없는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를 간청할 것이다. 저희 기도가 즉시 응답을 못 받는다고 하여 저희 믿음이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야곱이 천사를 붙잡은 것처럼 저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을 것이며 저들의 영혼의 언어는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는 말일 것이다.
그와 같이 시련의 때에 만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포와 고민으로 고통하고 있는 동안 저희 앞에 회개하지 않은 죄가 나타날 때에 저들은 압도당할 것이며 절망으로 저희 신앙은 끊어지고 저들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할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저희 자신들의 무가치함을 깊이 느낄 때에 저들이 드러날 감추어진 잘못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저희 죄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로 도말될 것이므로 저들은 그 죄들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죄를 자백하고 인정하라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 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렘 3:12, 13.

우리는 흔히 우리의 악한 행실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까닭으로 슬퍼한다. 그러나 이것은 회개가 아니다.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성령께서는 구주를 모욕하고 슬프시게 한 감사하지 아니한 마음을 드러내어 우리로 십자가 밑에서 통회하게 한다. 모든 죄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다시 상처를 입으시는 바 우리 때문에 찔림을 받으신 예수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고통을 준 죄로 인하여 슬퍼하는 것이다. 이러한 애통이 죄를 버리게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은 이 슬픔을 연약하다고 말할지 모르나 그것은 통회하는 자를 끊을 수 없는 고리로 무한하신 하나님께 매게 하는 능력인 것이다. 그것은 마음에 강팍함과 범죄로 말미암아 상실한 은혜를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람에게 다시 들려 주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통회하는 자의 눈물은 성결의 태양빛을 기약하는 빗방울에 지나지 아니한다. 이 슬픔은 심령에 생명 샘이 될 기쁨을 예고한다.
시련에 부닥쳤을 때에 우리는 초조히 행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반항하거나 그리스도의 손에서 떠날 것을 걱정하지 말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심령을 겸비하게 할 것이다.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견해로 사물을 보기 원하는 자에게는 주의 길은 분명하지 않다. 그 길은 인간의 성정으로 볼 때에 어둡고 재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도는 자비의 법도요 그 결국은 구원이다.


주께서 우리를 낫게 하고 싸매어 주심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1.

그리스도께서 온 몸을 통하여 나누어 주시는 사랑은 하나의 생명력이다. 뇌, 심장, 신경 등과 같은 모든 중요한 부분은 치료하는 일을 촉진시킨다. 그것에 의하여 사람의 최고의 능력들이 활동하게 된다. 그것은 생명력을 파멸시키는 죄책감과 슬픔, 근심과 걱정에서 심령을 해방시켜 준다. 거기에서 평온과 안정이 온다. 그것은 어떤 세속적인 것이 파괴할 수 없는 기쁨, 곧 성령 안에 있는 기쁨, 건강을 주고 생명을 주는 기쁨을 심령 속에 심어 준다.
비록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으로 고통을 자기 자신에게 초래하였을지라도 그분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다. 그들은 그분 안에서 도움을 찾을 수 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실 것이다. 비록 각 시대를 통하여 죄가 인류를 더욱 힘 있게 장악해 오고, 거짓과 교묘한 수단을 통하여 사단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자신의 해석의 검은 그림자를 던짐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했을지라도,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이 이 땅으로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일은 그치지 않았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는 마음에서 심령의 창을 하늘로 향하여 열 것 같으면, 치료의 능력이 홍수처럼 쏟아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심령을 고치실 뿐만 아니라 육신을 고치시는 분이셨다. 그가 자기가 목도하는 각양 곤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시고 그 곤란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시고 그의 친절한 말씀을 진통제처럼 제공하여 주셨다. 아무 사람도 그가 이적을 행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치료하는 사랑의 능력이 그에게서부터 병자와 고난당하는 자에게로 나온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는 그의 유년 시대로부터 드러나지 않은 방법으로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셨다.


내 백성이 구하면 내가 들으리라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대하 7:14.

사도나 선지자들 중에 저희가 죄없다고 주장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살았던 사람들, 죄를 알면서 범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생명까지라도 희생하고자 한 사람들, 그리고 하늘의 빛과 권능을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람들은 저희의 본성의 악함을 고백하였다. 저들은 육신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저희 자신의 의를 주장하지도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의를 온전히 의지하였다.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도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교만과 자부심을 조장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첨과 칭찬을 주는 일과 받는 일을 삼가야 한다. 아첨하는 일은 사단의 일이다. 그는 참소, 공박도 하거니와 아첨도 한다. 이와 같은 모양으로 그는 영혼을 멸망시키려고 한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하는 자는 사단에게 그의 조수(助手)로서 이용당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일군들은 모든 칭찬의 말을 받아들이지 말고 물리쳐버려야 한다. 자신을 숨기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여야 한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그에게로 만민의 눈을 향하게 하며 만민의 찬송소리가 올라가도록 하라.
주를 경외하는 생애는 슬픔과 우울의 생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얼굴 빛을 슬프게 하고 우리의 생애가 탄식의 나그네와 같은 생애가 되게하는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찬양하는 자와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 찬 자들은 그리스도와 친히 산 연합을 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기쁨의 샘이 되신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의 주지(主旨)는 기쁨이 된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을 것임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4.

우리가 하나님의 사하여 주시는 사랑을 받고 또한 이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이해하고 믿는 것이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와 잘못이 너무 중하고 커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귀중히 여기시지 않고 우리를 축복하여 주시지 않고 구원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우리 자신에게서는 연약한 것 밖에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하나님께 내어놓을만한 아무 것도 없는데 사단은 말하기를 “소용없다. 너희 품성의 결함을 고칠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에 사단은 속삭이되 “너는 아무런 악한 일도 행하지 않았느냐? 너는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범한 일이 없느냐? 그리고 네 자신의 양심을 더럽힌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기도하여도 소용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단에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셨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고 기도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는 곧 기도하여야 할 때이다. 혹은 심히 부끄럽고 자굴지심(自屈之心)을 억제키 어려울 때라도 우리가 기도하고 믿어야 할 것이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공로로 받게 되는 상급이 아니며 죄 많은 인간의 공로로써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움에 근거한 선물일 뿐이다.
우리는 죄를 변명함으로써 그 죄책감을 감소시키고자 애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받을 것인데 그것은 실로 무겁다. 갈바리의 십자가만이 죄의 무서운 흉악을 나타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부서뜨릴 것이다. 그러나 죄 없는 예수께서 아무 부담할 책임이 없으셨을찌라도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확실한 토대이신 그리스도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벧전 2:6.

무한하신 지혜로써 하나님께서는 초석을 택하시고 친히 이것을 놓으셨다. 그는 이것을 “견고한 기촛돌”이라고 부르셨다. 온 세계가 이 돌 위에 걱정과 근심의 짐을 놓을지라도 이것은 그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있다. 저들은 완전히 안전하게 그 위에 지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시험한 돌”이시다. 그를 신뢰하는 자들을 그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모든 시험을 견디셨다. 그는 아담과 그 후손들의 죄의 무게를 견디셨으며 악의 세력의 정복자 이상의 일을 성취하셨다. 그는 회개하는 모든 죄인들이 그에게 맡기는 죄의 짐을 지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 지은 심령이 구원을 찾았다. 그는 견고한 기촛돌이시다. 그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은 완전한 안전을 얻는다.
믿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견고한 기촛돌이 되신다. 저들은 반석에 떨어져서 깨어진다.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를 믿는 것을 이렇게 나타낸다. 반석에 떨어져 깨어지는 것은 우리의 독선(獨善)을 버리고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그리스도께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그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기초이신 그리스도 위에 집을 짓는 일은 역시 믿음과 순종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 산 돌 위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다 같이 지을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안전하게 지을 수 있는 유일한 기초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할 만큼 넓고 온 세상 사람의 무게와 짐을 질만큼 강하다. 산 돌이신 그리스도와 합하여 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모든 사람은 산 돌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자르고 닦고 아름답게 하지만 저들이 산 돌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딛 2:11.

예수께서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축복의 잔을 보여 주셨으나 저들은 조소하고 그 은혜스러운 축복을 거절하였다. 자기가 완전한 줄 알고 자기가 꽤 잘 하는 줄로 생각하여 자기의 현상을 만족히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의에 참예하려고 하지 않는다. 교만한 자는 아무 필요를 느끼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와 그가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무한한 축복을 받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 가운데는 예수께서 계실 자리가 없다. 스스로 부요하고 존경을 받을만하다고 하는 그들은 믿음으로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는다. 저들은 스스로 완전한 줄로 생각하므로 불완전한 채로 지내간다.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가능성이 없고 스스로 아무 의로운 행동을 할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실 수 있는 도움을 감사히 여길 자들이다. 저들은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니 그리스도께서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 자들이다.
예수께서 용서하실 사람은 먼저 회개케 하시며 죄를 깨닫게 하시는 바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일이다. 감화시키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은 자는 자기에게는 아무 좋은 것이 없고 지금까지 하여온 모든 일은 자신을 위하여 한 일이요 죄가 섞인 일임을 깨닫는다. 저희는 불쌍한 세리와 같이 눈으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부르짖는 것이다. 그들은 복이 있는 자이다.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인고로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신다... 자기의 신령적 결핍을 인식하고 자신에게 아무 좋은 것이 없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예수를 쳐다봄으로 의와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 7:18.

우리는 지금은 우리의 발이 안전하여 결코 동요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할지 모른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를 “나는 내가 믿는 자를 안다. 아무 것이라도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나의 믿음을 흔들 수는 없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단은 유전적이거나 계발된 품성의 특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필요나 결함에 눈이 멀도록 계획하고 있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예수를 굳게 바라봄으로써만 우리는 안전하게 행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대한 자비로써 노아 시대의 악한 거민들을 제거해 버리셨다. 그분께서는 자비로써 부패한 소돔의 거민들을 멸망시키셨다. 사단의 기만적 능력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찬성과 칭찬을 받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끊임없이 반역으로 인도한다. 가인의 시대, 노아의 시대, 아브라함의 시대, 롯의 시대에 그러하였고 또한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도 역시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들을 최종적으로 멸망시키는 것은 우주에 대한 자비에 의한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개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기에 충분하도록 선한 사람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께 나갈 수 없다고 속삭이는 원수(마귀)의 말을 듣지 말라. 만일 그대가 그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대는 도무지 그리스도께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일어나서 그대의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라. 그러면 그는 멀리 나와서 그대를 맞으실 것이다. 만일 그대가 회개하여 그에게로 단 한 걸음만 나갈지라도 그는 무한하신 사랑의 팔로 급히 그대를 안아 영접하실 것이다. 그의 귀는 통회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듣고자 열려 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생각이 첫번으로 생길 때에 그는 곧 아신다.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셨음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행 5:31.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옳은 자가 될 수 있을까?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을까?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거룩함에 조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나아 갈 것인가? 회개라는 것은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을 깨닫지 못하면 죄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요 또한 진심으로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우리 생애에 진정한 변화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회개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많은 사람은 저희의 악행이 저희 자신에게 고통을 미치게 할까 두려워서 저희가 범죄한 것을 후회하고 혹은 외모적 변화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상 의미로서는 회개가 아니다. 저들은 죄 그것보다도 그 고통을 슬퍼한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영구히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될 때에 슬퍼한 것이 그런 것이다. 발람은 칼을 빼어 들고 자기의 가는 길에 선 천사를 보고 두려워서 자기 생명을 잃을까 염려하여 자기 죄를 자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지도 않았고 목적을 변하지도 않았으며 악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가룟 유다도 자기의 주를 판 후에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하고 부르짖었다.
그에게 임한 결과가 그에게 공포심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팔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배반한 사실에 대하여 충심으로 마음을 찢는 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 이런 자들은 다 죄의 결과를 두려워한 것 뿐이요 죄 그것을 슬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영의 감화에 순복할 때에는 양심이 각성되어 죄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신성한 율법의 깊은 뜻과 신성성을 얼마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를 부르시는 자는 미쁘심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24.

기도가 아무리 더듬는 기도일지라도, 눈물이 아무리 은밀한 눈물일지라도, 하나님을 사모하는 생각이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이 마중 나가지 아니하시는 때는 없다. 기도가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또는 마음의 소원이 알려지기도 전에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은혜가 사람의 마음에서 역사하시는 은혜를 만나기 위하여 나온다.
그대의 천부께서는 죄로 더럽힌 옷을 그대에게서 벗기실 것이다. 스가랴서의 그 아름다운 비유적 예언 가운데 여호와의 천사 곁에 누추한 옷을 입고 선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죄인을 대표한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꼭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구원의 옷”으로 그대를 입히실 것이고 “의의 것옷”으로 입히실 것이다. 주께서 그대를 인도하여 잔치하는 집에 들어가리니 그대 위에 세운 그 기는 사랑이 될 것이다.
하늘로 향하는 계단들은 한번에 한 계단씩만 디뎌야 한다. 진보하는 매 계단은 우리에게 다음 계단을 위해 힘을 준다.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은 매우 소수만이 이해하는 사업인데, 이는 저들이 필요되는 노력을 하기에 너무도 게으르기 때문이다.
오, 우리 하나님의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자비이신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당신의 임재를 막은 죄들을 제거할 때에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한번 그들을 위하여 일하시기 시작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