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심판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시작하는 말

심판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을 하늘 본향으로 데려가시기 전에 준비된 하늘 처소에 살 사람들이 누구인가 헤아려보시는 일이 있음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으며, 지금 하늘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 전에는 누가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인지 고르시고 결정하시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무서운 심판이 아니라, 자비와 호소가 곁들인 주님의 사랑의 사역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하늘에서 재림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일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지 이 흥미로운 사실에 대해 함께 연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재림을 위해 준비되는 독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생애의 빛 편집실 에서

다 지어진 하늘 처소

다 지어진 하늘 처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예수께서는 한 가지 분명한 약속을 하시고 하늘로 가셨다. 그것은 우리가 살 곳(처소)를 준비하신 후에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이다.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40일 동안 지내신 후 하늘로 승천하시는 주님을 보고 제자들이 놀라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자, 천사는 이렇게 말했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


1) 재림의 약속
다시 오시겠다는 재림의 약속은 성경에 수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은 마치 재림에 관한 성경 절을 읽어본 적이 없는 듯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고 있다. 또 주님이 나타나는 때에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주님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어야 함에도 세상과 짝하여 정신없이 살고 있다.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모든 죄를 회개하고 깨끗하고 순결한 상태로, 주님의 아름답고 순결한 마음과 성품으로 변하여 주님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요즈음은 기독교에서 성경에 있는 재림의 약속에 대해 말하거난 재림을 강조하는 설교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재림의 약속을 굳게 믿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복스러운 소망”(딛 2:13; 히 9:28)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성경의 모든 예언들과 약속들이 재림 때에 성취될 것으로 기대했다(벧후 3:13; 사 65:17). 그것이 바로 그들의,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 생애의 목표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재림의 약속을 믿고 기뻐하였다. 그들은 모든 난관을 꿋꿋하게 견뎌 냈고, 이 약속은 그들의 용기와 힘을 새롭게 해주었다. 주님은 그들을 아버지 집으로 데려가려고 다시 오실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께서 성도들을 하늘로 데려가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 천사들과 대면하여 교제를 나누며 살 그날을 사모하며 기다린다. 우리는 재림의 날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가?

2) 선과 악의 대쟁투
우리를 위해 하늘의 처소를 예비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하늘 처소에 살 사람들을 고르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다. 왜 그래야 하실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먼저 선과 악 사이에 존재하는 전쟁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 함께 살펴보자.   

1. 하늘에서 일어났던 전쟁
하늘에 전쟁이 있었다. 성경은 그 전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계 12:7~9).
사단은 원래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던 천사였다. 사단의 이름은 “루시퍼”(Lucifer)였고 그는 죄가 없는 완전한 존재였다. 그런데 어떻게 하늘에서 죄악이 생겼을까? 그는 어떻게 죄의 창시자가 되었을까? 천사장 루시퍼(한국어로 루스벨:편집자 주) 는 하나님의 최고의 은총과 영광과 지위를 누렸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고 질투하였다. 어떻게 완전한 사랑과 평화의 하늘의 분위기 가운데서 루시퍼는 반역할 수 있었을까? 죄악의 시작은 그 존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다. 죄는 신비이다. 죄는 오묘한 것이며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으며, 그것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자발적이고 우러나오는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기를 원하셨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성경에는 루스벨의 타락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사 14:12).
여기서 “계명성”이라는 말은 “금성”을 말하는데, 히브리어로 “헬렐”이며, 라틴어로는 “루시페르”이다. 그런데 라틴어 성경을 “Vulgata”역을 번역한 “제롬 히어로니무스”가 영어로 “Lucifer”이라고 사용하여, 사단을 “루시퍼”라고 부르게 되었다.
성경 에스겔 28장 13~15절에 보면, 두로왕을 빗대어 은유로 사단 루시퍼에 대해 기록하기를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으로 단장하였었”다고 하였고, 또한 그는 “덮는 그룹” 천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천사였던 그는 교만하여져서 하나님보다 더 높은 보좌를 원하였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8:15).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14).

2. 사단의 기원과 공격
루시퍼는 하나님의 정부를 뒤엎기 위해 반역을 선동하였다. 그가 제일 먼저 도전한 것이 하나님의 정부의 법인 율법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은 불공평하며 공의와 자비가 조화되지 않아서 피조물이 지킬 수 없는 법이기 때문에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시퍼는 “다른 세계들의 거민들에게는 율법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천사들은 더 높은 존재자들이므로 그와 같은 속박이 필요없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을 아버지와 동등의 지위로 높이는 처사는 천사 루시퍼를 부당하게 취급하는 일이며 루시퍼 역시 그와 같은 존경과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되었다. 루시퍼의 시기와 그릇된 설명, 그리스도와 동등하다는 그의 주장 때문에 천사들 중에 루시퍼의 기만으로 말미암아 눈멀게 된 자들이 많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완전히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정부의 안정을 위해 하늘의 질서와 율법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어린 호소과 간청에도 불구하고 루시퍼의 질투심은 더욱 굳어 갔다. 이렇듯 불붙은 불만의 정신은 무서운 죄로 잉태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동안 참으셨다. 마침내 그가 하나님의 주권에 완전히 복종하든지, 공공연히 반역하든지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시간이 이르렀다. 그에게는 충분히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는 넉넉한 은혜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주장을 고집스럽게 옹호하였으며 자기의 창조주를 대항하는 대쟁투에 완전히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어 가진 자요, 그의 보좌에서 수종들던 자요, “빛을 지닌 자”인 루시퍼는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거룩한 존재자들의 “대적”사단이 되었다.

3. 이 땅에 옮겨진 전쟁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찐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 갔음이라 하더라”(계 12:12).
이제 선과 악 사이의 전쟁은 이 땅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땅으로 내어쫓긴 사단은 이제 인간을 유혹하고 선동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게 만들고 범죄하게 하였다. 그의 반역은 여전히 하나님의 정부와 법에 대한 것이었다. 대쟁투의 초기에 사단은 하나님의 법은 순종할 수 없으며, 공의가 자비와 조화되지 않으므로 율법을 파기하지 않고는 죄인이 용서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모든 죄는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만일 하나님이 죄의 형벌을 면제해 준다면 그분은 진리와 공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사단은 자기가 반역한 후에 하늘에서 추방당했기 때문에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총에서 영원히 제거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직도 죄인들에게 은혜를 나타내고 계심으로 그분은 공의로우실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류가 비록 죄인일지라도 사단과는 다른 입장에 놓여 있었다. 인류는 속임을 당했으며 사단의 궤변에 의해 마음이 어두워졌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자비의 품성을 그대로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 필요하셨고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가 사람들에게 나타났지만, 자비가 공의를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타락한 인류에게 알맞게 일점일획이라도 변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지상에 오셔서 계명을 지키시는 거룩한 생애를 사시고 의를 이루셨다. 그리고 주님을 믿고 그 의를 받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품성을 이룰 수 있게 하시고 그리하여 율법의 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서 성취되게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는 그분의 자비를 손상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죄는 용서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계명은 의로우며 온전히 순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셨다.

3) 하늘의 주민을 미리 고르시는 이유
성도들이 거할 하늘처소는 거의 다 완성되었다. 이제 주님께는 그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하늘 본향에 누가 들어와서 살 것인지 결정하실 일만 남으셨다. 누가 하늘 궁전에 거주할 것인가? 주님께서 하늘에 와서 갈 주민들을 미리 고르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이유를 앞서 언급한 선과 악의 대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 범죄하지 않은 세계와 우주의 거민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한 가지 큰 염려가 있다. 그것은 루시퍼의 반역과 죄의 결과로 인해 얻은 상처 때문에 생긴 것이다. 죄의 결과로 생긴 이 세상의 비극과 슬픔과 고통과 부조화를 보라! 처참하고 비참한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 세상이 얼마나 죄의 결과로 망가지게 되었는가! 다시는 이런 죄의 역사가 일어나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의 열망이 하늘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진짜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만큼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는 루시퍼와 같은 반역이 일어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서는 진짜 누가 하늘에 와서 살아도 안전한 사람인지 미리 알아보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정말 예수님을 믿어 그 마음과 성품이 변화되었는지, 아니면 말만 믿는다고 하면서 그대로 죄의 욕심과 부패한 마음 그대로 살고 있는지 각 사람을 알아보셔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다시는 루시퍼가 일으킨 반역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그래야 하늘이 안전한 곳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 시작될 새 하늘과 새 땅에 살 거민들을 반드시 미리 고르셔야 하는 것이다.

누가 하늘에서 살 것인가?

누가 하늘에서 살 것인가?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중요한 진리들을 가르치셨는데, 그 중에  마지막 심판에 대한 비유들이 많이 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는 가라지인 쭉정이 신자들을 골라내고 알곡인 당신의 신실한 백성들을 고르시는 내용의 비유이며(마 13장),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도 같은 내용의 비유이다(마 13장). 또 신실한 당신의 참 백성들을 불충실한 사람들로부터 골라내시는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장), 그리고 “미련한 처녀와 슬기있는 처녀의 비유”(마 25장) 등이 그런 내용이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비유 가운데 이 골라내시고 결정하는 분리는 세상 끝날에 있을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분리와 고르시는 일이 세상 끝이라고 하지만, 그 일이 예수님 재림 당일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일은 재림 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야 누가 생명의 부활로 나와 불멸의 상급을 얻을 것인지, 누가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재림 하는 날 누가 구원을 얻을 것이고 누가 멸망 받을 것인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하늘로 데려가실 사람들이 누구인지 조사되었고 결정 되었다는 것이다. 누가 하늘에서 살 사람들인가?  

1) 만일 이미 다 천국에 가 있다면?
현재 기독교 안에는 기독교를 널리 지배하고 있는 오류의 교리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영혼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과 사람이 죽으면 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현재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이 가르침은 진리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장례식에서 “소천하셨다, 하늘로 가셨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사람이 죽어서 다 하늘로 가있다면, 무덤에 누워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영혼이 빠져나간 몸이 무덤에 있다가 그 소리를 들을 것인가? 만일 이미 천국에 다 가있다면 심판은 왜 필요한 것인가?
또 다른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마 16:27).
이 성경 절에는 모호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예수께서는 아주 단순하고 직접적인 언어로 당신의 재림 시에 있을 부활 때까지는 아무도 상급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죽은 의인들 중에 아직까지 하늘에 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의미이다.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전 9:5). 모든 죽은 이들은 무덤 속에서 심판과 세상의 마지막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2) 영혼은 영원히 사는가?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 spirit)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이 성경절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혼이 불멸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신(영, spirit)이 하나님께로 되돌아 간다는 말이 무엇인가? 성경은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이 “영”이란 똑같은 단어가 야고보서에는 이렇게 사용되었다. “영혼(spirit)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여기서 “영혼(spirit)”이란 말이 성경의 난외 주에는 “호흡(breath)을 뜻함”이라고 나와있다. 이 말의 헬라어 원어는 “프뉴마(Pneuma)”로서 “호흡” 또는 “공기”를 뜻한다. 성경 전체에 사용된 “영혼”이나 “영”이라는 말로 번역된 이 단어의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는 “루아흐”, “네페쉬”, “네솨마”, “푸뉴마”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 약 1700번 이상 사용되었는데, 그런데 이 단어가 불멸의 성질을 가졌다거나 죽지 않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언급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는 헬라 원어의 뜻인 “호흡(breath)”과 “영(spirit)”으로 번갈아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생명(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호흡, spirit)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욥 27:3).
여기서 욥은 “호흡”과 “영”이란 말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했다. 사람의 코 안에는 호흡이 있다. 호흡은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불어 넣으신 생명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사람 = 흙 + 생기 = 생령(영혼)
그러므로 여기서 “영혼은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호흡”을 말하는 것이다. 호흡(생기)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주신 것이기 때문에, 호흡만이 주신 분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만일 모든 영혼들의 운명이 죽는 순간에 이미 결정되고 상벌이 결정된다면,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마지막 심판에 대한 교리는 다 거짓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죽으면 사람이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니라 무덤 속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잠을 잔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 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3) 재림 전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
성경에는 재림 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잘 설명해주신 예수님의 비유의 이야기가 있다. 이 비유를 공부하면 이 주제를 명확하게 알게 될 것이다. 함께 공부해보자.

1. 혼인 잔치에의 초청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싫어하거늘”(마 22:1~3).
이 비유는 어떤 임금이 사람들을 혼인잔치로 초청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속의 계획을 마련하셨다. 그리고 그 구원의 비밀이 담긴 복음을 가르치시고, 그 복음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셔서 하늘에 데리고 가려고 계획하셨다. 그리하여 복음의 초청을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 이후에는 이방인들에게, 그리고 지금 재림 전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초청이 보내졌다. 그런데 비유의 이야기는 초청으로 끝나지 않는다.

2.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1~14).
고대 시대의 풍습을 보면, 왕이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청할 때 그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이 반드시 입고 와야 하는 예복을 함께 보내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이 비유의 이야기에 보면, 혼인 잔치에 가득 찬 손님 중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왜 그 예복을 입지 않고 왔느냐고 질문을 하는 것이다. 손님들은 왕이 보내준 예복을 입고 옴으로써, 왕이 자신을 초청해 준 것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시해야 하였다. 그러나 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임금이 보내준 예복을 입는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고서 참석하였다. 그는 잔치의 참석을 위해, 임금이 요구하는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왕이 엄청난 값을 치르고 준비한 예복을 입는 일을 소홀히 하였던 것이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라는 임금의 질문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임금은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는 최종 선언을 내렸다.

3. 고르심과 심판
임금이 잔치에 참석한 손님이 예복을 입었는가 심사하는 일은 심판을 표상한다. 잔치에 모두 참여는 할 수 있지만, 잔치에 참석하여 그 향연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조사하고 심판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이 비유는 말해준다. 즉 누가 하늘에 가서 살 사람인가를 결정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흰 예복은 무엇일까?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계 19:7~8). 성경은 흰 세마포를 “성도들의 옳은 행실”, 곧 “의”라고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곧 세 번째 초청을 받고 하늘 왕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복”을 입고 참석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도들의 의"의 옷이다.   
흰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의이다.우리가 회개하고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믿을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주님의 의의 옷을 입혀주신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만 살짝 의의 옷을 입혀서 덮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진짜 우리의 속도 순결하고 의롭게 되도록, 곧 죄를 미워하고, 악한 것을 싫어하고, 남을 용서하며,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 되도록 변화시켜주신다. 의는 그 마음의 동기와 생각과 의도와 방향이 의롭다는 것이다. 곧 의롭고 선한 성품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복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소유해야 할 순결하고 흠 없는 품성을 표상한다.

비유에서 임금이 누가 혼인 예복을 입었는지 살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정말 변화된 성품을 가졌는지 살펴보신다.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은 예수를 믿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모두 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니다. 영생이라는 최후의 보상을 나누어 주기 전에, 먼저 누가 의인의 유업을 차지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이미 결정된 심사 결과대로 상벌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재림 하시기 전에 지금 하늘에서는 중요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 일은 바로 하늘 처소에 살 성도들을 고르시는 일이다. 이데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계속 연구해 보기로 하자. 

지금 하늘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

지금 하늘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

“어떤 사람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딤전 5:24).


많은 그리스도인들인 지금 하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아니, 지금 하늘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요한 사업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지금 하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 어디에 계신가? 그리고 주님께서는 현재 무슨 일을 하고 계실까?
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어디로 가셨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 답을 히브리서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1) 예수 그리스도의 현주소
히브리서가 말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주소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늘 성소에 계신다.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의 참 성소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중보사업을 하고 계신다. 성경은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곳이 어디이며, 주님께서 그곳에서 어떤 사역을 하시는지 자세히 알려준다. 즉,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닌 하늘에 있는 참 성소와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에 대해 히브리서를 통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짚어주는 것은 없다.

1.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시던 시각, 성전에서는 제사장이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희생제물인 어린양을 잡을 준비를 하고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칼을 놓친 제사장 앞에서 어린양은 도망을 쳤다. 지진과 천둥의 소음 속에서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그 바로 같은 시간,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부르짖으시고 운명하셨다.
이것은 무엇을 표상하는가? 십자가를 통해 드디어 표상은 실체를 만난 것이다. 여러 세기를 통해 성전의 봉사가 가리켜온 바로 그 사건이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희생제물로서의 그분의 속죄를 완성하셨다. 이제 표상이 실체와 만났기 때문에 이 희생을 예표하는 의식들은 폐지되었다. 그래서 휘장은 찢어지고, 칼은 떨어지고, 어린양은 도망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이제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더 중요한 장이 열리게 되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또 다른 구속의 역사의 장으로 들어서는 사건이었는데, 이제 예수께서는 하늘 성소로 들어가셔서 중요한 사역을 시작하게 되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완전한 희생이 드려졌으므로, 이제는 예수님께서 희생제물인 어린양으로서 성소의 뜰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드리신 희생을 적용하는 제사장으로서 봉사하시기 위해 하늘 성소로 들어가셨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분이 이루신 속죄 희생의 효력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도록 성소 봉사를 시작하셨다.

2. 하늘에도 성소가 있는가?
하늘에 성소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 지상 성소를 지으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셨다. 지상 성소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고 보이신 “식양대로”(히 8:5) 지어졌다. 그래서 지상 성소는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 혹은 "참 것의 그림자라고 불린다(히 9:23, 24).
신약 성경은 새 언약에도 성소, 곧 하늘의 성소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대제사장으로서 봉사하신다. 이 성소는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히 8:1, 2)다. 사도 요한도 이상 가운데 하늘 성소를 보지 않았는가? 그는 그것을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계 15:5), 혹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계 11:19)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늘 성소가 실제적인 곳이며, 비유나 추상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려준다.

그렇지만 하늘 성소의 규모나 정확한 형태, 또는 세세한 장치에 대해 추측하는 것은 무익하다. 그곳은 지상의 어떠한 건물을 가지고도 그 크기와 영광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상 성소에 있는 모든 것은 하늘 성소와 연관된 여러 봉사들을 예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그분은 하늘 봉사 사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성소 첫째 칸으로 들어가신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2) 대제사장 예수님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늘 성소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중보사역을 하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을 때, 그분은 제사장으로서 하늘 성소의 첫째 칸인 성소로 들어가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히 8:1).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는 어린 양”, 희생당하는 어린 양이 되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위해 속죄 사업을 하고 계신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 7:2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4~18)
예수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시다. 대제사장은 죄인들의 회개를 제시하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간구하는 자이다. 또한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용서받은 자들에게 전달하여 주는 중보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중보란 죄의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만이 아니라, 죄인이 다시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않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때를 따라 돕는 은혜, 곧 성령의 능력을 제공하여 주는 일을 포함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우리를 위해 이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 7:24)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

3)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구속과 심판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긴 기간의 예언인 2300주야 예언이 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단 8:14). 2300주야 예언에 대한 연구는 이미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을 통해 몇 차례 소개되었으므로 여기서 자세한 해석은 생략하기로 한다. ( 이 주제를 다시 연구하기 원하는 독자는 SOSTV.NET웹사이트에 있는 월간지 44호, 188호를 참조하십시오 ).

1. 성소 정결의 의미
성소가 정결하게 된다는 의미에는 많은 교훈이 포함되어 있다. 성소 제도에서 행해지는 의식을 보면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구별되어 있었다. 성소에서 죄 때문에 행해지는 매일의 봉사와 지성소에서 대속죄일에 행해지는 연례 봉사 두 부분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일년에 한 번 있는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될 것을 명하셨다. 그들은 일년 내내 죄들을 고백하며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면서 용서를 받아 왔다. 그러나 매년 마지막 날인 대속죄일 날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들의 회개가 정말 참된 것이었는지, 지금도 여전히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정말로 죄를 참회하고 버렸는지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일을 하셨다(레위기 16장 참조).

성소 제도와 봉사를 보면, 성소 뜰에서 희생제물 위에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 곧 그들의 죄가 속죄 제물의 피를 통하여 성소로 옮겨진 자들만이 대속죄일의 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동안 성소 안으로 옮겨진 (휘장에 뿌려진 희생제물의 피를 통해 ) 모든 죄가 대속죄일에 정결하게 되었는데, 그 죄는 마지막 최종적으로 사단을 대표하는 아사셀 염소 위에 전가되었다. 그것은 영적으로 죄의 최종 책임이 마귀에게 전가되는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성소제도에 있어서 성소가 정결해진다는 개념은 지성소에서 행해지는 대속죄일의 봉사인 심판의 사역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벧전 4:17).

2. 지성소 사업의 시작
2300일 예언에서 성소가 정결하게 된다는 의미는 지성소에서의 봉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2300년은 언제 마쳐졌는가? 이 예언을 연구해보면, 2300주야 예언은 A.D. 1844년에 끝나게 된다. 그런데 2300주야 이상의 끝 시점인 1844년에는 지상 성소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땅의 성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다니엘 8장 14절에 언급된 성소는 하늘 성소를 언급한다. 즉 1844년에 성소가 정결하게 됨을 입으리라는 말은 1844년에 시작된 영적인 대속죄일에,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시던 대제사장 예수님께서 우리 죄의 중보와 정결사업을 위해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4) 지성소로 가는 길이 열리다

이것은 요한이 기록한 계시에도 나타나는데, 그는 그 사실을 하늘의 열린 문으로 묘사하였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계 4:1).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계 11:19).

언약궤는 성소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성전의 둘째 칸 지성소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계시 중에 보았던, 언약궤가 있는 성전은 지성소를 가리킨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친히 돌비에 새기신 십계명의 보관소였다. 요한은 이상 중에 하늘의 열린 문 안에 보좌가 베풀어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지상 성소에도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의 금으로 된 뚜껑으로 “시은좌”(속죄소)라고 불렸다.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인 지상 성막의 봉사에서, 지성소는 오직 대속죄일에만 성소를 정결하게 하려고 열렸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였다는 것은, 1844년에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마지막 사업을 하시기 위하여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실 때에 그 지성소가 열린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성경 구절이 또 있다. 그것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시대 중 “빌라델비아”(1833~1844년)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 3:7,8).

이 말씀에서 “닫힌 문”은 하늘 성소의 문이며, “열린 문”은 하늘 지성소의 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하늘에서는 누가 진짜 회개하고 변화되어 하늘 처소에서 영원한 유업을 누리며 주님과 함께 살 사람인가를 고르시며 결정하는 심판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진짜 죄를 버리고 회개했는지 마음을 조사하시는 것이다.  

심판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심판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계 7:1~3).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마 “심판”이라는 어휘가 주는 무서운 인상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다르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연구해보면 우리는 그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기이하고 놀라운 사랑과 자비를 깨달을 수 있다. 함께 연구해 보자.

1) 하나님의 인과 심판의 과정

재림 전에 구원을 얻을 사람들을 결정하고 고르시는 심판은 마지막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치는 과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어떤 연관이 있는지 먼저 살펴보자.

1. 하나님의 인
마지막에 구원을 얻을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아야 한다.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계 7:1~3).
요한 계시록 6장에는 일곱 인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12절부터 시작되는 여섯째 인에는 세상의 마지막 징조와 재림의 광경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17절은 무서운 최후의 날에 누가 설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때에 마치 삽입구처럼 7장이 등장하면서, 그 최후의 날에 설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7장에 나오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 재림의 때에 설 수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2.  인치는 과정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라고 도장을 찍으시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의 아름다운 성품으로 온전하게 변화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인을 치시는 것이다(계 14:1~5절 참조).  
그런데 하나님의 인을 받는 경험은 한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은 갑자기 쳐지는 것이 아니다. 인을 치는 것은 과정이다. 진리를 깨닫고, 그 알게 된 진리에 따르는 올바른 영적 경험이 오고, 진리대로 순종하고 굴복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꼴 지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을 치는 것을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초나 왁스에 어떤 형상을 새기거나 어떤 것에 인이나 도장을 찍으려면, 그 형상이 완전히 새겨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마음과 성품에 새겨지는 것도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갑자기 사람의 성품이 변하게 되어 하나님의 인을 받을 수는 없다. 오랫동안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역사 해 오시고, 호소하고 깨닫게 하시고, 변하게 하신 결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령의 역사에 인간이 협력하고 굴복하고 순종한 결과로 성품이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을 받는 것은 과정이며, 성품이 완전하게 꼴 지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인이 찍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은 심판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하나님께서 재림 전에 누가 불멸의 영생을 누릴 자인가 조사하시는 일은 한 순간에 갑자기 결정되는 사안이 아니다.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심판을 받기 전에, 자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하여 그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신다. 자신의 죄를 알아야 죄를 버리고 회개하며, 정결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사라는 것을 드러내심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을 치는 것도 과정이지만, 조사심판을 받는 것도 과정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드러나게 하셔서 우리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부족함과 고쳐야 할 점을 어떻게 깨닫겠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드러나도록 역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며 큰 자비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계단씩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 나타나게 하기 위해, 각기 다른 경우로 인도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한 가지 점에는 잘 견디지만, 다음 것에는 넘어지고 만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경우는 기꺼이 주님께 순복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 받아들이지만, 다른 시험의 과정으로 인도하실 때 물러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이 품고 있는 어떤 우상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것이 있으면 그것을 버리기 싫어서 물러선다. 그러면 성령님은 우리의 거절 때문에 그분의 역사를 강요하시지 못하고 기다리시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또 역사하시고 그런 과정이 반복된다. 그러나 언젠가 사랑의 호소는 끝이 날 때가 있다.

3. 심판하시는 과정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내쫓는 무엇이 있는지를 볼 기회를 갖게 된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진리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있다. 각 개인은 자신의 우상들을 희생할 것인지를 알기 위해 한동안 시험과 시련을 당한다. 그리하여 모든 경우를 경험하고, 모든 시험을 견디고 승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을 받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시며 깨닫고 회개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인은 갑자기 쳐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따라 순종해 온 사람들, 주님의 인도를 따라 자신의 부족함을 회개하고 메꾸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죄와 모든 것을 이긴 사람들만이 받게 되는 것이다.
조사하는 심판도 마찬가지이다. 갑자기 하루 아침에 조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을 치는 것처럼 주님께서 마음 속의 모든 죄들을 드러나게 하시며 그 죄들을 진정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그리고 성령으로 부드럽게 역사하셔서 그 사람이 죄를 버리도록 하신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진짜 죄를 버릴 맘을 가지고 있는가, 성령의 역사에 순복하는 선한 마음을 가졌는가를 보신다. 진짜 주님을 가장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시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위험하게 다시 하늘에 들이시겠는가? 마음 속에 죄의 소욕과 욕심이 그대로 살아있는 사람이 하늘에 간다면, 우주에 죄를 가져오고 반역을 일으킨 루시퍼와 같은 사단이 다시 생겨나지 않겠는가?

2) 하늘을 위한 우리의 준비
지금 우리는 심판의 때에 살고 있다. 예수께서는 지금 지성소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중보사업을 하고 계시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의 고백을 받고 계시며, 우리 죄의 기록이 적혀 있는 책을 펴시고 각 사람의 케이스를 심판하시고 계신다.
심판은 재림 전에 이루어진다. 재림 때에는 주님께서 심판을 통과한 구원받을 의인을 데리러 오시는 것이지, 그때에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도말을 받는 엄숙한 시기에 살고 있다. 죄를 회개하면, 주님께서는 용서해주시지만, 우리 죄의 기록이 완전히 도말되는 것은, 그 똑같은 죄를 더 이상 반복하여 짓지 않는 완전한 사랑의 성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성품이 되었을 때에 도말 되는 것이다. 죄의 완전한 용서와 도말은 정말 그 사람의 마음의 의도와 방향이 진정으로 거듭나서 죄를 미워하고 백프로 성령의 음성에 굴복한 상태에 있을 때, 그 사람의 성품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의 성품으로 변화되어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선지자 다니엘은 계시에서 심판의 광경을 보았다."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단 7:9, 10).
지금 대제사장 되신 예수께서는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서서 인류를 위한 마지막 봉사를 하시고 있다. 회개하고 자복하여 속죄의 은사를 입을 자격이 있는 모든 사람을 속죄하시며, 죄를 도말 하시고, 준비된 사람들에게 인을 치셔서 하늘에 살 사람을 고르시는 것이다.

마치면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을 다 하늘로 데려가시기 원하십니다. 이 지구에 한 사람의 죄인만 있었어도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또 다시 죄의 반역이 일어날 위험한 곳으로 만들 수는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금 이 시간에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닮으라고 사랑으로 호소하십니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죄를 미워하고 승리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역사에 순복하여 주님의 성품으로 꼴지어져감을 입는 사람은 하늘에 갈 준비를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인을 받는 과정에 있습니까? 주님을 따라 매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하늘에서 살 사람들을 미리 고르시는 이 때에 여러분은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살 사람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준비된 하늘 처소에 모두 함께 들어가는 독자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 자원하여 바침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 자원하여 바침

새벽에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리로다  (시편 46:5).


그대의 지체를 굴복시키라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라” 롬 6:13.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인이 찍혀 있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셨으며 또한 그분께서는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모든 능력이 당신께 속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기를 원하신다. 시간과, 감화력과, 이지와, 애정과, 및 양심,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것들이다. 따라서 다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해야 한다. 이상 모든 것들은 세상의 지시에 따라서 사용하지 말 것이니 대개 이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지도자 아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 거하고 계시는 육신은 하나님께 속한다. 모든 근(筋)과 육(肉)이 주의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우리는 등한(等閑)하거나 또는 남용함으로써 단 하나의 기관이라도 이를 약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와 정신의 모든 능력을 조성하여서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을 만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대로 우리의 몸을 최상의 건강 상태로 보존함으로 하나님과 협력하여야 한다. 순결한 원칙을 우리의 마음 속에 쌓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를 심비(心裨)에 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 말씀의 귀한 진리를 머리에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면 아름다운 보석과 같이 이런 모든 진리가 생애에서 빛나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험을 받아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면밀하게 살피는 사업이 안식일 준수자들에게 진행되어야 한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나님과 그분의 놀라운 업적을 잊어버리고 그분께 반역하는가.


너희 몸을 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그대는 그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피로써 그대를 사셨다. 그대의 재능을 땅 속에 묻지 말라. 이것을 주를 위하여 사용하라. 어떠한 사업에 그대가 종사할지라도 예수를 그 가운데 모셔라. 만일 구주에 대한 그대의 사랑이 식어져 가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는 그대는 그 사업을 그만두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주께서 나로 하여금 무엇을 이루게 하시고자 하시나이까?” 하고 기도하라. 주께서는 그대를 자비로써 받아 주시고 또한 아낌없이 사랑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넘치게 용서하시리니 이는 주는 자비하시고 오래 참으시사 한 사람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시는 까닭이다.
우리 자신과 또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희생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마음까지를 자원하는 제물로 바쳐야 한다.
육체는 정신과 심령이 품성형성을 위하여 성장하게 해 주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원수는 육체적 힘을 약화시키고 퇴화시키기 위하여 유혹을 하고 있다. 그가 여기에서 성공하게 되면 영과 육을 다같이 악에 굴복시킬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육체적 본성의 경향이 보다 높은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분명히 파멸과 죽음을 당할 것이다.
육체는 반드시 지배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요구는 양심에 깊이 새겨져야 한다. 남녀들은 자제(自制)의 의무와 순결의 필요와 각종 타락한 식욕과 더러운 습관에서의 해방에 대하여 깨우침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정신과 육체의 모든 능력이 하나님의 선물임으로 그분을 섬기기 위하여 최선의 상태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누가 자원하는가?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대상 29:5 하단.

사단의 암시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얻을 바 유익점에 관해서 예상하고 지체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한 일이다. 죄는 죄에 빠진 각 사람을 욕보게 하고 불행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죄는 본래부터 맹목적이고, 사기적이고, 아첨하는 말로써 우리를 유혹한다. 만일 우리가 사단의 범위 안에서 모험을 하게 되면 우리는 그의 능력에서 보호를 받을 보증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마귀가 능히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모든 길목을 막아야 한다.
온 마음은 반드시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 만일 그렇게 아니하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그 변화가 우리에게서 결코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형편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진술한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엡 2:1)“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성한 곳이 없”다.(사 1:5,6). 우리는 사단의 올무에 단단히 붙들어 매인 바 되어 “그 뜻을 좇아 그에게 사로잡힌 자”(딤후 2:26 구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쳐 주시고 놓아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렇게 함에는 전적 변화 즉 우리 온 성질의 갱신이 요구되는 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자신으로 더불어 싸우는 싸움은 일찌기 싸운 싸움 중 가장 큰 싸움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며 자신을 바치는 일은 고투(苦鬪)가 요구된다. 그러나 심령이 새로와져서 성결하게 되려면 그 심령을 하나님께 순복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정부는 사단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맹목적 굴종이나 무리한 제재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정부는 이지(理智)와 양심에 호소한다.


내 발을 돌이켰나이다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로 내 발을 돌이켰사오며” 시 119:59.

나이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치 못한다는 구실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믿음은 선한 열매를 풍부히 맺어야 하는데 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각 의무와 각 희생은 지극히 큰 보수를 가져온다. 의무를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축복을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재능을 온전히 바치라고 요구하신다. 마음과 정신과 온 몸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영원한 부를 얻기 위하여 아무 것도 아끼시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 땅을 아름다움으로 입히셨고 사람이 세속적 생애를 하는 동안에 안락함과 사용할 것을 주시기 위하여 풍부히 준비하셨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법에 대한 신속하고도 질문없는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단의 속임수로 인해 마비가 되어 잠자고 있으며, 그는 사람들에게 변명과 구실을 암시하고 또 사람들의 마음에서 양심의 가책을 정복하여 동산에서 하와에게 “너희가 반드시 죽지 아니하리라”고 한 것처럼 저들에게도 말한다. 불순종은 다만 범죄자의 마음과 양심을 굳어지게 만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믿음까지 부패케 한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내어 우리 자신의 길을 따를 여유가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굴복과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꽃이 그 아름다움과 균정미(均整美)를 더욱 완전하게 하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 태양의 광선을 향하는 것처럼, 청년들도 의의 태양으로 향하여 하늘의 빛이 저들에게 비취게 하여야 한다.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의 의사를 강제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자원하는 마음과 이성적으로 하지 않는 경배는 받으실 수 없다. 다만 억지로 굴종하는 것은 마음과 품성의 진정한 계발을 방해할 것이요 사람으로 한갖 자동인형(自動人形)이 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창조주의 뜻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그에게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은 일체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버려야 한다. 재물의 신(神)은 많은 사람의 우상이다. 돈을 사랑하고 재물을 탐하는 것은 저들을 사단에게 붙들어매는 금사슬이다. 명망과 세속적 명예는 또 다른 사람들의 숭배하는 바 된다. 이기적 안락의 생애와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의 우상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예적 속박은 끊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절반은 주의 것이 되고 절반은 세상 것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 안에 거하실 때에 심령은 그의 사랑과 그와 더불어 교통하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어 그를 그리워하여 따르게 될 것이다. 그를 명상하는 가운데 자신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대한 사랑이 모든 행동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하는 것은 한갖 말 뿐이요 건조무미한 형식과 힘든 고역(苦役)일 뿐이다.
그대들은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너무 큰 희생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주셨는가?” 스스로 자문하여 보라.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그대에게 지우시는 시험을 그대가 겸손한 심령과 차분한 마음으로 견디어 내며 그분을 위한 봉사와 사업을 하기 위해 완전히 성화될 때까지, 같은 경내(境內)를 반복하여 지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김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찌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대상 28:9.

이러한 고상한 이상을 달하기 위하여 우리는 넘어지게 하는 것을 버려야 할 것이다. 의지를 통하여 죄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의지를 복종시키는 것을 눈을 빼 내든가 팔을 베어 버리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흔히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을 일생 동안을 불구자나 절뚝발이가 되고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도리어 더 나은 일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라도 최고의 은혜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침으로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생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자신을 복종시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음으로서만 당신이 지적하신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죄를 이길 수 있다고 하셨다. 우리가 만일 자신을 의지하고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거절하면 이는 사망을 택하는 것이다. 죄는 어디 있든지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태우는 불이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택하고 죄에서 분리되기를 거절할 때에는 죄를 태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도 불태우실 것이다.
그대는 주님 안에 있는 즐거움과 기쁨의 비결을 이해하기 위하여 날마다 진리의 샘에서 마실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의 의지가 그대의 모든 행동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대가 기호를 만족시키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결심하지 않는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같은 일은 없다. 그대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그대의 감정, 그대의 정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대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되면 그대의 앞에는 유용한 생애가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통회하는 심령을 갈망하심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하늘로 향해 가는 길은 우리 구주의 시대보다 오늘날 더 순탄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버려져야 한다. 우리의 신앙 생애를 방해하는 모든 방종은 끊어버림을 당해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거치는 것이 된다면 오른눈이나 오른손도 희생되어야 한다. 우리는 즐겨 자기 의에서 분리되고자 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택한 세속적인 친구들을 즐겨 버리고자 하는가?
우리가 이루는 교제는, 아무리 제한된 것일지라도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준다. 우리가 그 영향을 받는 범위는 친밀의 정도, 교제의 항구성(恒久性), 우리가 교제하는 자에 대한 사랑과 존경 등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그와같이 그리스도와의 친숙과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흠없는 모본되신 그분과 같아질 것이다.
외형적 형식이 우리를 정결케 할 수 없다. 가장 성자다운 사람이 집례한 의식도 성령의 침례를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마음에 역사하셔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은 하나님께로서 난 모든 사람들 안에서 드러날 것이다. 투쟁과 싸움은 성령으로 지배받는 자들 사이에서는 생길 수 없다.
무심한 방법으로 신앙적 문제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진정한 심령의 갈급성과 산 믿음 없이 영적 축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별로 효력이 없다. 그리스도의 주변으로 가까이 밀려간 방황하는 군중은 그 접촉에서 생명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불쌍하고 고통받는 여인이 큰 필요를 느끼고 손을 뻗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그는 치료의 능력을 느꼈다. 그의 접촉은 믿음의 접촉이었다.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 24:15.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들과 그분의 율법을 조롱하는 자들 사이에는 뚜렷한 투쟁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존경은 전복되어 왔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의 계명들을 교훈 삼아 가르치고 있다. 옛적 이스라엘 당시에 존재 하였던 것이 현대 세계에도 존재한다. 그런데 불충성과 범죄가 증가한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였던 자들이 지금 그것을 덜 존중해야 하겠는가? 저들은 세상의 권세와 연합하여 그것을 무효로 만들겠는가? 충성된 자들은 현존하는 악으로 인하여 쓸어 버림을 당치 아니할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임명하신 것을 경멸하지 아니할 것이다. 저들은 이스라엘의 망각하는 본을 따르지 않고 각 시대를 통하여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행사를 기억하고 그분의 계명의 길로 들어갈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시험이 오고 있다. 여기에는 두 편만 있을 뿐이다. 그대들은 어느 편에 있는가?
모든 영혼으로 빈틈 없이 경계하게 하라. 그대의 뒤에는 대적이 있다. 조심스럽게 숨겨지고 능란한 올무가 그대를 알지 못하는 새 걸리게 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주의하라. 부주의 하고 무관심한 자들로 조심하여서 주의 날이 밤의 도둑처럼 임하지 않도록 하라. 많은 사람들은 겸비의 길에서 벗어나 방황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멍에를 벗어 던지고 이상한 낯선길로 걸어갈 것이다. 눈이 멀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들은 하나님의 도성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떠날 것이다.
지금은 우리 백성들이 저희의 가족들을 데리고 도시에서 나와서 더욱 외딴 지방들로 가야할 때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많은 젊은이들은 물론이요 나이가 든 많은 사람들도 올무에 걸려서 원수에게 체포당할 것이다.


제자의 결심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눅 5:28.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에 그들에게 어떤 유망한 장래의 전망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또한 어떠한 이익이나 명예도 약속하시지 않으셨고 그들이 받아야 할 보수에 대한 아무런 약속도 없었다. 구주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았다. 이 때에 마태는 일하기 전에 전 직업에서 받았던 액수에 상당한 봉급을 요구하기 위하여 기다리지 않고 아무 조건도 없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을 좇았다. 그는 오직 예수님과 함께 있어 친히 그 음성을 듣고 함께 활동하는 것을 만족하게 여겼다.
이것은 그보다 먼저 부르신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나를 좇으라”고 명하시니 그들이 다 배와 그물을 버리고 좇았다. 이들 중에는 가족들을 부양할 책임을 지고 있던 제자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주저하여 “앞으로 내가 어떻게 생활하며 가족들을 어떻게 부양할 수 있겠읍니까?” 하고 묻지 않고 구주의 초청을 즉시 받아들였다. 그들이 그 부름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좇았으나 그 후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하고 물으시니 제자들은 “없었나이다”하고 대답할 수가 있었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사업을 하라고 옛적에 마태, 요한, 베드로를 부르셨던 것과 같이 오늘날도 우리들을 부르신다. 만일 마음에 주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다면 보수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원칙은 항상 가혹한 것이다. 사업에 전심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기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하나님의 사업에 성공할 수 없다. 예수께서 어느 길로 인도하시든지 즐겨 따라갈 것이다.


진실성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요일 2:6.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구주께서 말씀으로 가르쳐 주신 조건이다. 진리를 분별하고 어떠한 희생이 요구되든지 진리를 순종할 목적을 흔들림이 없이 신실히 지켜 나아가는 자는 신령한 깨우침을 받게 될 것이다. 진정한 경건함은 죄로 더불어 타협하는 것이 끝난 다음에야 시작되는 것이다. 그 때에 마음에서 울어나오는 말은 사도 바울의 하는 말과 같이 될 것이니 곧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꾸준하지 못하게 마음을 흔들리도록 허락할 때에 시작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다 바치지 않는 때에는 우리는 암흑가운데 있게 된다. 우리가 무엇이라도 남겨두면 우리는 마음 문을 열어 사단이 들어와 그의 유혹들로 우리를 이끌어 길을 잃게 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우리의 시야를 어둡게 하여 믿음의 눈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면, 죄에 대한 어떤 장벽도 없게 될 것을 안다.
우리는 각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에 살고 있다. 빛은 변함없는 광선으로 우리 주위에서 밝게 비추고 있다. 만일 이 빛이 옳게 받아 들여지고 올바로 평가된다면 이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것이지만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지혜나 힘을 신뢰하거나 우리 동료 인간들의 지혜나 힘을 의지한다면 그것은 독한 것으로 변할 것이다. 영생을 위한 투쟁에는 우리는 서로 의지할 수 없다. 생명의 떡은 각자가 먹어야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취해야 하며 영혼과 몸과 마음은 그 변화시키는 능력으로서 새롭게 되고 힘을 얻게 될 것이며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과 마음으로 동화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있어서 처음과 나중과 최상이 되어야 한다.

깨끗한 양심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행 24:16.

나의 형제들이여, 주께서는 그대들이 마음을 엄밀히 시험하기를 요청하신다. 그는 그대들이 그대들의 매일의 의무와 그대들의 모든 서로간의 교제에 있어서 장식하기를 요청하신다....그대가 양심의 신성한 요구를 경시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며 다른 사람들을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모본을 보이는 것도 위험하다.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날마다 의심과 악한 추측들을 쫓아내는 방법 그리고 그대들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대들의 형제들과 거래하는 일에 있어서 공명 정대하고 고상하게 되는 법을 배우고 있는가?
그 사악한 날에 양심의 명령을 따라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모두 용기와 확고부동함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의 지식이 필요될 것이다.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들이 박해를 받고 그들의 동기는 비난을 당할 것이며 그들의 최선의 노력은 오해를 받고 그들의 이름은 흉악한 것처럼 내던짐을 받을 것이다. 사단은 그의 모든 기만의 능력을 가지고 마음에 영향을 주고 이해력을 흐리게 하여 악을 선처럼, 선을 악처럼 나타나게 하고자 일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이 더욱 굳고 순결하며 하나님을 순종하고자 하는 그들의 결심이 확고하면 할수록 사단은 더욱 맹렬하게 그들을 대적하여 의롭다 공언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짓밟는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키고자 노력할 것이다.
우리가 회합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에 하나님과 사람에게 양심의 거림낌이 없도록 우리의 모임을 가질 것이요, 또 우리 자신의 행동을 그렇게 취하여야 할 것이니 우리가 교제하던 사람들에게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해나 손상을 준 일이 없었으며, 그들에게 유해한 감화는 끼쳐 주지 않았다는 자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근신, 경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딛 2:11, 12.

일반적으로 행하여지는 환락을 위한 회합도 역시 마음과 품성에 참된 발달을 위하여 방해가 된다. 경박한 교제와 낭비와 향락의 습관, 또한 너무 잦게 도락을 구하는 일이 생활에 굳어져서 그것이 일생을 그르치고 마는 것이다. 부모와 교사들은 이런 오락 대신에 건강에 좋고 활기를 주는 유회를 많이 주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모든 일에서 하신 바와 같이 이 휴양의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길을 보여 주셨다. 고대에 있어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친히 돌보시는 지도 아래 있던 당시의 사람의 생활은 단순하였다. 저희는 자연의 품속에서 살았다. 그 자녀들은 부모들로 더불어 함께 일하고 천연계의 보고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배웠다. 그리고 조용한 들과 살림 가운데서 저희는 여러 세대를 통하여 거룩한 위탁물로 전하여져서 내려오는 위대한 진리의 대하여 숙고하였다. 그런 훈련이 강한 사람을 만들어 냈다.
의는 사랑이요 사랑은 하나님의 빛과 생명이다.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러났으매 우리가 그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의는 고통스러운 분투로나 피곤한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선물이나 희생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얻기를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라야 거저 얻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식물이 요구되는 것처럼 영적인 생애를 유지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할 힘을 얻기 위하여 하늘의 양식 곧 그리스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죽기까지 충성함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행 21:13.

바울이 네로 앞에서 최후의 심문을 받는 동안 황제는 사도의 힘있는 말에 매우 강한 감명을 받고 사건의 결정을 연기하여 피소된 하나님의 종을 방면하지도 정죄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러나 바울에 대한 황제의 악의는 얼마 후 되돌아 왔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황제의 가족에게까지 퍼짐을 막지 못한 자신의 무능에 화가 나서 네로는 그럴 듯한 구실을 발견하는 대로 사도를 죽이고자 결심하였다. 그 후에 오래지 아니하여 네로는 바울로 순교자의 죽음을 하도록 정죄하는 결정을 선고하였다. 로마 시민은 고문형에 처할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은 참수형의 선고를 받았다.
바울은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형장으로 옮겨졌다. 참관자들을 거의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감화가 확대될 것에 대하여 경고를 받은 그의 박해자들이 그의 죽음의 광경을 보고 그리스도교에 귀의하는 자들이 있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 이상이 바울이 전파한 구세주를 받아들였고 머지 않아 두려움 없이 그들의 신앙을 그들의 피로 인치게 되었다.
바울은 하늘의 분위기를 간직하였다. 그와 교제한 사람들은 모두 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감화를 느꼈다. 자신의 생애로 그가 선포한 진리를 확증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설교에 수긍시키는 능력을 부여하였다.
사도는 불확실이나 두려움으로서가 아니요 즐거운 희망과 사모하는 기대를 가지고 위대한 내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순교의 장소에 설 때에 형리의 검이나 곧 그의 피를 받을 땅을 보지 아니하고 그 여름 날의 조용하고 푸른 하늘을 통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았다.


순종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시 119:33.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셨으므로 그분께서 말씀하신 바를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무한하신 지혜자가 말씀하신 후에는 인간이 해결해야 할 의심스러운 문제와 인간이 조정해야 할 망서려지는 가능성이 있을 수 없다. 인간에게 요구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표현된 뜻에 솔직하고 진지하게 일치한다. 순종이란 이성과 양심의 최고의 명령이다.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참된 경신(敬神)의 마음은 순종함으로써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하지 아니한 것을 하라고 명하시는 일이 없으시니 그에게 숭경의 뜻을 표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은 그의 분부하신 말씀을 순종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일찍부터 자녀들에게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부모들이 극히 드물다. 순종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는 너무 어린 나이라고 생각하면서 차마 훈련을 시키지 못하는 부모들 때문에 일반적으로 어린이는 두살이나 세살이 넘어서야 부모들의 훈련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에 이 작은 아이 속에서는 자아(自我)가 강하게 자라며 나날이 부모들은 그 아이를 다루기 힘들게 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린이들은 분명하고 단순하게 일러 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친절하고 분별있는 통제(統制)로써 순종하도록 가르칠 수 있다.
만일 청년들이 교회 기관의 법도와 규칙을 따르는 것이 바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더하게 하고, 성격을 향상하게 하며, 마음을 고상하게 하며, 그들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들은 바른 규칙과 건전한 요구에 반항하거나, 또는 교회 기관에 대하여 의혹과 편견을 일으키기를 일삼지 아니할 것이다.


행복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 5:11.

이생에 있어서의 그대들의 모든 행복과 평화와 기쁨과 성공은 하나님께 대한 그대들의 진정으로 신뢰하는 신앙에 달려 있다. 이 신앙만이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참된 복종을 촉진시킬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그대들의 지식과 사랑이 모든 악습을 제어하는 가장 힘있는 것이 되고, 또 모든 선을 행하는 동기가 된다.
그대들의 죄를 사유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대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집에서 행복스럽게 살기를 원하시는 예수를 믿어라. 주께서는 그대들이 당신과 살기를 원하시며 영생과 영광의 면류관을 받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할 때에는 반드시 유쾌한 마음으로 할 것이며, 슬프고 침울한 마음으로 할 것이 아니다. 예수의 종교안에는 침울이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주안에서 실망하여 슬퍼하는 표정을 남에게 보이면 그것은 주의 품성을 잘못 드러내는 것이요 원수들의 입에 구실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혹 말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주장할 수 있으나 침울하고 슬픈 가운데서 지내면 우리가 고아라는 인상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봉사를 실지로 그렇듯이 남 보기에 인기 있게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참으로 극기와 마음의 은밀한 고민을 자비하신 주께 내어놓을 것이며 우리의 무거운 짐을 십자가의 발밑에 내려놓고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의 사랑안에서 우리가 기쁨으로 전진할 것이다. 다른 사람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진행되는 은밀한 교제를 알 수 없으나 그러나 마음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일의 결과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니 이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평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는 한 손님으로 모실 때에는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과 뜻을 지키실 것이다. 세상에서 지내신 구주의 생애는 비록 투쟁 중에서라도 평화스러운 생애이었다. 아무 인간적 폭력이나 악마의 격노가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의 안온(安穩)함을 깨뜨리지 못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 세상의 행복은 환경에 따라 변하기 쉬운 것이나 그리스도의 평화는 변치 않고 영원한 것이다. 그 행복은 생애의 어떠한 환경에 따르는 것이 아니요 세상 물질의 다소나 세상 친구의 다소에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샘이니 그가 주는 행복은 언제나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가정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온유함은 가정 식구를 행복되게 하며 논쟁을 그치게 하며 성난 대답을 하지않게 하며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며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 그 매력을 감각하게 한다. 온유함과 자애는 어디서든지 세상 가족으로 하여금 하늘에 있는 큰 가족의 한 부분이 되게 한다.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 되시며 그의 사명은 죄악이 파괴시킨 평화를 이 땅과 하늘에 회복시키는 것이다. 누구든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자기의 마음 문을 열어놓는 사람은 하늘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외에는 아무 다른 평화의 기초(基礎)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사람의 마음 가운데 운동하면 사람들 사이에 증오를 풀어 주며 분쟁을 화해시키며 그 마음을 돌리어 사랑으로 충만하게 한다. 하나님과 이웃으로 더불어 화목한 가운데 지내는 사람은 불행하게 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심
“그 백성으로 즐거이 나오게 하시며 그 택한 자로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시 105:43-45.

애굽 사람들에게 흑암의 장벽이었던 구름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큰 빛의 홍수가 되어, 온 진영을 비추고, 저들에게 앞 길을 밝혔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는 불신자에게는 암흑과 절망을 가져오는 반면에 신뢰하는 영혼에게는 그것이 광명과 평화에 차 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혹 사막이나 바다 가운데일지 알 수 없으나 그 길은 안전한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만일 처음부터 종말을 볼 수 있고 하나님과의 동역자로서 저들이 성취하고 있는 그 목적의 영광을 식별할 수 있다면 저들이 인도받기를 선택하는 그 길 이외의 길로는 결코 저들을 인도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늘로 승천한 에녹이나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일지라도 결코 옥중에서 외로이 죽은 침례 요한보다 더 위대하거나 영예를 더 많이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 1:29). 그리고 하늘이 사람에게 주실 수 있는 모든 선물 중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치있는 신임이요 가장 높은 영예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심에 관한 것은 자주 되풀이되어야 한다. 고대 이스라엘을 다루심에 있어서 얼마나 자주 그분께서는 길표를 세우셨는가! 그분께서는 그들이 과거의 역사를 잊어버리지 말도록 모세를 명하여 그 사건들을 노래를 만들도록 하셔서 부모들로 하여금 저희 자녀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나의 방패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잠 30:5.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은 전능자의 큰 방패 아래 서있는 것이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우리의 하나님은 마음대로 하늘과 땅을 통치하시며 또한 그는 우리에게 바로 무엇이 필요한지 아신다. 우리는 오직 우리 앞에있는 것을 조금만 이해 할 수 있을뿐이다.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3).
그는 세상의 혼란을 초월하여 보좌에 앉아 계시다. 만물이 하나님의 거룩한 검사 앞에 드러나 있어서, 그의 위대하시고 조용한 불멸의 상태 가운데서 그가 가장 좋다고 보시는 것을 명하신다.
한마리의 참새라도 아버지의 주목이 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거스리는 사단의 증오심은 말못하는 동물들이라고 멸망시키는 것을 기뻐하도록 그를 인도한다. 새들이 저들의 즐거운 노래로 우리를 기쁘게 하도록 보호를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관심을 통하여 되는것 뿐이다. 오히려 그는 참새들이라도 잊지 않으신다.


그분께서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음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시 40:2.

그리스도인 생애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완전히 온순함과 인내와 온유와 친절만으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 그런 덕성들이 필수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용기와 힘과 정력과 불굴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정해주시는 길은 좁은 길, 극기의 길이다. 그 길에 들어가서 어려움과 낙망을 뚫고 전진하는데는 연약한 것 이상의 것이 요망된다.
힘 있는 사람들이 필요된다. 곧 그들의 길이 순탄해 지고 모든 장애가 제거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 기가 꺾인 일꾼들이 맥빠진 활동을 참신한 열성으로 고무시켜 줄 사람,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뜨거워지고 손이 주님의 일을 하기에 강해 진 사람들이 필요하다.
선교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어떤 사람들은 나약하고, 무기력하고, 풀이 죽고, 쉽게 낙심한다. 그들에게는 추진력이 결핍되어 있다. 그들은 어떤 일을 하는데 힘이 되는 적극적인 특성, 곧 열성이 타오르게 하는 정신과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성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용기 있고 희망적이어야 한다. 그들은 적극적인 덕성뿐만 아니라 활동적인 덕을 계발해야 한다. 그들은 분노를 가라앉히는 부드러운 대답을 해야 하는 한편, 악을 저항하는 영웅적인 용기도 가져야 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참는 사랑과 함께 그들의 감화력을 적극적인 세력이 되게 해 줄 품성의 힘이 필요하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품성에는 어려운 환경 때문에 바뀌어지거나 굴복될 수 없는 확고부동함이 있다. 우리는 도덕적 줏대, 곧 우쭐해 지거나 매수되거나 위협받을 수 없는 진실을 소유해야 한다.



그분께서 새 노래를 주심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시 40:3.

하나님의 성령께서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실 때에 회개한 영혼이 새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이는 그의 경험에서 하나님의 허락이 성취되었고, 그의 허물과 죄는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까닭이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회개하였고 인류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나타내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이와 같은 광경, 영광스러운 소망,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사신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잠잠할 것인가?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들이 했던 것만큼도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우리의 소망이 저들의 것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지 못한가? 우리가 이같은 소망으로 죽지 않을 것을 입고 영광에 넘쳐 큰 소리로 찬양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누가 감히 우리를 금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으며 그것을 더욱 더 갈망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저희의 선한 사업으로써 저희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할 것이며 다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모든 선한 사업은 성령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이니 성령을 주심은 받는 자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성령 주신 자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빛이 사람의 마음 속에 비취게 되면 그 입술은 하나님께 돌리는 찬송과 감사로 차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우리의 기도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나 자선사업이나 극기에 대하여 자랑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확대되고 우리 자신은 숨겨질 것이요 그리스도께서만 유일하신 이로 나타날 것이다.


그분의 이름은 나의 피난처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잠 18:10.

고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지정된 도피성은 그리스도 안에 준비된 피난처의 상징이었다. 이런 임시적인 도피성을 마련하신 동일한 은혜스러운 구세주께서는 보혈을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들을 위하여 저희가 둘째 사망에서 피하여 안전함을 얻을 수 있는 확실한 피난처를 준비하셨다. 어떠한 권세라도 용서를 얻고자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영혼을 그리스도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사단은 우리의 성격 가운데 있는 악을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 나타내고 또한 우리를 자기의 소유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하려고 한다. 원수는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한 후에 우리를 우주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무가치하다고 참소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크신 사랑으로 성령의 귀한 열매가 우리 안에 풍성하게 계발시켜지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장애나 핍박이나 어려운 일이 당케됨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를 저주하심이 아니라 우리 생애에 가장 큰 축복이 되게 하시기 위하심이다. 모든 시험을 대적하고 모든 시련을 견디는 것은 우리에게 새 경험을 얻게 하며 성품을 완성하는 일에 더욱 진보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시험을 대항하는 사람은 세상과 온 우주에 그리스도의 은혜의 효능을 나타내는 것이다.
악에서 보호함을 입을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 가운데 그가 사시도록 하는 것이다. 시험이 우리를 굴복시키는 것은 우리 마음 가운데 이기주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이기주의는 가증하고 좋지못한 성질을 나타내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그것을 우리 마음에서 내어쫓기를 원하게 된다.


옳바른 삶은 영예를 가져옴
“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잠 21:21.

오늘날 세상은 그분의 성도들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필요를 위해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세상 앞에 거룩한 백성들로 서기를 갈망하신다.
요셉과 다니엘과 및 그 동무들의 역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금사슬이 어떻게 청년들을 하나님의 보좌에 연결시킬 수 있음을 본다. 그들을 그들이 가는 온전한 노선에서 이탈하도록 유혹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제왕(帝王)들의 은총과 칭찬보다도 더 중요시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방패를 그들 위에 펴 주셨다. 그들의 믿을 만한 성실을 인하여, 모든 인간적 세력보다 하나님을 존경하려 하는 그들의 결심을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람들 앞에서 뛰어나게 존귀히 하셨다. 이 청년들은 저희의 본색(本色)을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 왕의 조정에서라도 저희 말과, 습관과, 버릇으로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법령이면 세상의 어떠한 법령에든지 굴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저희의 충성을 고백할 수 있는 힘을 하늘로부터 받아 가지고 있었다.
그대들은 이 고결한 청년들의 모본을 따를 준비를 하여야 한다. 그대들은 결단코 그대들이 가진 바 그리스도인의 휘장을 부끄러워하지 말지니 그 휘장을 붙이고 사람들과 천사들로 하여금 주목하게 하라. 그리고 그대는 이 조언(助言)의 반대가 되는 행동을 암시하는 그릇된 신중이나 그릇된 사려의 지배를 받지 말아라. 그대들이 선택한 말과 행동이 일치되고 예모있는 행동과 경건함으로 그대들의 신앙을 표명하고, 그리스도께서 그대들의 심령의 성전에서 보좌를 점령하시도록 결정하고, 모든 재능을 아낌없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두어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일에 사용하게 하라.


헌신은 평화를 가져옴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 119:165.

그리스도인들이 저들의 마음과 인격에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적게 가질수록 자신의 방법은 완전하고 다른 이의 방법은 불완전하게 보인다.
사업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얻어진 실제적인 결과만큼 필요한 것은 없다. 우리의 매일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안에 평화와 안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마음가운데 있는 그분의 평화는 표정가운데 빛날 것이다. 그것은 음성에 설득력을 줄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통은 품성과 전 행동의 노선에 도덕적 향상을 나누어 줄 것이다. 사람들은 초기 제자들을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와 함께 있었던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화평은 진리에서 나온 것이다. 진리는 하나님과 일치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율법과 원수가 되고 죄인은 저희의 창조주와 원수가 되고 그 결과 저희는 피차에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시 119:165) 고 말한다. 사람은 화평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인간이 개인이나 사회를 깨끗하게 하고 고상하게 하려고 계회하나 화평을 내지 못하는 것은 이런 계획이 심령을 울리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참된 화평을 창조하시고 영속시키실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은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이 은혜가 마음에 뿌리박힐 때에 이 능력은 분쟁과 불화를 일으키는 악한 정욕을 내쫓을 것이다.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며 인생의 사막은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 할 것이다. (사 55:13, 35:1).


예수님의 헌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8.

에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할 지극히 엄중한 책임을 지셨다. 그분은 인류들의 원칙과 목적에 단호한 변화가 있지 않으면 모든 인류가 잃어버린 바 될 것을 아셨으며 이것은 주의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주님께서 지신 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년 시절이나 청년 시절이나 또는 성년이 된 때에라도 주는 언제나 고독하게 지내셨다. 그러나 주님이 계신 곳은 천국이었다. 주는 날마다 여러가지 시련과 시험을 당하시고, 여러가지 악을 만나셨다. 또한 그가 찾아 복을 주고 구원하려는 자들 위에 죄의 세력이 나타난 것을 보시고 활기를 잃거나 낙담하지 않으셨다.
주께서는 모든 일에 희망을 가지시되 그의 사명에 엄격히 한정하셨다. 또한 모든 일을 하늘 아버지의 뜻에 복종케 함으로써 그 생애를 영화롭게 하셨다. 그가 어렸을 때에 그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께서 랍비들과 함께 문답하고 있음을 보고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할 때에 그는 대답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셨으니 이 대답은 그의 평생 사업의 요지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셨던 경건, 헌신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이 주의 종들에게서도 나타나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그의 하늘 고향을 버리시고 또 창세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누리셨던 영광과 우주를 통치하시던 보좌의 지위를 버리시고 하나의 연약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강림하셔서 고독한 생애를 보내시며 잃어버린 세상을 도로 찾기 위하여 눈물로 생명의 씨를 뿌리시고 피로써 그 위에 부으셨다.


마게도냐인들의 헌신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고후 8:3-5.

거의 모든 마게도냐 신도들은 이 세상 물질에는 가난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그들의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 흘러 복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쁨으로 바쳤다. 유대의 신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이방인 교회에서 전체적으로 모금을 할 때에 마게도냐에서 회개한 사람들의 너그러움은 다른 교회에 모본이 되었다. 사도는 고린도 신자들에게 편지할 때에 그들의 주의를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에 돌리면서 말하기를 “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의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저희가 힘대로 할 뿐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였다고 하였다. (고후 8:1-4).
마게도냐 신도들이 행한 자원의 희생은 전심으로 헌신한 결과로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고후 8:5) 그 후에 복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재물을 단 마음으로 아낌 없이 바쳤다. 그들에게 바치도록 간청할 필요가 없었으니 오히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하여 필요한 물건에까지라도 자신들을 부정하는 특권을 기뻐하였다. 사도가 그들을 제지하려 하였을 때에 그들은 그들의 헌금을 받으라고 그를 졸라대었다. 그들의 단순과 성실,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은 즐거이 자아를 부정하였으므로 자비심의 열매로 가득찼었다.
영적 번영은 그리스도인적 관대함과 밀접히 결속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애에서 구세주의 자비심을 나타낼 특권에 대하여 기뻐하여야 한다.


모세의 헌신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모세는 세상의 위인들 중에 탁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그것의 가장 영광스러운 나라의 궁정에서 빛을 발하고 그 권세의 홀을 휘두르기에 적합하였다. 그의 위대한 지력은 각 시대의 위인들 위에 그를 뛰어나게 한다. 역사가요, 시인이요, 철학자요, 군대장관이요, 입법자로서 그는 비교될 사람 없는 위치에 섰다. 세계가 자기 앞에 있었으나 그는 재물과 고귀와 명성을 얻을 유망한 전망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 할 도덕적 힘을 가졌었다.
겸손하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주어질 최후의 보상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은 모세에게 세속적 이익은 정말 무가치한 것일 따름이었다. 바로의 장엄한 궁전과 왕의 보좌가 모세에게 유인(誘因)으로 제공되었으나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는 죄스러운 쾌락이 궁정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호화찬란한 궁전 저편 그리고 군주의 왕관 저편에 있는, 죄에 물들지 않은 나라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에게 주어질 높은 영광을 바라보았다. 그는 믿음으로 하늘의 왕께서 승리자의 머리에 씌워 주실 불멸의 왕관을 보았다. 이 믿음이 그로 하여금 세상의 당당한 사람들에게서 떠나 죄를 섬기기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선택한 비천하고 가난하고 멸시받는 민족과 합하게 하였다.


가난한 과부의 헌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눅 21:3,4.

부자들은 저들의 풍부한 데서 바쳤으며 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서 영광을 받으려 하였다. 저들이 드린 큰 예물들은 저들에게서 안락이나 혹은 사치를 조금도 빼앗지 않은 것이었으며 또 아무 희생도 요구되지 않은 예물이었으므로 과부의 푼돈과는 그 가치에 있어서 비교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의 행동을 비열하다거나 혹은 높은 도덕적 가치를 가진 성질의 행동이라고 판정짓게 하는 것은 그 행위의 동기이다. 모든 사람이 주목하고 찬양하는 큰 것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간주하시는 것은 아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수행한 작은 의무와 남에게 보이지 않게 드린 적은 예물과 인간의 안목에는 무가치하게 보이는 것이 흔히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귀한 것이 된다. 믿음과 사랑이 있는 마음이 가장 값진 예물보다 하나님께는 더욱 귀중하다. 가난한 과부는 그가 드린 적은 예물을 드리기 위하여 그의 생활비를 바쳤다. 그는 사랑하는 사업에 이 두 푼을 드리기 위하여 자신의 음식을 희생하였다.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의 큰 필요를 모른체 하시지 않으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이 일을 행하였다. 구세주의 칭친을 받은 것은 이 이기심 없는 정신과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었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하여, 허울만의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우리 자신과 교회와 세상을 속이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것 같으면, 비록 우리가 회중에게 결코 설교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된다. 우리는 자선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줌으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이 된다.


사무엘의 헌신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삼상 2:26.

사무엘이 젊은 시절을 성막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헌신하였으므로 그는 악한 감화나 죄악의 모본에 물들지 않았다.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저희 아버지를 공경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들과 짝하려 하지도, 그들의 악한 길을 따르려 하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기대하신 바와 같이 된 것은 사무엘이 끊임없이 노력한 때문이었다. 이 일은 모든 젊은이들의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작은 아이들이라도 당신을 섬기는 일에 헌신할 때에 기뻐하신다.
사무엘은 엘리의 보호 아래 있었으며 그의 사랑스러운 품성은 연로한 제사장 엘리의 뜨거운 애정을 끌었다. 사무엘은 친절하고 아량 있고, 순종하고 공손하였다. ... 사무엘은 유용하고 애정이 깊었으며 엘리가 이 젊은이를 사랑한 것보다 일찌기 자기 아이를 더 사랑한 아버지는 없었다. 국가의 정사를 맡은 자와 단순한 아이 사이에 이처럼 뜨거운 애정이 존재하게 된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엘리는 고령으로 허약하여졌을 때에 자신의 아들들의 방탕한 행위로 인하여 근심과 양심의 가책으로 충만하였으며 위안을 얻으려고 사무엘에게로 향하였다.
성막에서 수종들도록 데려왔을 때에 그가 매우 어렸을지라도 사무엘은 그 때에라도 그의 능력에 따라 하나님을 봉사하는 데 수행하여야 할 의무를 가졌다. 이 일들은 최초에는 매우 천한 일이었고 언제나 즐거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는 그의 최선의 능력을 다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그 일들을 수행하였다. 그는 생애의 모든 의무에 그의 종교를 결부시켰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처럼 여기고 그의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노력은 받으신바 되었으니 이는 그 노력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의 뜻을 행하려는 성실한 소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바울의 헌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6:19, 20.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떠나 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는 기별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옛 교제도 끊어버리고 평생의 계획도 포기하며 이땅의 희망도 내어버려야 한다. 씨를 뿌리는 자는 자신을 희생하며 외로이 수고와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온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께 바친 자는 항상 새로운 육체적, 정신적 능력과 영적 능력을 받는다. 다함이 없는 하늘의 공급을 원하는 대로 받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영혼의 호흡 곧 자신의 생명을 주시며 성령께서는 그의 최대의 능력으로써 마음 가운데 활동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저희 기능을 더욱 배가시키며 온전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영혼 구원하는 사업을 돕기 위해 임하신다. 교역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협력함으로 주 안에서 완전하여지며 비록 인간으로서는 연약할지라도 전능하신 자의 행하시는 바를 행할 수 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선이나 혹은 악에 대한 각 개인의 감화력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또한 이해하지 못한다. 모든 학생은 그가 받아들인 주의원칙(主義原則)이 그 품성을 조성하는 산 동력(動力)이 될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인 자는 예수를 사랑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것이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 영생에 이르게 하는 까닭이다. 그는 남김없이 그리스도의 원칙에 자신을 바칠 것이다.


엘리사의 헌신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왕상 19:20.

이것은 거절이 아니요 믿음의 시험이었다. 엘리사는 값을 계산해야 하였다. 즉 부르심을 받아들이든지 거절하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였다. 만일 그의 소망이 자기의 집과 그 이익에 집착한다면 그는 집에 머무를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 부르심의 뜻을 깨달았다. 그는 이 부르심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알고 순종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였다. 어떠한 세속적 이익도 그에게 하나님의 사신이 되는 특권이나 하나님의 종과 교제하는 특권을 희생하게 하지 못하였다.
엘리사는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다. 엘리사는 주저하지 않고 그가 사랑받던 집을 떠나 불안정한 생활 중에 선지자를 수종하러 갔다.
만일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자기에게 기대하는 바 할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라면 그는 이런 대답을 얻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시며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이것을 알리실 것이다. 만일 그대가 여호와를 섬긴다면 여호와께서 그대의 모든 의문에 응답하실 것이다. 만일 그대가 하나님께서 그대를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는다면 그대는 나와 함께 갈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뒤에서 계시고 그대가 듣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임을 스스로 알라. 만일 그대가 모든 것을 진토로 여길 수 있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으니, 오라.’
그대들의 현재와 그리고 영원의 이익을 위하여 세상이 그대의 입장을 분별할 수 있도록 그대 자신을 전적으로 의(義)에 바쳐버리는 것이 가장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