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옛 생애에 사형선고를 내리라

시작하는 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 6:11).

 
인터넷에서 아주 흥미로운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이 “연애 시작 후 연락두절 된 절친에게 '장례식'을 선물한 친구들” 이란 기사였다.

이것은 영국에서 일어난 실화라고 하는데, 한 남성이 여자친구에게 빠져서 자기의 친구들에게 1년 넘게 연락을 하지 않자, 그의 친구들로부터 '장례식'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는 얘기의 기사였다. 영국 사우스웨일스에 사는 “케이란 케이블”은 1년 전부터 “제시”라는 여자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는데, 이 미모의 여자친구에 푹 빠진 케이란은 연애를 시작하면서 1년 반이 넘도록 주변 친구들에게 연락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케이란이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문자에도 답장을 하지 않자, 괘씸하게 생각해서 케이란에게 멋진 복수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50여 명의 친구들은 “케이란! 우리들에게 이렇게 연락을 안하니 넌 우리에게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라고 하며 그를 위해 가짜 장례식을 열기로 했다. 관과 운구차에 추모사까지 준비한 친구들은 검은 양복까지 챙겨입고 케이란의 가짜 장례식을 열어놓고, 케이란에게 럭비 게임을 보러 오라고 계속 유인했다. 마침내 그곳에 온 케이란은 상황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친구들이 “너는 죽었으니 관에 들어가!” 라고 말해 결국 제발로 관에 들어가 누울 수 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그를 관에 눕혀놓고 추모사를 읽었다. “1년 6개월간 케이란과 우리는 연락이 안됐다. 이제 기다림은 끝났고 케이란은 우리에게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케이란의 한 친구는 “한 동안 우리들 중 누구도 그를 보지 못했다. 문자도 메일에도 답이 없었기에 마치 죽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서, “이번에도 케이란이 연락을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이 장례식을 끝으로 그가 정말 죽은 것으로 생각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열린 케이란의 장례식 사진이 각종 SNS를 통해 확산되며 큰 관심을 얻었다.

이것은 우스꽝스런 기사에 불과하지만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이 남성이 어떻게 했는가? 여자 친구에게 빠져서 자기의 옛친구들과 옛 세상과 단절을 했다. 정말 그의 친구들이 장례식을 치뤄줄 만큼 옛 삶에 대해 죽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옛생애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옛 자아에 대해 장례식을 치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제1부 내 장례식

제1부 내 장례식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 6:11).


인터넷에서 아주 흥미로운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이 “연애 시작 후 연락두절 된 절친에게 '장례식'을 선물한 친구들” 이란 기사였다.

이것은 영국에서 일어난 실화라고 하는데, 한 남성이 여자친구에게 빠져서 자기의 친구들에게 1년 넘게 연락을 하지 않자, 그의 친구들로부터 '장례식'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는 얘기의 기사였다. 영국 사우스웨일스에 사는 “케이란 케이블”은 1년 전부터 “제시”라는 여자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는데, 이 미모의 여자친구에 푹 빠진 케이란은 연애를 시작하면서 1년 반이 넘도록 주변 친구들에게 연락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케이란이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문자에도 답장을 하지 않자, 괘씸하게 생각해서 케이란에게 멋진 복수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50여 명의 친구들은 “케이란! 우리들에게 이렇게 연락을 안하니 넌 우리에게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라고 하며 그를 위해 가짜 장례식을 열기로 했다. 관과 운구차에 추모사까지 준비한 친구들은 검은 양복까지 챙겨입고 케이란의 가짜 장례식을 열어놓고, 케이란에게 럭비 게임을 보러 오라고 계속 유인했다. 마침내 그곳에 온 케이란은 상황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친구들이 “너는 죽었으니 관에 들어가!” 라고 말해 결국 제발로 관에 들어가 누울 수 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그를 관에 눕혀놓고 추모사를 읽었다. “1년 6개월간 케이란과 우리는 연락이 안됐다. 이제 기다림은 끝났고 케이란은 우리에게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케이란의 한 친구는 “한 동안 우리들 중 누구도 그를 보지 못했다. 문자도 메일에도 답이 없었기에 마치 죽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서, “이번에도 케이란이 연락을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이 장례식을 끝으로 그가 정말 죽은 것으로 생각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열린 케이란의 장례식 사진이 각종 SNS를 통해 확산되며 큰 관심을 얻었다.

이것은 우스꽝스런 기사에 불과하지만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이 남성이 어떻게 했는가? 여자 친구에게 빠져서 자기의 옛친구들과 옛 세상과 단절을 했다. 정말 그의 친구들이 장례식을 치뤄줄 만큼 옛 삶에 대해 죽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옛생애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옛 자아에 대해 장례식을 치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1) 진정한 거듭남이란?

예수님께서 한 밤 중에 몰래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요 3:3)고 하셨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셨던 이 거듭남에 대한 설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듭남에 대한 설교 중에 가장 위대한 설교이며, 영생의 비결에 대한 가장 오묘한 진리와 비밀을 담고 있다. 즉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를 말씀해주신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비결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거듭남”이다.

거듭남이란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거듭남이란 옛 생애를 변경하고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마음의 본성이 바뀌는 것, 즉 마음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겉가지만 잘라내는 과정이 아니라 뿌리째 변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의 냇물이 맑게 되려면 먼저 마음의 샘이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 자신과 죄에 대하여는 죽고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나오는 것이다. 

마음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내가 추구하던 삶의 목적과 내가 살던 삶의 방식이 달라진 것을 말한다. 예전에 가졌던 사상과 마음이 변해서 새롭게 되고, 예전에 좋아하고 사랑하던 것들이 싫어지고, 예전에 가졌던 태도와 감정이 전혀 다르게 변하는 것이다. 정욕적이고 세속적이고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화되고, 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그분의 은혜의 매력과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깨닫게 되어 영혼이 거룩한 사랑에 젖게 되고 하늘의 신비에 사로잡히게 된다. 죄인이 이러한 변화를 경험할 때, 이전 생애는 가증하고 증오스럽게 보일 것이다.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깨뜨리게 되며, 그리스도를 영혼의 생명과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전의 쾌락들이 싫어지고 돌아보기조차 꺼려지며, 새로운 마음, 새로운 애정, 새로운 관심, 새로운 뜻을 갖게 된다. 그의 슬픔, 소망, 사랑은 모두 새로운 것들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 지금까지 그리스도보다 더 좋아했던 것들은 이제 버려지고, 한때는 매력없던 하늘이 이제는 그립고 영광스러운 곳으로 보이며, 이제는 천국을 장래의 자신의 집으로 생각하게 된다. 인생의 모든 목적과 삶의 방향이 총체적으로 바뀌고 변화되는 것이 거듭남이다.



2) 거듭남에 대한 오류

그런데 문제는 현 기독교에서는 “거듭남”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가르침이 완전히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진정한 거듭남을 체험할 수 있겠으며,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 이 중요한 비결을 터득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거듭남의 총체적인 진리가 가르쳐지지 않는다. 그것은 극히 표면적이고 반쪽 복음으로만 도배되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거듭남에 대한 진정한 개념을 알지 못한다. 대부분 그저 예수를 믿고 받아들일 때 거듭난 것이고, 그 때 구원을 받은 것이고, 한 번의 거듭남으로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아무도 성경이 말하는 정확한 거듭남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 가서 찬송을 부를 때, 눈물을 흘리고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 느끼는 뜨거운 감정이 거듭남의 증거이고 그것으로 거듭남은 끝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거듭난 이후 생애에 맺혀야 하는 열매나 변화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 후에 마땅히 살아야 하는 거룩한 생활, 성화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거듭남을 까마득한 과거에 한 번쯤 일어났던 어떤 경험 정도로만 생각하고 만족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한번의 거듭남은 영생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치명적인 오류임을 알지 못하고 말이다.  



3) 나는 정말 거듭났을까?

그렇다면 나는 정말 거듭났을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일 때 진정한 회개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먼저 거듭남에 대한 개념을 정리해보자. 어떤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거듭났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왜냐하면 남들에 비해 뜨거운 감정적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 속에 의문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거듭남은 전격적으로 오는 경우도 있지만, 거의 자신이 깨닫지 못하게 일어나는 과정일 때가 더 많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을 예증하기 위하여 바람을 사용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잎사귀와 꽃을 살랑거리게 하면서 바람은 나뭇가지 사이에서 들리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것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것도 이와 같다. 바람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거듭남고 설명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회심의 과정을 확실한 시간이나 장소를 대어 말할 수 없고 그 모든 상황들을 자세히 추적할 수 없다 해서 이것이 회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람과 같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사람의 마음에 끊임없이 역사하고 계신다. 받는 사람이 혹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조금씩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이끌리게 하는 감명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감명들은 언제 어떻게 받을까? 이것은 주님을 명상함으로나 성경을 읽거나 실제로 진리의 말씀을 들음으로 받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성령께서 더욱 직접적인 호소를 하실 때에 그 영혼은 기쁘게 자신을 예수께 바친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갑작스런 회심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오랜 시간 동안 꾸준하고도 지속적인 과정을 거쳐서 호소하고 역사하신 결과이다.

그런데 바람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결과를 드러낸다. 그와 같이 영혼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도 그 구원의 능력을 체험한 모든 사람의 행위 가운데서 나타나 보일 것이다. 내 자신이 거듭났는가를 알아보려면 먼저 자신을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에는 생애가 변화된다. 죄악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행위와는 인연을 끊게 된다.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을 대신한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용모는 하늘의 빛을 반사한다. 아무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손을 보지 못하며 빛이 하늘 조정에서 내려오는 것도 보지 못하지만, 사람이 믿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때에 하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한다. 그 때에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는 것이다.

* 만일 우리가 온전히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옛생애, 옛사상, 옛마음, 옛습관, 옛방식을 완전히 땅에 묻어 장사지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해보며 자신을 깊이 살피는 경험을 하자! 우리는 옛생애에 대해 매일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 예수님 한 분과만 교제하므로 세상과 완전히 연락을 끊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여기고 옛생애를 완전히 청산하였는가? 옛 생애에 대하여서는 사형선고를 내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던져보면 우리는 스스로 거듭난 사람인가 아닌가 알게 되지 않을까?


제2부 거듭남은 지속되어야 한다

제2부 거듭남은 지속되어야 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사도바울이 했던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간증은 거듭남에 대한 기독교의 일반적인 개념을 완전히 뒤집는 말이다. 예수를 믿을 때 한번 거듭나면 구원을 얻는다면 왜 그렇게 훌륭한 사도가 날마다 죽는다고 말했을까?

 

1) 지속적인 장례식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받아들일 때 자신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경험을 한다. 그러나 곧, 그런 전격적인 경험은 그저 예수를 처음 받아들일 때 한번 일어난 경험에 불과한 것으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거듭남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한 번 있었던 경험으로 끝나면 안 된다. 거듭남은 매일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죗된 자아가 매일 죽고 새 피조물로 매일 부활하는 것이다. 거듭남은 옛 생애를 장사지내는 것이다. 그런데 장례식을 한 번만 치르면 안 된다. 한 번의 장사가 아니다! 지속적인 장사이며 지속적인 죽음이 반복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옛 생애에 대해 지속적인 장례식을 치르는 것이다. 계속적인 죽음을 죽는 것이다. 무엇에 대하여 죽는 것인가? 죄에 대하여, 자신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육체의 일을 매일 지속적으로 끊어 버리는 것이다. 육체의 일이 무엇인가?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

 

2) 거듭나도 정욕이 올라오는가?

거듭나도 욕심이 올라오는가? 이것은 흔히 하는 질문이다. 사람이 거듭날 때 육체가 거듭난 것이 아니다. 마음이 거듭난 것이다. 원죄 때문에 우리가 정죄받은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가르침은 기독교에 들어온 큰 오류이다.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짓지 않은 죄 때문에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은 조상의 원죄가 전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렘 31:29~30). 얼마나 정확한 정의인가! 죄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다. 인간 자신이 죄를 짓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조상의 죄가 마치 내가 지은 죄처럼 죄책이나 원죄를 타고나 정죄를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조상의 모든 유전적인 법칙 아래 태어나는 인간은 죄에 대한 연약성과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또한 오래동안 죄에 물들고 세속적인 사고방식과 생애로 살아온 모든 습관과 경향들이 후천적으로 우리 몸 속에 철저하게 배어있다. 그 기억들은 우리의 두뇌 해마에 차곡차곡 쌓여있고, 뇌에 길이 나있어서 그렇게 행하려는 경향과 습관으로 굳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났어도 예전에 행하던대로 기울어지려는 성향이 강하게 형성되있기 때문에 아직도 세속적인 정욕과 욕망이 올라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육신의 성향과 싸우기 위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한 것이다. 거듭난 후에도 우리의 육신적인 자아가 계속적으로 살아나 주장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간증을 매일 실천 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하루만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아니고 매일 매 순간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속에 사셔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 되고, 주님의 사상이, 주님의 마음이 나의 생각과 마음이 되어야 하고, 주님의 뜻만이 나의 생애에서 고스란히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주님과 매일 동행하며 살 때에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내가 죽고 주님이 내 안에 임재하셔서 사실 때에 육체의 일을 끊게 되는 것이다.

 
3) 매일 경험하는 죽음과 부활

거듭남에는 계속적인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계속적인 삶, 새롭게 시작되는 삶이 따라야 한다. 곧 계속적인 죽음과 삶이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죄에 대하여 죽지만, 또한 지속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이다. 즉 죽음과 부활이 함께 가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예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것인데, 한번만 버리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버리며 주님을 따라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존절하게 깨어서 우리 자신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장사지냈다가도 금방 육신이 살아나서 일을 저지르려고 하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면서도, 혈기와 안좋은 성질과 날카로운 말들이 튀어나온다. 자존심, 자만심, 자기애, 자기 자랑, 교만, 이기심, 질투, 분냄과 짜증, 부정적인 감정과 말들이 부지불식간에 튀어 나온다. 그러므로 어제 육신에 대해서 죽었다고 해도 오늘 다시 육신적인 감정과 기질이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이다.



4) 완전히 죽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노라고 주장하는 데도, 그들의 말과 정신과 품행에 전혀 변화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까닭이 무엇일까? 또 자기의 목적과 계획에 대한 반대를 참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품성을 나타내며, 말이 거칠고 거만하고 툭하면 성을 잘 내는 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생애에서 세상 사람들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자기를 사랑하는 일과 이기심과 급한 성미와 성급한 말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처럼 자만하기를 잘하고 선천적인 못된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괴벽한 품성을 자주 나타내는 것을 본다. 그 이유는 그들이 거듭나지 못한 까닭이다. 이런 성품이 생활 속에서 계속 나타나는 것은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만일 자주 넘어진다면, 적어도 넘어지는 그 순간 예수님의 임재를 마음 속에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깨어서 주님의 임재 속에 거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면서 주님께 힘과 능력을 구하며 새로운 삶을 살라고 말한다.

우리는 진짜 완전히 자신에 대해 죽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한번의 장례식을 치르고는 아주 만족해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 나는 옛생애를 다 장례 치렀습니다. 그 장례식은 정말 성대하고 큰 장례식이었지요!” 이것은 틀린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한번의 장례식으로 만족해서는 안되는 삶이다. 지속적으로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서는 계속적으로 사는 것이다. 죽음 후에 오는 부활, 새 삶을 사는 일이 나타나야 한다. 새 생명이 따라야 한다. 죄에 대한 승리, 연속적인, 중단되지 않는 승리가 따라야 하는 것이다.

*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났는가? 아니, 거듭남을 지속하고 있는가? 끊임없이 육신에 대해 죽고 영으로 살고 있는가? 거듭남은 한번만의 경험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매일 새롭게 유지되는 경험이 되어야 한다.

제3부 거듭남을 지속하는 비결

제4부 거듭남을 지속하는 비결


그렇다면 어떻게 거듭남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바울의 말처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는 상황 속에 늘 살고 있는 우리가 말이다. 저 유명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우리의 몸이 재가 되고 욕망과 죄에서 자유로운 영광의 새 몸으로 부활할 때까지 죄와 욕망이 우리 안에 남아 있다”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성경 속에는 우리가 거듭남을 지속하고 육체를 거스려 살 수 있는 비결이 잘 기록되어 있다. 함께 생각해 보자.

 
1) 성령을 따라 걸으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사도 바울은 거듭남을 지속시키는 비결을 이 성경 절 속에 집어넣어 놓았다. 이 성경절을 영어로도 보자. “There is therefore now no condemnation to them which are in Christ Jesus, who walk not after the flesh, but after the Spirit” (킹 제임스 역).

이 성경 절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한국어로 번역할 때 생략된 부분이 영어에는 있다. 정죄함을 받지 않는 이 사람은 그냥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아니라, 현재 육체를 따라 걷지않고 성령을 따라 걷고 있는 자를 가리킨다. 원어에는 현재 진행형으로 쓰여있어서 계속적으로 성령의 음성을 따라 순종하며 함께 동행하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고 권면했다. ‘죄에 대해서 죽었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았다’ 는 의미의 참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안에 죄의 연약성이 계속 존재할지라도, 또한 죄의 유혹이 계속 올지라도, 우리가 죄악의 욕망과 죄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성령을 따라 걷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고도 기록했다. 여기서 ‘행하다’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할라카”(Halakhah) 인데, 이 말은 ‘걸어가다, 살아가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을 따라, 즉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걸어가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할 때에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않게 되며, 거듭남을 지속시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살라


거듭남을 지속시키는 비결은 성령을 따라 걷는 것이며, 또한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삶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그 구절들은 다 동사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의 통치를 받는 삶은 어떤 삶인가?


첫째,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여기서 “행하라”는 동사 헬라어 ‘페리파테오’의 문자적 의미는 ‘동행하다’ 또는 ‘따르다’이다. 바울이 이 동사를 현재형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일회적인 동행이 아니라 날마다 지속되는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명령은 날마다 성령을 따라 살기로 결정해야 할 선택이라는 것이다.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의지의 진정한 힘을 깨달아야 한다. 의지는 사람에게 있는 지배력이며, 결정력이고 선택력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택할 능력을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고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다.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듣고 매 순간 하나님의 편을 선택할 때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 선택에 의해 자아는 죽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게 된다.

 
둘째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이 단어는 성령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야 함을 의미한다.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대로 살아야 한다. 나의 소욕을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이다.


다음은 갈 5:25절을 보자.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이 ‘살다(자오)’, 성령으로 산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중생의 경험이 매일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동사도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중생의 경험이 날마다 갱신되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성령으로 “행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행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16절의 ‘행하다’와 다르다. 이 말의 원어 ‘스토이케오’는 ‘대열을 갖춰 나아가다’, ‘발을 맞추다’, ‘순응하다’라는 뜻의 군사용어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나는 중생의 삶을 계속적으로 살 뿐만 아니라, 성령과 발을 맞추어 성령께 순응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말이다. 그러면 거듭남을 지속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 말씀으로 살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성경은 우리가 거듭난 것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결과로 나타나며, 또한 말씀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한 결과로 지속된다. 말씀이 없으면 우리 자신을 비춰볼 방법이 없고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할 방도도 없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 15:3)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거듭나고 말씀으로 매일 깨끗하게 함을 입어야 한다. 성령에 의하여 거룩한 진리가 마음에 명각될 때 새로운 생각이 일깨워지고 잠자고 있었던 힘들이 분기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주님과 협력하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이다. 씨앗 속에 생명력이 들어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도 생명력이 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그분의 말씀 속에 있는 모든 약속에는 능력 곧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실제로 하나님의 생명과 품성을 받는 것이다. 믿음으로 마음속에 썩지 아니할 말씀의 씨를 받아들이면 반드시 하나님의 품성과 생명이 그 사람의 생애 속에 실현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케 하고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우상으로부터 우리 영혼을 깨끗케 하기 위해 말씀을 매일 상고해야 한다. 신령한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통함으로 유지된다.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하며 마음 가운데 말씀으로 가득 차야 한다. 마음 가운데 신령하게 품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욕망과 정욕을 억제시키며 품성의 모든 결함을 바로잡아 준다. 거듭남을 지속기키는 비결은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4) 기도로 호흡하라

 

우리가 만일 거듭남이 유지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주님과 교제하는 특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주님과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과 대화 할 수 있는 시간을 구별해 가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사람이 호흡이 없으면 살 수 없듯이 영혼도 기도 없이 살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사단의 유혹과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없다. 거듭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육신의 소욕을 이기고 죄를 승리하는 일이 필요하다. 사단의 공격과 죄의 세력을 이기는 힘을 과연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자. 능력의 근원은 하나님 안에 있으며 우리는 기도로 그것을 얻을 수 있다. 믿음의 기도는 우리가 마귀의 모든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무기이다. 하루라도 기도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우리는 늘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야 한다. 진실하고 열렬하게 영혼의 순결을 위하여 간구하라. 마치 육신의 생명이 위기에 놓인 것처럼 간절하고 열렬하게 간구하라. 마음 속에 구원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소원이 생길 때까지, 또한 죄의 용서를 받은 귀중한 증거를 얻을 때까지, 죄를 이길 힘을 얻을 때까지 하나님 앞을 떠나지 말라. 그렇게 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회개의 심령을 주셔서 더 깊은 회개로 나가게 하시며 주님께로 향하는 더 강한 믿음을 주실 것이다.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거듭남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1. 기도의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기도는 마치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우리의 심정을 펴 놓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어떠하다는 것을 하나님께 알리기 위함이 아니요, 우리로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내려오시게 함이 아니요, 우리를 그에게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 기도 하는 일에는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아무 일로든지 기도에 방해를 받지 말도록 하라. 예수님과 우리 심령 사이에 교통이 막히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자. 무엇보다도 은밀한 기도를 등한히 해서는 안 되는데, 기도를 등한히 하면서 영혼이 번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 기도와 공중 기도만으로는 넉넉하지 않다. 홀로 조용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앞에 우리의 심령을 내어 놓아야 한다. 골방에서 뿐만 아리라 매일의 업무를 행할 때에도 마음을 자주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해야 한다.



2. 기도 시간과 장소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기에 부적당한 시간이나 장소는 없다. 거리의 사람이 많은 곳에서나 일에 종사하고 있는 중에서라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마음문을 열어 놓고 예수께서 하늘의 손님으로서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계시기를 청하는 초청을 보내야 한다. 비록 우리의 주위가 부패된 분위기로 둘려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 더러운 공기를 호흡하지 않고 하늘의 깨끗한 공기 가운데서 살 수 있다. 우리는 진정한 기도로 심령을 하나님께로 올림으로 불순한 망상이나 불신성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모든 문을 막을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한다해도 주님을 괴롭게 하거나 피곤케 할 수 없다. 우리들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주님은 자녀들의 요구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으시다. 그의 사랑의 마음은 우리의 슬픈 일을 보거나 그 슬픈 일에 대한 말만 들어도 동정하신다. 마음을 번뇌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 내어 놓자! 그분께서 감당하시기에 과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그는 세계를 붙드시고 우주의 모든 사건을 주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주목하지 않으시는 것은 없고,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그가 풀기에 너무 어려운 것도 없다. 하나님과 각 사람과의 관계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주시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확실하고 개인적이고 완전하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도 허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하늘 찬양대의 우렁찬 찬미 소리 중에서도 가장 연약한 인간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다. 우리가 골방에서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쏟아놓을 때나, 길을 가면서 묵묵히 기도할 때에도, 우리가 올리는 기도의 말이 우주의 임금님의 보좌에 상달된다. 심령의 소원은 거리의 소음과 군중의 소요를 벗어나 하늘 조정에 상달된다. 역경과 시련이 우리를 둘러쌀 때에 우리들은 하나님께 피하며, 힘있게 건져내시고 강하게 구원하시는 주님께 확신을 가지고 기도로써 도움을 구해야 한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필수적인 것이다. 기도는 거듭남을 유지시키는 귀한 비결이다.

 



 

4-거듭남의 증거

제4부 거듭남의 증거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진정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거듭남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 사람의 성품과 생애에 맺히는 열매이다. 마음속에서 진정한 회심의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생애에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될 것이다. 그는 참 포도나무의 가지로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며, 불만과 슬픔이 아니라 “희락”이고, 분냄과 근심과 스스로 지어내는 시험이 아니라 “화평”이다. 그것은 또,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23)이다. 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며, 이 열매가 바로 거듭남의 참 증거가 된다. “그의 열매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열매가 바로 그 사람이다.


 

1) 성령의 열매는 자연스러운 것

 
거듭난 사람은 자신의 선함과 경건을 의식하지 못한다. 물론 거듭남 속에는 자신을 부인하고 옛성향을 부인하는 투쟁과 노력이 따르기는 하지만, 참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의 임재와 성령의 감화 속에 머물러 살기 때문에, 그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무화가 나무가 무화과를 맺고 장미덤불이 장미꽃을 피우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 된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행했다!”는 자부심이나 자각이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성품 속에 성령의 열매와 선한 행실이 나타난다.

 
마지막 심판의 표준은 무엇인가?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심판은 우리의 행위로 받는다. 은혜로 구원을 얻은 그 사람의 생애에 나타난 행위를 보고 정말 그 사람이 천국에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게 되고 심판을 받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하신 양과 염소의 비유는 중요한 교훈을 준다. 오른 편의 양들로 표상된 의인들은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축복의 선언과 함께 칭찬을 듣자 이렇게 대답한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 25:37~39). 왜 그들은 자신이 행한 선한 행위를 기억하지 못할까? 그것은 그 자신이 철저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 선한 행위는 더 이상 그들이 행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 속에 임재해 계신 예수님과 성령의 감화를 따라 행한 결과일 뿐이었다. 또한 그런 선한 행위가 남에게 보이려거나 보상을 바라고 행하는 것이 동기가 아니었고, 다만 그 일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몸에 베인 것이어서, “내가 그렇게 행했다!”라는 자각조차 없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아가 완전히 주 안에서 죽은 사람의 표본이 아니겠는가!

 
반면에 오른 편에 있는 염소로 표상된 악인들의 대답은 어땠는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그들의 대답의 특징을 보면, 그들은 자아가 죽지않고 너무나 살아있으므로 “내가 그렇게 다 했는데요!” 라고 항의한다. 그들은 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한 자각이 뚜렷하다.


거듭남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거듭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거룩한 성령의 능력밖에 없다.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한 그 능력은 생애에 위대한 변화를 초래 하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다른 영혼들에게 언제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이 회개할 때에 그에게는 새로운 도덕적 감각이 생기게 되고 새로운 동기의 힘이 주어지며, 그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형언할 수 없는 감사함이 그의 영혼 안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생애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는 주님을 믿노라고 하는 신앙 고백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면, 우리의 생애는 겸손해지고, 우리의 대화는 거룩해지고, 우리의 행동은 흠이 없어질 것이다. 영생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뿌려지면, 의와 평강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

 

2) 거듭난 사람은 계명을 사랑한다


거듭났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가운데서 기쁨을 찾는다는 것이다. 새로남으로써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됨과 동시에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죄인 속에 일어난 이 위대한 변화는 그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증거가 된다. 사실 거듭난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따금 실수하여 어떤 죄에 빠지고 넘어질 수 있지만, 습관적으로, 의도적으로 짓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럴 수 없는 것이 악한 길을 가거나 계획적인 의도로 좋지 않은 죄를 짓는 것이 싫어져서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증거는 그가 더 이상 죄짓기를 계속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거듭난 사람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의의 종으로 살아간다. 바울은 죄를 의인화하여 다스리는 왕으로 설명했고, 종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주인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영생에 이르는 의를 섬기는 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두 주인의 비유에서 바울은 한 주인을 섬기는 것은 다른 주인에게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거듭난 사람은 매일 양자택일을 하며 주님을 따라간다. 그러나 죄의 통치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죄가 절대 없다거나, 죄와 더 이상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절대 실패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허물과 부족이 삶에 여전히 남아 있을지라도, 죄를 극복하게 해달라는 승리의 약속을 기도로 매일 주장해야 할지라도,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종처럼 지배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개인의 구주로서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바라보고 모방함으로써 모든 일에 있어서 그분에게 이르기까지 자라나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믿음은 계속 자라날 것이며 양심은 성화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행위와 말에서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다. 거룩한 삶을 살기위하여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율법의 표준과 일치시키신다.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전체를 바치는 것이며 마음속에 있는 하늘의 원칙에 마음과 생애를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함을 받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남녀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거듭남을 유지시키는 것은 성화의 생활을 사는 것이다.

성화란 한 순간, 한 시간, 하루의 일이 아니라 필생의 사업이다. 이것은 고양된 행복감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일의 결과이다. 나약하고 때때로 중단되는 노력으로는 잘못들을 바로잡을 수 없고 품성에 개혁을 단행할 수 없다. 오로지 오랜 끈기 있는 노력, 괴로운 훈련, 쓰라린 투쟁에 의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 어느 날에도 우리는 내일 우리의 투쟁이 얼마나 처절하리라는 것을 알 수 없다. 사단이 통치하는 한 우리에게는 복종시켜야 할 자아가 있고 극복해야 할 얽매이게 하는 죄악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계속하는 한 멈추는 데가 없을 것이며, 우리가 도달해서 내가 완전히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없을 것이다. 성화란 필생의 순종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룩한 성화의 길을 기쁨으로 걸을 것이다.

 
영혼 속에 받아들인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의 모든 기능을 일깨워 주신다. 하나님의 성령의 지도 아래서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사람의 마음은 균형 있게 발달하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깨닫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의 사람들이 굳건하고 확고부동한 품성을 가진 사람으로 변모된다. 끊임없이 자신을 바치면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게 되어, 마침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품을 다스릴 수 있는 주인과 같이 된다. 그는 생명을 주는 의의 태양의 능력으로 활기를 띄게 되어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애를 살게 된다. 곧 그 생애에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거듭남의 결과는 이렇게 생애에 나타나게 된다. 얼마나 확실한 증거들인가!

 
끝맺음말

거듭남은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옛 자아가 매일 죽어 장사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매일 매 순간 새 피조물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거듭남이 여러분의 생애에서 지속되고 있습니까? 죽음과 부활이 매일 매 순간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옛 생애에 사형 선고를 내리셨습니까? 옛 자아에 완전히 장례식을 치르셨습니까?

 옛 자아가 죽고 주님과 함께 새롭게 살아가는 삶은 행복한 삶입니다! 다시는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기 싫은 전혀 새롭고 신선한 삶입니다! 이런 변화가 여러분에게 일어났나요?

신비하고 아름다운 거듭남의 비밀을 생애 속에서 계속 이루시는 독자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세계-나비 날개의 놀라운 비밀

나비 날개의 놀라운 비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팔랑거리며 날다가 사뿐이 내려앉는 나비를 보며 아마 한번 쯤은 “아! 예쁘다” 라는 생각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나비들은 1초에 20 번 날개를 흔들어 초속 0.9m 빠르기로 난다고 합니다. 나비 종류에 따라 1초에 5번에서 100번까지 팔랑거리는 것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나비는 몸통에 비해 날개가 크지요? 머리, 가슴, 배로 이어지는 몸통 길이로 크기를 나타내는 곤충들과는 달리 나비의 크기를 말할 때는 날개 양쪽 끝까지의 거리를 가지고 비교합니다.


그런데 나비 날개에서 보이는 그 아름다운 색의 비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나비 날개의 표면에는 비늘이 기왓장처럼 촘촘하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단순한 비늘 같이 보이지만, 10억분의 1의 크기로 볼 수있는 나노기술로 전자현미경을 통해 보면, 날개 표면의 비늘(Scale)들은 마치 규칙적인 배열을 하고 있는 꽃잎과 같다고 합니다. 이 Scale 하나의 크기가 100um (micrometer)이라고 하는데, scale의 단면을 전자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면, 높이 2um 정도의 눈에 보이지 않을만큼의 얇은 막이 여러 개가 세로로 빽빽이 세워져 있어 마치 빽빽한 ‘ridge’(산등성이)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각 ridge들은 주름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각 주름의 너비는 수십 나노 정도에 지나지 않는 아주 정교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날개가 태양빛을 받아들이면, 비누방울의 막처럼 얇은 여러 개의 막에 따른 빛의 회절로 특유의 색상을 냅니다. 그 특별한 색은 구조색(structural color)이라고 불리우는데, 색소가 없어도 나비 날개에 있는 그 정교하고 독특한 나노구조로만으로도 빛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회절 각도에 따라 특정한 파장의 빛이 반사되어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상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빛이 날개 표면의 구조에 닿으면 일부는 반사되고 일부는 통과하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나비의 날개는 아주 훌륭한 방수역활도 한다고 합니다. 나비의 날개 능선에 동일한 간격으로 나 있는 작은 혹들은 물이 표면에서 머무는 시간을 감소시켜서 물을 더 잘 격퇴시킨다고 합니다. 이 능선들은 정확한 크기를 가지고 있고 물방울을 작은 구슬로 조각내어 빠르게 흩어버립니다.


이렇게 작은 미물인 나비 날개에 이렇게 아름다운 비밀이 숨어있다니 정말 놀랍지요? 작은 나비에게 아름다운 색을 띠고 방수 기능도 갖춘 날개를 달아주신 섬세한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도 아시고 돌보시지 않을까요?

척추를 알면 건강이 보인다 3

몸의 대들보-척추

척추는 우리 몸의 대들보인데, 움직이는 대들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움직이는 동물이기 때문에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척추가 건강해야 한다.

첫째 척추가 건강해야 하고 또 척추를 붙잡아주고 있는 인대, 근, 근육들도 건강해야 한다.그런데 척추가 건강하다는 뜻은, 척추의 골밀도가 정상을 유지하는 것이고, 또한 척추의 위치나 각도가 정상으로 유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골다공증
우리 몸의 대들보 혹은 기둥인 척추 안에는 인체의 모든 기관을 총괄해주는 척추 신경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척추의 위치나 변형 그리고 골밀도에 따라 인체에 큰 지장을 초래될 수 있다.
나이가 젊을 때는 척추와 중요한 뼈들의 골밀도가 대부분 정상이지만, 나이가 들어 뼈에 있던 칼슘이 빠져나가면 골다공증을 유발 시키는 원인이 된다. 골다공증의 주요 원인은 칼슘 및 비타민 결핍이지만, 또한 유전적 요인, 트라우마, 홀몬의 변화 등도 영향을 준다. 그리고 노화 혹은 생활 습관에 따라 뼈의 내부 미세 구조가 분해되기 시작 하면서 골밀도와 지지력이 줄어들게 된다.
보통 시작은 엉덩이나 척추에서 시작 되지만 다른 골격 구조에서 시작 될 수도 있다. 골다공증은 노인들에게서 흔히 나타나지만 나쁜 습관, 몸에 독소가 쌓이는 경우 조기에 나타날 수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조기에는 심각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합병증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리 미리 뼈를 관리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수 있다. 튼튼한 뼈, 즉 골밀도가 정상인 뼈를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것 여러가지 중에 특별히 몇가지만 강조 하고자 한다.



튼튼한 뼈를 위해 필요한 것

1. 비타민 D 흡수
 비타민 D 는 뼈의 골절 및 석회화 예방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양소로서, 뼈의 칼슘을 계속 공급하고 장에서 무기질이 흡수 될수 있도록 도와줄뿐 아니라 소변을 통해 무기질이 너무 많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작용한다.
아무리 우리 몸, 특히 뼈에 필요한 칼슘을 많이 먹더라도 우리 몸에 비타민 D 가 결핍하면 뼈에 칼슘을 공급해 줄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칼슘이 많이 들어있는 음식을 섭취 하는 것 이상으로 비타민 D의 섭취 또한 아주 중요하다. 비타민 D 는 햇빛을 통해 우리몸에 흡수가 되는데, 하루에 20분 정도 일광욕을 해 주면 우리 몸에 충분한 비타민 D 를 섭취 할수 있다. 요즘 햇빛속에 자외선 등을 걱정해서 일광욕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얼굴을 제외한 몸의 일부를 햇빛에 쪼여 비타민 D 의 흡수를 권장하는 바이다.


2. 바른자세
척추의 정상적인 위치나 각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른 자세가 필수적이다. 척추가 곧바른 수직의 상태에서 벗어나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휘거나 S 자로 휘는 척추 측만증이 되면, 척추의 각도가 정상적인 각도에서 벗어나게 되어 척추 전반에 걸쳐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누적이 될 경우 뼈와 주위에 있는 인대, 건 그리고 근육에 부상 및 약화를 유발 할 수 있다. 따라서 앉아있는 자세, 걷는 자세 그리고 잠 자는 자세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 해야 한다. 늘 바른 자세를 유지하도록 하자.


3. 규칙적인 운동
운동은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식사 시간을 지키듯이 운동도 시간을 정해서 하는것이 매우 중요하다. 척추는 26개의 뼈와 주위의 인대와 근육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운동을 하지 않거나 가만히 있으면 굳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때문에 시간을 정해서 운동하거나 움직여 주어야 한다. 하루에 30분 이상 걸어주거나 매 50분마다 5분 혹 10분정도 일어나서 걷거나 스트레치 운동을 해 주는 것이 건강한 척추와 뼈 조직을 유지해 주는 최선의 방법이다.


4. 좌골신경이 눌리지 않게 하라
대부분 남자들은 두둑한 지갑을 오른쪽이나 왼쪽 뒷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경향이 있는데, 그럴 경우 두 가지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지갑이 들어있는 쪽에 엉덩이가 들리게 되고,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이 되면 골반의 위치에 변형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척추 측만증을 유발하게 되고 골반과 요추 부근에 원치않는 통증이나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지갑 자체가 좌골 신경이 통과하는 부위를 눌러서 좌골 신경통을 유발할 가능성을 높혀준다.
그렇기 때문에 지갑은 뒷 주머니에 넣지 말고 앞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을 장려한다.


5. 충분한 물을 마셔라
지난 호에도 강조 했듯이 건강한 척추, 혹은 척추의 부상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루에 8잔에서 10잔의 물을 섭취해 주어야 한다. 특히 물은 모든 뼈와 근육조직의 활동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게 도와주는데, 척추와 인대 그리고 근육속에 수분의 양에 따라서 부상의 가부가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상을 빨리 회복하는 요령

1. 얼음 요법
목이나 허리등 몸의 어느 부분에 순간적으로 통증을 느끼거나 불편을 느꼈을 때 즉시 얼음을 갖다댄다. 24시간동안 4번정도 반복한다. 얼음대신 뜨거운 물 주머니를 대는 방법은 좋지 않은 방법이다. 근육에 통증이 있다함은 근육이 파열되어서 염증, 쉽게 말해서 근육에 불이 붙었다는 뜻인데, 즉시로 뜨거운 물주머니를 대주면 불 붙은곳에 휘발유를 뿌리는 것과 같다.
운동 경기에서 선수들이 부상당해서 쓰러졌을 때, 제일 먼저 그 상처 부위에 얼음 주머니를 대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무거운 것을 들다가 또는 허리를 삐끗해서 통증을 느끼면 즉시로 얼음주머니를 부위에 대주어야 한다. 첫 24시간동안은 얼음주머니만 대주고, 24시간이 지난 후부터는 뜨거운 물 주머니 10분 정도, 그리고 즉시로 찬 얼음 주머니 3분~5분정도 대주는 것을 3일 정도 하라. 그 이후에는 뜨거운 물 주머니를 계속해서 대어 줌으로써 혈액 순환을 증가시켜 찢어진 근육을 빨리 회복 시켜주면 된다.


2. 물 요법
하루 물 섭취량을 8잔에서 12잔으로 올린다. 일단 통증이나 움직임의 불편함이 없어질 때까지 많은 양의 물을 계속 마셔줘야 한다. 일단 모든 증상들이 정상화 되더라도 하루 최소 8잔의 물을 마셔줘야 건강한 근육들을 유지 할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것이다.


3. 냉 온수 요법
일주일 동안 다친 부위가 재발 되지 않도록 주의 하면서 얼음찜질 그리고 뜨거운 물찜질을 해주면 왠만한 부상은 회복이 가능하다.
통증이 없어지고 몸의 움직임이 가능해지면 하루에 30분 이상 걸어준다. 걷게 되면 골반이 움직이게 되고, 골반이 움직일 때 마다 모든 척추뼈들이 움직이게 되고, 척추 뼈들이 움직일때마다 그 주위에 인대와 근육들이 움직이게 되어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한다.


4. 스트레칭
하루에 최소 10분이상 근육 스트레치 운동을 해야 한다. 목을 천천히 앞으로 숙였다가 뒤로 제키는 운동 5번, 앞을 똑바로 쳐다 보면서 고개를 좌우 옆으로 숙이는 운동 5번,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보는 운동 5번, 그리고 천천히 360도 원을 그리면서 고개를 왼쪽으로 5번, 그리고 오른쪽으로 5번 해준다. 허리도 목처럼 같은 동작을 5번씩 해주면 척추 주위의 모든 근육들이 충분한 이완과 수축작용을 하므로 부상을 예방할 수 있게 해준다.


성령의 전이 되는 우리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자!

진리의 가장 큰 논증-그리스도인 가정

진리의 가장 큰 논증-그리스도인 가정

원대한 감화력
가족들이 품위 있고 예모 있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선을 위하여 원대한 감화를 발휘한다. 다른 가정들은 그런 가정이 도달한 결과를 주목할 것이요 또한 그들의 모본을 따를 것이며 그들도 차례가 되면 그들의 가정을 사단의 감화로부터 보호할 것이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이 통치하는 가정을 종종 방문할 것이다. 그런 가정은 거룩한 은혜의 능력 아래서 피곤하고 싫증난 순례자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곳이 된다. 주의 깊은 경계로 말미암아 자아를 주장하는 일은 없게 되고 올바른 습관들이 형성되어 남의 권리를 인식하는 조심성이 생긴다. 사랑으로 역사하며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믿음이 키를 잡고 온 집안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형제간의 원칙은 그런 가정의 거룩한 감화 아래서 더욱 널리 인식되고 준행된다.
믿지 않는 사회에서 하나의 가정이 예수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읽는 바 산 편지가 되도록 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 사명은 두려운 책임을 내포한다.


가장 큰 설교
질서 정연하고 잘 훈련된 가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설교보다도 그리스도교를 더욱 많이 증거한다. 그런 가정은 부모들이 하나님의 교훈을 따르는 데 성공적이었다는 것과 또한 자녀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는 증거를 보여 준다. 그들의 감화는 자라날 것이니 이는 그들이 남에게 나눠 주면, 받은 이들이 또한 남에게 나눠 주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정에서 받은 교훈을 남에게 전하여 줄 조력자를 그들의 자녀 중에서 찾아낸다. 이웃들은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이생과 영원한 세상을 위하여 부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온 가족은 주를 섬기는 일에 종사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경건한 모본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양 무리, 곧 하나님의 아름다운 양 무리와 함세 살면서 하나님께 신실하고 참되게 살도록 감명을 받는다.


그리스도인 가정을 입증하는 가장 효과적인 시금석은 가정의 감화로 말미암아 형성되는 품성의 모본이다. 행위는 경건에 대한 가장 정확한 고백보다도 더욱 크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일은 다른 가정에 감화를 끼칠 수 있도록 우리의 자녀들과 가족들로 어떤 덕성들을 소유할 수 있게 가르칠 수 있는가를 깨닫는 일이다. 그리하므로 우리는 비록 교단에 서는 일이 없다 할지라도 교육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질서 있고 훈련된 가정은 정금보다도, 오빌의 순금보다도 진귀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감화를 끼치고 있는가?
우리 중에 아무라도 세상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그런 방법으로 살 수는 없다. 가족 중에 아무도 다른 가족이 자신의 감화나 정신을 느끼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 속에 봉해 둘 수는 없다. 바로 얼굴의 표정 자체가 선악간에 감화를 갖는다. 그의 정신, 그의 언어, 그의 행동, 남들에 대한 그의 태도, 이런 것들은 명백한 것이다. 만일 이기주의로 사는 사람이면 말라리아 열병과 같은 독기로 자신의 심령을 두를 것이요 만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면 다른 이들의 감정을 위하여 예모와 친절과 부드러운 호의를 나타내는 동시에 그와 교제하는 이들로 더불어 사랑과 친절과 기분 좋은 유쾌한 감정으로 사귈 것이다. 그것이 그가 예수님을 위하여 살고, 날마다 예수님의 발 아래서 가르침을 받으며, 그분의 빛과 화평을 받고 있음을 명백히 나타낼 것이다. 그는 능히 여호와께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