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랑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 가장 많이 강조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그렇기에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그 유명한 “사랑 장” 을 썼으며, 성격이 급하여 우뢰의 아들이라고 불리었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된 사랑의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에 “사랑” 에 대해 더 덧붙일 수 없을 만큼 훌륭하게 묘사해 놓지 않았던가!

가지고 싶은 하나님의 사랑

많은 사람은 사랑하고 있다. 아니 적어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또는 남편과 아내를, 아니면 부모와 자식을... 더 나아가서는 형제와 이웃을...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사랑은 너무 피상적일 때가 많은 것 같다. 어찌보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 조차 부끄러운 그런 얄팍한 사랑을 우리는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넓은 가슴에서 활화산처럼 끝없이 솟아나는 뜨거운 사랑에 비해, 흔히 우리들이 주고 받는 사랑이란 네가 한웅큼 주면 나도 다가가 한웅큼 베푸는, 극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작고 옹졸한 사랑인 것을 깨달을 때가 많다.
용서하고 용서해도 또 용서할 수 있고, 상대방이 이해를 구하기 전에 먼저 이해할 수 있으며, 상처를 받아도 마음에 두거나 보복하지 않고, 절망적인 것에서 소망을 발견하며, 의심없이 믿어주고 신뢰하며, 그리고 무한히 쏟아 부어도 한없이 솟아 나오는,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그런 사랑을 갖기를 그렇게도 소원하건만!... 그러나 어쩌랴! 마음은 원이로되 타고난 것이 그것 뿐인 우리의 작은 손바닥만한 사랑을...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랑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한다. 그리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랑!”... 그것은 어떤 사랑일까? 아무리 상처와 해를 당한다 해도, 아무리 손해를 본다 해도 분노하거나 섭섭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해 아무 악한 추측이나 생각도 하지 않고, 그것을 악한 동기로 비약하거나 오해하지 않고, 잠잠히 믿어주는 사랑... 아마도 이런 사랑이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랑”이 아닐까? 아무리 의심과 불신의 물결이 몰려오더라도, 아무리 그 동기와 의도에 대해 의심하며 불평하고픈 욕망이 생기더라도,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 이런 것이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랑”이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 주님께서 한번이라도 잘못을 범한 우리들을 야단치시거나, 심한 비평이나 의심을 품고 대하신 적이 있으신가?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약점들을 참작하시고 이해하시며, 모든 부족한 점을 아시고 오래 참으신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체질을 가졌는지를 다 아시는 우리의 주님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마음

우리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의 동기를 항상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좋은 뜻으로, 선한 동기로 해석하기를 주저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 일어났을 때, 실제로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도 자기가 모욕과 경멸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랑”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며, 그 마음이 은혜로 부드러워지지 않았고, 또 자아가 죽지도 않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필요 이상으로 과민 반응을 나타낸다.
이렇게 은혜로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은, 항상 자신을 너무 예민하게 만들어 주위 사람들과 자주 충돌을 일으키며, 조금만 남과 부딪혀도 쉽게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 스스로를 주위와 격리시킨 채, 불행이라는 단단한 껍질 속에 자신을 가두고 몇 날을 어두움속에서 지내게 한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랑”으로 채워진 마음은 자기에게 가해질 수 있는 무례함이나 불공평함을 살피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 속에 섭섭함과 오해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려는 그 때, 사단이 가져다 주는 그런 모든 자극과 불행한 암시들을 차단해 버리기 위해 그런 것으로부터 눈과 귀와 마음 문을 닫아버리기를 원하신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랑”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린다. 성경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을 왕이나 정복자보다 더 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다만 화를 참거나 분노하지 않는 것보다 더 넓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생각과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동기를 좋지 않게 해석하고 싶은 생각, 끝없이 불평하고 싶은 생각, 섭섭함에 또 다른 섭섭함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도록 허용하고 싶은 욕망, 또 어떤 것에 대해 “악한 추측”을 계속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날 때, 그런 생각과 욕망을 조용히 접고, 잠잠히 주님께 굴복하며, 마음 속에 주시는 성령의 목소리에 주의 깊게 귀를 귀울이는 것... 이것이 마음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무엇인가로 차 있다. 그것은 선한 것이나 악한 것, 둘 중에 하나로 점령되도록 되어 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일반적이고 평범한 문제들로만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연단해야 하고, 마음의 허리를 동임으로써 생각이 바르게 지향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들은 반드시 지배 되어야 한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 것이나 붙잡으려고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뻗어가는 포도 덩쿨과 같다. 이 훈련받지 못하고 아무 방향이나 맘대로 뻗쳐가도록 내버려진 덩굴손들은 손에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붙잡는다. 만일 포도 덩굴이 쓸모있게 되려면, 이 덩굴손들이 먼저 그 붙잡고 있던 쓸데없는 것들에서 잘리워 져서 그것들을 우아하고 균형잡히게 해 줄 만한 것에 매어져야 한다.

그것처럼 만일 우리가 타고난 자연적이고 이기적인 마음대로, 그냥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도록 방치된다면, 고상한 동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려는 마음없이 마구 행동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자연적으로 타락되었음과 또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올바른 길을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늘 올바른 생각과 명상을 가지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안에 머무르도록 훈련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진실한 노력과 우리 자신이 미칠 수 없는 큰 힘, 곧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우리의 마음을 헛되고 천박한 것에서 비우고, 그 공백을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기다리는 아름다운 생각들로 채우자! 우리의 생각과 상상력을 지배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면서...

위로부터 받는 사랑

때때로 생각해본다. 받아서 주는 것이 아닌,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아닌, 이해받았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이 아닌, 조건없이 주는 사랑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을까 하고...
못마땅해도 마음을 활짝 열어 품어주는 너그러운 사랑, 한없이 사랑하고도 또 사랑할 수 있는 사랑, 그렇게 섭섭하게 했는데도 미워하지 않고 담담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랑, 베푼 사랑에 배반으로 갚은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자비로운 사랑... 정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아가페적인 사랑을 우리 가정 안에서, 아니 우리 형제와 이웃에게 베풀기를 요구하시는 걸까 하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랑”... 속을 줄 알면서도 믿어주는 사랑, 늘 손해만 보는, 어찌보면 어리숙하고 바보같은 사랑, 거의 무조건적으로 신뢰해 주는 순진한 사랑... 그런 사랑을 가진 사람이 주위에 한명 만이라도 있다면 우리 주위는 얼마나 훈훈해 질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기적 같은 사랑을 보려고 천사들은 우리 주위에 얼마나 서성거리게 될까?
우리는 사랑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아니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사랑은 남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 사랑의 화신인 예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매일 부어지기 전에는... 그리고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을 흔들기 전에는...

우리는 때로 우리가 가진 작은 사랑을 보며 자신에 대해 실망할 때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우리가 싫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를 향해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리고 오늘도 그런 크나큰 사랑을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쏟아부어 주시기에, 그리고 나누어 주시는 그 사랑을 통해 불가능한 것들을 이루게하시는 기적이 오늘도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사랑하고, 용서하고, 웃고, 미소지며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리라!...
 

권두언


강병국 목사

음악은 현대인의 일상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 요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모든 일들에서 음악은 그 뒷배경에 깔려 있으며 또한 모든 방송의 프로그램들에 엮어져 있어서 항상 들으며 지내야 하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음악은 우리의 종교 생활에 있어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입니다. 음악이 없는 예배 행사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찬양과 노래가 들어있지 않은 예배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음악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깊숙이 들어 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번쯤은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종교 생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음악을 사단이 공격하지 않고 가만히 놓아 둘 리가 있을까요? 물론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마귀는 교회 음악을 이용하여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려고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부르는 음악들, 찬송가들을 연주하고 노래하는 그 박자들과 형식들에서 사단은 크게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음악은 우리의 정서와 판단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동물들과 식물들에게도 음악을 틀어주므로 성장에 도움을 주게 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꽤 오래 전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터입니다. 음악은 우리가 느끼고 감응하며 심지어는 우리의 판단력에 영향을 미치게 만드는 막강한 매개체 입니다. 그래서 백화점들이나 쇼핑쎈타들에서도 고객들의 구매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음악들을 틀어 주려고 많은 연구들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오늘날 현대 교회의 음악들이 유행가나 팝송의 흐름과 분간하기가 어려운 형태로 돌변해 가고 있는 실정을 목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또한 이러한 교회 음악의 변화가 과연 우리 신앙 생활에 어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일까요? 어떠한 종류의 음악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가장 적합한 것일까요? 이 중요한 문제를 이번 호가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책은 마음의 양식” 이라는 말이 있다. 신체와 마찬가지로 마음과 정신도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에서 힘을 얻는다. 정신은 우리가 집어 넣어주는 것에 따라 고상하게 되기도 하고, 저속하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에 도덕적, 지적 힘들을 많이 배양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고상한 힘들은 좋은 서적을 많이 읽음으로 강화된다. 때때로 강하고 건전하던 정신력이 독서의 방종으로 균형을 잃고 부분적으로 감각을 잃게 되었거나 편파적으로 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사상을 가진 서적들로 우리의 정신을 먹인 결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들의 영성을 강하게 하지 못할 헛된 서적을 읽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생각을 왜곡시켜 나쁜 감정을 갖게 하고, 우리들의 정신을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하여 예수님과 그분의 귀중한 교훈들을 전보다 적게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정신력에 힘을 주지 못하는 쓸데없는 이야기로 마음을 번거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상은 마음에 공급된 양식과 동일한 성격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책을 선택해 주자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기의 자녀가 신앙있고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나 주기를 바란다. 만일 그렇다면, 부모들은 먼저 선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 모든 좋지 않은 감화력을 가정에서 몰아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특별히 자라나는 시기에 있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이해력이 넓어져가는 아이들은 지식을 갈망하게 되어 있으므로, 대부분의 아이들과 청소년들은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는 경향이 있다. 그런 자녀를 가진 부모들은 자녀들의 독서 의욕을 자제시켜야 하며, 자녀들의 독서하는 습관들을 통제하고 좋은 책들을 선택해 주어야 한다.
아이들은 만일 누군가 그들을 위하여 읽을 것들을 선택해 주지 않는다면, 그들 자신이 읽을 것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들 자신이 먼저 좋은 지식들을 자기의 마음과 정신에 채우며, 그 분야에 대한 좋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 자녀들에게 바람직한 충고를 줄 수 있고, 그들의 정신에 건전한 양식을 줄 수 있게 된다.

이런 책은 어떨까?

1. 신화와 동화들 - 오늘날에는 아동과 청소년의 교육에 있어서 동화나 신화나 지어낸 이야기가 크게 사용되고 있다. 요즈음 독서계를 강타하는 이야기들이나 영화로 되어 나온 이야기들을 보면, 많은 경우에 거짓된 상상이나 강신술(spiritualism), 또는 사단의 마술이나 심령술 등에 깊은 연관을 가진 이야기들이 많으며, 이런 거짓된 사상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현상이다.
만일 어린이들이 사실이 아닌 만들어낸 이야기(Fiction) 에 너무 흥미를 가지게 되면, 쓸데없는 공상이나 상상을 많이 하게 되며, 현실에 잘 적응을 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신화나 동화 이야기는, 현 생활에 필요되는 어려움을 견뎌내는 인내라든가, 자신의 마음을 제어하는 자제나 극기, 절제 같은 것은 다루지 않고, 오히려 고난을 견뎌내기보다는 요술이나 마술을 통해 모든 것을 쉽게 해결하거나, 어려운 일이나 난관을 헤쳐나가는 대신 상상을 통해 이런 일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안일하고 게으른 사상이 형성되도록 만드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야기에는 모든 것들이 현실과는 달리 아름답고 평탄하고 멋있게 그려져 있기 때문에, 어려서 이야기책이나 동화를 많이 읽었거나, 소설이나 드라마를 많이 본 사람들은 그 이야기와 현실간의 간격에 조화를 이루지 못하므로 비현실적이고 실제적이지 못한 병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그리고 이런 실화가 아닌 꾸며낸 이야기들을 많이 읽은 아이들은 인내하지 못하며, 정신이 약하고 진실되지 못하게 되기 쉽다.
어린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많이 읽히면 상상력이 풍부해지므로 이것을 권장하는 부모가 많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자라면서 자기가 읽은 이야기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거짓말을 배우게 된다고 어떤 교육가는 말한다. 동화책들은 인생에 관한 거짓 견해를 가르치고 실지로는 있을 수 없는 사물에 대한 욕망을 갖게 하고 또 길러 주므로 그렇게 권장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2. 소설, 연애 소설, 신문 소설 - 청소년들은 소설이나 연애 소설을 즐겨 읽는다. 청소년들이 연애 이야기나 신문소설들을 자꾸 즐기게 되면 교훈적인 의미를 주는 교양 서적들은 점점 구미에 맞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선정적인 소설들을 자꾸 읽으면 그것은 잘못되고 건전치 못한 흥분을 생기게 하며, 상상력을 흥분시키고 마음을 유용성에 부적당하게 하여, 정신적으로 또 모든 영적 활동에 무능력하게 만든다.
지나치게 긴장되고 자극적으로 꾸며낸 이야기들을 많이 읽으면, 현실의 생활이 지루하고 싫증나게 느껴지기 쉬우며, 생애의 엄숙한 문제들에 써야 할 많은 시간과 모든 능력과 자아 훈련을 빼앗기게 되므로 정신과 마음이 건전한 사람이 되기 어렵다. 경박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읽은 사람들은 실제 생활의 의무들에 부적당하게 된다.
또한 자극적인 독서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불안과 공상에 빠지도록 만든다. 그것은 그들을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사는 사람으로 변하게 한다. 그들은 집에서나 밖에서나 불안해 하고 공상에 잠기고 저속한 주제 외에는 이야기할 줄을 모른다. 자극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욕망이 배양되었으므로, 정신적 미각은 왜곡되고 그 마음은 해로운 음식물을 먹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한다. 좋지 않은 독서에 방종하는 습관은 마치 먹고 마시는 데 방종하는 습관이 신체에 끼치는 것과 같은 영향을 뇌에 끼친다.

3. 신앙심이 없는 저자들이 쓴 책 -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심이 없는 저자의 책을 읽는 것을 삼가해야 하며, 아이들에게도 책을 골라 줄 때 저자가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잘 살펴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신앙이 없는 저자들이 쓴 글에는 무신론적인 사상이나 진리와 부합되지 않는 사상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책들에 아무리 멋있는 철학이 들었다 할지라도 그런 것들을 읽으면서 마음이 위태롭게 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 신앙심 없는 주인공들의 행동과 사상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받게 되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자가 취급하고 있는 주제에 주의가 사로잡히고 흥미가 일깨워진다. 그리하여 문구들이 기억 속에 새겨지고 사상들은 저자의 정신에 의하여 영향을 받으며 마음과 품격은 신앙적이지 못한 감명을 받는다.
그런 책들은 마음을 기도와 영적 사물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차차 멀어지게 하며, 신앙적인 힘을 빼앗아 간다.

어떤 책이 좋을까?

1. 본받고 싶은 인물의 자서전들 - 이 세상에는 사회의 복지와 인간을 위해 훌륭한 봉사의 생애를 산 위인들의 실화들이 있다. 고상하고 위대한 삶을 산 위인들의 전대기를 읽음으로 우리의 삶의 질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또한 어린이들은 훌륭한 사람들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를 읽음으로 자신이 본받고 싶은 이상형의 상을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2. 선교사들의 이야기 -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목적과 신앙에 좋은 영향을 주는 훌륭한 선교사들의 일생의 이야기나 경험에 대한 책을 읽음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신앙을 위해 바친 그들의 고귀한 삶의 이야기는 우리로 더욱 인류를 위해 봉사하며 하나님께 충성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3. 될 수 있으면 실화를 읽으라 - 우리 자신이나 아이들에게도 꾸며낸 이야기(Fiction) 보다는 실제로 일어났던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히는 것이 좋다.
4. 위대한 신앙의 개혁자나 순교자의 이야기 - 교회 안에 있던 개혁자들이나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신앙 생활에 많은 감동과 도움을 줄 것이다.

책 중의 책 성경

성경은 책 중의 책이다. 성경에는 일찍이 기록된 어느 책보다 가장 흥미롭고 교훈적인 역사와 전기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성경에는 현세와 내세에서 적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깨달아야 할 모든 원칙들이 포함되어 있다. 누구나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단 한 절을 읽더라도 거기서 유익한 사상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가끔씩 하는 연구나 단편적인 연구로는 성경의 가장 귀중한 교훈을 배울 수가 없다. 성경을 급히 또는 부주의하게 읽는 사람에게는 성경의 큰 진리의 체계가 깨우쳐지지 않는다. 진리의 보화는 대부분 깊이 파묻혀져 있으므로, 열심 있는 탐구와 끊임없는 노력으로써만 이를 얻을 수 있다.
성경을 올바로 연구하려면, 우리는 진리들을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사 28:10)씩 찾아내어 모음으로써 하나로 크게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찾아지고 모아진 진리는 서로 완전하게 조화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4복음은 서로 부족한 것을 보완하고 있으며, 모든 예언들은 서로 다른 예언들을 설명하고, 모든 진리들은 다른 어떤 진리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일상의 평범한 일에만 마음을 쓰게 되면 지능이 계발되지 못하고 떨어진다. 지능의 퇴화를 막고 그 발달을 촉진하는 일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성경이 하는 일

성경 전체를 통해 흐르는 주제의 위대성과 단순하지만 위엄 있는 말씀, 그리고 비유의 아름다움은 다른 것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 즉 사람의 사상을 일깨우고 향상시키는 일을 한다. 성경은 광범위한 문체와 논제를 가지고 있어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이끌며 각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성경의 페이지들에서는 가장 오랜 역사, 가장 진실한 생애를 산 사람들의 전기, 그리고 국가를 통치하고 가족을 다스리는 원칙들, 곧 사람의 지혜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탁월한 원칙들을 볼 수 있다. 성경에는 가장 심오한 철학, 가장 아름답고 숭고하고 감격적이며 참으로 감상적인 시가 담겨 있다.
그러나 성경 전체 가운데 논의된 가장 중요한 중심 주제는 구속의 경륜이며, 이 구속의 경륜은 사람의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는 일이다.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기회 있는 대로 열심히 읽으면 성경의 풍성한 보배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사상은 고상해지며, 인류에게 좋은 감화를 끼치는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성경을 연구하면 할 수록 성경은 더욱 아름답게 보일 것이며, 쓸데없는 독서에 대한 미각은 줄어들 것이다. 이 귀중한 책을 우리들의 마음에 묶어두자. 분명히 그것은 우리의 친구와 안내자가 될 것이다.

마음의 통로를 잘 수호하자

현인 솔로몬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애의 순결을 찾는 일은 헛일이 될 것이다.
사단의 계책에 빠지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영혼의 통로를 잘 지켜야 한다. 불순한 생각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것을 읽고, 보고, 듣는 일을 피하여야 한다. 영혼의 원수가 암시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되는 대로 방황하도록 마음을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3-15)고 말하였다.
이 일에는 열렬한 기도와 끊임없는 경계가 요구될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향상시키고 마음 속에 순결하고 거룩한 사물을 항상 생각하게 할, 거룩한 성령의 끊임없는 감화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9, 11)라고 말하였다.
마음에 늘 좋은 양식을 먹이자. 먹는 대로 우리의 정신은 꼴지어질 것이다.

 

우울증으로 고생하시나요?


과학과 문화가 발달하면 발달할 수록 인간의 삶은 편안해 지기는커녕 더 복잡해지는 것 같다. 왜냐하면 빠르게 변해가는 문명과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나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 사회는 인간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가져다주며, 그로 인해 많은 질병이 초래되는데, 특히 요즈음에는 정신적인 질병, 즉 우울증이나 정신분열증 같은 병들이 아무 연령층을 막론하고 많이 발생하고 있다. 얼마전 미국 잡지 타임스에는 미국 청소년들 중 반 이상이 정신병적인 증상을 가지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 중에는 우울증도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우울증은 정신 건강에 매우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이것은 계층이나 문화적인 영역이나 나이를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질병이다. 심지어는 가장 활달하고 밝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야 할 청소년층에서도 요즈음 만성적인 우울증이 빠른 속도로 증가되고 있는 것을 본다.

우울증에 대해

우울증은 마음이 계속적인 침울함과 슬픈 상태에 빠져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에도 미친다. 만성적인 우울증에 빠지면, 저항력이 떨어지게 되며, 당뇨병, 비만과 같은 합병증으로 고통당하게 된다.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은 평범한 감기와 독감에 쉽게 걸리며, 병이나 사고로 인한 부상으로부터 회복되는데에도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애 가운데 단기간의 우울증에 걸렸던 경험이 적어도 한번 이상씩은 있다. 배우자의 죽음, 이혼 또는 가정이나 직장에서 받게 되는 지속적인 스트레스는 장기간의 우울증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인 요소들이다. 우울증을 일으키는 요소들은 다양하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정신적으로 선택한 결과 때문에 발병되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과 호르몬

우리 인간들은 밤에는 자고 낮에는 활동한다. 즉, 리듬과 주기에 따라 생활한다. 이 반복되는 생체리듬 뒤에는 멜라토닌과 세라토닌이라는 중요한 호르몬이 작용하고 있다. 멜라토닌은 해가 지면 분비되어 잠을 편하게 자도록 하는 반면, 세라토닌은 해가 뜨면 분비되어 안정적으로 낮시간에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호르몬이다. 이 호르몬들은 뇌신경세포 속에서 분비되는데 뇌신경세포 속에는 이들 호르몬을 생산해내는
멜라토닌 생산유전자와 세라토닌 생산유전자가 있다.
과학자들은 이들 호르몬이 분비되기 위해서는 호르몬을 생산하는 유전자가 켜졌다가 꺼지는 과정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해가 지면, 세라토닌 생산유전자는 꺼지고 멜라토닌 생산유전자가가 켜지며, 해가 뜨면 반대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시차가 다른 나라로 여행할 때 시차적응이 안되는 것도 바로 이 호르몬 분비체계가 일시적으로 혼란을 겪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호르몬 생산유전자가 잘못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자고 싶어도 밤에 멜라토닌이 나와주지 않으면 불면증에 걸리게 되고, 아무리 편안한 마음을 갖고 싶어도 세라토닌이 나와주지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또 이것이 너무 과하게 분비되면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자거나 기분이 가라앉게 된다.
우울증은 세라토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세라토닌은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호르몬이다. 이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우울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왜 세라토닌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을까? 세라토닌 생산유전자가 비활성화돼 더이상 호르몬을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비활성화된다는 것은 사용하지 않아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늘 불안해하고 걱정하면서 사는 사람에게 세라토닌이 필요할까?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일이 오래 지속되면 세라토닌 대신 스트레스 호르몬만 활발하게 분비된다. 세라토닌이 분비될 필요가 없어지면 나중에는 아예 세라토닌 생산유전자가 녹슬어버린다. 정작 필요한 때가 와도, 또 사람이 아무리 편안해지고 싶어도 꼼작도 않고 켜지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울증이다. 이것은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걸리는 병이라기보다, 세라토닌 생산유전자를 사용하지 않는 습관을 가지고 생활함으로써, 유전자에 이상을 일으킨 결과로 생긴 병이라고 할 수 있다.

우울증의 원인은 세라토닌(Serotonin) 유전자

우울증에 걸리는 것은 유전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울증 환자들은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며, 늘 불안하다. 이렇게 우울증에 걸리는 것은 뇌신경 세포에서 생산되는 호르몬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울증에 걸리면 도통 기쁘지가 않다. 엔돌핀이 생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웃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잠을 자는 것도 내가 자고 싶다고 해서 잘 수 있는 게 아니다. 우울증 환자는 스스로 우울해지고 싶어서 우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 마음이 기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진심으로 바란다. 뭔가 돌파구를 찾고 싶은데 세라토닌 유전자와 엔돌핀 유전자가 꼼짝하지 않아서 우울증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만일 오랫동안 늘 걱정하며 사는 사람을 살펴본다면, 다른 유전자들은 축 처져서 한구석에 처박혀 있고, 걱정하는 호르몬을 생산하는 유전자만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걱정만 하지 마음을 편하게 할 틈을 주지 않으므로, 세라토닌이 생산될 필요가 없어져서 그것을 생산하는 유전자가 한구석에 쭈그리고 자게 되는 것이다.
병원에 가면 우울증 환자에게 세라토닌 대용품을 약으로 준다. 그런데 우리 몸 속에서 세포가 스스로 생산해 낸 것이 아니고 밖에서 인위적으로 집어넣는 대용품은 거의 다 부작용이 있다. 따라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진짜 치료법은 세라토닌과 엔돌핀을 생산하는 유전자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모든 것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 자기도 모르게 호르몬을 생산하는 유전자가 깨어나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유전자는 의미에 반응하는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원인을 치료하지 않는 치료는 의미가 없다. 원인은 그냥 둔 채로 증세만 치료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약을 먹으면 처음에는 낫는다. 그 이유는 많은 경우에 그 약에 자기 병을 낫게 할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약을 먹지 않으면 다시 재발한다. 왜냐하면 약은 증세만 치료할 뿐이지 원인까지 없애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대의학과 우울증

현대의학에서도 우울증을 세라토닌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병원을 찾으면 항우울제라고 해서 세라토닌을 처방한다. 뇌신경세포 속에서 세라토닌이 분비되지 않으니 인위적으로라도 이 호르몬을 투여하려는 것이다. 이런 처방으로 당장은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내 몸속에서 생산해낸 것이 아닌 호르몬은 영원히 내 것이 될 수 없다. 약효가 떨어질 때마다 지속적으로 처방을 해야 하는데 어떤 약이든 부작용 없이 오래 복용할 수 있는 약은 거의 없다.
또 외부에서 세라토닌이 자꾸 주입되니까, 내 뇌신경세포 속의 세라토닌 생산유전자는 더욱 활동할 필요가 없어져버린다. 결국 세라토닌 대체품으로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아지게 만들 뿐, 치료효과를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약을 써서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그 다음에 사용하는 방법이 전기요법이다. 외부에서 세라토닌을 주입하는 대신 뇌신경세포 속의 세라토닌 생산유전자를 직접 깨우려는 것으로, 약품보다는 더 유전자 원리에 가까운 치료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 복제양 돌리를 만들어낼 때도 유전자를 깨우기 위해 몇볼트의 전기를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무려 277번이나 실험을 거듭한 끝에 성공했다. 복제는 근본적으로 모든 세포는 하나의 세포로부터 탄생했다는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뇌신경세포든, 체세포든, 위장세포든 결국 근본은 같기 때문에 꺼져있는 다른 유전자들을 켜주기만 하면 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론상으로도 맞는 얘기고, 지금은 실제로 복제가 실험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인위적으로 전기, 즉 에너지를 가해 유전자를 깨우는 것이 과연 기뻐할 만한 과학의 발전일까? 하나님의 창조와 유전자의 오묘한 진리조차 물리화학적인 수준으로 전락시키고, 복제실험을 통해 유전자를 억지로 치료하려는 현대의학의 접근법은 우려할만한 것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유전자가 스스로 깨어나도록 생활을 바꾸려는 노력 대신 인위적인 에너지로 유전자를 치료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우울증 환자에게 사용하는 전기요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울증에 걸린 어느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전기 충격요법이 있는데, 이 방법은 뇌에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기에너지가 꺼져있던 세라토닌 생산유전자를 깨운다는 이론 하에 사용되는 방법이다.
그러면 전기요법으로 우울증 환자가 정말 회복될 수 있을까? 외부에서 전기충격을 주어 억지로 깨운 유전자는 한달만 지나면 다시 꺼져버린다. 매달 전기충격을 받아야 하는 환자는 결국 병을 치료하지 못한 채 죽게 된다. 전기요법도 일시적인 증세치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뇌신경세포에 전기충격을 자꾸 가하게 되면 나중에는 뇌신경세포가 죽어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된다. 어떤 질병이든 인위적인 치료로는 근본적으로 유전자를 회복시킬 수 없다. 세라토닌 생산유전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세라토닌 대체약품이나 전기요법으로는 절대로 원인치료가 불가능하다.

우울증 정복의 길

우울증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은 꺼져있는 세라토닌 생산유전자를 다시 깨우는 것이다. 어떻게 깨울 수 있을까? 우리는 현대의학이 억지로 유전자를 깨우려고 함으로써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앞에서 확인했다. 따라서 부작용없이 꺼져있는 유전자를 깨우려면 억지가 아닌 자연스러운 방법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뇌신경세포 속의 유전자가 스스로 깨어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세라토닌이 필요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대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자연을 감상하거나 음악을 듣고 노래 부르는 것 등이 모두 세라토닌을 활성화시키는 생활이다. 불안과 걱정이 밀려들 때 스트레스 호르몬 대신 세라토닌이 분비되도록 하려면 의도적으로 그런 감정을 떨쳐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걱정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조용히 명상에 잠기거나, 노래를 부르면 세라토닌 생산유전자도 그에 반응해 세라토닌을 생산하기 위해 활동을 시작한다.
햇빛도 세라토닌의 생산을 돕는 좋은 치료약이다.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중, 콩에 많이 들어있는 트립토판이 장에서 세라토닌으로 분해되는데, 그 과정에 반드시 햇빛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울증 환자는 콩을 충분히 먹고 자주 햇빛을 쬐는 생활이 꼭 필요하다. 또 세라토닌이 원할하게 생산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엔돌핀 분비도 활성화시켜야 한다.

우울증을 극복한 경험담

자, 그러면 마음 속에 기쁨과 평안을 체험하며, 우울한 감정들을 떨쳐버리는데 있어서 신앙은 과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여기서 다니타 레이트의 경험담을 들어보자.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발견하고 신앙으로 우울증을 극복했는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간증하며 건강교육가로 활동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울증으로 인하여 고생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나의 남편은 좀처럼 의기 소침해지지 않는데, 그가 의기 소침해 질 경우에는 길어야 하루 밖에 되지 않는 단기간 내에 문제가 해결된다. 그의 성격은 매우 낙천적이다. 그와 반면에 나의 성격은 내성적이고 회의적이다. 나는 과거 여러 해동안 염려와 낙담과 투쟁하였는데, 그러한 생활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난 몇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나를 점차적으로 당신을 깊이 신뢰하는 관계 속으로 인도해 주셨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어떻게 하면 부정적인 감정들을 극복할 수 있는지를 내게 보여 주셨다. 나는 내가 경험한 이 성공적인 비결들을 독자들과 나누기를 원한다. 나는 다섯가지로 그것을 요약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1. 사물을 보는 그대의 시각이 긍정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버마에서 있었던 일을 통하여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 하루종일 세찬 비가 내린 어느 저녁이었다. 어떤 두 사람이 밤하늘에 떠있는 무지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버마의 원주민인 정부 관리는 그 희귀한 현상을 보면서 두려워 떨고 있었다. 그는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하나의 나쁜 징조인 것 같습니다. 나는 결코 무지개가 밤에 뜨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선교사는, “제가 보기에, 이것은 매우 좋은 징조 입니다. 이것은 저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 줍니다. 나는 홍수와 폭풍우, 그리고 미신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우리의 성경 학교를 세우는 일이 잘 이루어 질 것을 확신합니다.”
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우리는 두가지의 대조적인 시각을 볼 수 있다; 하나는 긍정적인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시각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긍정적인 생각들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정신 속에서 떠오르는 모든 감정과 욕구는 이성과 양심의 지배 하에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부정적인 생각에 잠겨 있다면, 즉시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함으로써, 생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생각이 지배되어야 할 분명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 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립보서 4:4,6-8.
어떤 일이 우리에게 닥치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최선의 계획하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그분을 더욱 더 깊이 신뢰하고 기뻐해야 한다. 어떤 어려운 일에 관하여 걱정하는 대신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 가운데 쉬어야 하며, 진실하고, 고상하며, 정결하고, 사랑스러우며, 덕이 있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혹시 자신의 마음 속에 어떤 죄가 있는가를 명상하면서, 우울증의 내적 원인을 찾은 다음,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해결하라.

2. 다른 사람들을 도우라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두번째 해결책은, 계속해서 바쁘게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돕고 용기를 주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과 친교를 도모하라. 단순히 봉사를 받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봉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교회에 참석하라. 만일 그대의 생각이 자기 희생적인 봉사와 친교로 가득차 있다면 우울증으로 고심하는 기간은 줄어들 것이다.
선행은 그것을 베푸는 사람과 도움을 받은 사람 양쪽 모두에게 축복과 유익이 된다. 자신 앞에 주어진 작은 의무를 잘 수행하고, 자신의 적은 노력과 희생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었을 때, 정신과 마음은 풍요로운 만족감으로 인하여 자유롭고 행복해지며, 그렇게 변화된 마음에서 퍼져나오는 고상한 감화력은 주변 사람들에게 놀라운 생명력을 나누어 주게 된다. 근처에 있는 양로원을 방문해 보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될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3. 매일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라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또 다른 해결책은 매일 운동을 하는 것이다. 운동을 많이 하되, 지칠 정도로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운동을 통하여 심장 박동수와 호흡률이 높아져야 하지만, 운동을 하면서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해야 한다. 자신이 여유있게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유형의 운동을 선택하라. 걷는 운동 또는 정원이나 채소밭을 가꾸는 것은 매우 좋은 운동이 된다. 가능하면 옥외에서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 적어도 매일 30분씩 운동하라. 운동은 특정한 홀몬을 증가시켜주기 때문에, 우울증을 해소 하는데 도움을 준다. 운동할 때에 분비되는 호르몬은 사람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오른쪽 뇌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운동은 혈액 순환을 증가시키고, 뇌에 공급되는 산소의 양을 증가시킨다. 규칙적으로 매일 운동을 하면, 산소를 활용하는 뇌의 역량이 점차적으로 증가된다.
날마다 하는 규칙적인 운동은 근육 세포로 하여금 힘을 소모하도록 만드는데, 이것은 미토콘드리아 (mitochondria) 라고 불리우는 힘의 공급처를 증가하게 한다. 미토콘드리아는 산소를 소모하여 힘을 만들어 낸다. 산소를 많이 소모하면 할 수록 인체는 더 많은 힘과 더 건강한 정신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규칙적인 운동은 점차적으로 신체의 힘과 에너지를 증가시켜 준다.

4. 자극제를 피하라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네번째 비결은 각종 자극제들을 피하는 것이다. 커피, 콜라를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카페인을 피하라. 카페인은 처음에는 인체를 흥분시키지만, 그것이 주는 최고의 흥분이 지나가면, 신체가 인위적으로 혹사되었기 때문에, 정상보다 낮은 슬럼프에 빠지는 반응을 나타내게 되는데, 이것이 우울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담배에 함유되어 있는 니코틴 역시 카페인과 같은 영향을 몸에 미친다.

5. 창조주와 가까이 교제하는 관계를 유지하라
죄책감, 걱정, 의심,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쇠약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참된 평화와 행복과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사랑안에 거하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우울증과 절망으로 갈등하고 있는가? 왜냐하면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모든 걱정과 염려를 맡기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지 않을 때,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들을 빨리 시정해야 겠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께서 주시는 암시들을 듣지 않은채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고집한다면, 그 결과, 죄책감과 걱정과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채우게 되며, 평화와 기쁨과 행복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 것도 거리끼는 것이 없을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신다는 확신과 평화 속에서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인만이 가질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야말로 우울증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1. 세이지(sage), 캣닙, 알파파 차를 아침과 저녁으로 마시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2.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간식을 하지 않는 식생활을 해야 한다. 모든 생활이 정해진 시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일찍 잠자리에 들되 9시간 이상 수면을 취하지 말 것.
3. 일광욕은 우울증 치료에 많은 유익을 준다. 밤에만 분비되는 멜라토닌이 과다하게 분비될 경우, 우울증이 유발될 수 있다. 햇빛은 멜라토닌의 분비를 억제해 준다.
4. 음식물로 인한 알러지 때문에 우울증에 빠지는 환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알러지성 식품: 우유, 콜라, 쵸코렛, 커피, 차, 코코아, 설탕, 소세지, 캔디, 통조림, 계란, 등등). 정제된 식품(흰쌀, 흰밀가루, 흰설탕)을 식단에서 제거할 경우, 유익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5. 우울증을 일으키는 부작용을 가지고 있는 의약품이 약 300 종류를 넘는다. 약품을 정기적으로 장기간 복용할 경우, 우울증에 빠질 확률이 매우 높다.
6. 저혈당은 우울증을 초래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규칙적인 운동과 하루에 2식을 통곡류와 채식으로 함으로써, 많은 효과를 볼 수 있다.
7. 체중을 짧은 기간 내에 지나치게 심하게 조절하는 사람들의 경우, 우울증으로 고통당할 수 있다.
8. 설탕의 섭취량을 최소한으로 제한할 것. 비타민 B는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데, 설탕의 대사작용 동안에 비타민 B가 소모되어 버린다.

 

서론 - 그리스도인의 삶과 음악


그리스도인의 삶과 음악은 떼어놓을 수 없는 깊은 관계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예배의식에 있어서 음악과 찬양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가 말로 하는 것이라면, 찬양은 음악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쁠 때나 슬플 때, 그리고 마음이 낙심될 때나 우울할 때,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이 눌릴 때, 아니면 환희로 가슴이 뛰며 감격할 때,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여 하늘로 올리기에 음악처럼 적당한 것이 또 있을까?

그것이 비록 훌륭한 목소리로 표현되지 못했다 할지라도, 또 그것이 정확한 음조를 갖추지 않은 흥얼거림이라 할지라도, 마음의 간절함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소원이 담긴 찬양이라면, 그것은 저 높은 하늘을 뚫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상달될 것이다.

하늘은 음악으로 가득찬 곳이다. 성경에 하나님의 보좌나 하늘이 표현된 대목에는 늘 찬양과 음악이 함께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소리도 많은 물소리 같은 아름다운 소리로 묘사되어 나오며, 하나님을 수행하는 천사들은 늘 “거룩하다 거룩하다!” 라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뿐인가! 마지막에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하늘 유리 바닷가에, 또는 시온산에 서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은가?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1~3).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14:1~3)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계15:2~4)

그런데 흥미있는 것은 타락하기 전에 사단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보좌하던 천사였으며, 하나님의 인을 맡은 천사였고,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찬양하며 모시던 천사(사 14: 12~13, 겔 28: 12~15 참조) 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은 하늘의 음악과 그 음악의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음악의 힘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점령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음악은 힘을 가지고 있다. 좋은 음악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고상하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며, 우리를 하늘의 분위기에 더욱 가까이 이르도록 돕는다. 그러나 저속하고 통속적인 음악은 우리의 말초신경과 본능을 자극하여 우리로 더욱 세속적인 사람이 되게 하며, 하늘과 영적인 것에 흥미를 잃게 하고, 세상의 타락과 범죄 속으로 가까이 가게 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지 않은 음악의 힘에 이끌려 이성을 잃고 하지말아야 할 행동들을 하는가?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좋지 않은 음악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정신이 황폐되고 있는가? 술집이나 클럽에서, 또는 댄스 홀에서 들려지는 통속적인 음악들은 은연 중에 심각한 영향을 끼쳐 많은 사람들로 더욱 대담하게 부도덕한 길을 가도록 부추기고 있다.

음악은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번 호에는 “음악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음악박사인 Dr. H. Lloyd Leno 의 글을 실었다. 우리는 이번 호에서 음악이 우리의 몸과 정신과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생리학적으로 어떤 반응과 기전을 우리 몸에 일으키는지, 그리고 그것이 과학적으로 어떻게 증명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또한 좋지 않은 음악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사단이 음악을 사용하여 어떻게 인간의 마음과 정신과 이 세상을 지배하려고 하는지, 또한 잘못된 음악을 통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려 하는지에 대해 연구해 볼 것이다. 아울러 음악이 변천된 역사와 음악이 선과 악의 대쟁투에서 끼치는 영향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아 볼 것이다. 아주 흥미있는 기사가 되리라고 믿는다.

아무쪼록 이 기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하여 어떤 음악을 선택하여야 하며,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살찌우기 위해서는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숙고하도록 만드는 기사가 되기를 바라며, 이 기사를 읽는 독자들이 모두 구원을 받아 훗날 하늘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함께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게 되기를 바란다.

 

1부 - 음악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어떤 오락과 유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익히 잘 알고 있다. 특별히 오락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음악인데, 이 음악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듣거나 사용하기에 안전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나름대로 음악에 대한 소신과 철학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는 많은 음악들이 범람하고 있으며, 그 음악들은 우리의 정서와 정신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정신과 협회 회의의 한 연설에서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유명한 작곡가 Howard Hanson 씨는 이렇게 말했다.
“음악은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정서에 작용하여 영향을 주는 아주 흥미있고 미묘한 예술이다. 이것은 아주 많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구성 성분에 따라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하며, 활력을 주기도 하며, 사람을 고상하게 만들기도 하며, 천박하게 만들기도 하며,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만들기도 하며, 정신을 흥분시키기도 한다. 음악은 악의 힘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의 힘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 음악을 사회적으로 혹은 치료의 강력한 용도로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꼭 이루어낸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음악은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가 선호하는 음악의 맛과 성질이 현 시대에 자주 접하게 되는 라디오와 텔레비젼과 음반 회사에서 나오는 여러 다른 음악들로 인해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는 혹시 음악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만약 이 음악들이 결과적으로 우리의 영성과 구원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혼 속으로 좋은 것들이 흘러 들어 가도록 영혼의 통로를 잘 수비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우리는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선택에 우리의 결정을 맡기는 어리숙한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의 육체와 정신이 음악에 대해 반응하는 기전을 과학적인 조사를 통하여 살펴본 후, 그것의 도덕적, 영적인 적용과 또 음악이 현 시대에 일어나는 도덕적인 논쟁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이 1부에서는 음악의 소리 중 어떤 소리가 인체에 특별하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정신과 의사와 물리학자와 이 분야에 대해 많이 연구한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 자료들을 살펴볼 것이다.

“음악”에 대한 이해

음악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한 가장 흥미있는 연구는 “음악 치료”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세계 제 2차 대전 중에 더욱 활성화되고 증가되었는데, 그 이유는 전쟁 때문에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은 군인들에게 정신과적인 치료가 매우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44년, 미국 의무 장관의 지시에 따라, 워싱톤 D.C 에 있는 “월터 리드” 종합 병원에 음악을 통하여 인간의 정서와 행동을 통제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고 또 발전 시키기 위해 “음악 연구 협회”가 발족되었다.
음악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에 하나는, 아마도 음악은 뇌에서 첫번째로 통과해야 하는 이성의 판단이나 지성의 관여 없이 곧바로 뇌의 정서와 감정과 감각의 자극을 받는 부분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라 하겠다.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재확인된 이 발견은 음악 치료에 위대한 촉진제가 되었으며, 정신 의학 박사 도로시 셜리안(Drothy Schullian) 이 쓴 “음악 치료에 관한 임상 경험”이라는 책에 나오는 문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그의 책에 기술하였다. “음악, 뇌의 지시에 의존하지 않고 곧바로 우리 몸의 기관으로 들어 올 수 있는 음악은, 정서를 주관하는 기관인 시상하부(thalamus)가 하는 것처럼 감정과 감각을 자극할 수 있다. 어떤 자극이 시상하부에 다다르면 뇌는 자동적으로 함께 자극을 받고, 만일 그 자극이 계속되면 뇌와 현실 사이에 긴밀한 접촉이 성립된다.”
그러므로 음악은 그들의 질병 때문에 의사 전달을 할 수 없는 정신병 환자에게 (정상적인 의사소통은 뇌의 피질 - cerebral cortex - 을 사용해야만 가능하다) 그들의 의사전달을 가능하도록 재 성립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음악과 무드와 몸의 화학작용

깊이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음악이 우리의 무드(기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이 생각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식일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연구에 의해서도 밝혀진 사실이다. 이에 대한 초기 연구 중에 하나는 1920~1923년 사이에 이루어진 “카네기 과학 기술학교”에 의한 것이었다. 이 연구는 국제적인 규모로 진행 되었는데, 음악은 괄목할 만큼 비슷한 방법으로 서로 다른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의 감정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정신 분석학자 에드워드 포돌스키(Edward Podolsky) 가 발표한 “청각 신경에 대한 연구” 를 보면, “우리 몸은 음악의 톤과 화음과 진동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기능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 더 나아가 그는 말하기를 “우리의 감정은 생리적 현상, 즉 뇌의 활동과 혈액과 인체 화학 반응에 크게 의존하는 생리적 현상과 직접 연관이 되어 있다.” 라고 했다.
근래에 나온 연구는 초기에 나온 연구 결과보다 더욱 확대되고 확증된 것을 알 수 있다. 독일의 두명의 과학자인 본(Von G.) 과 헤러(H. Harrer) 가 쓴 음악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실험한 연구서가 나왔는데, 그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음악을 들을 때 인체에는 호흡과 맥박뿐 아니라 정신 전류 피부 반사작용에도 심각한 변화가 생기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실험에 의하면, 고의적으로 어떤 사람의 주의를 다른 데로 이끌어 그 사람 자신이 어떤 음악을 듣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있었는데, 연구 결과 그 사람이 그 음악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체에는 강한 정서적인 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같은 사람에게 어떤 음악을 들려주며 그 듣는 음악에 대한 비평을 요구하자, 그 사람의 몸에 일어나는 정신 전류 피부 반사 작용이 훨씬 덜해지고, 대신 뇌의 활동량에 현저한 증가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실험 결과 모든 감각과 청각은 자율 신경조직에 큰 효과를 끼친다는 것이 밝혀졌다.” 라고 그 보고서에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생리학적인 지식은 우리에게, 이 자율 신경조직은 심장이나 호흡기관 같은 내장기관의 기능만 조정하는 것뿐 아니라, 내분비 선 같은 기관도 관장하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뇌 부분 중에서 이런 기능들을 통제하는 것은 시상하부인데, 우리는 지금 정서와 감정에 대해 공부하고 있으므로 이 시상하부의 기능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생리학자인 메리 그리피트(Mary Griffith) 는 언급하기를 “시상하부는 갑상선 호르몬과 부신 피질 호르몬, 생식선 호르몬의 분비량을 조절하는 기능을 하며, 성 호르몬 분비뿐 아니라 신체의 대사율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다.
그녀는 더 나아가 말하기를 “시상하부는 공포와 분노와 다른 감정들의 표현과 연결되는 자율반응에 제동을 거는 일도 한다.”고 말했다.
이 언급은 하바드 대학의 생리학자 알트 슐러 박사의 음악에 대한 초기 연구의 결론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음악은 아드레날린이나 다른 호르몬들을 분비 시킨다.”고 했다. 얼마 전에 나온 또 다른 연구에 의하여 음악은 인체의 전기 전도율에 영향을 주는 것이 발견되었다. (Doris Soibelman 의 논문 “음악 치료 연구”에서)
의약 과학 전문지는 인간 각 개인의 감정은 전력과 전해질의 균형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사람들이, 각 사람이 음악에 대해 반응하는 것들은 너무 개인적인 것이라서 예측하기가 어렵고, 음악에 의해서 자극되는 인간의 감정은 개인의 역량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는 의견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거기에는 개인적인 차이와 변화가 있겠지만 음악이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힘과 그것에 반응하는 인간의 반응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Muzak 같은 큰 기업들과 영화 제작 회사들은 인간의 감정을 잘 조성하는 효과적인 음악을 잘 선택하여 사용함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의 감정은 자신의 무드에 맞는 음악을 듣고 표현하려는 욕망을 자극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리듬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

리듬은 인간이 존재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인간은 주기적인 존재(rhythmical being) 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의 심장 박동과 호흡과 걸음걸이와 말에는 분명한 리듬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내장 기관들 역시 주기적인 리듬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 심지어 우리의 뇌의 기능도 리듬 안에서 작동을 한다. 뇌파는, 독일의 과학자 Hans Berger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일정한 주기가 있으며, 육체와 정신적인 상태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것만 보아도 왜 인체가 음악의 박자에 의해 영향을 받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잘 알려진 물리학자 맥켄드릭(Mckendrick) 의 실험은 인체가 리듬에 얼마나 예민한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그는 음악이 나오는 전축 (record player) 으로부터 뽑은 전선을 소금물이 담긴 통에 부착한 뒤, 한 청각 장애인의 손가락을 그 통에 넣게 하였다. 그 장애인은 11세 때 청각을 상실한 여자였다. 실험 결과, 청각 장애인이 리듬이 커지고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여자는 손가락이 리듬을 느끼는 대로,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박자에 맞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또 그 실험은, 그 장애인이 손가락을 통하여 느낀 그것이 자기가 청각을 잃기 전에 들었던 음악을 다시 기억나게 한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음악에 대한 인체의 반응

음악에 대한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은 신체 활동을 통해 나타난다. 빠른 박자의 음악은, 부상당한 군인들의 기부스(cast)를 한, 팔 다리를 빨리 다시 움직이게 하기 위한 치료로써 전쟁 병원에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음악은 몸은 건강하지만 피곤해하는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기 위하여도 사용된다.
또 강한 박자의 리듬을 가진 음악은 감각 운동 기관에 반응을 일으킨다. 긴 행진을 거의 마쳐가는 군인들이나 보이 스카우트 멤버들이 마지막 힘든 지점을 통과하게 되어 지칠 때, 기운을 북돋아 주는 활기찬 음악을 연주해 주면, 정신이 새로와지는 동시에 몸에서 새 에너지를 방출하게 되어 행진을 잘 마치게 되는 것을 본다.
고대와 마찬가지로 현대에도 음악은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돕는 일을 해왔다. 사실 많은 포크 송들이 이런 경우를 위해서 작곡된 것이다. 물론 음악은 노동의 수고와 지루함을 덜어주기도 한다. 회사와 공장에서 이루어진 실험들의 결론에 의하면, 음악의 리듬이 일의 정확도와 정밀성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가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타이프를 칠 때, 그 주위의 음악의 리듬이 타이핑의 속도와 맞지 않고 마찰되면 타이핑의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이 밝혀졌다. (Doris Soibleman 저, 공장의 음악치료 참조)

리듬과 템포의 효과

러시아의 공중 보건당국에서 과학자들이 음악의 효과에 대한 일련의 실험을 하였다. 그 실험 결과 리듬과 템포는 인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그들은 발견하였다. 그 실험은 이렇게 발표되었다. “근육 사용의 수용력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음악들이 특별히 선정되었다. 그런데 들려주는 음악의 빠르기에 따라 노동자들의 노동량이 변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음악이 활동에 알맞는 좋은 속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했던 또 다른 실험에 의하면, 음악의 영향을 받는 것은 노동의 수용량뿐만이 아니고 맥박과 혈압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리듬은 항상 생산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지만은 않았다. 음악과 춤은, 같지 않은 많은 문화 속에서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었는데, 예를 들어 광란적이고 시끄러운 음악과 춤이 디오니소스(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를 예배하는 종교 의식에 쓰인 것,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안의 여러 부족들이 전쟁을 할 때 추는 춤과 음악이 그것들이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음악 치료사 개스톤(E.Thayer Gaston) 은 이런 모든 반복적이고 똑같이 지속되는 춤은 “강직성 발작”을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했다.

신체 자극제로서의 리듬

음악의 성분 중에서 박자는 가장 신체를 자극하는 자극제라고 할 수 있다. 만약에 박자가 신체의 근육에 힘을 주는 종류의 것이라면, 그것은 역시 정서에도 똑같은 효과를 미친다. 휴즈(Hughe) 박사는 리듬과 우리의 감정과 무드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음악은 두가지의 중요한 효과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움직인다. 첫째, 음악은 듣는 사람의 주의를 완전히 빼앗아감으로 그것을 듣고 있는 순간 그 자신을 잊게 한다. 둘째로 음악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들려지는 음악의 분위기에 따라 똑같은 감정으로 반응하도록 그 사람의 정서를 창조한다. 이 반응은 마치 인생의 삶에서 일어나는, 마음과 감정에 따라 신체가 변하는 것과 똑같은 반응이다. 이런 것들은 음악의 복합적이고도 총체적인 효과가 일으키는 반응이다. 그런데 회사 고용자들을 이용한 한 실험에서, 음악의 성분 중에서도 리듬이 그런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인자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음악에 리듬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일반적으로 음악이 빠르냐 아니면 중간 빠르기냐 아니면 느리냐하는 것으로도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세가지의 연구를 살펴보면, 음악 학자 군다크(Gundach), 헨라인(Henlein), 헤프너(Hevner) 씨 등은 각각 독립적으로 실험을 하였는데, 그들의 결론은 똑같이 “템포와 리듬은 음악의 성분 중에서 정서적인 반응을 창조하는 가장 결정적인 성분이다.” 라는 것이었다.
“음악과 정서”라는 저서에서 레오나드 길만(Lonard Gilman) 은 “부점이 많이 붙은 고르지 않은 박자는 특별히 의미심장하다” 고 말하며, 음악을 표현하는데 있어서의 차이는 그 음을 정확히 낸다든가 어떤 소리를 내는가 하는 것보다 그것의 박자와 템포와 빠르기에 따라 그 음악의 성질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하였다.
리듬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 율동이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영락없이 주위의 분위기와 우리의 태도를 백팔십도로 바꾸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협력과 화합을 만들어 낸다. 개스톤 음악박사는 그의 저서 “음악 치료”에서 “리듬에 맞추는 활동은 말(언어) 없이도 같이 협력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리듬이 서로의 소통의 끈이 되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이것은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댄스를 할 때 처음 만난 남자와 여자가 보통 공중 앞에서라면 주저하여 할 수 없었을, 서로 팔을 두르고 껴안는 포즈를 음악이 계속 연주되고 있는 한,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가장 적절한 요약은 챨스 디스벤스(Charles Disevens) 가 쓴 “병원에서의 음악”이란 책에 되어 있다. “음악이 불가항력적인 이유는 그것이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의 기능의 차원에서 반응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음악과 감각 수용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음악이 우리의 감각 기관(오관)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배우며 놀랐을지 모른다. 우리의 감각은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 이외에 소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만일 우리가 음악을 듣는 중에 있다면 그 냄새와 맛과 접촉이 훨씬 예민하게 될 것이다. 그에 더하여 우리가 눈으로 직접 색깔들을 본다면 그것은 더욱 놀랍게 우리의 감각에 파급 효과를 미칠 것이다.
놀라운 사실이 실험에서 입증되었는데, 사람들이 일정한 먼 거리에서 알아보기 힘들던 색깔과 읽기 힘들던 글자를 음악이 연주되는 상태에서는 판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Charles Disevens 저, “음악의 물리적 효과” 참조)
다음은 음악이 마음과 몸에 영향을 미친다는 과학적인 연구의 짧은 요약이다. 이 보고가 비록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독자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고 믿는다.
1. 음악은 이성과 판단을 하는 뇌의 기능의 관여없이 그냥 곧바로 몸으로 받아들여지고 즐겨진다.
2. 들려지고 있는 그 음악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지 않을 지라도, 우리 몸은 그 음악에 대해 뚜렷한 반응을 나타낸다.
3. 음악은 우리 몸의 화학 작용과 전해질 균형에 영향을 끼쳐 우리의 무드(기분)에 변화를 가져온다.
4. 음악은 감각 수용의 차원을 낮춤으로 색깔과 접촉과 다른 감각 능력을 높게 만든다.
5. 음악은 근육의 힘에 변화를 초래하며, 신체의 활동량에 영향을 준다.
6. 반복되는 리듬은 최면적인 효과를 지녔다.
7. 청각은 어느 다른 감각보다 자율 신경조직에 영향을 미친다.

2부 - 음악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


앞의 기사에서 음악은 뇌의 이성이나 판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의식적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뇌의 피질에서 이루어지는 기능을 거치지 않고, 직접 시상하부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한 종교 저술가는 음악이 젊은 그리스도인 청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렇게 기술해 놓았다. “사단은 음악을 젊은이들의 마음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로 삼을 수만 있으면 아무 음악이나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고 사단을 섬기는데 시간이 바쳐지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의 목적에 적합할 것이다. 사단은 마음을 흥분시키고 고무시키고 빼앗고 매료시켜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신체의 어느 기관을 흥분시킬 것인지 알고 있는 듯하다.”
만일 음악이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면, 도대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음악은 우리 몸의 화학작용과 전해질 균형에 영향을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분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 과학적인 연구에 의해 증명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가사가 없는 음악에 의해서도 우리의 생각이 영향을 받을까?
앞의 기사에 나왔던 음악의 과학적인 요약을 다시 살펴보면, 음악은 신체적인 반응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곧 근육의 활력에 영향을 주는것, 활동력의 증가나 감소현상을 가져오는 것, 반복되는 리듬은 최면 상태를 일으키는 것 등이다. 이런 모든 것을 미루어 볼 때, 음악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악과 환경

만일 앞서 밝혀진 과학적인 연구들이 타당한 것이라면, 생활의 여러 다른 상황들에서 이것이 증명되어야 할 것인데, 음악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음악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해로운 것인가도 살펴보자.
음악의 기본적인 기능과 기원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음악이 가지는 의미와 영향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증명된 사실에 대해 반대할지 모르지만, 어떤 음악이 어떤 일을 하게 했는가를 살펴보면 그 사실에 함께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연으로 그렇게 된 것들이 아니다. 이것은 음악의 본질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핑클스타인(Finklestein) 은 이렇게 말했다. “음악을 사용하는 방도에 의하여 그 사람이 음악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최근에 “불루크로스”(Blue Cross) 보험회사에서는 “공중 보건은 이해에서부터”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여러명의 사회학자들과 정신 분석학자들과 교육 책의 저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사춘기 젊은이들의 문화와 철학과 관습과 도덕관에 대해 깊히 연구하도록 했다.
그런데 “도덕심이 결여된 음악들”이라는 표제로 젊은이들의 음악을 분석한 결과, 이런 흥미있는 발표가 나왔다. “유행 음악은 미국에서 많은 문제들을 일으켰는데, 특히 미국 동남부의 도시들에서 랙타임 (ragtime: 당김음이 많이 사용된 재즈의 일종)과 재즈 음악이 시작되면서부터 세태가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음악이 유행하면서부터 사람들에게 병적인 세태가 조장되었으며, 그 때로부터 많은 사람들은 이 새로운 음악의 영향으로 인해 생기는 세상의 타락과 부도덕을 걱정하게 되었다.”

역사는 위의 언급을 증명했다. 흑인 음악 연구가 서던(Southern) 박사에 의하면 피아노 랙타임은 1865년에서 1875까지 발달되었다고 하며, “민스트렐 (Minstrell)” 쇼(흑인처럼 얼굴에 검은 분장을 하고 흑인의 춤과 노래를 부르는 쇼) 도 그 시점에 들어왔다고 한다. 당김음(Syncopation) 이 많이 섞인 밴조(Banjo) 스타일의 음악이 이 “민스트렐” 쇼에 함께 사용되었고, 이 음악들은 직접적으로 랙타임 음악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재즈의 기원

서던은 “블루스와 랙타임이 혼합된 밴드의 연주와 당김음이 많이 섞인 댄스 음악이 ‘재즈’라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라고 말했다. “재즈”는 어원 그대로 시끄럽고 혼란스러우며, 부도덕하고 세속적인 유흥장소, 즉 매춘지역 같은 곳에서나 연주되기에 알맞은 음악이다.
웹스터 백과사전에 보면 “재즈”라는 항에는 “성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콩고 댄스(뉴올린즈) 음악”이라고 적혀 있다. 1914년 판, 역사학자 보로프(Borroff) 가 쓴 “유럽과 미국의 음악” 이란 책에는 뉴올린즈 지역과 함께 “재즈”가 소개 되었는데, 유명한 흑인 오락인이 명명하고 확인한 말을 인용하여 “재즈는 그 당시 뉴올린즈의 매춘굴을 의미하는 네 글짜 ‘four-letter word’ 로 된 이름이다” 라고 나와 있다. 후에 이 말은 미국의 많은 지역들에서 “sexual intercource”(성교) 를 의미하는 공통 속어로 쓰이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재즈”를 하나의 민요(foik music) 로 간주하려고 한다. 야외에서 부르던 노래, 노동할 때 부르던 노래, 흑인 영가 같은 민요들 중에 재즈에 영향을 끼친 민요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민요는 민요일 뿐이지 재즈와 같이 견줄 만한 성분의 노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미국 각 주에서 벌어지는 재즈 그룹의 공연이 성공하는 것만 보더라도 재즈가 얼마나 범세계적으로 얼마나 호감을 받는 음악이 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예전에는 하류 계급의 중요한 오락이던 재즈가 지금은 모든 등급의 사회에 받아들여졌으며, 해가 거듭할수록 사회의 분위기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오락의 하나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재즈가 생겨도 옛날 스타일의 재즈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으며, 요즈음의 재즈는 “록 음악(Rock music)” 과 혼합되어 쓰이고 있다.

흑인음악의 영향

“민스트렐” 쇼(흑인 분장을 하고 흑인 노래와 춤을 추는 쇼) 가 대중 음악이 발전하는데 두가지의 중요한 공헌을 한 것을 우리는 주의해 보아야 한다.
첫째, 이 쇼에 쓰이던, 당김음이 섞인 밴조 스타일의 음악은 랙타임(ragtime) 음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이 랙타임 음악은 바로 “재즈”의 중요한 음악 성분이 되었다. 랙타임 피아니스트들은 수년동안 미 북쪽과 특히 뉴올린즈의 매춘굴과 술집 살롱들에서 연주하던 오락인들이었다.
두번째, 이 민스트렐 쇼에는 노래와 춤의 혼합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 음악과 함께 동반되는 춤들은 매우 선정적이고 외설적인 것들이 보통이었다.

음악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

이 시대는, 그 기원을 살펴보면 그렇게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는, 흑인 음악이 밑바탕이 된 재즈가 미국의 대중 음악으로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는 시대이다.
앞으로 또 다른 종류의 음악들과 그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겠지만, 아무튼 음악은 사회의 전반적인 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사회에 유행하는 음악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그 사회의 성격과 도덕과 관습이 영향을 받으며, 음악이 그 사회의 성격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그 사회의 음악의 성격에 따라 사회의 타락상과 범죄율에도 차이가 오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음악은 그 사회의 상태와 문화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떤 종교 저술가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사회에 만연하는 유행 풍조와 유익하지 못한 오락과 음악에서 자신들을 존절히 지킬 것에 대해 이렇게 경고 하였다.
“흥분과 재미있는 환락에 대한 욕망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특히 청년들에게 하나의 시험이요 올무이다. 사단은 하나님을 섬기며 주의 강림을 위해 준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의 엄숙한 사명에서부터 끌어내기 위한 유인물을 끊임 없이 준비하고 있다. 사단은 세속에 속한 사람들의 힘을 빌려서, 방심한 자들을 세속적인 쾌락에 동참하도록 유혹하려고 계속적인 흥분을 유지시킬 것이다. 쇼와 유행되는 음악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도록 계획된 여러가지 오락들이 있는데,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이처럼 연합하면, 그들의 믿음은 연약하여질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쾌락과 육체적 만족을 즐기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마음을 세속적 쾌락으로 채워줌으로써, 내 영혼의 영생이 달린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생각할 시간이 없도록 만들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인간의 상상력에 해를 끼치고 신앙적 감명을 파괴하며 조용한 즐거움과 인생의 진정한 현실에의 취미를 흐리게 하는 어떤 부적절한 오락이나 음악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노력하자.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에 유행하고 있는 흐름과 음악들이 우리에게 어떤 효과를 미칠 것인가를 숙고하며, 이 세태를 거슬러 올라가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다음 장에서는 음악의 변천과 현 시대에 유행하고 있는 음악과 그것의 해로움에 대하여 연구하기로 한다.

3부 - 음악의 변천과 로큰롤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어떤 종류의 자극에 익숙해지고 순응하기 쉽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러한 자극에 내성을 가지게 되며, 그것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어떤 질병들에 대해서는 면역성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음악 분야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볼 수 있는데, 한때 방종적으로 여겨지던 음악들이 오늘날 유행되고 있는 음악들에 비하면 아주 양순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제시해야 할 질문은, “그 음악들을 현재 우리가 참고 묵인해도 될 정도의 음악인가?” 가 아니라 “ 그 음악들이 현재 우리에게 유익되는 좋은 음악인가?” 라는 질문이다.
흥행업계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대중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기 위해서는 항상 새로운 유행적 감흥을 계속 도입하고 소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 음악계의 정책은 각종 취향에 부합하는 새로운 음악들을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사업의 성공이 대중의 필요성을 만족시키거나 혹은 새로운 음악 상품을 판촉하여 수요를 불러 일으키는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음악의 변천
재즈 음악의 개발이 이러한 대중 음악의 진행 과정을 잘 증거해 주고 있다. 뉴올리언즈에서 시작한 딕시랜드 재즈로 불리워지는 초기의 재즈 음악은 “뉴올리언즈” 양식에서 좀 더 탬포가 빠른 “시카고” 양식으로 발전되었으며, 그 후 재즈 피아노 블루스인 “부기우기”(boogie-woogie), 그리고 각종 다른 양식과 템포의 스윙 재즈 등의 음악이 등장했고, 또 그 뒤를 이어 즉흥적인 비밥 재즈와 쿨 재즈, 리듬 앤드 블루스 및 흑인풍의 펑키 재즈 등이 유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1950년대에 들어오면서 재즈 음악은 좀 이지적으로 세련화되어 젊은 세대들에게 원초적인 매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댄스 음악으로서 역할이 감소되는 듯 하면서 전체적으로 대중 음악의 흐름은 아주 듣기 좋은 음률, 감상적이고 몽상적인 세상을 그리는 쪽으로 흘러 가고 있었다. 불려지는 대부분의 노래의 주제가 달빛, 황홀함, 장미, 고독한 마음 같은 것들이었고, 가수들의 연령이 30대를 넘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대중가요계를 움직이는 사업가들이 모두 중년층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십대의 젊은층들이 누리고 있던 사회 경제적 생활의 부요함은 그들로 하여금 그 당시 대중 음악의 경향에 반기를 들도록 준비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충분한 여분의 돈이 있었으며, 걱정거리도 별로 없었는데, 단지 그들은 한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자 그들 사이에 비행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고, 대중 음악 산업은 이러한 십대층들이 애착할 수 있는 음악 상품의 엄청난 시장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러던 중, 대중 음악 레코드 업계는 많은 십대층들에게 일률적으로 호감을 받은 최초의 한 새로운 히트 음악을 만들어 내어 크게 흥하게 되었다.

로큰롤 음악(Rock and Roll)

로큰롤 음악은 흑인 음악의 리듬과 블루스및 서부의 컨트리 음악들이 혼합된 음악 양식이다. 다만 그것의 한가지 새로운 면은 아주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나타나는 공격적인 성적 표출인데, 이러한 특성은 전자 기타등의 악기로 만들어지는 로큰롤 특유의 리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런 음악의 특성은 오래 전부터 대중 음악에 사용되어져 왔지만, 그러한 특성이 전체 음악의 기조를 이룬 적이 없었다. 로큰롤 음악은 노골적이고 강렬하며, 한없이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등장한 우주 음악도깨비처럼 나타나, 그 전의 대중 음악들에서 보이던 표현상의 절제조차 깡그리 없애 버렸다.
밀실의 무대에서나 불려지던 소수의 음란한 노래들을 제외하고, 50년대 초에 불려지던 대부분의 대중 가요들은 선정적인 은유 정도로 그쳤고, 들어내놓고 색정적인 욕구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로큰롤의 지나치게 과장된 리듬의 음악과 가사는 자기들의 감정과 태도를 좀더 노골적이고 육체적으로 발산하려고 하는 이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게 되었다. 이 새로운 대중 음악 양식에 적당한 이름의 명명이 필요되어질 때, 앨런 프리드라고 하는 한 현란한 디스크 자키에 의해 “로큰롤(Rock and Roll)” 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는데, 이 로큰롤이라는 속어는 그 당시 흑인들의 슬럼가에서 성행위를 지칭하는 한 표현으로 사용되던 말이었다.

로큰롤(Rock and Roll)의 의미

제 2부에서 언급된 불루크로스 보험회사의 보고서는 로큰롤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새로운 음악은, 근본적으로 ‘와서 나와 함께 한번 마음껏 즐겨 보자’ 라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다. 30-40년대에 유행하였던 대중음악의 공통적인 흐름이었고 또 50년대의 초기 로큰롤의 주 요소였던 로맨스로 초청하는 부드럽고 애조적인 노래가, 이제는 인생의 춤을 마음껏 즐기자는 좀더 노골적인 초청의 노래의 형태로 바뀌었다. 많은 이 새로운 노래들에서 ‘come-on’ 이라는 외침으로 표현되고 있는 이러한 노골적인 초청은 때로는 적당한 성교 파트너를 향해 구체적으로 던지는 엉성하게 꾸민 유혹인 것이다.”
“부모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는 바는, 이 로큰롤 음악이 그것을 듣고 그 음과 가사에 맞추어 춤추는 젊은이들에게 너무 성적으로 도발적이고 노골적인 자극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대중 음악을 진실로 신봉하는 많은 이들이, 그들의 음악에 대한 이러한 염려스러운 입장에 대해 반박하거나 자신들의 음악을 옹호하려고 하지도 않는데, 그 이유는 이 음악을 반박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이 새로운 음악의 음조와 가사들이 바로 그들의 마음과 감정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로큰롤 음악은, 은밀하게 유지되어야 할 성적 관계를 리듬적 오르가즘의 집단적 표출로 대체시키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주시해 보라... 그러면서 당신 자신들 세대의 음악이 욕망의 억제를 얼마나 은폐하고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 고 대꾸한다.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비록 그들이 로큰롤 음악에 내포되어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도덕관에 대해서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더라도, 이 로큰롤 음악의 리듬 양식이 보여주는 관능적인 암시와 영향을 인식하고 있다. 1965년 5월 21일자 타임지에는 다음과 같은 의견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경향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이 로큰롤 음악이 가지는 관능성을 일종의 “안전한 성행위” 로 취급하고 있다... 하바드 대학의 정신 의학자인 필립 솔로몬 박사는 ‘이러한 로큰롤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들은 표출되지 않아 만족함을 얻지 못한 성욕을 순화시키는 배출구임으로 아주 건전하고 유익한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패인 휘트니 심리 병상 진료소의 청소년 외래 환자과의 과장으로 있는 매터슨 박사는 “이 로큰롤 음악은 육체적인 욕구의 배출구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성적 표현이라고 본다. 그 박자에는 가장되지 않은 성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며 사람들에게 그들의 이러한 드러나지 않은 감정을 분출할 수 있는 한 방법을 제공해 준다.” 라고 밝히고 있다.
다시 타임지는 말하기를, “로큰롤 춤이 가지고 있는, 아주 농도가 진한 성적 암시는 일부의 정신 의학자들로부터 염려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이중 한 정신과 의사는 ‘이 춤들은 아주 불건전한 성행위를 관중 스포츠화 한 것이다’ 라고 직설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로큰롤(Rock and Roll)의 영향

그러면 로큰롤 음악이 청소년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가? 한 청년은 이 로큰롤 음악이 자신의 십대 기간 동안 자기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로큰롤 음악은 철저하게 방종적이고, 금기라는 것이 전혀 없어서 나는 자제심을 내팽개칠 정도까지 되었다. 그것은 인생을 미치도록 즐기고 싶은 정도까지 나를 끌어 내렸다. 때로 나는 거울 앞에서 온갖 모양으로 몸을 비틀어 움직여 보이며 춤을 추었고, 나 자신이 점점 더 깊게 로큰롤 음악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학교들과 각종 음악 클럽들에서 로큰롤 움악에 대해 강연을 많이 해온, 밥 존즈 대학교 음악이론과 과장이며 관악 합주단 단장인 프랭크 갈록 교수는 자신이 만난 한 청년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십대 소녀들을 많이 정복하기로 소문난 한 청년은 ‘젊은 여자애들을 성적으로 흥분하도록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로큰롤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성교하는 것이지요. 어떠한 여자애들도 적당한 분위기만 제공하면 끝까지 가니까요’ 라며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한 십대 소녀는 롤링스톤이라는 로큰롤 음악 그룹을 지칭하며, “그들의 매력은 성적인 것이죠... 하지만 제발 제가 한 말을 기사에 쓰지 말아주세요. 제 엄마가 알면 아주 혼이 날 말이니까요.” 라며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 로큰롤 음악 연예인들 자신은 그들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더 도어즈 그룹의 모리슨은 “우리를 성애를 다루는 정치가들로 생각하라.” 고 말하며, 제퍼슨 애어플래인 그룹의 마티 배이린은 주장하기를 “우리는 사람들에게 유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성교를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롤링스톤의 재거는 “아드레날린 흥분제가 온 몸속으로 퍼져나감을 느낀다. 그것은 일종의 성적인 느낌이다.” 라고 말하고 있으며, 아더 브라운은 말하기를 “모든 소울 음악 (soul music; 리듬 앤드 블루스의 일종) 은 성적이다” 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머더즈 오브 인밴션 그룹의 자파는 “로큰롤 음악을 부인하는 것은 성욕을 부인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로튼롤 음악 연예인으로서의 경력이 있는 밥 라슨씨는 이 로큰롤 음악의 영향을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었던 진귀하고 직접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가 관찰한 청소년들의 행동 방식에 대한 심리학적인 해석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라슨씨는 “음악이 죽은 날” 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이 로큰롤 춤들이 왜 그렇게 노골적으로 관능적인 몸의 움직임을 보이는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 말하고 있다. 그는 직접적인 관찰과 의학적인 의견을 바탕으로, 젊은 여자 아이들이 로큰롤 춤을 추며 표출하는 광란적이고 추잡한 행동들은 바로 “성교시 극에 달하는 상태와 유사한 경험”을 그들이 하는데서 기인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인간의 마음은 잠재 의식적으로 음악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 음악의 잠재적인 힘을 쉽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음악의 잠재적인 힘의 요소중, 다수의 심리학자들이 그들의 연구에서 보여준 것처럼, 기틀러씨도 말하기를, “음악의 리듬이 그 주요소”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록 음악을 지배하는 것은 그 음악 고유의 심한 박자이며, 듣는 사람들은 그것에 원초적으로 반응하게 되어 있다.” 라고 말한다. 마마와 파파라는 록 그룹의 죤 필립스도 세밀한 관찰과 직접적인 실험을 바탕으로 그가 터득한 사실을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반복 진행되는 리듬을 조심스럽게 조절함으로써 폭동과 광란 상태를 조장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관중들에게 그런 상태를 조장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누구든지 그렇게 하는 방법을 알 수 있다.” 라고 주장했다.
현 세대의 록 연예인중 최상의 교육수준을 가진 이들 중 한 사람인 프랭크 자파는 또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음이 인간의 유기 조직들에 가할 수 있는 영향과 방법들은 무수하며 미묘하다. 오늘날 사용되는 아주 요란한 음과 밝은 빛들은 엄청난 세뇌의 도구들이다... 어떤 적당한 형태의 박자가 당신으로 하여금 발로 가볍게 박자를 맞추게 한다면, 그 어떤 다른 종류의 박자는 당신으로 하여금 주먹을 불끈 쥐고 남을 치게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록(Rock and Roll) 음악과 정신 통제

밥 라슨씨는 그의 최근의 저서에서 근래 미국에서 혁명과 무정부주의 정신을 고무하기 위해 록 음악이 가지고 있는 특유한 음과 가사를 이용해 온 많은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다.
컨추리 조 앤드 피쉬 (Country Joe and the Fish) 라는 한 그룹은 흑인 과격파 단체인 흑 표범당 (Black Panthers)과 민주사회주의 학생 단체를 지원해 온 록 음악 그룹이다. 그리고 디트로이트에서 활략하는 MC5라는 5인조 그룹이 있는데, 이 그룹의 초창기 매니저인 죤 싱클래어씨는 “이 MC5 그룹은 우리 모두를 미국의 거리로 미친듯이 몰아낼 만큼 해방적이고 힘이 넘치는 원천이다.” 라고 선전하고 있다. 또한 화이트 팬서당 (White Panthers)을 지원해 온 더 업 (The UP) 이라는 그룹에 대해서 한 록 음악 잡지는 이렇게 평하고 있다; “혁명 시대에 더 업 그룹은 로큰롤 음악이 가지고 있는 혁명을 위한 투쟁의 잠재력을 잘 보여 주는 한 훌륭한 사례이다.”
마지막으로 제리 류인씨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과 반전주의 히피 생활 방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LSD환각제와 긴 머리 및 히피족 옷차림, 마리화나와 록 음악과 자유로운 성생활등으로 나타나는 우리들의 생활 방식은 바로 혁명적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미국의 체제를 조롱하고 도전하는 바로 그것이다.”

종교 음악에 가미된 로큰롤(Rock and Roll)

인간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공략해온, 지금까지 연구한 록 음악과 더불어, 문제점을 쉽게 포착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장되어, 어쩌면 세상적인 록 음악 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고 변형적인 음악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음악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아주 기본적이고 원초적이며, 특히 대중 음악에 함유된 메시지는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되어지고 전해짐을 살펴 보았다.
그러면 비교적 단순한 양식의 스윙을 포함한 재즈나 소울 혹은 록 음악을 세상적인 환경에서 듣고 반응해온 이들이 그와 근본적으로 똑 같은 박자와 똑같은 양식의 음악을 성경 구절이나 종교적인 가사와 더불어 종교적인 장소에서 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이런 경우 사람의 마음이 선과 악이 복합된 이러한 음악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
만일 이것이 “OX” 시험 문제일 경우, 우리는 부분적으로라도 틀린 문장에 대해서는 오답 (X표) 으로 표기하도록 지시받고 있다. 그런데 사단으로부터 오는 이 유혹에 대해 우리가 “OX” 시험에 임하는 자세보다 덜 조심스럽게 접근해서야 되겠는가? 사단은 인간의 타락을 초래하기 위해 바로 이러한 선과 악이 뒤섞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 선과 악이 뒤섞이면 사람의 마음은 혼란해지고, 지적 능력과 영적 능력은 마비된다.
선과 악의 혼합된 상태를 받아들이거나 그러한 경계에 근접하여 활동하는 것은 타협이며, 그러한 타협이 현저하게 들어나고 있는 분야가 바로 이 종교 음악의 분야이다. 대중 매체가 오래동안 대중들을 춤곡의 리듬 음악으로 철저하게 길들인 결과, 그외의 어떠한 음악도 사람들에겐 단조롭고 흥미를 불러 일으키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개신교의 복음성가 작곡자나 가수들이 복음 성가를 춤곡의 박자에 맞추어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일종의 강박 관념에 가까운 현상들을 목격하게 된다. 이 중 일부는 좀더 조심스럽고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그룹들의 전형적인 경향은 왈츠나 스윙, 컨추리 스타일 및 소프트 록, 포크 록 음악의 여러가지 혼성적인 춤곡 양식을 많이 공공연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들중 어떤 이들은 자기들을 민속 음악 그룹으로 정체 본성을 내세우며 그들의 활동을 합리화하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냉정하게 관찰해 보면, 기독교적 원칙과는 부합하지 않는 목적을 가진 음악 형식을 이러한 그룹들이 사용하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타협 불가

전 브로드웨이 쇼 “헤어”의 감독이었던 릭 쇼터가 교인이 되었을 때 그는 이러한 타협의 문제를 정직하고 정면적으로 직시하였다. 전문적인 성악가요 기타 반주자였던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처음에 오래된 록이나 소울 음악중 몇을 개작하여 복음 성가로 만들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와서 깨달은 바는 내가 세상과 그 세상의 음악, 오락 및 철학들과 타협을 하면 결코 안된다는 것이다.”
릭 쇼터씨는 자신이 중생의 경험을 하기 전에 그 유명한 재니스 조플린, 지미 핸드릭스 및 짐 모리슨등의 록 음악 연예인들과 접촉하던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 보면서 또 다음과 같은 경종의 충고를 주고 있다; “그러한 생활 중에서는 결코 그 어떤 의미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록 음악에 흠뻑 빠져있는 젊은 청소년들에게 이러한 경종을 주고 싶은 간절한 바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겉으로 들어나고 있는 휘황찬란한 것들에만 눈이 멀어 그 속에 있는 공허함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사실 요즈음 성행하고 있는 이러한 춤곡의 리듬과 복음 성가의 혼합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이러한 일은 벌써 1900년도에 교인들의 한 야영 집회에서 일어났었다. 그 해 9월에 인디애나 주의 뮨치 (Muncie)에서 열렸던 어떤 교회의 야영 집회의 운영을 돕기위해 한 목사와 그의 부인이 파송되었는데, 이 목사 부인이 자기 친구에게 쓴 편지에는 이 집회에 사용되던 음악에 대해서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곳에는 아주 큰 북이 있고, 탬버린 두개와 아주 큰 베이스 바이올린과 두개의 작은 바이올린, 그리고 플루트와 코넷 두개, 오르간과 함께 몇 사람의 노래 인도자들이 있다. 그들은 풍미의 정원이라는 노래책을 그들의 찬송책으로 쓰며 춤곡들에 맞추어 성스러운 가사를 붙여 노래부르고 있었다.”

옛날 대중 음악 양식의 부활

20세기 초반에 유행하던 대중 음악들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이 옛날 음악들은 그 의미를 상실했는가 아니면 일부가 주장하는 대로 일종의 고전이 되었는가? 록 음악이 출현한 몇년 사이에 이 새로운 음악은 다른 모든 대중 음악들을 쇠퇴시켰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재즈 음악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매력과 인기를 다 잃지는 않았다. 요즈음 이 재즈 양식과 록이 혼합된 음악이 나올 뿐만 아니라 랙타임과 스윙 재즈 음악이 아주 상승적으로 복귀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통찰력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록 음악에 비해 비교적 부드러운 고풍의 재즈 음악 양식들이 결코 사람의 마음을 고상하게 하고, 영혼에 영감을 불어넣고, 마음을 고양시키는 음악으로 일변되지 않았음을 쉽게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옛날 대중 음악들이 재기하는 데는 두가지의 원칙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 세대에 있었던 이러한 음악의 매력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1940년대에 15-20세 였던 사람들이 지금 그들 자신들 세대의 음악을 다시 듣고싶어 하고있다. 이러한 옛날 음악들은 그들의 십대 자녀들이 듣고 있는 음악으로부터 일종의 기분을 전환시키는 매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젊었을 때 느꼈던 똑같은 매혹적인 달콤한 꿈같은 기분을 되살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옛날 음악은 그 당시 세상의 생활 방식을 계속 대변하고 있다. 둘째로, 젊은층들 사이에서 대중 음악의 유산으로 옛날 음악 양식을 받아들이고 권장하는 것이 또한 유행되고 있는 것이다.

대중가요적인 복음성가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요즈음의 대중가요적인 복음성가를 한번 관찰해 보기로 하자. 이러한 복음성가가 초창기에 누렸던 흥행은 1940년대에 유행하던 스윙 재즈 음악 양식과 감상적인 실연가 풍의 노래 양식을 사용한 데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이러한 양식은 이 복음성가 산업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지만, 얼마후 이 복음성가는 세상의 록 음악을 뒤늦게 따라 그와 같은 양식으로 진전되었다.
다수의 개신교 작곡가들과 가수들이, 이 세상의 감상적이고 듣기 좋은, 칵테일 라운지에서 부르는 스윙 음악의 노래 양식을 따라 그들의 복음 성가 노래를 모방했기 때문에, 그들 중 대부분에게 이제는 요즈음 아주 크게 유행하는 록 음악의 양식을 이용하고 모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컨추리 스타일의 음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기타 리듬이 록 음악에서도 주 요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그 기타 리듬이 복음성가 음악에서도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음을 본다.
이처럼 세상의 대중 음악은 물론, 종교 음악에서도 한 음악 양식이 다른 음악 양식으로 진전되어 가는 현상을 목격하면서, 퐁조의 “한 단계 움직임은 또 다른 단계의 상태로 움직여 간다”는 원리는 점점 더 자명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 물줄기가 세게 흐르는 개울 가운데로 흘러 나가는 경험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서 그 개울로 들어가든지 하류라는 한 방향으로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끌려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4부 - 음악이 끼치는 영향력


음악에 대하여 연구할 때, 우리는 음악이 인간의 삶에서 하나의 부수적인 부분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악은 삶의 경험에 있어서 우리의 투쟁과 갈등과 성취를 리듬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다.

모든 인간의 삶속에는 긴장-완화, 그리고 기대-만족의 순간들이 있는 것을 본다. 만일 이러한 감정과 경험들이 잘 균형을 이룬다면, 이 삶의 리듬은 인간의 정신 건강에 꼭 필요하고, 또 인간의 잠재 능력을 계발하는 데 필요한 지속성과 변화, 안정과 도전, 및 휴식과 자극을 적당히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어떤 면에서 음악이 우리 인간의 경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수잔 랭거는 말하기를,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인간은 자기들의 경험을 예술을 통해 상징화하고자 한다.” 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도리스 소벨만은 “인간의 행동 양식은 음악의 소리 안에서 표상으로 내재하고 있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또 시드니 핑켈스타인은 이러한 표상을 “음악의 형상”이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더불어 설명하기를, “기악을 포함한 모든 음악의 표현의 기조는 삶의 모든 활동에서 인간의 표상과 동작을 통해 나타난다.” 라고 역설하고 있다.
음악은 음(소리)과 무성의 양식을 이용하여 음악의 관념을 구체화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은 그 공동체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그 사회에 대한 해설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음악은 외부의 세상으로 발산하는 내재적인 인격체의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음악을 통해 표출되는 인간성

인간이 온전한 상태에 있었을 때는 가장 고상한 생각과 감정들만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그 표현하는 바가 죄된 본성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죄된 본성을 대변하고 상징하는 음악에는 부정적인 영향과 부도덕적인 내용이 함유되어 있음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혹자는 “록 음악이 나로 하여금 대마초를 피게하거나 옷을 다 벗어 던지게 하지는 않는다” 라며 음악에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이 있다는 입장을 부인하곤 한다. 음악이 주는 영향에 대해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화학적 독물이 우리 몸에 작용하는 것과 같은 명백한 인과관계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인과관계를 자기들 자신이나 남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음악 자체에는 아무런 감화력이 없다고 결론짓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만일 음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예측할 수 없고, 음악 자체는 어떠한 감화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현재 많은 장소와 환경에서 그 어떤 성과를 이루기 위해 음악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에 대해 그들은 어떤 논리적인 설명을 제공할 수 있겠는가?

“병원에서의 음악”이라는 책을 저술한 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음악이 소유하고 있는 강력한 영향력은 인간 문화권 아래에 있는 익숙한 관례 행사들에 잘 나타나 있다. 왜 교회나 정치적인 집회및 극장들에서 그렇게 많은 음악들이 사용되고 있는가? 그 이유는 이러한 음악의 여러 변형적인 사용이 그 어떤 다른 자극과 고무에 대한 사람들의 수긍성을 높이기 때문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추구하는 메시지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보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음악이 주는 의미와 효과는 그 음이 가진 자연적인 특성에서 오는가 아니면 문화적 혹은 사회적인 영향에서 유추되는가? 이 둘의 모두에서 유래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주어진 용도를 위해 쓰여지는 음악의 형태가 문화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를 들어, 예배를 위한 음악이나 구애를 위한 음악들은 대체적으로 사회적인 영향 아래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와 가슴, 목, 입술 및 손가락등에 가해지는 장력들에 의해 여러 다른 종류의 음질들이 창출되고 있음을 볼 때, 이러한 여러가지 신체적인 장력과 그 영향으로 생성되어 나오는 소리(tone)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음을 알려 준다. 즉, 전쟁시에 사용하는 한 민족의 음악이 다른 민족의 자장가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인 것이다.

기본 음질이 유사한 효과를 냄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차이를 만드는 문화적인 영향력을 인정하더라도, 인간은 아직도 많은 공통점들을 가지고 있다. 음율, 리듬, 음량과 음색등의 기초적인 음악의 특성, 그리고 어느 정도의 멜로디와 화음까지도 모든 민족들의 신체적, 정신적 작용에 아주 동일한 방법으로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본다.
한가지 인식할 것이 있는데, 음악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일 수록, 그 음악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교육이 더 필요해진다는 것이다. 한 예로, 콘체르토나 심포니같은 정통 클래식 음악은, 그런 음악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외에는, 대부분의 청취자들에게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이 주는 의미가 음악적인 지식을 많이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러한 음악이 주는 분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아주 유사함이 증명되었다. 곧, 이론적인 지식은 이러한 음악이 주는 분위기와 느낌을 즐기는데 필수적이 아님이 밝혀진 것이다.

한가지 명백한 것은 기능적인 음악일수록, 그에 대한 인간의 행동 반응은 보편적이며, 많은 일치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의 몸은 본질적으로 주기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음악의 리듬이 인간의 몸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이다.
앞의 기사에서 읽었듯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리듬적인 음악은 최면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 극단적인 경우에 이러한 음악이 인간에게 인사불성적인 최면이나 아주 파괴적인 행동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조용한 소프트 록이나 스윙 음악은 본격적인 록 음악에 비해 그렇게 들어나지 않는 미묘한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이러한 음악들은 좀 더 완만하지만 그래도 박자가 강한 록 음악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음악을 듣는 청취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취된 것 같이 꿈꾸는 듯한 무의식적인 상태로 빠지는데,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양심이 느슨하여져 그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인 것이다.

음악의 영향력

이렇듯이 음악은 사람의 심리 상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음악이 또한 우리 인간의 태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당연한 귀추이다. 그러므로 음악의 분위기와 어떠한 행동이 연결될 때, 듣는 이들에게 일종의 생각들을 암시케 할 수 있는 것이다. 설사 이렇게 구체적인 음악과 행동의 연결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음악의 분위기는 듣는 사람들에게 통상적인 느낌의 상태들을 조장한다. 건설적이고 바람직한 심리 상태는 엄숙함, 기쁨, 그리고 활기 (자제된 흥분 상태) 같은 상태이며, 바람직하지 못한 심리 상태는 감상주의, 경박함과 난폭한 느낌 (자제되지 않은 흥분 상태)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감정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상태속에 있는 사람은, 밴드월씨가 언급한 것처럼, 바람직하지 못한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하도록 구두적으로나 혹은 무언적으로 암시를 주는 구체적인 자극에 넘어가기 쉽다. 이러한 상태는 가볍게 술취한 상태와 흡사하다. 술취한 상태는 취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어떤 일을 하도록 강제하지 않지만, 그러한 상태는 술취한 사람으로 하여금 유혹에 대한 저항력을 낮추게 만든다.

음악에 대한 지성적인 반응

음악에 대해 논할 때, 우리는 도덕적인 의미라는 측면과 더불어 인간의 정서적 성숙도라는 또 다른 중요한 면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이 정서적으로 발육되기 위해서는, 주위 환경이 주는 여러가지 영향들에 대해 지성적으로 반응할 기회가 그에게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의 음악에 대한 반응이 그저 “그 음악이 좋다.” 이거나 “그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좋다.” 라는 정도로만 국한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동물이나 혹은 정신 박약아들이 보이는 수준 이상으로 음악에 대해 반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만일 한 개인이 그저 감각적인 반응 이상의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음악만을 듣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적어도 음악적 경험면에서는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 계속 머무를 수 밖에 없다.
감각적으로 별로 반응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음악은 청취자의 관심을 끌기위해 선정적인 음향효과나 수법에 많이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곧 그 수법은 리듬, 화음, 멜로디 혹은 음색 등의 여러 요소 중 한 두가지의 감각적인 취급 (혹은 지나친 강조)을 통해서 달성된다. 이러한 감각 지향적인 음악은 영속적인 가치를 함유한 음악들과는 대조적인 영향을 청취자들에게 주고 있다.
감각 지향적인 음악은 청취자의 주의력에 상관없이 청취자에게 즉각적인 호소력을 발휘한다. 만약 이러한 음악을 되풀이하여 계속 들으면, 그 청취자는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나 지식, 혹은 전문가적인 의견을 계발시키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음악이 은밀하고 고립된 감흥의 감정적인 탐닉을 계속 유지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 음악을 즐기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도록 저해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감각적인 음악과는 달리 심미적으로 구체적인 경험을 전달해 주는 좋은 음악들이 있다. 이런 음악은 청취자의 감성뿐만 아니라 지성에도 호소하며, 이러한 음악은 듣는 사람의 음악적 감수성과 인식도를 계발시킨다. 이런 종류의 경험에는 사람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으며, 이런 음악은 인간사이의 관계를 향상시키는데 사용될 수 있다.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음악 선택

과학이 밝히는 바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 고등적인 지력(知力)을 사용하지 않으면, 음악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그저 듣기 좋거나 싫은 정도의 수준에 머무를 것이며, 주의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인간은 그러한 음악에 정서적으로 반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설사 우리가 그러한 음악에 대해 인지를 하게 되더라도, 한 광경으로부터 눈을 돌리듯이 그 음악의 소리로부터 귀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다.
이 뜻은 바로 음악이 우리의 마음으로 침투할 수 있는 뒷문이 항상 열려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인식하고 깨닫기 전에, 벌써 음악에 관한 기호와 습관들이 정해져 버리는데, 특히 이러한 현실은 어린이들에게서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윤리적 또한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음악 교수들 및 연예인들과 녹음된 음악을 준비하는 전문인들은 수많은 어린이들과 청소년 그리고 장년들의 음악에 대한 기호와 태도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그들이 대중화하고자 하는 음악을 선정할 때, 어떠한 동기와 기준에서 하고 있는가? 그들의 동기가 사람들의 심성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자 하는 것인가? 또 그들의 동기가 기독교적인 이상에 대한 고려없이 순전히 상업적인 것만은 아닌가?
사람의 마음 상태를 조절하는 것은 그 무엇이나 그 사람의 영적인 성장을 저해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로 하여금 구원을 거절하도록 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냉정한 숙고는 타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또 줄 수 있는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그들의 책임성을 심각하게 깨닫도록 촉구하며,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 (히브리서 5:14)이 되도록 한다. 그러므로 가치를 평가하는 능력은, 자기 방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은 다른 분야보다 이 음악의 분야에서 더욱 필요되고 있다.

어떤 성경주석에는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 라고 하는 베드로 전서 1:13의 말씀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사단의 간계에 빠지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영혼의 통로를 잘 지켜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 말씀처럼, 사단의 간계에 빠지지 않는 방향으로 우리의 행동 방향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들이 대중 음악 산업의 조작에 파멸적으로 빠질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다.
한 전문가의 말을 빌리자면, “대중 음악 산업은, 디스크 쟈키나 자동 전축기등을 통하여 음악의 계속적인 반복으로 대중의 기호를 조종하며, 대중의 기호를 제조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거대한 조직인데, 이 조직은 아주 질이 좋지않은 대중의 음악적 필요를 창출하고 있다.”

사단의 무기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말씀을 상고하며, 진리로 그의 마음을 강화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러한 음악적인 분야에 있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단은 비록 타락한 존재이지만, 그러나 아직도 그는 인간의 마음을 다룰 수 있는 요소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단은 수천년 동안 열심히 연구하였으므로 각 사람들의 공격당하기 가장 쉬운 점들에 대해 알고 있다.
지나온 세대동안 사단에 의해 성공적으로 쓰여진 음악은, 앞으로도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의 기만적인 무기의 하나로 분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이 글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애에서 음악에 관하여 현명한 결정들을 내릴 수 있도록 돕고자 하여 몇가지 유용한 지식들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들이 중요하지만, 그 지식 자체로서 충분하지 못함을 알리고 싶다.
한마디로 음악에 대한 선택의 근본적인 관건은 영적인 문제이며,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제기해야 할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무엇이 정결하며 참되며 사랑있는 것인지 분간할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하여야 알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빌립보 4:8 참조) 필자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로마서 12:2에서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5부 - 음악과 대쟁투


시내 광야의 우상숭배로부터

“들어보세요! 백성들이 진영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떠들썩한 소동 소리를 들으면서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말했다.

‘이것은 승전가도 아니고, 패전의 탄식도 아니다.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다!’ 라고 모세가 대답하였다. 모세가 진에 가까이 와서 보니, 사람들이 수송아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출 32:17~19, 새번역 성경).

하늘에서 타락하지 않은 하늘의 존재들과 교제하는 동안 벌써 하나님에 대해 잘못 선전하던 루시퍼(사단)는, 재빨리 이 땅 지구에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퍼뜨리고 있었다. 가인의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제사와 함께 이 땅에 거짓 예배가 점차적으로 소개되고 있었으며 사단은 곧 여러 종류의 거짓 신들을 들여옴으로 이 일에 성공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경륜”을 통해, 인간이 그리스도와 사단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리셨다. 사단에 의해 거짓 신을 예배하고 섬기는 의식은 인간의 기만적인 마음에 맞도록 온갖 기술과 방법들로 총동원되어 들어왔다. 그 옛날, 진리와 거짓 사이에, 진짜와 가짜 사이에 있었던 전쟁에 대하여 더 확실하게 이해하는 일은 오늘 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서 나온 성경절의 배경을 보면, 거기에는 세가지 다른 의견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1) 백성들은 자기들이 예배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2) 여호수아는 (처음에) 그들이 전쟁을 하는 줄로 생각하였다.
(3) 모세는 그것이 둘 다 아닌 것을 알았다.

아무튼 그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그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졌지만, 한가지 서로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호수아는 그 소리를 전쟁하는 소리로 알아들었으나, 애굽의 문화에 대하여 보고 들었으며, 익히 알고 있던 모세는 이것이 이방 신을 섬기는 중에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모세는 그 소요의 성질을 보다 올바르게 판단했는데, 그 소리는 싸우는 소리가 아니라 환락의 소리였다.
과연 이 소리의 차이란 무엇이었는가? 이 사건이 있기 바로 얼마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의 뚝에서 춤과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했었다. 그러나 이 두가지의 활동들은 확실하게 서로 다른 형태의 것이었다. 왜 그것은 서로 달랐는가? 그 사이에는 어떤 의미심장한 차이가 있는가?
음악은 항상 어떤 형태의 예배에든지 들어 있었으므로 그 당시 그들의 문화 안에서 그렇게 강한 영향을 끼쳤던 종교 의식들을 살펴보자.

시내에서 애굽까지

먼저 시내 광야에서 일어났던 우상숭배 광경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 일은 그저 어쩔줄 모르던 군중들이 자신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한, 특별 활동에 불과했던가? 아니면 향수병에 걸린 애굽인들이 그들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열었던 파티에 불과한 것이었는가?
이스라엘 무리 중에는 애굽에서 따라 나온 “섞인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항상 제일 먼저 불평과 초조에 빠졌으며, 뒤따라 일어난 배도의 선봉이 되었다. 애굽 사람들이 신의 상징으로 존경했던 대상물 중에 황소나 송아지가 있었다. 애굽에서 이런 형태의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자고 제안했다.
어떤 신이 이 동물에 의해 대표되었는가? 고대 애굽의 종교 역사를 연구해 보면, 그들의 주된 신인 “오시리스”(Osiris)를 대표하기 위하여 황소가 선택되었다. 이 사실의 의미심장함은 그들의 특별한 신을 섬기는 데 관계된 신앙과 음악과 춤의 형태를 보면 알 수 있다.

* 애굽신 오시리스
애급 종교 역사가들에 의하면, “오시리스”라는 신과 그 신을 섬기는 신앙 이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 그 신은 선한 신이었다.
2.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
3. 그는 부활하였다.
4. 그는 부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
5. 그는 죽은 자들의 심판자가 되었다.

여러분들은 이 신앙의 이론에서 어떤 유사점들을 발견하는가? 거짓 그리스도의 도입을 위한 얼마나 영리한 계책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그렇게 오랫동안 가고 없자,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을 멀리 떠난 듯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들은 더 “사실”적이고, 더 “땅과 가까운” 신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론에게 사정하고, 조르고, 위협했으며, 그 압력에 못이겨 아론은 마침내 그들의 청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들이 우상을 섬길 때 사용하던 춤과 음악에 대해 연구하기 전에 성경 구절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출 32:6에 보면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고 되어 있다. “일어나서 뛰놀더라”라는 뜻이 과연 무엇일까? 한 성경 주석에 보면 “음탕한 행위는 이방신을 섬기는 예식에서 떼어낼 수 없을 만큼 깊이 연관되어 있었고, 육욕적인 쾌락이 종교의 구실이 되고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킹 제임스 성경과 표준 개역 성경에는 “뛰놀더라”는 히브리어가 여러가지 뜻으로 번역되었는데, 그 뜻은 주로 “순결함에서 음탕함으로 흘러감”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창 39:14~17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한 장면에 똑같이 쓰여졌다. “리빙 바이블 (The Living Bible)”에는 이 구절이 더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는데, “그들이 성적인 부도덕함이 병행되는 난잡한 연회에 먹고 마시려고 앉았다”고 표현되어 있다.

애굽에서 서아프리카까지

우상 숭배에 사용되던 음악과 춤에 대하여 더 자세히 연구해 보자면, 영국 박물관의 고대 이집트관에서 일하던 역사학자 “버즈(Budge)”의 연구를 살펴볼 수 있다. 그의 권위있는 정보에 의하면 애굽의 “오시리스” 신을 섬기는 예식에는 전통 음악과 춤이 주된 것으로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더 나아가 이 애굽의 전통 음악은 수단과 서아프리카에 퍼져 현재 그 나라들을 대표할 만한 현존하는 중요한 음악과 춤이 되고 있다.
버즈 박사는 먼저 그 춤의 성격을 잘 관찰해 보라고 언명한다. 그는 설명하기를 그 춤을 출 때, 입는 옷 뿐 아니라 그 행동은 “음란함”과 “외설적인 것”과 “넌더리 나는 음탕함”을 명백히 표현하고 있다고 하였다. (버즈 저, “오시리스” 1961년 판, 뉴욕 대학 책 참조)
그는 특별히 고대 이집트인들 중 가장 유명한 여자 전문 춤꾼인 “과와지(Guawazi)” 와 그 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그들의 춤은 엉덩이를 좌우로 매우 빠르게 흔드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그것을 고대 이집트 궁정에 있던 전문 가수와 춤꾼으로부터 전수받았다.” 고 그는 말한다.
여기서 이집트 문화가 시사하는 바를 한번 더 강조하자면, 그들은 그들의 전통을 영존시키려고 노력했는데, 자세히 연구해 보면, 고대 이집트인들의 종교의식 행사와 서아프리카인들의 종교의식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음악과 춤은 그들의 전통을 문화적인 유산으로 남기는 데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는 고대 이집트에서 금송아지를 경배할 때 쓰이던 음악과 춤에 대해서, 그리고 이것이 다호메이(아프리카 서부 공화국)와 콩고를 포함한 서아프리카로 전수된 것을 알아보았다.
이제는 특별히 그 음악의 발전과 성격에 대해, 그리고 고대 이집트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고 그로부터 유래된 음악의 문화에 대하여 연구해 보자.
첫째로 우리가 주의해 볼 것은 이것인데, 명백하게도 아프리카의 음악은 곡조나 주제보다는 리듬과 그 리듬의 발전에 주의를 끌도록 포인트가 맞추어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발전은 요즈음의 서방 음악의 경우에도 해당되고 있다.
또한 이집트로부터 유래된 그들의 춤의 의미심장함은 서콩고의 전통 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버즈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그들의 춤의 특징을 나타내는 용어 “dance du ventre” 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깨, 엉덩이, 배, 가슴을 각각 다르게 혹은 동시에 흔들고 굴리며 율동하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또 다른 춤으로 “부두(voodoo)” 라는 것이 있는데, 엉덩이를 움직이는 것이 콩고의 춤의 특징이라면, 이 부두라는 춤의 특징은 상체, 특별히 목과 어깨를 비트는 것이 특징이다. 부두 그 자체는 춤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교”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다 알려진 일인데, 그 유래는 다호메이에서 찾아낼 수 있다.
“부두”와 “마녀 요술” 사이에는 근원과 신앙에 있어서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 “마녀 요술에 관한 보고”라는 책에서 휴즈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프리카 종교 의식과 마술에 대하여 연구해 보면, 그것은 어떤 의식을 혼란시키는 방법 같은 것들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고대 이집트에서 유래되었다.”

서아프리카에서 뉴올린즈까지

이집트의 음악과 춤의 이동의 마지막 스텝은, 서아프리카해 지방, 곧 지금의 기니아, 잠비아, 시에라 리온 , 라이베리아, 토고, 나이제리아, 카메룬, 콩고 제국의 일부 등으로부터 온 많은 노예들에 의해 미국으로 옮겨진 사실을 알 수 있다.
많은 노예들이 미국으로 잡혀 오는 도중에 첫번째로 서 인도제도, 특별히 히스파니올라 (서인도 제도 중에서 둘째로 큰 섬) - 그 지역의 많은 부분이 지금 뉴올린즈로 팔려서 예속됨 - 에 많이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올 때 그들의 종교와 음악의 유산들을 가지고 들어 왔다. 지금의 도미니카 공화국인 산토 도밍고에서 온 고대 “부두” 예배 의식은 아직도 뉴올린즈에서 계속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고대 이집트로부터 전수된 아프리카 음악이 미국의 음악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세계 각 곳의 음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미국의 많은 도시들에서 아프리카 음악은 여행자들을 위한 오락의 원천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은 흑인의 인구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뉴올린즈 (미국 루이지애나주의 한 도시) 에서 보다 더 심각하게 그리고 강하게 영향을 미치며 사용되고 있다.
뉴올린즈는 많은 문화들이 섞이는 장소가 되고 있으며, 이국적인 문화의 도시로 알려졌다. 흑인음악 역사 연구가인 에일린 서던씨는 그의 저서에 뉴올린즈에 있는 아주 의미심장한 행사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였다.
“뉴올린즈의 가장 이색적인 광경 중에 하나는 뷰어갈드 광장에서 열리는 노예의 춤 행사인데, 전통 흑인 노예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주일이나 교회의 성일들에 광장에서 춤을 추는 행사이다. 그 행사는 1786년도부터 시작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며, 오후 세시부터 그 춤을 추는 행사가 시작된다. 그 춤은 아주 흥분적이고, 출 수록 점점 와일드해지며 더욱 광란적이 되어 남자와 여자들이 기절할 때까지 추며 계속된다.”

재즈의 근원
아프리카의 전통 음악과 춤이 공중에게 노출되자, 이것은 유럽의 전통 음악에 영향을 끼치는 일을 초래하게 되었다. 특별한 리듬에 의해 이런 춤의 율동이 강조되고, 이에 따라 다른 많은 성격의 오락이 곁들여지도록 된 음악이 있는데, 그것은 재즈이다.
권위있는 음악 문헌에 의하면, 목화밭에서 노동할 때 흑인 노예들이 부르던 노래, 시골이나 도시에서 흑인들이 부르던 블루스, 민스트렐 쇼 (흑인처럼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흑인 노래를 부르는 쇼)에서 연주되던 밴조(Banjo) 스타일의 음악, 당김음 (syncopation) 이 많이 들어간 브래스 밴드와 랙타임 음악 등은 재즈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부두 음악도 재즈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Robert Tallant 와 Stern의 The story of jazz 참고)

역사적인 재즈 음악 교육가 탈마즈 씨는 그의 저서에서 아프리카 음악의 어떤 성분이 재즈에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분석에서 이렇게 정리해 놓았다.

1. 당김음 (Syncopation)
2. 다 박자 (Polymeter)
3. 즉흥적 (Improvisation)
4. 강렬한 강조 (Percussion emphasized)
5. 충동적인 연주
6. 같은 곡조와 리듬의 반복으로 감정을 흥분시킴
7. 리더 싱어가 있는 것
8. 춤과 음악의 혼합

위의 항목들을 보면, 다섯개 이상이 몸의 율동과 함께 하도록 되어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들 중에 당김음 (syncopation)의 발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 재즈와 클래식 음악의 권위가인 건터 슐러 박사는 “당김음은 재즈의 근본적인 성분으로 아프리카 리듬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며, “아프리카 음악 유산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복합적인 폴리리듬 (polyrhythm; 대조 리듬의 동시 사용) 의 가장 가까운 그리고 가장 최선의 대용품” 이라고 말했다. 그는 덧붙이기를 박자구조에 있어서 당김음의 우세함은 서방의 음악으로부터 온 재즈에 특이성을 부여했으며, 이 당김음이 몸을 흔들게 만드는 음악의 원천이 되었다고 언급했다.
또한 그는 “초기의 재즈”라는 그의 저서에서 강한 “비트”를 사용하는 흑인들의 음악은 음악 성분에 있어서 리듬이 가장 최상이라는 것과 충동적인 리듬의 대중화를 이루어냈다고 언급했다.
어떤 음악이 인기가 되려면 그 당시의 사회상의 분위기와 효과적으로 연계되어 있어야 한다. 만약에 그 음악이 광고성이 있는 음악이라면 그것은 성공을 보장한다. 그러므로 뉴올린즈는 재즈가 발전될 수 있는 적당한 환경을 공급함으로 인해 재즈 음악 발전의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뉴올린즈와 재즈

프랜시스는 그의 저서 “재즈”에서 뉴올린즈의 어떤 환경이 재즈 음악의 성장을 자극하였는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뉴올린즈는 번잡한 항구로서 넘쳐나는 많은 수의 클럽과 바가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여인숙과 매춘을 하는 곳, 그리고 도박장과 살롱과 술집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각 유흥업소와 무도장들마다 자기들만의 음악 그룹이나 연주가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명한 클럽들에서 흑인 가수나 연주가들을 고용했고, 그러자 더 많은 장소들에서도 다투어 흑인 연주자들과 싱어들을 환영하게 되었다. 퍼레이드나 장례식, 축제 후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공원이나 호수 등지에서 시끄럽고도 혼란한 음악과 춤들을 즐겼으며, 이 새롭게 들어 온 음악은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았다. 자연히 술과 성적인 타락과 춤이 그것에 따라 함께 왔다. 그러자 발을 구르며 소리를 치는것, 당김음으로 이루어진 구성, 괴성등을 필요로 하는 재즈는 당연히 그들에게 필요하게 된 것이다.”
또한 서던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나팔과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블루스’ 음악을 연주할 것을 강요당하였고, 군중들은 그들이 원하는 ‘지저분한 소리(dirty tone)’ 를 들을 수 있을 때까지 술잔과 술병과 컵들을 두드려댔다” 라고 쓰고 있다.

재즈의 또 다른 모습들

재즈의 뿌리에 대해서 언급한 후 서던 박사는 이 새로운 음악의 특성을 이렇게 요약했다. “가장 조용한 종류의 재즈는 ‘블루스’ 에서 직접적으로 파생되었다. 재즈는 사람의 목소리로 부르도록 고안된 것이나 연주가가 자신의 악기로 사람의 목소리를 대체하였으며, 그러므로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형식과 블루스처럼 다시 창조되어, 끌어올리는 것, 슬쩍 넘기는 것, 길게 끄는 것, 흐느끼듯이 하는 것, 가성의 효과 등이 첨가되었다.”
재즈에 대해 다시 요약한다면, 이것은 앞서 존재했던 전 음악의 스타일을 따라 합성된 새로운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음악의 특성은 연주하는 악기의 종류 뿐 아니라, 악기의 연주하는 방법에 따라 만들어지는 이국적인 소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일반적인 음악은 정확한 박자와 소리가 중요시되고 있지만, 재즈는 그렇지 않다. 재즈는 한 음에서 다른 음으로 갈 때 곧바로 그 음을 내는 대신, 날아 가듯이 끌면서 옮겨간다. 그뿐 아니라 박자를 마음대로 길게 끈다든가, 박자를 무시한 채 빨랐다가 느려졌다가 한다든가, 강약, 중 강약 등 형식을 갖춘 박자를 무시한 채, 완만하고 긴장을 풀리게 하는 “쉬운(easy)” 리듬으로 연주를 한다.
1917년에 미 해군단지가 뉴올린즈의 스토리빌에서 문을 닫음으로 인해 야기된 경제적인 불황으로 많은 뉴 올린스의 음악가들이 다른 도시로 직장을 찾아 옮겨 가게 되었는데, 그들은 주로 미시시피와 멤피스, 특히 시카고에 많이 이주하게 되었다.
재즈의 발전으로 여러가지 같지 않은 형태의 음악과 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음악에 “재즈”라는 이름이 붙혀진 것처럼, 각 춤에 이름이 붙혀지게 되었다. 그 춤들은 모두 성적인 의미가 함축된 율동들로써, “Squat”, “Grind”, “Fishtail” 등등이다.
또한 재즈는 여러가지 다른 형태의 음악들을 불러들이는 일을 하였는데, 그 중에 “소울(soul)” 이라는 음악이 생겼다. 이런 노래를 연주하거나 부르는 사람들은 똑같이 소리(tone)를 내는 것 뿐만 아니라, 음을 올렸다 내렸다 끌다 넘어가다 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 듣는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끼친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에는 에너지를 좀 적게 요하는 “스윙 (swing)” 이라는 춤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 춤은 과한 에너지의 소비없이 즐길 수 있는 더 보수적이고 세련된 춤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은, 그 춤을 출 때 연주되는 음악이 도덕적으로 느슨하게 되도록 분위기를 조성할 뿐 아니라, 남녀의 몸이 서로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됨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즐기기에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음악과 대쟁투

음악의 변천사와 역사를 보면 선과 악 사이에 있는 대쟁투를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락하기 전 하늘에서 음악을 지휘하는 천사장이었던 사단은 누구보다도 음악의 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앞의 글을 연구한 독자들은, 시내광야에서 애굽의 신인 금송아지를 숭배할 때 사용되던 음악이 어떻게 아프리카로 전수되었고, 또 그 음악이 흑인 노예들을 통해 어떻게 미국 뉴올린즈로 들어온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애굽의 음악은 흑인 음악에 영향을 끼쳤고, 결국 그것은 그 음악을 바탕으로 하여 생긴 재즈와 및 현재 유행하고 있는 미국의 다른 많은 음악들에 영향을 준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옛날 시내 광야에서 흥분적인 음악과 광란적이고 부도덕한 춤과 예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선동하여 거짓 신을 섬기게 한 사단은, 오늘날도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가나안 변경에서 발람의 꾀에 빠지게 하고, 이방신을 섬기는 예식에 참여하게 하여 우상 숭배와 간음죄에 빠지게 한 것도 다 사단이 고안해 낸 유혹에 의해서였다. 사단이 그들을 유혹하고 미혹시키는 미끼로써 사용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자극적인 음악과 현혹적인 춤과 육욕적이고 현란한 눈의(안목의) 정욕적인 광경들이었다.
오늘날도 사단은 많은 매개체들, 특히 음악을 사용하여 세상을 지배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점령하려고 힘쓰고 있다. 그리하여 사단에 의해 자주 음악은 악용되어 악한 목적에 사용되고, 사람을 유혹하는데 가장 유력한 것이 된다. 사단은 음악을 젊은이들의 마음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로 삼을 수만 있으면 아무 음악이든 반대하지 않는다.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고 사단을 섬기는 데 시간이 바쳐지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의 목적에 적합할 것이다. 사단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능력에 의하여 감각을 잃고 있는 동안 그들을 정신 없이 심취되어 있는 상태에서 사로잡기 위하여, 가장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을 통하여 역사한다.
음악은 좋게 이용되면 하나의 축복이다. 그러나 그것은 흔히 사단이 영혼들을 사로잡는 가장 매력적인 도구 중 하나로 쓰인다. 음악은 그것이 남용되면, 헌신하지 못한 사람들을 교만과 허영과 어리석음으로 이끈다. 헌신과 기도의 위치를 대신하도록 허용되면, 그것은 무서운 저주가 된다.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비록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자들일지라도 그들의 천박한 대화와 음악의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과 그들의 신앙에 욕을 돌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거룩한 음악은 그들의 취미에 점점 맞지 않게 된다.

음악의 용도

음악은 원래 사람의 마음과 사상을 순결하게 하며, 정신을 고상하게 하고 향상시키는 일에 사용되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영혼 속에 하나님께 헌신하고 감사하는 생각을 일깨우는데 사용되던 하늘의 음악과 또한 이스라엑 백성들이 옛날 광야를 여행할 때 부르던 거룩한 노래의 용도와 오늘날 흔히 쓰여지고 있는 음악의 용도 사이에는 얼마나 큰 대조가 있는가!
음악이 바르게 사용될 때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고귀한 주제(主題)로 높이고, 심령에 영감을 일으키며, 신앙을 향상케 하는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 된다. 음악은 행동의 조화를 촉진하고, 용기를 잃게 하거나 힘을 약하게 하는 어두운 생각과 앞날에 좋지않은 일이 전개될 것 같은 불안감과 두려움을 없애는 힘을 가졌다.
또한 노래는 영적 진리를 마음에 감명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다. 죄와 낙담으로 무겁게 짓눌려 거의 절망에 빠지려던 사람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린 시절에 부른 노래의 가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돌이키게 되며, 인생에 새로운 의의와 목적을 가지게 되고 새사람이 되어, 용기와 즐거움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나누어 주게 된 실례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또한 찬양은 사단이 주는 죄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게 하는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예수께서 지상 생활을 하실 때, 때때로 닥쳐오던 어려운 시험과 고난을 이기기 위해 시편과 성경절들을 노래로 부르시며 이용하신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찬양과 노래를 부르는 것은 기도를 드리는 것과 마찬 가지로 예배의 행위이다. 사실 노래는 많은 경우에 기도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앞으로 더욱 많은 찬송을 불러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로 주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신앙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음악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재능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대신에 자신을 높이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예를 본다. 그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하는 영광을 인간이 가로채는 것이 됨으로 각별히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음악을 잘못 즐기는 경솔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가지 말라고 금지하신 오락의 장소로 자주 가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합하려고 한다. 이런 것들은 사단이 음악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멸망하게 하려는 방법들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적당하게 사용하면 큰 축복이 될 음악이 사단이 사람의 마음을 유인하여 의무를 떠나게 하고 또한 영원한 사물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데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가 된다.

미래의 하늘의 음악

멀지 않은 장래에, 우리의 구세주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는 하늘의 문 어귀에 인도하실 때에 우리는 보좌를 두른 하늘 합창대의 부르는 찬미와 감사의 곡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천사들의 노래소리는 지금도 우리 마음으로 들을 수 있다. 우리가 항상 하늘과 연결되어 있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하늘의 가수(歌手)들에게 접근될 것이다. 하늘의 교제는 땅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늘의 찬양의 기본 곡조를 배우는 것이다. 만일 하늘의 찬양대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지상에서 하늘의 곡조를 먼저 배워야 하며, 하늘의 마음과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과 그리고 당신에게 대한 헌신으로써 가득 찬 순결한 마음에서 나오는 찬양의 노래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의 생활이 항상 찬양으로 가득 채워지는 신앙 생활이 되게 하자!